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는 교통수단의 발달 등으로 인해 이전의 힘들고 위험했던 ‘여행’이 즐겁고 편안한 ‘관광’으로 바뀐 시기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근대관광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이 만들어갔고, 그 주도 세력은 식민지 정부였다.
수많은 일본인이 부산으로 들어와 경성을 관광했으며, 평양을 거쳐 만주까지 돌아보기도 했다.
역사지리학자인 저자가 수년 동안 수집한 당시의 기행문 80여 편, 관광안내서, 지도와 사진 등 개인의 발자취와 기관의 기록을 분석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근대 산물인 관광이 어떤 명암을 드러냈는지 살펴본다.
공급자 측면에서 다룬 여느 근대관광 연구서와 달리, 비록 일본인이지만 관광소비자 측면도 함께 다룬 한국 근대관광 연구서라는 의의가 있다.
목차 책 머리에
제1장 서장
1 관광과 관광객 그리고 여행 2 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관광 연구의 의의 3 이 책에서 사용한 자료와 그 활용 방법
제2장 식민지 조선 관광에 나선 일본인들
1 일본인 관광객의 면면 2 관광의 동기 3 관광의 준비
제3장 교통수단과 교통로
1 일본과 식민지 조선 간의 이동 2 도시 간의 이동 3 도시 내의 이동
제4장 공급자가 제공한 경성·평양·부산의 관광지
1 공급자가 추천한 주요 관광지 2 공급자가 편성한 관광 일정
제5장 관광객이 이용한 경성·평양·부산의 관광지
1 식민지 조선과 세 도시의 체류 기간 2 관광객이 찾은 세 도시의 관광지
제6장 숙박과 식사 그리고 관광 중의 활동
1 숙박 2 식사 3 관광 중의 활동
제7장 종장
저자 소개 저 : 정치영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지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일본 교토대학교 초빙학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지리학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과거를 대상으로 하는 지리학”인 역사지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과거의 경관이나 지리적 상황을 복원하고, 각 지역의 환경에 적응하여 사람들이 만들어 낸 지역 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지은...
책 속으로 이때 관광은 사람들이 타자를 인식하고 이를 통해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며, 나아가 세계에 대한 상상의 지리, 심상지리(心象地理)를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관광은 관광지를 물리적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여기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이같이 근대관광은 경제적 현상을 넘어선 사회문화적 현상이었으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장 서장, 17쪽」중에서
기행문의 숫자를 관광객의 숫자로 바로 연결하기는 어려우나, 그 경향은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을 것이며, 동시에 읽을거리로서의 기행문의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행문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를 읽고 관광에 나서고 싶은 사람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2장 식민지 조선 관광에 나선 일본인들, 43쪽」중에서
흥미로운 인물은 하라 쇼이치로이다. 그의 일생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으나, 1909년부터 1918년까지 법제국(法制局) 참사관(參事官)으로 근무하였으므로, 1914년 여행 당시에도 이 신분으로 공무 출장을 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50여 일에 걸쳐 경성뿐만 아니라 전라도·경상도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였으며, 기행문 곳곳에 그의 조선관(朝鮮觀)과 총독정치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식민지에서는 이 책의 발매가 금지되었다고 한다. ---「2장 식민지 조선 관광에 나선 일본인들, 67쪽」중에서
연락선의 명칭을 보면, 대한해협의 섬 이름인 이키와 쓰시마에서 시작하여, 한반도가 식민지로 전락한 1913년에는 과거의 나라 이름인 고려와 신라를 사용하여 한반도의 역사마저 일본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의도를 보였고, 1922년과 1923년에 취항한 배에는 경복·덕수·창경 등 조선의 궁궐 이름을 붙여 조선의 지배권력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었다. ---「3장 교통수단과 교통로, 118쪽」중에서
일제가 그들 위주의 시각에서 관광지를 조성했다는 점은 일본이 도입한 근대문화시설인 공원을 주요한 관광지로 선정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경성에서는 파고다공원·장충단공원·남산공원, 부산에서는 다이쇼공원·용두산공원, 평양에서는 서기산공원 등지가 관광지로 선정되었는데, 이 가운데 파고다공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가 만든 곳이다.
특히 장충단공원은 조선의 충신을 추모하는 제단을 없애고 공원을 조성하고 벚꽃을 심었으며, 박문사를 경내에 건립하였다. ---「4장 공급자가 제공한 경성·평양·부산의 관광지, 221쪽」중에서
관광객 가운데는 경복궁에 대한 독특한 감상을 남긴 이도 있다. 1917년 경복궁을 방문한 승려 샤쿠 소엔은 일제가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경복궁 경내에 지은 건물들이 남아서 고아(古雅)한 경복궁의 건물과 대립하는 데에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수년간의 계획으로 경복궁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조선총독부의 새로운 거대한 청사를 짓는 일은 무취미(無趣味)한 관리들 탓이라고 하였다.
실로 역사 있는 궁전과 전면의 아치(雅致)가 있는 오래된 대문이 버터 냄새 나는 건물로 일도양단(一刀兩斷)될 운명이라고 비판하였다. ---「5장 관광객이 이용한 경성·평양·부산의 관광지, 307쪽」중에서
1920년의 이토 사다고로는 “조선의 민정을 시찰하고 풍속의 진상(眞相)에 접촉하려면 탈것은 3등, 여관은 조선숙(朝鮮宿)에 여보(ヨボ, 조선인을 뜻하는 말로 일본에서 사용되었으며, 모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와 합숙하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였지만, 조선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식 여관이나 민가에 숙박한 일본인은 한 명도 없었다.
일본인에게는 일본과 다름없는 운영 방식과 시설을 갖춘 일본식 여관이 편하고 익숙하였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식 여관이 일본의 그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된 점은 기행문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6장 숙박과 식사 그리고 관광 중의 활동, 390쪽」중에서
일본인이 찾지 않는 음식점을 체험한 사람은 1919년 연구목적으로 방문한 누나미 게이온 정도이다.
그가 방문한 청량리의 청량관이라는 요리점은 일본인이 거의 오지 않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먹은 음식도 냉면·잡채·닭백숙 등 일본인이 가는 조선요리점에서 잘 제공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는 파고다공원을 구경한 다음에도 근처의 순 조선식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시도하였다.
어방반옥(魚房飯屋)이라는 곳이었으며, 이곳에서 비빔밥을 맛보고 맑은 약주, 그리고 탁주인 막걸리를 마셨다. ---「6장 숙박과 식사 그리고 관광 중의 활동, 429쪽」중에서
일본인들의 식민지 조선 관광은 대체로 철도망으로 연결되는 도시를 중심으로 짧은 기간에 이루어지는 피상적인 여행이었다.
관광객들이 경성·평양·부산의 세 도시에서 방문한 관광지들은 대부분 관광공급자에 의해 의미가 덧씌워지거나 변성된 장소였으며, 숙박과 식사도 일본에서와 거의 같은 방식과 내용을 소비하였고, 개인적인 시간은 드물고 단체행동이 위주였으며, 만난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조선인과 직접 접촉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현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지인과 만날 기회가 배제된 오늘날의 단체 패키지 해외 관광과 매우 닮은 여행이었다. ---「7장 종장, 475쪽」중에서
출판사 리뷰 일본인의 빛바랜 기록으로 잊혀가던 한국 근대관광을 복원하다
일반적으로 관광에 관한 연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생산자, 즉 관광공급자로서의 관광지와 관광 대상 그리고 이를 조성한 주체의 측면에서 고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소비자, 즉 여행자와 관광객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관광공급자 측면의 연구는 관광지의 구조와 성격, 관광정책, 관광을 제공하는 국가·시장·조직의 특성 등이 연구 대상이다.
이때는 관광지의 정보를 담고 있는 관광안내서와 관광정책 보고서 등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근대관광 연구는 대부분 관광공급자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
신문자료를 활용해 한국 학생들의 일본·만주 수학여행의 여정 등을 살펴본 연구, 조선총독부 자료, 관광안내서 등을 활용해 일제하 조선총독부의 관광정책과 주요 여행지를 고찰한 연구 등이 대표적이다.
『근대 일본인의 서울·평양·부산 관광』이 지금까지 근대관광을 다룬 여타 책과 다른 점은 관광의 소비자, 즉 관광객의 측면도 함께 다룬다는 점이다.
그동안 소비자 측면에서 연구가 이뤄지기 어려웠던 점은 당시 한반도 관광을 누렸던 주 소비자 역시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인의 기행문, 사진 등을 그러모아 해체하다시피 분석하였고, 한반도에서 펼쳐진 근대관광의 모습을 복원하는 동시에 일본인이 기록하지 않은 사회상과 역사적 의미를 탐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인의 손에서 끝날 뻔한 한국 근대관광의 기록을 다시금 우리의 기록으로 만들었다는 데 이 책은 또 다른 의의를 갖는다.
시대를 다시 그리게 하는 개인들의 기록물
“한눈에 내려다본 경성 시가의 전망은 실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시가를 둘러싼 산들이 멀리 창공에 분명하게 붉게 도드라졌다.
그것은 내지 등에서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산의 모습이었다.
살짝 안개가 서린 가운데 아침 햇볕을 받은 집들이 모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지붕은 붉은색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어딘가 외국의 거리에 온 것 같은 이국적인 경치였다.” (닛타 준)
1941년 경성을 찾은 소설가 닛타 준이 유람 버스를 타면서 본 경성 풍경을 기행문에 남긴 내용의 일부다.
식민지 조선에 관광을 와서 그 기행을 글로 쓴 이 일본인과 같이, 과거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떠났고,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품고 관광에 나섰다.
그런 동경과 호기심은 관광안내서와 지도를 낳았고, 세계 곳곳을 여행한 사람들은 수많은 기행문을 남겼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 과거의 경관이나 지리적 상황을 복원하는 역사지리학자인 저자는 특히 개인이 기록하는 여행의 결과물인 기행문에 관심을 가졌다.
문학작품이기도 한 기행문은 작가의 여행 과정과 여행지의 지역 상황을 상세하고, 비교적 재미있게 담고 있는 사실적인 기록이므로, 과거의 경관이나 지리적 상황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연구 자료로 활용한 일본인의 기행문(단행본)은 80여 편에 이른다.
이와 별도로 기행문 저자의 특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직업, 관광 당시 나이, 관광의 개인적 배경 등에 대해서도 인터넷과 문헌 자료를 샅샅이 살피어 조사하였고, 이 결과를 도표로 정리하였다.
연구 자료로 활용한 관광안내서는 37가지, 사진첩 목록은 18개다. 각종 지도와 사진첩에 수록된 도판을 비롯하여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과 소장하고 있던 그림엽서를 포함한 총 90여 개의 도판을 이 책에 실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서울, 평양 그리고 부산
이 책에서는 근대 관광공간 가운데 서울·평양·부산 등 3개의 도시에 주목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세 도시는 관광지로서 각기 나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식민지 조선을 대표하는 관광지는 금강산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세 도시를 통해 세계의 형성과정에 제국주의, 자본주의, 산업발전, 도시화의 진전 등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식민지의 수도였던 경성, 즉 서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발전시킨 제국 일본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관광공간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평양은 조선의 전통문화가 잘 보전된 관광공간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평양이 임진왜란·청일전쟁의 전적지여서 일본제국의 확대 과정을 기념할 수 있는 관광지라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한편 일본인의 식민지 조선 관광의 출발점이자 종착점 역할을 했던 부산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관광지가 특히 많았으며, 시간에 따라 변화가 컸다.
일제가 제안한 관광지 중 상당수는 조선 역사 속에서의 의미보다는 일본 역사 속에서의 의미 때문에 선정되었다.
이 책은 ‘관광지’로서 서울, 평양, 부산이 어떻게 조성되었고, 시간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구체적인 장소들이 관광지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고찰하였다.
한국 근대관광을 말할 때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
한국에서 근대관광이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라 할 수 있으며, 이를 주도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였다.
일본은 1905년의 러일전쟁 승리 이후 자국민들의 해외여행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특히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관광개발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획득하고, 제국의 우월성과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자 하였다.
이 책의 시간적 범위는 1905년부터 1945년까지의 41년간으로 하는데, 일제강점기는 1910년부터이나, 관부연락선과 경부선철도가 개통된 1905년을 기점으로 일본인의 한국 여행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인의 관광은 대부분 현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현지인과 만날 기회가 배제된 오늘날의 단체 패키지 해외 관광과 매우 닮은 여행이었다.
그들이 남긴 기행문 속 한반도를 바라보는 시각은 낙관적인 전망이 배어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의 모습은 피상적이고 소략하게 설명되었다.
저자는 이 책이 경성·평양·부산이라는 세 도시를 주로 다루고 있어 지역적 제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이 만든 자료 위주로 분석하였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의 관점과 상황을 담은 후속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며 소회를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