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제주4·3의 한가운데서 무장대, 유격대, 폭도, 산사람 등 그 평가만큼이나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태동부터 소멸을 살핀 책이다.
제1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태동’에서는 해방 이후 제주도의 정치 상황을 시작으로 하여 제주4·3의 시발점이 된 3·1발포사건과 총파업, 그리고 이어지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무장봉기 결정 과정을 살핀다.
제2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조직과 운영’에서는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조직체계와 조직개편 과정, 계보 등을 살피고, 이어서 교육 및 훈련, 규율, 환경과 근거지 등을 통해 그 운영 상황을 기술한다.
제3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활동’에서는 시기별 지역별 활동일지를 통해 세부적인 활동 상황과 주요 전투를 담고 있는데, 실제 이런 활동으로 인한 피해 또한 함께 다루고 있다.
저자는 1948년 4월 3일 봉기 직후 호소문의 한 구절인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표제 아래, 조국통일을 꿈꾸던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의미를 다양한 사료를 통해 짚어나간다.
그 속에서 그들의 신념뿐만 아니라 과오 또한 함께 살피고자 했다.
맺음말의 한 구절이 이 책의 의의와 저자의 의지를 잘 전하고 있다.
“이 글은 제주도인민유격대 이야기다.
역사는 그들을 ‘공산폭도’, ‘빨갱이’라 재단하여 죽이고, 깊고 깊은 구렁텅이로 내던져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품었던 꿈마저 묻어둘 수는 없다. 그들은 인간 이하 취급을 받으며 스러졌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들이다. 이기지 못할 싸움인 줄 알면서도 탄압세력의 총부리에 제 가슴을 내밀었던 사람들이다.
조국통일을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사람들이다.
섬의 오름 곳곳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며 도민들의 가슴을 울렸고, 제주도민을 몰살하려는 서청·경찰을 공격하여 도민들의 지지·지원을 받았던 사람들. 5·10 단선 거부에 결연히 나섰던 사람들.
무차별 살상 등의 잘못으로 원망과 미움을 받았던 사람들. 끝내 신념을 버리지 않고 조국통일을 외치며 쓰러져 간 제주도 사람들….”
목차 제1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태동 해방 이후 제주도
1. 귀환인구의 급증, 실직과 생필품 부족 2. 자연재해와 식량난, 미군정의 미곡(米穀) 정책에 반발 3. 관리의 부정부패 4. 미군정의 패착, 친일파 재등용
제주도의 정치 상황과 분위기 1. 해방 후 86일, 짧았던 진짜 해방과 제주도인민위원회 2. 민중의 여론과 민전(民戰) 건국5칙(建國五則) 3. 거리에 울려 퍼진 인민항쟁가
3·1발포사건과 총파업 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3·1절 기념행사 총동원 준비 2. 제주현대사의 분수령, 3·1절 발포 사건 3. 온 도민이 나선 총파업
탄압이면 항쟁이다! 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무장봉기 결정 2. 전 도민이 총칼 앞에 제 가슴을 내밀었다! 3. 봉기의 목적 4.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5.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
제2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조직과 운영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조직
1.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조직체계 2. 유격대의 조직 3. 조직개편 과정 4. 면당(面黨)의 조직체계 5. 병력 및 무기 6. 유격대 와해와 하산명령 7. 제주도인민유격대 지도부(사령관) 계보
제주도인민유격대의 운영 1. 교육 및 훈련 2. 규율 3. 내부 분열 및 숙청 4. 빗개 5. 연락병 6. 열악한 생활환경과 보급 7. 유격대 근거지
제3장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활동 활동일지
1. 무장봉기와 5·10 단선 저지 2. 지하 선거, 남과 북 각각 정부 수립 3. 충돌의 격화, 주민 대량 희생 4. 대토벌과 귀순공작, 유격대의 와해 5. 한국전쟁 발발, 잔여 유격대의 준동과 소멸
유격대의 활동 현황 1. 월별 활동 현황 2. 시기별 활동 현황
주요 활동 1. 경찰지서 및 우익인사 지목 습격 2. 5·10 단선 거부 3. 지하선거와 김달삼 사령관의 월북 4. 인민공화국 지지 5. 주민 구출 작전 6. 선전, 홍보 7. 도로 차단, 통신 방해, 교량 파괴 8. 반미투쟁
유격대에 의한 피해 1. 유격대에 의한 피해 실태 2. 무차별 습격과 살상 사례 3. 개별 사례
4. 유격대의 과오
국방경비대와 제주도인민유격대 1. 4월 3일 봉기와 국방경비대 2. 9연대 침투 세포들의 활동 3. 국방경비대 탈영이 유격대 활동에 미친 영향 4. 박진경 연대장 암살
주요 전투 1. 주요 전투 및 교전 일지 2. 주요 전투
협상(평화회담) 1. 4·28 회담 2. 추가 협상은 없었나?
통일조국을 위하여
저자 소개 저 : 장윤식 제주4·3연구소 이사. 제주4·3평화재단 팀장을 역임했다. 『제주4·3유적 Ⅰ·Ⅱ』, 『한라산총서 3: 한라산의 역사·유적』, 『그늘 속의 4·3』, 『4·3 70년 어둠에서 빛으로』,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보고서 Ⅰ』, 4·3희곡선집 『당신의 눈물을 보여주세요』를 공동 집필했다.
책 속으로 거리에서 인민항쟁가와 적기가가 청년은 물론 어린이들 입에서도 불렸으며 그것을 단속하거나 나무라는 일도 없었다.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나라, 모두가 부자 가난 없이 잘 사는 나라, 남녀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해방통일, 자주독립된 나라’가 곧 들어설 줄 알았다.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와 함께 민중들의 꿈은 부풀어 올랐다. 기대와 희망이 충만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3의 분기점이 되었던 1947년 3·1절 발포사건이 발생했다. --- p.41
잡히면 죽음이었다. 섬은 긴장이고 갈등이고 폭발 직전의 아우성이었다.
제주도민은 무자비한 탄압정책과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 필요했다.
‘앉아서 죽느냐, 일어서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절박한 상황에 맞닥뜨렸다.
은신처가 필요했고 입산자가 늘었다.
이렇듯 극심한 폭력과 탄압은 4·3봉기의 강력한 배경이 되었고 ‘제주도인민유격대’가 예비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 p.65
봉기일을 결정하고 행동에 나선 유격대는 4월 3일 경찰지서와 서청 숙소 등을 집중 공격하며 탄압에 대한 저항의지를 분명히 하였고, 이후 5·10단선 저지를 위해 선거업무에 협조하는 우익단체원, 선거관리위원을 공격했다.
또한 선거 관련 서류를 탈취하기 위해 면사무소, 마을의 선거관리소를 습격하는가 하면, 일부 마을에서는 선거를 피해 주민들을 입산하게 하는 등 선거방해 활동을 적극 시행했다.
결국 5월 26일 딘 군정장관이 제주도의 2개 선거구(북제주군 갑·을)의 투표 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제주도는 5·10단선을 거부한 유일한 지역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 p.214
유격대의 기나긴 침묵은 한국전쟁 발발 1개월이 지난 7월 25일 하원리 습격으로 깨졌다.
이때부터 어느 정도 전열을 재정비한 상태의 조직적 활동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토벌대의 적극적인 진압작전과 귀순공작이 이어지며 끝내 소멸의 길에 접어들었다. --- p.249
살상행위는 결국 일반 대중에게 ‘폭동’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했고 유격대를 ‘폭도’라 통칭하는 데 작용했다.
도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잃게 했으며, 도민 간의 갈등이 심화되며 결국 지역공동체의 균열을 가져오게 하는 데 일조했다.
‘산사람’(유격대, 인민군)과 ‘폭도’(공비)의 경계가 되고 말았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동원된 수단이 잘못되었다. 잘못은 비판받아야 한다. --- p.328
대정면 가파리의 20세 청년 이창하는 결혼식을 3일 앞둔 1948년 음력 10월 26일 가파도에 토벌하러 온 군인에게 체포되어 심문받던 중 “제 나라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무엇이 죄가 되느냐!”며 항의하다 처형됐다.
한림면 여성동맹위원장 오매춘은 “오늘 승리해지카부댄 허는 것이 아니고,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라도, 나라가 분단된 때에 그래도 조국 통일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자손들에게 남기기 위해 싸우고 있수다!”라는 말을 남기고 총살당했다.
제주도인민유격대 이덕구 사령관이 봉개동 견월악 속칭 ‘북받친밧’에서 경찰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1949년 6월 7일, 그날의 유격대 암호는 ‘조국’ 하면 ‘통일’이었다. --- p.366
출판사 리뷰 작가의 말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역사 속에 실재했으나 섣불리 다가서지 않으려는 대상이 되었고,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수없이 비틀어지고 비하되고 업신여김당해 왔다.
그렇게 우리 앞에서 사라져간 제주도인민유격대는 여전히 ‘역적의 무리’, ‘폭도’, ‘죽어 마땅한 빨갱이’로 방치되고 있다. 4·3 전 기간을 통해 드러났던 그들의 행위들, 특히 저항의 언어들은 금기의 영역이었으며 거기에 가담하거나 관여했다고 수많은 제주도민이 희생됐다. 누명을 쓴 채 죽기도 했다.
삐라 살포, 도로 차단, 숙청, 남로당, 세포, 민애청, 공산당, 부녀동맹, 3·1대회,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총파업, 통일독립! 미국은 물러가라!
봉화, 습격, 5·10선거 거부, 벽보, 백지날인, 왓샤, 빗개(보초), 연락, 보급투쟁, 교전, 인민공화국 만세! 등등, 모두 죽음의 언어였다.
4·3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탄식 같은 말이 있다.
“나 고치 몰맹헌 것들만 살아남고 쓸 만하고 요망지고 똑똑한 사람들 다 죽었어.
” 이렇듯 당시 제주도 인재라는 인재 대부분이 죽었다. 왜 그들은 총칼 앞에 가슴을 내밀었는가?
그들은 당연히 죽어야 했던 사람들인가? 그들의 함성은, 깃발은, 봉화는 무의미한 것인가?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한라산으로 올랐을까? 무엇을 위하여 총과 죽창을 들고 거대한 세력에 맞섰고, 무엇 때문에 목숨까지 내걸었을까?
또 그들은 왜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제주도인민유격대의 태동과 활동, 그리고 과오 등 전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