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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여성은 다르게 기억한다”
출간되자마자 독일 사회를 뒤흔든 문학 사건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가장 어린 유대인 루트 클뤼거
홀로코스트 추모문화를 거부한 홀로코스트문학,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증언문학
1931년생,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가장 어린 유대인, 얼어붙은 기억을 반세기 만에 녹인 여성 피해자, ‘마지막 생존자’라는 그럴싸한 꼬리표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역사의 증인,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고 한참 뒤 ‘가해자의 언어’를 다시 꺼내 쓴 독일문학연구가, 날카롭고 간명하고 유려한 문체로 독자에게 에두름 없이 말을 거는 작가, 루트 클뤼거.
『삶은 계속된다: 어느 유대인 소녀의 홀로코스트 기억』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클뤼거의 대표작으로, 나치가 지배한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을 유대인이자 여성, 어린아이, 딸, 문학 독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기념비적 증언문학이다. 1992년 독일 출간 당시 “강제수용소의 참담함을 재현한 또하나의 수기가 아닌” “피해자에 관한 통념을 매 순간 배반하는” “페미니즘적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 독보적인 홀로코스트문학”이라는 평가와 함께 독일어권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등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지금도 유럽과 미국에서 국가폭력 피해자(특히 여성)의 경험과 기억, 사후 영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더불어 증언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날카로운 문장과 기억을 불러내는 기법 등 탁월한 문학성을 인정받아 토마스만 문학상, 레싱 문학상, 쇼아 기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 (도시 인구 약 189만 명 중) 10만 독자가 이 책을 읽어 화제가 되었다.
출간되자마자 독일 사회를 뒤흔든 문학 사건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가장 어린 유대인 루트 클뤼거
홀로코스트 추모문화를 거부한 홀로코스트문학, 여성의 눈으로 바라본 증언문학
1931년생,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가장 어린 유대인, 얼어붙은 기억을 반세기 만에 녹인 여성 피해자, ‘마지막 생존자’라는 그럴싸한 꼬리표를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역사의 증인,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하고 한참 뒤 ‘가해자의 언어’를 다시 꺼내 쓴 독일문학연구가, 날카롭고 간명하고 유려한 문체로 독자에게 에두름 없이 말을 거는 작가, 루트 클뤼거.
『삶은 계속된다: 어느 유대인 소녀의 홀로코스트 기억』은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클뤼거의 대표작으로, 나치가 지배한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을 유대인이자 여성, 어린아이, 딸, 문학 독자의 관점에서 기록한 기념비적 증언문학이다. 1992년 독일 출간 당시 “강제수용소의 참담함을 재현한 또하나의 수기가 아닌” “피해자에 관한 통념을 매 순간 배반하는” “페미니즘적 관점을 전면에 내세운 독보적인 홀로코스트문학”이라는 평가와 함께 독일어권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는 등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지금도 유럽과 미국에서 국가폭력 피해자(특히 여성)의 경험과 기억, 사후 영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다. 더불어 증언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날카로운 문장과 기억을 불러내는 기법 등 탁월한 문학성을 인정받아 토마스만 문학상, 레싱 문학상, 쇼아 기념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주관하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 (도시 인구 약 189만 명 중) 10만 독자가 이 책을 읽어 화제가 되었다.
목차
제1부 빈
제2부 수용소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크리스티안슈타트 (그로스로젠)
제3부 독일
탈출
바이에른
제4부 뉴욕
에필로그: 괴팅겐
옮긴이 해설
제2부 수용소
테레지엔슈타트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크리스티안슈타트 (그로스로젠)
제3부 독일
탈출
바이에른
제4부 뉴욕
에필로그: 괴팅겐
옮긴이 해설
책 속으로
죽음이, 섹스가 아니라 죽음이 어른들이 숙덕거린 비밀, 하나라도 더 들으려고 귀기울인 비밀이었다. --- p.11
“사람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 / 기다릴 만큼 기다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사람은 달아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p.28
우리 유대인은 남자만 카디시, 즉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나에게 한결같이 잘 대해주던 할아버지, 늘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와 안겨주던 할아버지는 한 번씩 슬픈 표정으로 키우던 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여기서 내 카디시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아이구나.” 할아버지는 딸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고, 어머니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전해주면서 여느 유대인 딸들처럼 그런 무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p.31
모든 걸 알아내는 우리는 가스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이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올랐고 그래서 남자들 시체는 늘 위에, 아이들 시체는 맨 아래에 있었다. 아버지는 숨이 끊어질 때 나 같은 아이들을 짓밟고 있었을까? --- p.42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눈에도 저녁시간의 성별 역할분담은 보이기 마련이다. 집안의 여자 어른들은 온종일 더운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특별한 명절이니만큼 여자들은 기독교인 가사도우미의 도움 없이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그 음식을 앞에 두고 나이가 가장 많은 남자 어른이 「출애굽기」를 엄숙하게 낭독한다. 여자 어른들은 이날 늘 기분이 좋지 않아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 p.56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프랑스에 있을 때 질투심을 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지낸 마지막 해에 자주 다퉜으며 어머니는 내 앞에서 자기 여동생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웠고 이모할머니가 애원하면서 두 조카를 말렸다고, 어머니의 여러 사소하고 자잘한 악의와 잔인함을 눈썹 까딱 않고 비난 내지 증명할 수 있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히틀러 시대에 당신들이 견뎌야 했던 그런 상황에서는 박해받는 이들끼리 더 가깝게 지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략) 그것은 감동적인 난센스, 고통을 통한 정화라는 잘못된 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용히 틀어박혀 스스로를 돌아보면 꽤 많은 이가 실상을 깨닫게 된다. 더 많이 견뎌야 하는 곳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품는 인내심도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가족 간 유대도 금이 간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지진이 나면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릇이 깨지는 법이다. --- p.71~72
우리는 남은 것들, 그러니까 장소, 돌멩이, 잿더미를 집요하게 붙들고만 있으면 안 풀리던 것이 풀리겠거니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간 범죄의 추하고 초라한 잔해들로 추념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 잔해를 모으고 보존하는 건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기 때문이다. --- p.89
“당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뭘 했는지 알아요.” 나는 우리가 뭘 했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았다. “당신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지요.” 내가 “나는 그때 겨우 열두 살이었는걸요”라고 대답했어야 할까? 그건 “다른 이들은 나빴지만 난 아니었어요”라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난 원래 착한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했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니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하면서 반발했어야 할까? 나는 말없이 집에 왔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살아남은 건 실로 우연이었다. --- p.92
오늘날 “하지만 당신은 그 끔찍한 시기를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잖아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묻지도 않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들이 내 삶을 앗아가려 하는구나 한다. 삶이란 건 지나온 시간일 뿐인데 저들은 내 기억의 권리를 의심하며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박해와 재난을 겪다 탈출한 아이들에게 경험극복 과정을 누차 막아서면서 ‘정상적’으로 처신하라고 종용했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만들어 어른들 몰래 되풀이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 p.93
수용소 공간을 당시 모습 그대로 묘사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그러나 우리 시대와 수용소 시대 사이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 또한 불합리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온, 아무도 읽으려 들지 않았던 책들에서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우리의 생각을 바꾼 그 책들 때문에라도 지금 나는 수용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치 내가 최초의 인물인 듯, 아무도 이야기한 적 없는 듯, 읽고 있는 사람 모두 그것에 대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 않은 듯, 이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통속물로 착취되지 않은 듯 이야기할 수 없다. --- p.100
내 지인들과 아들들을 포함한 사람들 대부분이 소규모 수용소의 이름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수용소를 가능하면 하나로 묶어 유명한 수용소들의 큰 문패 아래에 두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세세하게 분류하며 씨름하는 것보다 그편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덜 피곤하니까. 나는 세세한 구별을 고집하면서 썩 내키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여성 독자들에게 (누가 남성 독자를 염두에 둘까? 남성 독자들은 다른 남성이 쓴 것만 읽는다) 교훈을, 심지어 얼마쯤은 아마추어 심리학에 의지하는 교훈을 전하면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거나 심지어 불친절하게 대해본다. 내가 이런 구별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 p.103~104
만성적인 굶주림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다. 굶주림은 늘 있고 늘 있는 건 말하면 지루해진다. 굶주림은 사람을 쇠약하게 하고 갉아먹는다. 굶주림은 보통 생각들이 들어서야 할 뇌의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안 되는 먹거리로 뭘 할 수 있을까? --- p.111
우리는 소지품을 침대 속에 숨겨두거나 우편함처럼 나뉜 선반에 보관했다. 그 함들은 열려 있었지만 도둑맞을 염려는 없었다. 실제로도 도둑질은 없었다. 우리는 공동체였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중략)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제일 속상했던 것도 수용소마다 가장 잔인한 이기심이 작동했으리라는 추측, 그래서 수용소에 있다 나온 자는 도덕적으로 무너진 자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내 눈에는 전부 오해고 편견이었다. --- p.114~115
누가 개미 같은 존재이고 싶었을까. 우리는 변소에서조차 혼자인 적이 없었다. 변소 문밖에는 항상 볼일이 급한 이가 있었다. 거대한 우리에 갇혀 산 것이다. 가축들이 매놓은 줄을 물어뜯지는 않는지 확인하러 섬뜩한 제복의 권력자들이 이따금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겼고 실제로도 그런 존재였다. --- p.131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기 직전 문들이 열렸다. (중략) 나는 일어나 울고 싶었다. 질질 짜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의 섬뜩한 풍경 앞에서 눈물이 멎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실제로 나도 처음에는 드디어 정어리 깡통 같은 데서 삶기지 않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다며 안심했다. 그러나 공기는 신선하지 않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나는 곧장 여기서는 사람이 울지 않는다는 것, 울면서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p.141
아이들이 생긴 뒤에야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기다리느니 차라리 자식들을 죽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품고 어쩌면 더 철저하게 수행했을 수도 있다. 자살은 비교적 아늑한 느낌을 주는 생각이고, 특히 자살률이 높고 두 명 중 한 명이 ‘자살’을 입에 올리는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아늑하다는 것은 비르케나우에서 처방받는 다른 죽음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 p.145
끝없는 갈증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굶주리는 사람에게 더 큰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한 사람이 굶어죽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갈증이 찾아오기까지의 시간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몇 주 동안, 심지어 몇 달 동안 금식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에 갈증이 계속되면 며칠 안에도 죽는다. 그런 만큼 갈증은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럽다. --- p.150
시절이 좋지 않다면 그 시절을 쫓아버리는 것보다 나은 게 없을 터, 그럴 때 모든 시는 마법을 거는 주문이 된다. --- p.156
그들은 아우슈비츠에 관한 시는 물론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떤 시도 쓰지 말라고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운율 있는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니 시 없이도 살 수 있는 이들이 하는 주장이다. 시를 짓지 말고 정보만 수집하면 족하다는 뜻이다. 기록들을 읽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놀랄지라도 침착하게. --- p.160
공감하고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사건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p.162
시몬 베유는 선이란 그 자체 말고는 마땅한 이유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었다. (중략) 한나 아렌트는 악이 편협하고 고루한 정신 속에서 저질러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선에 대한 시몬 베유의 주장과 짝이 되는 것을 전해줬다. 하지만 그 말에 남자들은 분노를 쏟아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의적인 폭력에 대한 폭로가 가부장제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꼭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아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성은 악을 쉽게 악마화하는 남성보다 악에 대해 더 많이 알 것이다. --- p.168
나치들이 야만인들이다? 웃기는 이야기다. 그들은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고 과학을 신뢰했다. 미신을 믿긴 했지만. --- p.188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내가 죽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저지른 게 없는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응보를 받아야 하나? ‘부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희한한 의무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서 가진 것을 빼앗아 죽은 자들에게 주고 싶지만 어떻게 빼앗아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채무자인 동시에 채권자가 되어 뭔가를 보상하거나 요구하려고 보상행동들을 해 보이지만, 그 행동들은 이성의 빛에 비춰보면 무의미한 것들이다. --- p.232
사유 정원에서 과일을 훔쳤다는 이유로 미군들에게 잡혀 꽤 긴 구류형을 선고받은 젊은 생존자들 소식도 신문에서 읽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전과자처럼 다뤘다. 마치 그들이 실제로 뭔가 죄를 범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는 듯 말이다. --- p.242
내가 몇 차례 크리스토프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유대인 남학생 몇몇이 나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며 잠깐 끌어냈다. 결혼 안 한 유대인 여자가 비유대인 남자와 함께 다니는 것, 게다가 독일 남자와 다니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격분했다. 너희는 독일 여자들과 사귀면서 내게 무슨 지시를 내리려는 거냐고 반발했다. 그러자 그것은 좀 다르다고, 자신들은 남자고 누구와도 사귈 수 있다고 받았다. (중략) 처음에는 빈에서 아리아인 아이들이 유대인 아이들을 멸시했고, 그다음에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체코 아이들이 독일 아이들을 멸시했으며, 지금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멸시한다. 너희는 이 세 종류의 멸시에 공통분모가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세 가지를 순서대로 체험했다. --- p.272
1940년대 후반에는 기업가 정신을 소유한 백인 남성이라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무한한 가능성의 시장으로 노동시장을 지목한다. “백인 남성을 위한”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말이다. --- p.292
나는 젊은 여자들의 위험한 상태를 이야기할 때 쓰는, 입맛을 다시며 친밀한 척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가 진 뒤 센트럴파크에 갈 때 조심하란다. 남자들은 성과 관련된 위험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남성성을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나라도 이랬을 거다…… 이런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아는데……” “너는 젊은 여자라서 잘 모를 테지만” 등.) 마치 태생적으로 더 약한 여성들의 근육이 문제일 뿐이고, 늘 약자들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신사도는 위장으로만 이용할 뿐인 남성 폭력의 도착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듯 말이다. 게다가 그 위장도 전쟁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얄팍하다. 나는 그들이 경고를 한답시고 가해자에 대해 너그럽게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 p.297~298
나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집안 문제를 털어놓는다. 끊임없이 생기는 마찰, 내가 무엇을 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어머니, 한 번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어머니, 내가 하는 일마다 부정적 판단을 내리는 어머니에 대해. --- p.305
눈에서 다시 끔찍한 자기연민의 눈물이 흘렀다. 내게서는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다. 언제 내가 내 삶을 손에 쥐어봤단 말이야. 어디를 보나 깨진 조각들뿐인데. 나는 화해하지 않은 채 놓아둔 것들에서만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고, 그것들을 나는 꽉 붙들고 있다. 이렇게 그냥 내버려둬.
“사람은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 / 기다릴 만큼 기다리면 죽음이 찾아온다. 사람은 달아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p.28
우리 유대인은 남자만 카디시, 즉 고인을 위한 기도를 올린다. 나에게 한결같이 잘 대해주던 할아버지, 늘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와 안겨주던 할아버지는 한 번씩 슬픈 표정으로 키우던 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가 여기서 내 카디시를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아이구나.” 할아버지는 딸들 앞에서 이렇게 이야기했고, 어머니는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전해주면서 여느 유대인 딸들처럼 그런 무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 p.31
모든 걸 알아내는 우리는 가스실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이제 자세히 알게 되었다.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밟고 올랐고 그래서 남자들 시체는 늘 위에, 아이들 시체는 맨 아래에 있었다. 아버지는 숨이 끊어질 때 나 같은 아이들을 짓밟고 있었을까? --- p.42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 눈에도 저녁시간의 성별 역할분담은 보이기 마련이다. 집안의 여자 어른들은 온종일 더운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다. 특별한 명절이니만큼 여자들은 기독교인 가사도우미의 도움 없이 음식을 장만해야 했다. 그 음식을 앞에 두고 나이가 가장 많은 남자 어른이 「출애굽기」를 엄숙하게 낭독한다. 여자 어른들은 이날 늘 기분이 좋지 않아 말을 걸 수조차 없었다. --- p.56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프랑스에 있을 때 질투심을 품었고 두 사람은 함께 지낸 마지막 해에 자주 다퉜으며 어머니는 내 앞에서 자기 여동생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싸웠고 이모할머니가 애원하면서 두 조카를 말렸다고, 어머니의 여러 사소하고 자잘한 악의와 잔인함을 눈썹 까딱 않고 비난 내지 증명할 수 있다고.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히틀러 시대에 당신들이 견뎌야 했던 그런 상황에서는 박해받는 이들끼리 더 가깝게 지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중략) 그것은 감동적인 난센스, 고통을 통한 정화라는 잘못된 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용히 틀어박혀 스스로를 돌아보면 꽤 많은 이가 실상을 깨닫게 된다. 더 많이 견뎌야 하는 곳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품는 인내심도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가족 간 유대도 금이 간다. 겪어보면 알겠지만 지진이 나면 평소보다 더 많은 그릇이 깨지는 법이다. --- p.71~72
우리는 남은 것들, 그러니까 장소, 돌멩이, 잿더미를 집요하게 붙들고만 있으면 안 풀리던 것이 풀리겠거니 기대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나간 범죄의 추하고 초라한 잔해들로 추념하는 것은 죽은 자들이 아니다. 그 잔해를 모으고 보존하는 건 누구도 아닌 우리에게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기 때문이다. --- p.89
“당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뭘 했는지 알아요.” 나는 우리가 뭘 했는지는 몰랐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았다. “당신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지요.” 내가 “나는 그때 겨우 열두 살이었는걸요”라고 대답했어야 할까? 그건 “다른 이들은 나빴지만 난 아니었어요”라는 뜻일 것이다. 아니면 “난 원래 착한 사람이었어요”라고 말했어야 할까?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니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하면서 반발했어야 할까? 나는 말없이 집에 왔고 마음이 내려앉았다. 살아남은 건 실로 우연이었다. --- p.92
오늘날 “하지만 당신은 그 끔찍한 시기를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잖아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묻지도 않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저들이 내 삶을 앗아가려 하는구나 한다. 삶이란 건 지나온 시간일 뿐인데 저들은 내 기억의 권리를 의심하며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을 문제삼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박해와 재난을 겪다 탈출한 아이들에게 경험극복 과정을 누차 막아서면서 ‘정상적’으로 처신하라고 종용했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지 말아야 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만들어 어른들 몰래 되풀이하면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 p.93
수용소 공간을 당시 모습 그대로 묘사하려 드는 건 어리석다. 그러나 우리 시대와 수용소 시대 사이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식으로 묘사하는 것 또한 불합리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나온, 아무도 읽으려 들지 않았던 책들에서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우리의 생각을 바꾼 그 책들 때문에라도 지금 나는 수용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마치 내가 최초의 인물인 듯, 아무도 이야기한 적 없는 듯, 읽고 있는 사람 모두 그것에 대해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 않은 듯, 이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나 심미적으로나 통속물로 착취되지 않은 듯 이야기할 수 없다. --- p.100
내 지인들과 아들들을 포함한 사람들 대부분이 소규모 수용소의 이름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은, 아마도 수용소를 가능하면 하나로 묶어 유명한 수용소들의 큰 문패 아래에 두고 싶어하기 때문인 것 같다. 세세하게 분류하며 씨름하는 것보다 그편이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덜 피곤하니까. 나는 세세한 구별을 고집하면서 썩 내키지 않지만 의식적으로 여성 독자들에게 (누가 남성 독자를 염두에 둘까? 남성 독자들은 다른 남성이 쓴 것만 읽는다) 교훈을, 심지어 얼마쯤은 아마추어 심리학에 의지하는 교훈을 전하면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거나 심지어 불친절하게 대해본다. 내가 이런 구별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 유용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 p.103~104
만성적인 굶주림에 대해서는 별로 할말이 없다. 굶주림은 늘 있고 늘 있는 건 말하면 지루해진다. 굶주림은 사람을 쇠약하게 하고 갉아먹는다. 굶주림은 보통 생각들이 들어서야 할 뇌의 자리를 차지한다. 얼마 안 되는 먹거리로 뭘 할 수 있을까? --- p.111
우리는 소지품을 침대 속에 숨겨두거나 우편함처럼 나뉜 선반에 보관했다. 그 함들은 열려 있었지만 도둑맞을 염려는 없었다. 실제로도 도둑질은 없었다. 우리는 공동체였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중략) 나중에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 제일 속상했던 것도 수용소마다 가장 잔인한 이기심이 작동했으리라는 추측, 그래서 수용소에 있다 나온 자는 도덕적으로 무너진 자일 거라는 추측이었다. 내 눈에는 전부 오해고 편견이었다. --- p.114~115
누가 개미 같은 존재이고 싶었을까. 우리는 변소에서조차 혼자인 적이 없었다. 변소 문밖에는 항상 볼일이 급한 이가 있었다. 거대한 우리에 갇혀 산 것이다. 가축들이 매놓은 줄을 물어뜯지는 않는지 확인하러 섬뜩한 제복의 권력자들이 이따금 나타나는 곳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겼고 실제로도 그런 존재였다. --- p.131
견딜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르기 직전 문들이 열렸다. (중략) 나는 일어나 울고 싶었다. 질질 짜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의 섬뜩한 풍경 앞에서 눈물이 멎었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실제로 나도 처음에는 드디어 정어리 깡통 같은 데서 삶기지 않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게 되었다며 안심했다. 그러나 공기는 신선하지 않았고 이 세상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나는 곧장 여기서는 사람이 울지 않는다는 것, 울면서 주의를 끌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 p.141
아이들이 생긴 뒤에야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기다리느니 차라리 자식들을 죽이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나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을 품고 어쩌면 더 철저하게 수행했을 수도 있다. 자살은 비교적 아늑한 느낌을 주는 생각이고, 특히 자살률이 높고 두 명 중 한 명이 ‘자살’을 입에 올리는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면 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아늑하다는 것은 비르케나우에서 처방받는 다른 죽음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 p.145
끝없는 갈증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굶주리는 사람에게 더 큰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한 사람이 굶어죽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갈증이 찾아오기까지의 시간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은 몇 주 동안, 심지어 몇 달 동안 금식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 반면에 갈증이 계속되면 며칠 안에도 죽는다. 그런 만큼 갈증은 굶주림보다 더 고통스럽다. --- p.150
시절이 좋지 않다면 그 시절을 쫓아버리는 것보다 나은 게 없을 터, 그럴 때 모든 시는 마법을 거는 주문이 된다. --- p.156
그들은 아우슈비츠에 관한 시는 물론 아우슈비츠 이후에 어떤 시도 쓰지 말라고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운율 있는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으니 시 없이도 살 수 있는 이들이 하는 주장이다. 시를 짓지 말고 정보만 수집하면 족하다는 뜻이다. 기록들을 읽고 들여다보고 하면서. 놀랄지라도 침착하게. --- p.160
공감하고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사건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p.162
시몬 베유는 선이란 그 자체 말고는 마땅한 이유도 없고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고 했는데, 맞는 말이었다. (중략) 한나 아렌트는 악이 편협하고 고루한 정신 속에서 저질러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적시하면서 선에 대한 시몬 베유의 주장과 짝이 되는 것을 전해줬다. 하지만 그 말에 남자들은 분노를 쏟아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자의적인 폭력에 대한 폭로가 가부장제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꼭 의식적으로는 아닐지라도 아주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성은 악을 쉽게 악마화하는 남성보다 악에 대해 더 많이 알 것이다. --- p.168
나치들이 야만인들이다? 웃기는 이야기다. 그들은 전혀 원시적이지 않았고 과학을 신뢰했다. 미신을 믿긴 했지만. --- p.188
나는 다른 사람들이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내가 죽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저지른 게 없는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응보를 받아야 하나? ‘부채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희한한 의무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서 가진 것을 빼앗아 죽은 자들에게 주고 싶지만 어떻게 빼앗아야 할지 모른다. 사람들은 채무자인 동시에 채권자가 되어 뭔가를 보상하거나 요구하려고 보상행동들을 해 보이지만, 그 행동들은 이성의 빛에 비춰보면 무의미한 것들이다. --- p.232
사유 정원에서 과일을 훔쳤다는 이유로 미군들에게 잡혀 꽤 긴 구류형을 선고받은 젊은 생존자들 소식도 신문에서 읽었다. 사람들은 이들을 전과자처럼 다뤘다. 마치 그들이 실제로 뭔가 죄를 범해 강제수용소에 갇혔다는 듯 말이다. --- p.242
내가 몇 차례 크리스토프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유대인 남학생 몇몇이 나에게 진지하게 이야기하자며 잠깐 끌어냈다. 결혼 안 한 유대인 여자가 비유대인 남자와 함께 다니는 것, 게다가 독일 남자와 다니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격분했다. 너희는 독일 여자들과 사귀면서 내게 무슨 지시를 내리려는 거냐고 반발했다. 그러자 그것은 좀 다르다고, 자신들은 남자고 누구와도 사귈 수 있다고 받았다. (중략) 처음에는 빈에서 아리아인 아이들이 유대인 아이들을 멸시했고, 그다음에는 테레지엔슈타트에서 체코 아이들이 독일 아이들을 멸시했으며, 지금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멸시한다. 너희는 이 세 종류의 멸시에 공통분모가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세 가지를 순서대로 체험했다. --- p.272
1940년대 후반에는 기업가 정신을 소유한 백인 남성이라면 누구든 출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무한한 가능성의 시장으로 노동시장을 지목한다. “백인 남성을 위한”이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말이다. --- p.292
나는 젊은 여자들의 위험한 상태를 이야기할 때 쓰는, 입맛을 다시며 친밀한 척하는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가 진 뒤 센트럴파크에 갈 때 조심하란다. 남자들은 성과 관련된 위험을 이야기할 때 자신의 남성성을 은근히 자랑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나라도 이랬을 거다…… 이런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나는지 아는데……” “너는 젊은 여자라서 잘 모를 테지만” 등.) 마치 태생적으로 더 약한 여성들의 근육이 문제일 뿐이고, 늘 약자들을 표적으로 삼으면서 신사도는 위장으로만 이용할 뿐인 남성 폭력의 도착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듯 말이다. 게다가 그 위장도 전쟁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처럼 얄팍하다. 나는 그들이 경고를 한답시고 가해자에 대해 너그럽게 말하는 것이 거슬렸다. --- p.297~298
나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집안 문제를 털어놓는다. 끊임없이 생기는 마찰, 내가 무엇을 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어머니, 한 번도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어머니, 내가 하는 일마다 부정적 판단을 내리는 어머니에 대해. --- p.305
눈에서 다시 끔찍한 자기연민의 눈물이 흘렀다. 내게서는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고 있다. 언제 내가 내 삶을 손에 쥐어봤단 말이야. 어디를 보나 깨진 조각들뿐인데. 나는 화해하지 않은 채 놓아둔 것들에서만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고, 그것들을 나는 꽉 붙들고 있다. 이렇게 그냥 내버려둬.
--- p.354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가해자의 언어로 써야 한다”
처음에는 아이의 시선으로, 다음에는 여성의 시선으로
무엇보다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쓴 생존자의 자서전
현재 시점의 그녀는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운 채, 오십 년 전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그가 일곱 살 때 유대인은 공원 벤치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빵을 사러 가게에 편히 가지도 못했고 영화관에도 갈 수 없었다. 열한 살 때 고향에서 추방되어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폴란드 크리스티안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갇혀 지냈다. 1945년 초 어머니와 언니와 극적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클뤼거는 인간의 존엄성을 습득하는 대신 멸시와 학대와 굶주림과 갈증에 적응해 살았다.
열두 살 때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있었다. 당시 그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증언할 가치가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인번호 A- 를 팔에 새겨야 했고, 발가벗은 채 죽은 이들이 담긴 트럭이 한 번씩 눈앞에서 지나갔다. 날마다 한참을 서서 점호를 받았다. 신체적 불편함은 끝이 없었고 그래서 지루했다. 어느 순간 열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은 전부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는 순전히 우연히 살아남았다.
저자는 이렇게 (1) 반유대주의적 분위기가 극에 달한 빈에서 보낸 유년 시절, (2) 고향에서 쫓겨나 체코와 폴란드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낸 소녀 시절, (3) 극적으로 탈출해 숨어 살다 독일 바이에른에 당도한 전쟁 말기, (4) 미국 이주 뒤 살아온 젊은 날 등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때 전쟁과 강제수용소의 잔인하고 참담한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현장과 여자아이가 받은 부당한 대우, 유대인 사회의 여성차별 사례 등을 솔직하고 통렬하게 펼쳐놓는다.
이 책은 중요한 기록물로 손꼽히지만 기록적 가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로서 발휘한 언어 감각도 눈부시다. 저자는 국가폭력이 지금과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헤엄치듯 떠밀어내듯 말을 움직여 독자의 상상력을 건드리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분노와 공포를 소화하지 못한) 아이의 시선과 (성장하면서 깊어진) 통찰이 이런 기법에 힘입어 맞물려가면서, 읽어갈수록 더 큰 울림과 더 예리한 사유를 전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을 독일어로 썼다. 열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독일어를 거의 쓰지 않았지만, 이 회고록은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제수용소에 관한 책은 주로 헝가리어, 폴란드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집필되었고, 독일어로 집필된 것은 의외로 드물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심이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가해국의 독자들에게, 귀를 닫지도 장벽을 세우지도 말고, 이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것을 간절하고 단호하게 요청한다.
화해와 용서를 입에 쉽게 올리지 않고
피해자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한 가지 방법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십사 년 뒤인 2016년 1월 27일, 루트 클뤼거는 독일정부의 초청으로 연방의회의 나치 희생자 추념행사 자리에 참석해 기념연설을 진행했다. 이차대전 당시의 나치 강제수용소, 특히 여자 수감자들이 겪은 성적 착취에 대해 담담히 회고한 그는, 오늘날 독일 정부의 난민수용정책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초청에 응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 몇 달 전 메르켈 총리가 독일로 들어오는 난민들을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홀로코스트 광대”라는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의) 자조적 표현에 적극 동조할 정도로 홀로코스트 추모문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였던 그가 추념행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자신의 염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십 년 전 그토록 간절하게 전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닿았다는 안도의 표시였을 수도 있다.
다만 클뤼거의 연설 수락이 곧장 독일인들과의 화해나 그들에 대한 용서로 이어진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룬 단절과 모순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혐오의 조짐들을 놓친다면 그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클뤼거와 오랜 시절 우정을 나눴던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가 반유대주의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낸 2002년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클뤼거는 이때 발저와 관계를 중단한다.)
고집스러운 항의이자 사유를 일깨우는 통찰인 『삶은 계속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과거와 기억을 다루는 문학의 탁월한 방식을 만나고, 그 여정에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홀로코스트 추모문화에 피로를 느끼는 동시대인들과 그 의례적인 문화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관들 틈에서 폭력의 경험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 피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과거를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의 시선으로, 다음에는 여성의 시선으로
무엇보다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쓴 생존자의 자서전
현재 시점의 그녀는 독일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누운 채, 오십 년 전 유년 시절로 돌아간다. 그가 일곱 살 때 유대인은 공원 벤치에 앉는 것이 금지되었다. 빵을 사러 가게에 편히 가지도 못했고 영화관에도 갈 수 없었다. 열한 살 때 고향에서 추방되어 체코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이후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 폴란드 크리스티안슈타트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갇혀 지냈다. 1945년 초 어머니와 언니와 극적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클뤼거는 인간의 존엄성을 습득하는 대신 멸시와 학대와 굶주림과 갈증에 적응해 살았다.
열두 살 때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있었다. 당시 그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증언할 가치가 있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인번호 A- 를 팔에 새겨야 했고, 발가벗은 채 죽은 이들이 담긴 트럭이 한 번씩 눈앞에서 지나갔다. 날마다 한참을 서서 점호를 받았다. 신체적 불편함은 끝이 없었고 그래서 지루했다. 어느 순간 열다섯 살 미만의 아이들은 전부 가스실로 끌려갔다. 그는 순전히 우연히 살아남았다.
저자는 이렇게 (1) 반유대주의적 분위기가 극에 달한 빈에서 보낸 유년 시절, (2) 고향에서 쫓겨나 체코와 폴란드 강제수용소에 갇혀 지낸 소녀 시절, (3) 극적으로 탈출해 숨어 살다 독일 바이에른에 당도한 전쟁 말기, (4) 미국 이주 뒤 살아온 젊은 날 등을 퍼즐을 맞추듯 하나씩 풀어나간다. 이때 전쟁과 강제수용소의 잔인하고 참담한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대신,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현장과 여자아이가 받은 부당한 대우, 유대인 사회의 여성차별 사례 등을 솔직하고 통렬하게 펼쳐놓는다.
이 책은 중요한 기록물로 손꼽히지만 기록적 가치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가로서 발휘한 언어 감각도 눈부시다. 저자는 국가폭력이 지금과 이후 삶에 미치는 영향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헤엄치듯 떠밀어내듯 말을 움직여 독자의 상상력을 건드리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분노와 공포를 소화하지 못한) 아이의 시선과 (성장하면서 깊어진) 통찰이 이런 기법에 힘입어 맞물려가면서, 읽어갈수록 더 큰 울림과 더 예리한 사유를 전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을 독일어로 썼다. 열여섯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독일어를 거의 쓰지 않았지만, 이 회고록은 가해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제수용소에 관한 책은 주로 헝가리어, 폴란드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집필되었고, 독일어로 집필된 것은 의외로 드물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결심이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무엇보다 가해국의 독자들에게, 귀를 닫지도 장벽을 세우지도 말고, 이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것을 간절하고 단호하게 요청한다.
화해와 용서를 입에 쉽게 올리지 않고
피해자의 메시지에 응답하는 한 가지 방법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십사 년 뒤인 2016년 1월 27일, 루트 클뤼거는 독일정부의 초청으로 연방의회의 나치 희생자 추념행사 자리에 참석해 기념연설을 진행했다. 이차대전 당시의 나치 강제수용소, 특히 여자 수감자들이 겪은 성적 착취에 대해 담담히 회고한 그는, 오늘날 독일 정부의 난민수용정책을 놀라운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초청에 응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 몇 달 전 메르켈 총리가 독일로 들어오는 난민들을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홀로코스트 광대”라는 (역시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의) 자조적 표현에 적극 동조할 정도로 홀로코스트 추모문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보였던 그가 추념행사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자신의 염원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십 년 전 그토록 간절하게 전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닿았다는 안도의 표시였을 수도 있다.
다만 클뤼거의 연설 수락이 곧장 독일인들과의 화해나 그들에 대한 용서로 이어진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룬 단절과 모순과 갈등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혐오의 조짐들을 놓친다면 그런 일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클뤼거와 오랜 시절 우정을 나눴던 독일 작가 마르틴 발저가 반유대주의적 시선을 가감 없이 드러낸 2002년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클뤼거는 이때 발저와 관계를 중단한다.)
고집스러운 항의이자 사유를 일깨우는 통찰인 『삶은 계속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과거와 기억을 다루는 문학의 탁월한 방식을 만나고, 그 여정에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더불어 홀로코스트 추모문화에 피로를 느끼는 동시대인들과 그 의례적인 문화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기관들 틈에서 폭력의 경험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 피해 경험을 말한다는 것, 과거를 극복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추천평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소녀의 경이롭고 명철한, 불굴의 고찰. 홀로코스트 재현문화에 물음을 던지는 동시에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짚는, 한없이 감동적이고 더없이 중요한 작품.
- [퍼블리셔스 위클리]
유대인, 여성, 어린아이, 딸, 문학연구가의 정체성을 가로지르며 기록한 탁월한 자서전.
- [북리스트]
숨막힐 듯 솔직하다. 저자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북리뷰]
아슬아슬한 가족관계, 사회적 존재로의 성장, 전후 독일에서의 만남들?이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여성 생존자의 프리즘을 통과해 인간관계, 권력, 역사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이 책은 섬세하고 지혜로운,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품이다.
- [커커스 리뷰]
그 어떤 자서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서전. (기억 속 이름을 불러내는) 시적 감수성과 (거짓 없고 거침없는) 비판의식 속에서 극단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삶은 계속된다』 같은 아우슈비츠 수기는 처음이다. 이토록 간결하고 냉철하고 정직하게 회고하면서도 감정을 켜켜이 드러내고, 타인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써내려간 책은.
- 디 차이트
최근 몇 년간 나온 독일어 책 중 가장 훌륭하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어느 누구도 무심한 눈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각자의 목소리로 이 책에 대답해야 한다.
- 마르틴 발저
- [퍼블리셔스 위클리]
유대인, 여성, 어린아이, 딸, 문학연구가의 정체성을 가로지르며 기록한 탁월한 자서전.
- [북리스트]
숨막힐 듯 솔직하다. 저자의 통찰력이 놀라울 뿐이다.
-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북리뷰]
아슬아슬한 가족관계, 사회적 존재로의 성장, 전후 독일에서의 만남들?이 모든 것이 홀로코스트 여성 생존자의 프리즘을 통과해 인간관계, 권력, 역사의 풍경으로 펼쳐진다. 이 책은 섬세하고 지혜로운, 자서전이라는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품이다.
- [커커스 리뷰]
그 어떤 자서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서전. (기억 속 이름을 불러내는) 시적 감수성과 (거짓 없고 거침없는) 비판의식 속에서 극단의 감정들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삶은 계속된다』 같은 아우슈비츠 수기는 처음이다. 이토록 간결하고 냉철하고 정직하게 회고하면서도 감정을 켜켜이 드러내고, 타인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써내려간 책은.
- 디 차이트
최근 몇 년간 나온 독일어 책 중 가장 훌륭하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어느 누구도 무심한 눈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반드시 각자의 목소리로 이 책에 대답해야 한다.
- 마르틴 발저
'24.폭력연구 (박사전공>책소개) > 6.홀로코스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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