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재미있다. 오죽하면 TV드라마나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품이 줄을 이을까.
한데 많은 이가 학교를 떠나면 역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암기 위주의 공부가 남긴 후유증 탓이 크지만 역사의 재미, 역사의 쓸모를 제대로 전해주려는 연구자들의 노력이 소홀한 탓도 적지 않다.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의 관료제를 깊이 파고든 지은이가 속담을 매개로 ‘벼슬’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통찰과 애환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목차 · 머리말_벼슬에서 속담으로
01 오해가 끌어낸 벼슬
주사와 주서_개고기주사 대간_고약하다 고약해 한성부_서울 무섭다니까 남태령부터 긴다
02 마땅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기대
임금_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 벼슬아치_계란유골 양반_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03 좋은 벼슬을 향안 욕망과 통찰
정승_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평양감사_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04 백성과 맞닿은 벼슬
수령_원님 덕에 나팔이라 포도청_목수멍이 포도청 차사원_함흥차사
05 모두에게 익숙한 벼슬길
당상관_따놓은 당상 상피_말도 사촌까지 상피를 본다 공사_조선공사삼일
· 꼬리말_조선 벼슬이 남긴 것들
저자 소개 저 : 이지훈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선시대사를 전공했다.
조선 초기 인사고과와 관직 운용을 연구한 〈조선 초기 고과제도考課制度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강사로 일하고 있다.
사람이 만든 제도와 그 제도에 영향을 받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궁금한 것이 많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시대 관료제의 역사적 성격과 특징을 ...
책 속으로 이팽수는 김안로의 추천으로 1534년(중종 29) 정7품 승정원 주서注書 관직을 얻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이팽수가 김안로에게 뇌물을 쓴 결과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 즉 ‘집에서 키우는 노루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고 놀렸다. ‘집에서 키우는 노루 [家獐]’는 개고기를 가리켰다. --- p.14
승정원 주서는 정7품으로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기본적으로 글짓기 능력이 있는 문과 급제자, 그 가운데서도 재능이 뛰어나고 도덕성이 검증된 사람으로 두루 추천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주서를 거치면 다음 벼슬도 좋은 자리에 갈 확률이 높았다. --- p.15
고약해는 1413년(태종 13)에 발탁된 인물로, 태종 때 정6품 형조 정랑까지 올랐다가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연관된 소송을 잘못 처리하여 파직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용서를 받고 다시 벼슬살이를 이어가 종2품 호조 참판까지 올랐다.
고약해는 이처럼 높은 벼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세종과 의견이 달라 여러 차례 충돌했다. --- p.27
세종이 당시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줬다든가, 애민愛民의 마음에서 한글 창제를 했다든가, 백성들의 형벌을 줄여주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고약해의 이야기는 세종의 리더십, 즉 반대 의견이나 비판도 들어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쓰인다. --- p.35
《경국대전》의 경관직 항목에는 한성부뿐만 아니라 개성부도 있었다.…《경국대전》은 개성부가 ‘구도舊都’, 즉 예전 수도를 관리한다고 명시했다.…
개성부는 한성부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개성부의 벼슬은 외관직으로 분류하지 않고 경관직으로 분류했다.
이는 한성부가 경관직 항목에 기재되었다는 사실이 서울을 수도로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49
“나라님이 약 없어 죽나”는 목숨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아무리 대단한 나라님이라도 사람인 이상 자기 수명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라님 망건값도 쓴다”는, 돈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써버리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 p.57
맹자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리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맹자는 조선의 문묘에 배향되었다.…맹자의 주장을 조선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 p.59
계란유골鷄卵有骨. 우리말로 풀면 ‘달걀이 곯았다’ 정도가 되겠다. “늘 일이 잘 안 되는 사람이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났어도 역시 일이 잘 안 됨”을 이르는 말이다. --- p.64
황희는 청백리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황희를 청백리로 못 박은 기록은 황희가 살았던 당대 기록이 아니라 20세기 기록이다…
황희의 처가 쪽 친척이 국가 재산을 함부로 이용한 혐의가 있었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황희가 이를 변호하여 처벌받지 않도록 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둘째 아들 황보신이 뇌물을 받은 죄로 처벌받았는데, 황희가 문종에게 부탁하여 사면을 시켜준 일이었다. --- p.69
계란개골의 주인공은 황희가 아니라 강일용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실존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고려 사람이었고 학사 벼슬에 있었다. --- p.75
동반은 붓을 쓰는 문신, 서반은 칼을 쓰는 무신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임금과 성씨가 같은 남자 친척들, 즉 종친의 경우 칼을 쓰지 않더라도 서쪽에 섰다. 서반 벼슬이 모두 칼을 쓰는 벼슬도 아니었다. 붓을 쓰는 문신 가운데 서반 벼슬을 받아 서쪽에 설 때도 있었다. --- p.85
양반이 되려면 벼슬이 필요했지만, 벼슬만으로 양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공인한 ‘양반 신분증’ 같은 건 없었다. 현직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벼슬 종류에 따라 양반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자신이 스스로 양반이라 주장해서 양반이 될 수도 없었다. 양반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남들에게 널리 인정받아야 하는 계층에 가까웠다. --- p.87
“양반 두 냥 반”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속담은 양반이 그만큼 흔하고 돈으로 살 수 있는 지위에 불과하다는 조롱의 뜻을 담고 있다. “양반 때리고 볼기 맞는다”, “양반은 가는 곳마다 상이요, 상놈은 가는 데마다 일이라”, “ 양반 못된 것이 장에 가 호령한다” 등 양반의 신분적 우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속담도 있으나 그것이 당연하다거나 마땅하다는 어감은 전혀 없다. --- p.92
조선 건국 직후 최상위 관청 가운데 하나인 문하부에 설치된 벼슬로 좌정승과 우정 승이 있었다.
처음에는 시중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394년(태조 3)에 정승으로 바뀌었다.
그 뒤 1400년(정종 2) 문하부가 사라지고 의정부가 만들어졌다.
이때 정승 대신 의정議政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의정부의 장관은 의정부의 영의정부사, 즉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1414년(태종 14)에 판의정부사 두 자리를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바꾸면서, 의정부의 가장 높은 세 벼슬 이름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정리되었다. --- p.95
처음에는 통정대부 이상 당상관을 영공이라고 높여 부르다가 1592년 전후로 영공은 영감이 되었다.
그리고 영감 가운데 정2품 이상을 따로 구분하는 대감이라는 말이 생겼다. --- p.97
벼슬아치들은 당상관으로 불리는 정3품 통정대부및 절충장군에 오르기까지 정해진 근무 기간을 채우고 업무 성과를 쌓아 승진했다.…
규정되어 있는 내용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종9품 장사랑將仕郞부터 통훈대부까지 약 40년 가까이 걸렸다.
40세 남짓이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한 세대에 걸치는 아득한 시간이었다. --- p.102
“저는 잘난 백정으로 알고 남은 헌 정승으로 안다”는,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이 거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만만히 보거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헌 정승만큼도 안 여긴다”는, 여럿이 모여 무엇을 하면서 어떤 이를 무시하고 참여하지 못하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승을 지낸 사람이라도 현직에서 내려와 권력을 잃으면 주요 논의에 끼워주지 않을 정도로 괄시했다는 뜻이다. --- p.105
조선 시대 평양은 평양부平壤府였고, 소속한 도는 평안도였다.
그러므로 평안도 관찰사를 줄여서 다른 말로 쓴다면 평안도 감사 혹은 평안감사 정도가 옳은 표현이다.
조선의 공식 문서에서 평안도 관찰사를 줄여서 쓸 때 평양감사라고 쓴 적은 없었다. --- p.109
평양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인구가 1만 명이 넘는 큰 고을이었다. 18세기에는 2만 명이 넘어 도읍 한성과 옛 도읍 개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고을이었다.…
평양이 다른 고을보다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이었다. 다른 하나는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을 도읍에 보내지 않고 평안도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잉류仍留 조치였다. --- p.113
평양감사 역시 그 ‘좋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지닌 속담도 함께 남아 있다.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가 낫다”는, 그렇게 좋은 자리여도 관찰사 임기는 2년을 넘기지 못하니, 차라리 오래 변하지 않는 소금을 파는 장사치가 낫다는 뜻이다. --- p.118
조선 시대에 말[馬]을 끌어주는 사람은‘ 거덜’이라고 불렀다. ‘거들먹거리다’와 ‘거덜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