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박사님 2025. 2. 24. 21:37
728x90

책소개
‘개고기 주사’에서 ‘조선공사 삼일’까지
옛사람의 지혜, 애환 그리고 욕망 14마당

‘재미있는 역사’를 위한 색다른 시도

역사는 재미있다. 오죽하면 TV드라마나 문학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역사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품이 줄을 이을까.

한데 많은 이가 학교를 떠나면 역사에서 멀어지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는 암기 위주의 공부가 남긴 후유증 탓이 크지만 역사의 재미, 역사의 쓸모를 제대로 전해주려는 연구자들의 노력이 소홀한 탓도 적지 않다.

이 책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의 관료제를 깊이 파고든 지은이가 속담을 매개로 ‘벼슬’을 둘러싼 옛사람들의 통찰과 애환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목차
· 머리말_벼슬에서 속담으로

01 오해가 끌어낸 벼슬

주사와 주서_개고기주사
대간_고약하다 고약해
한성부_서울 무섭다니까 남태령부터 긴다

02 마땅히 해야 할 역할에 대한 기대

임금_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
벼슬아치_계란유골
양반_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

03 좋은 벼슬을 향안 욕망과 통찰

정승_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
평양감사_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04 백성과 맞닿은 벼슬

수령_원님 덕에 나팔이라
포도청_목수멍이 포도청
차사원_함흥차사

05 모두에게 익숙한 벼슬길

당상관_따놓은 당상
상피_말도 사촌까지 상피를 본다
공사_조선공사삼일

· 꼬리말_조선 벼슬이 남긴 것들


저자 소개 
저 : 이지훈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조선시대사를 전공했다. 

조선 초기 인사고과와 관직 운용을 연구한 〈조선 초기 고과제도考課制度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강사로 일하고 있다. 

사람이 만든 제도와 그 제도에 영향을 받는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궁금한 것이 많다.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 시대 관료제의 역사적 성격과 특징을 ...

책 속으로
이팽수는 김안로의 추천으로 1534년(중종 29) 정7품 승정원 주서注書 관직을 얻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이팽수가 김안로에게 뇌물을 쓴 결과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팽수를 가장주서家獐注書, 즉 ‘집에서 키우는 노루로 주서가 된 사람’이라고 놀렸다. ‘집에서 키우는 노루 [家獐]’는 개고기를 가리켰다.
--- p.14

승정원 주서는 정7품으로 높은 벼슬은 아니었지만…기본적으로 글짓기 능력이 있는 문과 급제자, 그 가운데서도 재능이 뛰어나고 도덕성이 검증된 사람으로 두루 추천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주서를 거치면 다음 벼슬도 좋은 자리에 갈 확률이 높았다.
--- p.15

고약해는 1413년(태종 13)에 발탁된 인물로, 태종 때 정6품 형조 정랑까지 올랐다가 태종의 넷째 아들 성녕대군이 연관된 소송을 잘못 처리하여 파직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용서를 받고 다시 벼슬살이를 이어가 종2품 호조 참판까지 올랐다.

 고약해는 이처럼 높은 벼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세종과 의견이 달라 여러 차례 충돌했다.
--- p.27

세종이 당시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줬다든가, 애민愛民의 마음에서 한글 창제를 했다든가, 백성들의 형벌을 줄여주었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고약해의 이야기는 세종의 리더십, 즉 반대 의견이나 비판도 들어보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쓰인다.
--- p.35

《경국대전》의 경관직 항목에는 한성부뿐만 아니라 개성부도 있었다.…《경국대전》은 개성부가 ‘구도舊都’, 즉 예전 수도를 관리한다고 명시했다.…

개성부는 한성부 바깥에 있었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개성부의 벼슬은 외관직으로 분류하지 않고 경관직으로 분류했다.

 이는 한성부가 경관직 항목에 기재되었다는 사실이 서울을 수도로 해석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p.49

“나라님이 약 없어 죽나”는 목숨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아무리 대단한 나라님이라도 사람인 이상 자기 수명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나라님 망건값도 쓴다”는, 돈이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써버리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속담이다.
--- p.57

맹자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임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언제든 자리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주장을 펼친 맹자는 조선의 문묘에 배향되었다.…맹자의 주장을 조선이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 p.59

계란유골鷄卵有骨. 우리말로 풀면 ‘달걀이 곯았다’ 정도가 되겠다. “늘 일이 잘 안 되는 사람이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났어도 역시 일이 잘 안 됨”을 이르는 말이다.
--- p.64

황희는 청백리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황희를 청백리로 못 박은 기록은 황희가 살았던 당대 기록이 아니라 20세기 기록이다…

황희의 처가 쪽 친척이 국가 재산을 함부로 이용한 혐의가 있었는데, 당시 영의정이던 황희가 이를 변호하여 처벌받지 않도록 한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둘째 아들 황보신이 뇌물을 받은 죄로 처벌받았는데, 황희가 문종에게 부탁하여 사면을 시켜준 일이었다.
--- p.69

계란개골의 주인공은 황희가 아니라 강일용이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실존 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는 고려 사람이었고 학사 벼슬에 있었다.
--- p.75

동반은 붓을 쓰는 문신, 서반은 칼을 쓰는 무신이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임금과 성씨가 같은 남자 친척들, 즉 종친의 경우 칼을 쓰지 않더라도 서쪽에 섰다. 서반 벼슬이 모두 칼을 쓰는 벼슬도 아니었다. 붓을 쓰는 문신 가운데 서반 벼슬을 받아 서쪽에 설 때도 있었다.
--- p.85

양반이 되려면 벼슬이 필요했지만, 벼슬만으로 양반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 공인한 ‘양반 신분증’ 같은 건 없었다. 현직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벼슬 종류에 따라 양반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자신이 스스로 양반이라 주장해서 양반이 될 수도 없었다. 양반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남들에게 널리 인정받아야 하는 계층에 가까웠다.
--- p.87

“양반 두 냥 반”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속담은 양반이 그만큼 흔하고 돈으로 살 수 있는 지위에 불과하다는 조롱의 뜻을 담고 있다. “양반 때리고 볼기 맞는다”, “양반은 가는 곳마다 상이요, 상놈은 가는 데마다 일이라”, “ 양반 못된 것이 장에 가 호령한다” 등 양반의 신분적 우위를 뚜렷하게 드러내는 속담도 있으나 그것이 당연하다거나 마땅하다는 어감은 전혀 없다.
--- p.92

조선 건국 직후 최상위 관청 가운데 하나인 문하부에 설치된 벼슬로 좌정승과 우정 승이 있었다. 

처음에는 시중이라는 이름이었으나 1394년(태조 3)에 정승으로 바뀌었다. 

그 뒤 1400년(정종 2) 문하부가 사라지고 의정부가 만들어졌다. 

이때 정승 대신 의정議政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의정부의 장관은 의정부의 영의정부사, 즉 영의정이 되었다. 그리고 1414년(태종 14)에 판의정부사 두 자리를 각각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바꾸면서, 의정부의 가장 높은 세 벼슬 이름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정리되었다.
--- p.95

처음에는 통정대부 이상 당상관을 영공이라고 높여 부르다가 1592년 전후로 영공은 영감이 되었다. 

그리고 영감 가운데 정2품 이상을 따로 구분하는 대감이라는 말이 생겼다.
--- p.97

벼슬아치들은 당상관으로 불리는 정3품 통정대부및 절충장군에 오르기까지 정해진 근무 기간을 채우고 업무 성과를 쌓아 승진했다.…

규정되어 있는 내용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종9품 장사랑將仕郞부터 통훈대부까지 약 40년 가까이 걸렸다. 

40세 남짓이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한 세대에 걸치는 아득한 시간이었다.
--- p.102

“저는 잘난 백정으로 알고 남은 헌 정승으로 안다”는, 별로 대단치 않은 사람이 거만한 태도로 다른 사람을 만만히 보거나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업신여기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헌 정승만큼도 안 여긴다”는, 여럿이 모여 무엇을 하면서 어떤 이를 무시하고 참여하지 못하게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승을 지낸 사람이라도 현직에서 내려와 권력을 잃으면 주요 논의에 끼워주지 않을 정도로 괄시했다는 뜻이다.
--- p.105

조선 시대 평양은 평양부平壤府였고, 소속한 도는 평안도였다. 

그러므로 평안도 관찰사를 줄여서 다른 말로 쓴다면 평안도 감사 혹은 평안감사 정도가 옳은 표현이다. 

조선의 공식 문서에서 평안도 관찰사를 줄여서 쓸 때 평양감사라고 쓴 적은 없었다.
--- p.109

평양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인구가 1만 명이 넘는 큰 고을이었다. 18세기에는 2만 명이 넘어 도읍 한성과 옛 도읍 개성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고을이었다.…

평양이 다른 고을보다 크게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망이었다. 다른 하나는 평안도에서 거둔 세금을 도읍에 보내지 않고 평안도에서 사용하는, 이른바 잉류仍留 조치였다.
--- p.113

평양감사 역시 그 ‘좋은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지닌 속담도 함께 남아 있다.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가 낫다”는, 그렇게 좋은 자리여도 관찰사 임기는 2년을 넘기지 못하니, 차라리 오래 변하지 않는 소금을 파는 장사치가 낫다는 뜻이다.
--- p.118

조선 시대에 말[馬]을 끌어주는 사람은‘ 거덜’이라고 불렀다. ‘거들먹거리다’와 ‘거덜내다’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거덜이 ‘거들먹거리며’ 어깨를 흔들어대는 모습에서 살림이 흔들린다는 뜻까지 이어졌다.
--- p.128

중종 대(1506~1544) 정식으로 설치한 포도청의 임무는 도적과 수상한 자를 감시하고 체포하는 것이었다.

 도적이 빈번하게 발생할수록 도적을 색출하는 포도청의 기능이 강조되었다.

 포도청은 좌변포도청과 우변포도청으로 나뉘어 한성과그 주변을 순찰했다.
--- p.133

포도청을 담은 다른 속담들도 모두 포도청을 두려운 곳으로 묘사하고 있다.…

“포도청 뒷문에서도 그렇게 싸지 않겠다”, “포도청 문고리도 빼겠다”, “ 도둑이 포도청 간다”,

 “몽둥이 들고 포도청 담에 오른다” 등도 감히 하기 어려운 행동을 포도청과 연결하여 묘사하고 있다.
--- p.138

차사는 한 도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찰사나 한 도의 군사를 담당하는 절제사節制使가 도내 업무를 보거나 중앙에 보고하기 위해 임시로 두는 벼슬아치였다.

 조선에서 차사라는 표현은 관찰사가 수령을 차사로 두고 임무를 부여할 때 가장 많이 쓰였다.
--- p.142

함흥차사는 집안을 다시 일으키고 싶어 했던 박순 후손들의 열망과 숙종의 정치적 필요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인다.…박순이 충민공이라는 시호를 받은 숙종 대에 와서야 집안에서나 알려져 있던 박순의 이야기가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위인전’이 될 수 있었다.

 그저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박순은, 어느새 태조에 대한 충과 태종의 효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인물이 되어 있었다.
--- p.154

당상을 옥관자로 이해하면, 이 속담은 다른 곳에 떼어 두어도 상하거나 변할 일이 없는 옥관자를 가리키게 된다.

 이렇게 보면 옥으로 만든 귀중한 물건을 함부로 ‘잡아뗄’ 리는 없으니 “따놓은 당상”보다 “떼어놓은 당상”이 조금 더 적절한 표현처럼 보인다.
--- p.158

당상을 당상관으로 이해하면, 이 속담에서 당상은 벼슬을 가리키게 된다. …

“따놓은 당상”에서 당상은 ‘붙어 있는 것을 잡아떼는’ 대상보다 ‘점수나 자격 따위를 얻은’ 결과에 가깝다. 

이미 당상이라는 벼슬을 따놓았으니, 그야말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다는 뜻이다.
--- p.158

아홉 번째 서열 정3품 상계上階 통정대부부터 그 이상 관계에 있는 벼슬아치는 모두 당상관이었다. 

그 아래에 열 번째 정3품 하계下階부터 스물네 번째 종6품 하계 선무랑까지 참상관參上官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정7품부터 종9품까지 나머지 여섯 개 관계를 참하관參下官 혹은 참외관參外官으로 분류했다. 참상관과 참하관은 아울러 당하관堂下官이라고 했다.
--- p.162

각 관청의 당상관이 소속 벼슬아치의 업무 성과를 6개월마다 정기적으로 평가하여 상, 중, 하로 점수를 부여했다. 당상관이 되었을 때 할 수 있는 업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평가였다. 

그러므로 벼슬아치는 관청에 나가서 일을 하면 근태 평가로서 사일과 업무 성과 평가로서 포폄 성적 두 가지를 받았다. 

이 두 가지가 일정한 기준에 부합해야 자신의 관계를 올려 당상관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었다.
--- p.165

좌천이 좌천인 까닭은 조선 시대 문서는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읽는 세로쓰기였기 때문이다. 

벼슬아치를 서열대로 기록하면 서열이 가장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은 책의 가장 첫 쪽, 오른쪽 위 귀퉁이에 있게 마련이었다. 

낮은 관직으로 떨어져 서열이 낮아지면 ‘왼쪽으로 옮겨[左遷]’ 적히게 된다. 말 그대로 좌천이었다.
--- p.167

1478년(성종 9) 성종은 자신의 장인 윤호에게 경기도 관찰사 자리를 맡기려고 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반대하고 나섰다.…명분은, 경기도에 윤호와 상피가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다. 

당시 윤호의 동생 윤해와 윤파는 각각 장단 부사와 과천 현감이었다. 

그리고 안성 군수 이영희는 윤호의 사촌동생이었다. 

사헌부는 윤호에게 경기도 관찰사를 맡기면, 이 세 명이 모두 벼슬을 이동 해야 하므로 쓸데없는 낭비가 생긴다고 지적했다.
--- p.171

‘경술국치’를 1년 앞둔 1909년 7월 25일 자 《대한민보》 중앙에 삽화가 하나 실려 있다.

 우리나라 최초 만화이자 시사만 화의 효시로 평가받는 이도영의 그림이었다. 

여기 나오는 ‘임이완용任爾頑傭 자부상피自斧傷皮’는 ‘솜씨가 없는 일꾼에게 도끼질을 맡기니 제 살에 상처를 낸다’는 뜻이다.…

발음만 읽으면 이완용이 자부子婦, 즉 며느리와 상피붙는다는 뜻이 된다. 아들이 유학을 떠난 사이 이완용이 며느리와 간통했다는 이야기는 당시에 꽤 유명했다.
--- p.183

‘조선공사삼일朝鮮公事三日’은 조선에서 시행한 정책이나 법령은 사흘 안에 바뀐다는 뜻으로, 한번 시작한 일이 오래 계속되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비슷한 말로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이 있다.
--- p.184

출판사 리뷰
역사의 뒤안길에서 만난 삶의 지혜

2,400년 전 맹자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자리’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선은 그 맹자를 문묘文廟에 모시고 기렸다.

 지은이는 이를 적시하며 ‘가난은 나라님도 못 구한다’란 속담이, 임금의 권한과 의무와 백성의 소망 그사이 어디쯤에 있다고 보았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란 속담 이야기에서는 평양이 어떻게 한양…개성에 이은 큰 고을로 발전했는지, 평안감사란 ‘벼슬’은 없었다든지 이야기하다가 슬그머니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가 낫다’란 속담으로 끝을 맺는다.

 임기 2년인 관찰사보다 오래 변하지 않는 소금을 파는 장사치가 낫다고 여겼다는 증좌란다.

 요즘 나랏일 하는 나으리들이 새겨들을 만한 가르침이지 싶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서민들의 고달픔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에선 낯선 이야기가 나온다. 

양반은 문신과 무신을 아우르는 말이긴 하지만 ‘벼슬’만으로 양반이 될 수는 없었단다. 또 나라에서 공인한 ‘양반 신분증’은 없었기에 사회적?문화적으로 ‘양반다움’을 인정받아야 양반 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양반 같지 않은 양반에 대한 비아냥이 담긴 ‘양반 두 냥 반’ ‘양반 못된 것이 장에 가 호령한다’는 속담이 생겨났으리라. 

‘원님 덕에 나팔이라’이란 속담 이야기에선 지방 수령 행차 때 말을 끄는 사람을 ‘거덜’이라 불렀으며 여기서 ‘거들먹거리다’와 ‘거덜내다’가 비롯됐다고 들려준다.

 이들이 얼마나 잘난 체하고, 그러다가 살림을 결딴냈는지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엿볼 수 있다.

감투를 얻기 위한 눈물겨운 분투

그래도 백성들은 벼슬이 고팠다. 부귀영화가 약속된 듯 보였다. 

그러니 중종 대 이팽수란 이가 당대의 권세가 김안로에게, 그가 즐기는 개고기를 상납해 승정원 주서란 벼슬을 얻었을까. 비록 ‘개고기주서’란 놀림을 받았지만 ‘주서’는 실력 있고 도덕적인 인재를 위한 자리로 탄탄한 벼슬길이 보장된 자리였으니 그럴 만했다.

 말단에서 오늘날의 장차관인 당상관까지 오르는 데 원칙적으로 약 40년이 걸렸다. 

각 단계에서 6개월마다 고과를 받았는데 다섯 번 중 세 번은 상上을 받아야 승진이 가능했다. 이런 지난한 벼슬살이는 ‘따놓은 당상’ 이야기에 나오는 깨알 정보다.

이것은 역사서인가 속담집인가

이 책은 “주말에는 역사책을 가까이하자”는 취지로 기획된 역사 교양서 시리즈 ‘금요일엔 역사책’의 11번째 책이다. 그리고 여태 나온 시리즈 중 그 취지에 가장 걸맞은 책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

대중가요, 심리학책, 헌재 판결까지 등장시켜가며 우리 곁의 무형 문화유산인 속담과 역사를 알차게 버무려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2671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