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소개 저 : 이종전 안양대학교,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 등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의 교수로 역사신학 분야를 연구하면서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로 있으며, 2017년부터는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대신교단의 목사후보생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그는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신학을 개혁파신학이라고 확인하고, 그 계승과 확장을 위해서『개혁파신학연구소』...
책 속으로 프롤로그 변방에 고립된 섬이지만 한반도의 역사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곳, 1232년(고종 19년)부터 1270년(원종 11년)까지 38년간 고려국이 개경에서 도읍을 천도한 곳, 근대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침략했을 때 전장이었던 곳, 이렇게 한반도 역사에서 여러 가지 사건의 중심이었던 곳, 그곳이 강화도다.
그런데 강화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은둔의 나라를 찾았던 초기 선교사들의 족적이 남아있는 곳이며, 전해진 복음의 능력이 섬 전체에 확산되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정주할 수 있도록 허락된 곳은 서울 정동이지만, 이곳 강화도에는 선교사들의 족적과 신앙의 선조들이 남긴 특별한 믿음의 열매들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지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들을 찾아 걷기를 시작한지 어언 40여년이 되지만, 처음 강화도를 찾았을 때의 감동과 놀라움으로 넋을 놓을 만큼 멍 ~ 하게 서서 한 참씩이나 ‘이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생각에 잠겨야 했던 느낌은 지금도 그대로다.
답사를 거듭하면서 하나씩 정리가 되고, 나아가 사건과 이야기들이 내 안에 엮어지면서 그 사실들을 나누고 싶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공유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싶었다.
따라서 강화도는 언제 찾아도 여전히 설렘과 함께 찾아야 하는 곳이다. 수도권에서 멀지 않지만 섬이라는 특성 때문일까, 특별한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있는 곳이다.
갑곶나루 역사는 과거의 산물이지만 그 역사를 만나는 것은 현재이다.
따라서 역사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설렘과 함께 상상력도 필요하다.
이미 과거의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만나기 위한 발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적과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와 함께 나를 만나 줄 것인지?
그래서 설렘이 있다. 1970년 이전까지 강화도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해서 건너야 했다.
하지만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는 뱃길조차 만만치 않다.
한강하류와 이어지는 바닷길은 들물과 날물의 유속이 빨라서 곧장 건널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여 나루터가 좁은 물길을 사이에 두고 멀리 대각선에 위치해 있다.
무동력선인 풍선배를 노저어서 건너야 했던 사공들은 급한 물살을 이겨내며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코프(Charles John Corfe)선교사도, 존스(George Heber Jones) 선교사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벽안의 선교사들은 모든 어려움을 이기면서 1890년대 초반 이곳 강화도를 찾았다.
그들이 첫발을 내디딘 곳은 갑곶나루이었다. --- 「강화도」 중에서
복음 전래의 길목 백령도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주요 길목이었다.
1884년 알렌이 의료 선교사 신분으로 들어오기 전, 중국 주재 선교사들 가운데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된 몇몇 사람이 처음으로 조선에 발을 디뎠던 곳이 백령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현존하는 유형의 유적은 없지만, 그들의 수고가 유효함은 훗날 이곳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 섬의 복음화 과정에서 놀라운 열매로 나타났다.
필자는 비록 그들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지 않고, 역사를 잇고 있지도 않지만 전해진 복음의 씨앗이 발아하여 성장한 오늘의 교회들을 돌아보고 싶었다.
백령도는 우리나라 기독교회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 Thomas)와 그 보다 앞서서는 칼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가 처음으로 조선의 땅을 밟았을 때 찾았던 곳이다.
그들은 이곳에 한문성경을 전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을 전해준 곳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다. 비록 그 열매가 맺혀지는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으나 그들이 남겨준 복음에 의해서 복음화를 이룰 수 있는 터전을 준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현재 백령도 주민의 적게는 65% 많게는 80%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야기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없고, 다른 섬의 경우에는 없어서는 안 될 풍어제와 같은 굿이나 대동제 같은 마을의 제례의식도 이곳에는 없다고 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이곳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수고와 신실한 신앙과 성경적인 삶의 열매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곳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말기에 교회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잠시 몇 교회들은 집회가 불가능했었다.
하지만 1937년부터 시작한 백령성경학교는 백령도를 비롯해서 대청도, 소청도 그리고 인근 섬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사는 삶의 확신을 가지게 하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백령성경학교는 겨울철에 2개월씩이나 계속되는 그야말로 계절학기식 성경학교였다.
3개 섬과 지금은 북한에 속한 주변의 작은 섬들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 300여 명씩이나 모여서 함께 먹고 자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 섬에서 많은 목회자와 장로들이 배출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 「옹진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