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저 : 서영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화재청 근대문화재 전문위원과 경기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고, 역사도시서울 위원회와 인천시 문화재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 과정과 정치세력의 동향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자주적 근대국가 수립에 실패하고 식민통치를 겪었던 역사적 경험이 현대 한국인의 삶에 어떠한 유산으로...
책 속으로 사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책봉체제라는 전통적 관념에서 보면 대한제국 황제정의 탄생은 이례적이다.
원래 제국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를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미 동아시아의 계서적 국제질서를 부인하고 스스로 ‘제국’이라 칭했듯이, 대한제국 또한 주권국가로서 근대적 자주독립의 의지를 제호로써 천명했다. --- 「프롤로그. 우리는 대한제국을 어떻게 기억해 왔는가?」 중에서
국호 논의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칭제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해온 심순택의 주장에 보이듯이, 중국과 대등한 황제국을 칭하는 마당에 중국에서 내린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쓸 수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야말로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온 중국과의 관계에 대한 획기적인 인식 변화에 근거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제국은 결코 조선왕조의 연장이 아니다. --- 「2장. 새 국호 ‘대한’과 제국」 중에서
고종과 대한제국이 칭제와 국호 변경을 통해 획득하고자 했던 근대적 만국공법체제 편입은 단순히 칭제나 국호 변경이 아니라 스스로 자주, 독립, 자강할 수 있을 때 획득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향후 고종과 대한제국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해 보였다.
동양적 황제국을 선망하며 황금빛 의장물들을 앞세우고 중화제국의 황실문화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만국공법적 국제질서하에서 유럽 제국의 근대적 군주 상을 추구할 것인지,
그것이 1897년 10월 12일 어렵사리 탄생한 대한제국 황제정 앞에 놓인 선택지였다. --- 「3장. 환구단에서 열린 황제 즉위식」 중에서
궁중 의전관으로 근무했던 엠마 크뢰벨은 (…) 한성이야말로 ‘전통과 근대의 신문화가 정면으로 부딪히며 대립하는 독특한 사회’라고 서술했다. (…)
상하이나 도쿄, 베이징도 한성처럼 전신과 전화, 전깃불과 전차를 동시에 갖지는 못했다고 비교하면서, 한성은 한편에 전통이 자리하고 다른 한편에는 유럽의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시설들이 존재하는 ‘독특한’ 도시라고 평가했다. --- 「10장. 고종 즉위 40년 칭경예식과 서양식 연회문화」 중에서
역사가 조선왕조에서 곧바로 일제강점기로 넘어간 게 아니고, 해방 후 대한민국도 갑자기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근대 한국과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은 대한제국기에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안은 채 대한민국이 출발했다. --- 「에필로그.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에 남긴 유산」 중에서
출판사 리뷰 조선의 마지막 유산이자 근대 한국의 출발점 우리는 대한제국을 어떻게 기억해 왔을까?
대한제국의 흔적은 대한민국이라는 현 국가의 이름에도 확고히 남아 있으나, 정작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연결고리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며 박물관으로 들어간 역사. 대한제국이라는 기억은 곱씹을수록 낯설고 씁쓸하다.
커피를 좋아한 고종이나 일본으로 넘어간 덕혜옹주 등 몇몇 황실가족의 일화는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잘 알려졌지만, 정작 우리 역사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은 미처 정리되지 않은 채 어렴풋한 과거에 남겨진 듯하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이가 대한제국을 그저 13년 만에 사라진 나라, ‘간판만 바꿔 단’ 조선왕조로 기억한다.
그러나 ‘대한’이라는 칭호에서도 알 수 있듯, 대한제국은 더 이상 청의 종속국으로 남지 않고 자주국으로서 주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으며,
양반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국가로 평가되어야 한다.
사진으로 만나는 대한제국의 사람들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대한제국의 이야기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180여 개의 사진 자료다.
대한제국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긴 사진에서 현대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의 연결고리가 더 분명히 드러난다.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치러진 당시의 환구단 사진과 일제가 환구단을 허문 자리에 지은 철도호텔 사진을 비롯해, 고종황제의 국장 행렬을 바라보는 사람들, 만원 전차에 올라탄 여인들, 3·1운동 당시 정동길을 가득 채운 만세 시위 군중 등이 담긴 사진이 근대 한국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대한제국 시기, 서구에서 도입된 기술문명을 대하는 근대 한국인의 표정과 몸짓, 거리 풍경을 통해 그동안의 문헌 자료에서는 읽을 수 없던 이 시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주권국가를 향한 염원과 좌절 대한제국이 우리에게 남긴 것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의 원형은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식 행렬에 앞세워졌으며, 황제탄신일과 개국기원절 등 수많은 대한제국 국가 행사를 장식했다.
대한제국의 탄생을 선포하는 자리에도 태극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수백 년간 지속된 청(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위계질서로부터의 이탈을 선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역시 자신을 대한국인이라고 칭했다.
이처럼 근대 한국의 정체성은 이미 대한제국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대의 대한민국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한제국이 우리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한제국은 유럽 각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중립 외교를 추구했으며, 일제의 국권침탈을 고발하는 특사단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이처럼 대한제국은 만국공법이 지배하는 근대 세계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일제의 병합으로 근대 주권국가를 향한 염원은 좌절되었다.
이후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단계에서부터 일찍이 민주공화제를 채택했고, 해방 후 정부수립 과정에서도 옛 황실을 복원하는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이러한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안은 채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저자는 스스로 황제정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가 현대 한국 정치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지 궁금했다고 한다.
이 책은 이 의문에 답하고자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제정이 차지하는 의미를 찾는 데 집중했다.
대한제국의 건축, 미술, 사진, 음악, 복식,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로 시각을 넓혀 대한제국이 근대 한국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한편, 일제의 외압하에서 대한제국이 세계질서에 적응하기 위해 어떤 국가체제를 만들었는지 규명하였다.
이 책을 통해 근대 한국의 출발을 알고, 우리가 사는 세상, 현대의 대한민국을 더 깊이 이해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