이는 『3·1운동 50주년기념논집』(1969)이나 3·1운동 70주년 기념 『3·1민족해방운동연구』(1989)의 지배적 시각이며, 그 이후 논저에서도 비중의 차이는 있으나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공동 책임편집자인 이태진 교수는 그러한 관점에서 탈피할 때라고 말한다.
대한제국 성립 및 침탈과 ‘연속적’으로 맞물려 3·1운동이 발발한 것이므로, 그 운동의 성격은 대한제국기를 다시 평가함으로써 재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교수가 정조 시대의 ‘민국’ 이념이 고종 시대를 거치면서 어떻게 ‘국민’ 의식으로 변모하였는지를 논했다면,
김승일 원장은 조소앙이 그러한 ‘민국’ 개념을 바탕으로 서양의 ‘공화’ 개념과 손문의 ‘민국’ 개념을 취사선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호를 제정하였음을 추정하고 있다.
손병희를 재조명한 변영호 쓰루분카대 교수는 3·1운동 저변에 변혁의 주체로서 ‘민중’을 보는 동학과 천도교의 한국 토착 근대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소개하고 있다.
신민이 아닌 국민으로서 이루어낸 의거와 만세시위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기만, 범법으로 점철된 군사강점의 형식으로 성립한 한국병합(이태진, 『일본의 한국병합 강제 연구』, 지식산업사, 2016)은 국제법상으로도 원천무효임(김영호·이태진 외 공편, 『한일 역사 문제의 핵심을 어떻게 풀 것인가?』, 지식산업사, 2013)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일제는 태황제 고종을 ‘독살’시키면서 주권을 유린했다.
따라서 3·1운동은 “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안중근에 대한 기억을 연구한 김대호 편사연구관은 안중근이 등장하는 「독립군가(용진가勇進歌」는 3·1운동 1주년 기념 격문과 1930년대 말 기록에도 나올 정도로 영향력이 컸음을 밝히고 있다.
안중근이 남긴 글씨에는 신민이 아닌 대한인大韓人으로서 자각을 엿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민’으로서 스스로 의식한 주체에는 학생층도 포함된다. 경성(서울) 만세시위를 본격적으로 다룬 이태진 교수는 『동경조일신문』 보도와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결정서』를 활용하여 학생들이 주도한 2차 시위를 복원한다.
김태웅 교수는 관립전문학교학생들이 일본의 우대 정책과 민족운동의 당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차별과 불평등을 겪으면서 민족정체성을 확인해 나가는 내면세계의 성장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한 어린 보통학교학생들도 과감하게 시위에 뛰어들었던 여러 실례를 들고 있다.
가해자의 인식: 일본 정부와 지식인의 대응
그때의 메아리가 얼마나 절절하였는지는 당시 북한 성천成川 땅에서 목격했던 일본 소녀의 마음에도 선명히 각인되었다.
세리카와 데쓰요 교수는 일본의 소수 지식인과 문학가들이 3·1운동의 참상에 대해서 어떻게 논평하고 문학작품으로 형상화했는지를 위와 같은 사례 연구로 서술한다.
이러한 양심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총독부는 단순 가담자까지 색출, 보안법을 적용하여 높은 형량을 내렸다. 공동 책임편집자인 사사가와 노리카쓰 교수의 두 논문에는 3·1운동 주동자 및 가담자들이 내란죄로 처벌되고 그 이후에도 무고한 조선인을 불경죄 명목으로 체포한 실상이 고발되고 있다.
이러한 위장·기만술책은 안중근의 거사 당시 이토의 수행원들이 의거를 폄하하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고 언론이 허구적 기사를 냈음을 지적한 김봉진 교수의 논문에서도 확인된다.
독립의 열기를 진압하기 위한 다각적 방책에서도 일제의 그 기조는 이어진다.
故 아라이 신이치 교수는 1919년 사건 직후 총독부가 ‘문화정치’로 식민지배를 포장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내세워 중앙(일본)에 대한 종속을 강조한 역사교육을 시행했음을 포착한다.
3·1운동 발발 직후에야 일제가 영국의 식민지배를 참고하여 조선에 투자를 시작하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거짓 선전을 퍼뜨렸음을 논증한 도리우미 유타카 교수의 논문도 그 또 다른 예이다.
김대호 편사연구관은 일제가 사직단 제사를 폐지한 뒤 그 네트워크를 국가 신도와 일본 놀이문화인 마츠리를 이식하는 방편으로 이용한 실태를 보여준다.
3·1정신의 지속과 과제
운동 참여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대응을 다각도로 조명한 이 책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적 진실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이 책의 말미에는 1919년부터 2018년까지의 3·1운동 연구 자료 및 논저 목록까지 수록되어 있다.
명실상부하게 3·1운동 연구사에 한 획을 긋는 시도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 한 권에 나라를 되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이름 모를 이들의 그 모든 인고忍苦를 다 담을 수는 없다. 지방의 만세운동 연구가 더 진척될 필요가 있으며,
학생층 이외의 다양한 계층의 내면세계가 어떠했는지도 앞으로의 탐구 과제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인은 국가 형성의 데모크라시 정신이 투철하다는 사사가와 교수의 논단처럼 그 역사는 오늘에도 지속되고 있다.
3·1정신은 부당한 억압과 불평등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해 왔던 근현대 한국인들, 그리고 최근의 우리의 얼굴이기도 하며,
세계 곳곳에서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이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일 양국은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는 이 정신은 이 책과 같은 성과가 축적되면서 앞으로도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