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중앙에 근정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궁성

광화문(光化門)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으나 , 세종 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과 용과 거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2021년부터 월대 복원을 발굴 공사가 진행중이다

건춘문(建春門)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춘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영추문(迎秋門)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1865년에 준공되었던 원래 영추문은 1926년에 전차 진동으로 인해 석축이 무너지고 얼마 뒤 철거된다.
1975년에 원 위치가 아닌 북쪽으로 50m 이전한 자리에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었다.

신무문(神武門)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하고 마주하고 있다.
외조 / 정전 권역

흥례문(興禮門)
흥례문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1867년에 중건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가,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에 완공했다.
영제교(永濟橋)
영제교는 근정문 앞을 흐르는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정전 안이 지엄하고 신성한 곳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전의 외당 앞에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물위로 다리를 설치한 것이다.
북악산에서 흘러들어온 물과 서쪽에서 들어온 물이 합쳐져 근정문 앞을 지나는 금천을 이루는데 영제교는 바로 이 금천에 설치한 다리이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이치로 지어진 다리이다.
영제교의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 가량으로 비교적 넓으며 3칸으로 나뉘어 있는데 중앙이 3.4m, 그리고 양쪽이 각각 3.2m씩이다. 이 가운데가 바로 어도(御道, 왕의 길)로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다리 발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돌난대를 떠받치게 하였으며 난간 전후 법도에는 4마리의 서수가 강바닥을 뚫어져라 감시하고 있다.
광화문 밖의 서수가 뿔이 보이지 않는 데 반해 영천교의 이 서수들은 뿔이 보이고 있는데 정전의 앞이기에 더욱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듯하다.
기별청(奇別廳)
기별청은 근정문에 이르기 전 서쪽에 있는 작은 건물로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관보의 성격을 띠는 기별지를 발행하는 곳이었다.
매일 아침에 각 관청의 기별서리들은 기별청에서 승정원에서 적어온 기별지를 베껴서 가지고 돌아갔다. 지방의 경우에는 기별군사라는 전령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기별지에는 다양한 소식이 실렸는데 주로 임금이 받은 상소문과 그에 대한 답, 조정의 인사 내용, 과거 시험의 날짜 등이 적혀있었다.

근정문(勤政門)
근정문은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로 되어 있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정문과 행각은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좌우의 행각이 회랑으로 변형된 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일이 없는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대신 관리들이 궁에 출입할 때는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이용하였는데, 음양으로 볼 때 태양을 뜻하는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그리고 달을 뜻하는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통하여 출입하였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과 정문(正門)인 광화문(光化門),中間門(중간문)인 흥례문(興禮門)을 잇는 문이다.

근정전(勤政殿)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
현재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조선 물산공진회때 용상이 훼손되었으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근정전 해체공사 때 복원되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마련하여 구름무늬를 그리고,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만들어 달았으며, 건물 내부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본래 건물 안에는 의장 기물이 가득 장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편전 권역

사정전(思政殿)
사정전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
“ 그 사정전(思政殿)에 대해서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법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써 높은 자리에 계시오나, 만인(萬人)의 백성은 슬기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불초(不肖)함이 섞여 있고, 만사(萬事)의 번다함은 옳고 그르고 이롭고 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이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이 된 이는 누구나 높고 영광되고자 아니하고 위태롭고 악하고자 하였겠습니까마는, 옳지 못한 사람을 가까이 해서 계책이 옳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패(禍敗)에 이르게 된 것이니, 진실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옵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어찌 너를 생각지 않으랴마는 집이 멀다.’ 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생각함이 없는 것이다.
왜 멀다고 하리오.’ 하였고,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 했으니, 생각이란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그 쓰임이 지극한 것입니다.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하면, 조칙(詔勅)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하옵기를 청합니다. ”
—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천추전(千秋殿)
천추전은 왕의 소편전(小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였다.
때문에, 온돌이 없는 사정전과는 달리 천추전에는 온돌이 설치되어있다.
만춘천과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중건되면서 격리된 형태로 변했다.

만춘전(萬春殿)
만춘전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천추전과 좌우대칭을 이루며, 주로 봄에 사용된 건물이였다.
천추전과 마찬가지로 온돌이 설치되어있다.
다만, 천추전과 달리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
세종 때 만춘전에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궐내각사 권역

수정전(修政殿)
수정전은 돌로 높고 넓게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세운 것으로, 원래 이 자리엔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었다.
1456년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집현전을 폐지하였고,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버려져 있었다.
1867년(고종 4년)에 건물을 다시 짓고 이름을 수정전이라 하였다.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으로 추정되는 이 전물은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로 사용되었고 이후 내각의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은 지금은 홀로 남아 있지만 둘레에는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들이 200칸 가까이 있었고 주변에는 나랏일을 돌보던 여러 관청이 있었다.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 문서 등을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였던 옥당과 역대 왕들이 쓴 글과 옥새를 보관하고 서적의 수집과 출판을 담당한 검서청 등이 있었고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에 이르기까지 즐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이 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세워져 있다.
내전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도 내전에 있는데 대왕대비, 즉 왕의 할머니의 거처이다.
침전 권역

강녕전(康寧殿)
강녕전은 왕이 거처하던 곳인만큼 화재가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썼는데, 굴뚝을 건물 가까이에 지을 수 없고 그렇다고 멀리 떨어진 곳에 굴뚝을 지을 수도 없었기에 강녕전 뒷편의 교태전으로 가는 양의문 좌우에 굴뚝을 붙여 지었다.
연산군, 인종, 영조 등이 거처한 곳이다.
주로 근정전에서 업무를 보고 이곳에서 자기도했다.
본래 강녕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희정당이 되었고, 현재의 강녕전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 강녕전(康寧殿)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오복(五福) 중에 셋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란 것은 오복 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을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마음을 바루고 덕을 닦는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보는 곳에 있는 것이며, 역시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는 너무 안일(安逸)한 데에 지나쳐, 경계하는 마음이 번번이 게으른 데에 이를 것입니다.
마음이 바르지 못한 바가 있고 덕이 닦이지 못한 바가 있으면, 황극이 세워지지 않고 오복이 이지러질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 너의 벗한 군자를 보니 너의 얼굴을 부드럽게 한다.
잘못이 있어도 멀리 하지 아니하고 너의 방에 함께 있으니, 방 한구석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
라고 했습니다. 무공의 경계하고 근신함이 이러하므로 90을 넘어 장수했으니, 그 황극을 세우고 오복을 누린 것의 밝은 징험이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무공의 시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의 복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하리이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
— 정도전, 《삼봉집》기09 경복궁,
또는 《태조실록》태조 3년 10월 7일
연생전(延生殿)
연생전은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 및 복도각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경성전(慶成殿)
경성전은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 및 복도각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연길당(延吉堂)
연길당은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 및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응지당(膺祉堂)
응지당은 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 및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교태전(交泰殿)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인 중궁전으로, 강녕전에서 양의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정면 9칸 규모의 건물이다.
교태란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으로 주역에 있는 괘 이름이다.
건물 뒷편에는 정원인 아미산이 있는데 아미산을 볼 수 있도록 후면 동쪽에 마루와 방으로 연결된 건순각을 배치하였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폐비 윤씨가 거처하였고 연산군이 태어난 곳이며, 폐비 신씨, 단경왕후, 인성왕후, 정순왕후, 철인왕후 등이 거처하였다.
왕비는 통상 좌측방을 이용하다가 임금께서 오시면 우측방에 함께 합방하였다.
그 이유는 오른쪽은 양, 즉 임금을 상징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본래 교태전 건물은 1918년 창덕궁으로 옮겨 지어 대조전이 되었고, 현재의 교태전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한 것이나 굴뚝은 고종 당시 경복궁 중건 때의 것이다.
아미산 굴뚝
아미산(峨嵋山)
아미산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돋운 작은 가산(假山)이지만,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온 맥이 북한산, 북악을 지나 경복궁에서 멈춘 장소이다.
아미산에는 괴석의 석분(石盆)과 석지(石池) 등 석조물이 배치되었는데, 이 가운데 보물 811호인 아미산 굴뚝이 있다.
아미산 굴뚝은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온돌방과 연결된 굴뚝으로, 1865년(고종 2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든 것이다.
현재는 4개가 남아있는데 화강석 지대석 위에 벽돌로 30단 혹은 31단으로 쌓고,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덩굴,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벽돌로 구워 배열하였고 벽돌 사이에는 회를 발라 면을 구성하였다.
십장생, 사군자와 장수 부귀 등 길상의 무늬 및 화마 악귀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도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윗부분은 조형적으로 목조 건물의 형태를 모방하였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도록 점토를 빚어서 만든 집 모양의 장식을 설치하였다.
굴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 각종 문양의 형태와 구성이 매우 아름다워 궁궐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다.

흠경각(欽敬閣)
흠경각은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년)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 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함원전(咸元殿)
함원전은 교태전 서쪽에 자리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년)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소주방(燒廚房)
동궁의 북측과 자경전의 남측 사이에 있으며, 궁궐 내 음식물을 보관·조리·제공하는 식생활 공간으로, 수라상을 비롯해 왕실 잔칫상 등을 만드는 궁중 요리원이다.
대전(大殿)의 음식을 만들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재건 시 다시 지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조선 물산 공진회가 개최되면서 여러 전각들과 함께 헐려 없어졌다가 2015년 2월 16일 복원했다.
연침 권역


자경전(慈慶殿) 및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809호인 자경전은 왕비의 정침(正寢)인 경복궁 교태전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이 세상을 떠나면 교태전에 있던 왕비는 대비로 높여져 정침인 교태전을 새로 중전이 된 왕비에게 물려주게 되는데, 이때 대비가 교태전에서 옮겨와 주로 머물던 곳이 자경전이다.
현존하는 침전 가운데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로, 현재의 자경전은 조대비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 2년(1865년)에 지은 뒤 불에 탄 것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한 것이다.
전면 마당 동ㆍ남ㆍ서쪽에는 각각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이 일곽을 이루며 마당을 둘러싸고 있다.
자경전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자경전의 담장은 벽돌로 모양을 내어 꾸몄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던 건물인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들과 소나무, 국화, 거북 등, 연꽃, 대나무, 모란 등의 대왕대비의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만(卍)의 경우 글자의 모양을 계속 그려나가면 끝이 없으므로 영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거북 등 그림의 경우 장수하는 동물 중 하나가 거북이므로 역시 대왕대비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경전 후정 담의 중앙부에는 자경전 십장생(十長生) 굴뚝이 있다.
이 굴뚝은 담보다 한단 앞으로 나와 장대석 기단을 놓고 그위에 전돌로 쌓아 담에 덧붙어있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 및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따로 만들어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으로 만들고 십장생 무늬로 장식하였다.

흥복전(興福殿)
흥복전은 경복궁의 대비전중 하나로 창의궁(영어판)의 함일재를 옮겨왔다고 전해진다.
중건 후 왕의 공식적인 업무 및 행사를 보는 곳으로 쓰인다. 이후 신정왕후가 1890년(고종 27년)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이후 고종의 명에 따라 북행각이 경운궁 확장 자재로 쓰이고, 일제강점기 시절인 1917년 창덕궁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한 내전 재건에 자재로 쓰이기 위해 본채 자체가 헐려 사라졌다가 2010년대에 복원하지만 흥복전의 (북, 서)행각은 복원되지 않았다.
궁궐 복원 중 처음으로 내부를 현대식으로 배치하였다.

집경당(緝敬堂)과 함화당(咸和堂)
집경당과 함화당은 1860년대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다.
그러다 1890년대에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춘희당과 보광당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 집경당과 함화당이다.
일제강점기 때 동궁터에 지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운영하면서 사무실로 쓰기 위해 헐지 않고 남아 있었으나 전각 주변의 행각과 문을 헐렸다.
이후 2000년대 후반에 행각 복원을 하여 오늘에 이른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여기서 외국 사신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경회루 일대

경회루와 연못 경회루(慶會樓)
경회루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
지금의 경회루는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1867년에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가 되는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
태종은 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 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 대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
미복원 전각
인지당
자미당
통화당
만경전
만경전(萬慶殿)은 대왕대비의 침전인 경복궁 자경전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졌다.
대비전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내전 권역 화재에도 무사했기 때문에 한동안 고종이 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 곳에서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를 열기도 했다.
북궐도형이 작성되던 1907년 당시엔 만경전 주위 행각들이 표시되어 있으나 1916년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지도엔 본채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복도각과 행각들이 전부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사라진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하기 위해 훼철되었고, 본 건물은 현재 창덕궁 경훈각이 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2031년 ~ 2042년에 걸쳐 진행할 "궁중의례권역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만경전 영역의 행각과 복도각을 짓기로 하였다.
만화당
만화당(萬和堂)은 대비전인 경복궁 만경전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고종 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7년에 고종의 지시로 경운궁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북궐도형에선 지금은 없는 전각으로 표시되어 있다.
경운궁으로 옮겨진 만화당은 정침인 함녕전으로 불리게 된다. 원 만화당 전각은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당시 소실되었고 이후 재건된 함녕전은 이전과는 약간 다른 모습으로 재건된다.
건청궁 권역
건청궁은 1873년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지어졌다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을미왜변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됐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건청궁 복원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 및 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돼 있다.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
2007년 복원 이후 목재가 썩는 등의 현상이 보였고, 조사 결과 지붕이 잘못지어져 누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다.

장안당(長安堂)
장안당은 고종황제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 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유물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침대 등 궁중생활용품 3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60]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복수당(福綏堂)
복수당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관문각(觀文閣)
관문각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건물 관문당이었다.
그러다 1891년에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개축되었다.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로, 2층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문각은 양관이라 불리며 주로 외국인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다만 공사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와 부실 공사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결국 부실공사로 1901년 헐리게 되면서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알려지지 않아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건청궁 복원 사업이 진행될 때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터만 복원되었다.
1992년 1월 관문각의 존재가 사진첩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쪽에서 건널 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이를 허물고 일본풍으로 나무 적심 위에 간이다리를 새로 놓는다.
이 다리는 이후 6.25 전쟁때 파괴되었다가 1953년에 관람 편의를 위하여 본래의 자리가 아닌 향원정 남쪽에 다시 세워졌었다.
그 뒤 2017년부터 약 4년에 걸친 향원정 보수공사 때 원래의 위치인 북쪽에 아치형 목교로 다시 지었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 가도록 되어 있다.

집옥재(集玉齋)
집옥재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빈전•혼전 권역

태원전(泰元殿)
태원전은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으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화상)이 봉안됐던 곳이자, 명성황후의 빈전(殯殿)으로도 활용되었다.
빈전은 빈소의 높임말로,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렀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어, 그 자리에 일본군과 미군 뿐만 아니라, 청와대가 바로 뒤인 관계로 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해 있었다.
현재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고종 때 태원전의 건축 이유는 왕의 적통이 아니라 입양된 고종이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의 서북쪽 일대는 빈전(殯殿)이나 혼전(魂殿), 영전(靈殿) 같은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빈전은 왕실에 돌아가신 분이 있을 때 관을 모셔두는 곳이고 혼전은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이며, 영전은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태원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다.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이곳은 궁 안 외진 곳이어서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는 일이 많았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다가 지금 옛 모습대로 건물이 복원되었다.
건물은 제사 지내는 집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미복원 전각
문경전
회안전
동궁 권역
동궁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공간이며,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대(1427년)에 와서 창건된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의 장자 단종과 연산군의 장자 이황이 태어났으며, 덕종, 세자 시절의 연산군, 연산군의 세자 이황, 인종, 순회세자, 효장세자 등이 거처하였다.
또한 고종 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이 복원되었고, 2023년에 계조당 영역이 복원되었다.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빈이 살았다.
일제시대 당시, 건물 전체가 일본에 건너가 이왕가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년에 반환받아 현재 건청궁 옆으로 옮겨두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계조당(繼照堂)
계조당은 여러 행사 때 왕세자가 축하를 받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고 한 때 빈 터로 남아있었으나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023년에 복원되었다.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1915년 자선당과 함께 철거되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선원전 권역 / 미복원
선원전
선원전(璿源殿)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었다.
선원전은 고종 대 경복궁 중건 당시 세워졌으며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직후 경복궁의 소유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면서, 일제는 선원전 주변의 부속 건물과 행각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1931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를 장충단에 지으면서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사용했다.
건물은 광복 직후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을 선원전 영역에 지으면서 이 일대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안당 등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지었다.
이 공사로 인해 당시까지 남아있던 선원전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문화재청은 2031년 ~ 2042년에 걸쳐 진행할 "궁중의례권역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철거하고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짓기로 하였다.
경안당
경복궁관리소
북원
2022년 8월 말 문화재청은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를 시작해 (사)한국건축역사학회 등에 용역하여 2022년 8월 25일부터 12월 23일까지 조사하였다.
경무대 권역
융문당
융무당
옥련정 권역
오운각
옥련정
경농재 권역
문화재청의 후원 기초조사를 통해 경농재 권역의 위치는 청와대 경호실 A동 북쪽 건물 상부와 영빈관 건물 가장자리 쪽에 지희실, 관풍루, 경농재, 대유헌 등 건축물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타
영결식
1974년에는 육영수 여사, 1979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2006년에는 최규하 전 대통령, 2009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흥례문 & 광화문 사이의 공간에서 열렸다
전면개방
2018년 12월 이전까지 경복궁으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남쪽의 광화문, 북쪽의 신무문, 동쪽의 국립민속박물관 출입문 등 총 세 곳이었다.
2018년 12월, 경복궁과 서촌 지역 방문 관람객의 편의를 높이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추가로 서문 영추문을 43년 만에 개방하면서 경복궁의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출입이 가능해졌다.
야간개장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2010년 11월 9일에 처음으로 야간 개장이 실시되었다.
이후 정례화되어 연 2회 실시되었으나, 입장객의 제한없이 개방하자 하룻밤에 4만여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특히, 술판을 벌이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일부 관람객들의 태도때문에 논란이 크게 일며, 문화재청이 대책없이 성급하게 추진했다고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다.
2014년부터는 하루 최대 관람 인원을 1500명으로 제한하고, 월 2회 총 48일간 실시된다.
2021년 4월부터 진행된 2021년 상반기 경복궁 야간 관람은 하루 최대 관람 인원을 2000명(사전 예매 1700명, 현장 발권 300명)으로 제한하였다.
정기휴관
경복궁은 다른 궁하고는 달리 화요일에 정기휴관을 실시한다.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된 까닭
경복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가 무산된 사유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에 의한 소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전각들의 원형이 크게 훼손되는 바람에, 현재 남아 있는 유산이 세계유산 등재 기준에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등재되지 못한 사유
건축적 가치 부족 : 조선 후기부터 전해진 우리만의 궁궐 건축기법이나 독특한 양식이 사라지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등재할 만한 독창적 가치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높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심각한 원형 훼손 : 임진왜란(1592~98) 당시 광화문(光化門), 근정전(勤政殿), 경회루(慶會樓) 등 주요 건물들이 불에 타버리는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전란으로 인한 재정난이 겹치는 바람에 이후 고종 4년(1867년) 이전까지 2세기(270여 년) 넘게 복원되지 못한 채 폐허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주요 건물들은 복원에 성공하긴 했지만, 일제강점기(1910~45) 당시 주요 전각들이 철거된 것은 물론, 일제에 의해 철거된 광화문 앞 월대 자리에 노면전차 선로가 깔린데다, 설상가상으로 1926년에 조선총독부(1995년에 철거) 건물까지 세워지는 등의 수난을 당하는 바람에 역사적 가치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현재 복원된 건물은 일부에 불과).
기능적 활용 미흡 : 현재 경복궁은 박물관 등 문화재적 가치 정도만 인정될 뿐, 왕실 기능이나 역사적 실사용이 사실상 끊긴 상태다.
창덕궁 · 종묘하고의 차이점
창덕궁 : 건물들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원 등 독특한 궁궐 구조로 등재 기준을 인정받았다.
종묘 :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서 오랜 기간 기능적으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요약하면, 경복궁은 심각한 "원형 훼손", "건축 관련 창의성 부족"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탓에 문화유산 등재가 취소되었으며, 창덕궁하고 종묘는 보존 상태가 우수하고 높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재 기준을 충족했다.
사진























교통
● 수도권 전철 3호선 - 경복궁역
● 수도권 전철 5호선 - 광화문역
Sources Wikipedia

'03.우리문화유산 [웹북] <문화재> > 1.조선 5대궁궐'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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