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요약)/1.고대.삼국.신라

왕검성(王儉城) (2025) - 황하 이북을 다스린 고조선의 수도

동방박사님 2025. 12. 8.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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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전국시대 황하 이북에서 광활하게 사용된 명도전 분포지가 고조선 영토임을 최초로 증명하다! 황하 이북 문명은 황하 이남의 화하족 문명과 다른 문명으로, 북방 홍산 문명을 이은 고조선 세력의 활동 영역이었다. 

이들의 일파인 상(商, 殷)나라는 황하 이남까지 진출하여 황하 문명을 일으킨 뒤, 기원전 11세기 중원 세력(주나라)에 밀려 현재의 하북성 중부 북경(北京) 일대로 이주하여 토착 세력과 연합한다(장가원상층 문화). 이렇게 고조선은 북방 문명과 황하 문명을 흡수한 국가로서, 그 중심지 왕검성은 하북성 중부 북경시, 보정시 일대였다.


목차
발간사
서문

Ⅰ. 고조선을 찾아서
1. 고조선 위치와 한국 문명
2. 왕검성을 찾는 방법

Ⅱ. 원전(原典)을 벗어난 기존 학설들
1. 고조선 중심이 한반도가 될 수 없는 이유
2. 고조선 중심이 요녕이나 하북성 동북이 될 수 없는 이유

Ⅲ. 황하에 있었던 고조선 국경 갈석산(碣石山)
1. 중국과 한국의 갈석(碣石) 위치 주장
(1) 중국의 갈석(碣石) 위치 주장
(2) 한국의 갈석(碣石) 위치 주장
2. 갈석산 관련 제설(諸說)의 문제점
(1) 평양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 설(說)
(2)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현 인근 갈석산 설(說)
(3) 하북성 보정시 내원현 백석산 설(說)
(4)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 고성구(藁城區) 무차산(無此山) 설(說)
(5) 산동성 빈주시(濱州市) 무체현(無縣) 설(說)
(6) 하남성 형양시(滎陽市) 광무산(廣武山) 설(說)의 타당성 검토

Ⅳ. 하북성 내륙에 있었던 발해(渤海)
1. 내륙해 발해(渤海)에 관한 기록들
2. 현재보다 12m 낮았던 중원 땅
3. 한무제가 설치하려 했던 창해군은 하북성 남부 고발해(古渤海)

Ⅴ. 산서성에 있었던 만리장성과 요동(遼東)
1. 만리장성 서쪽 끝은 바다, 동쪽 끝은 산서성 요동(요수)
(1) 동쪽이 아닌 서남쪽 바다에 이른 장성
(2) 요동(遼東)의 기준인 요(遼: 요주遼州)의 위치
(3) 후한(後漢) 시기 중산(中山) 지역에 있던 장성과 연(燕)의 위치
2. ‘요수(遼水)?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구체적 위치
(1) 동쪽으로 곧게 흐르던 요수(遼水)
(2) 요동(遼東)은 하북성 남부 장하(河) 인근
(3) 요서(遼西)는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동남

Ⅵ. 하북성 석가장시에 있었던 패수(浿水)
1. 낙랑군의 이주와 패수
2. 패수 관련 기록 분석

Ⅶ. 황하 이남에서 산서성으로 이주한 연(燕)나라
1. 문헌에 등장하는 연(燕)의 위치
2. 연(燕)의 시기별 위치 분석
3. 연(燕)이 공격한 조선 서부는 기자조선=중산=동호=오환
4. 연(燕)이 차지한 조선 서방(동호, 중산)의 위치

Ⅷ. 고조선과 왕검성(王儉城) 중심지 하북성
1. 상(은)나라 북쪽에 있던 고조선과 예맥계 국가들
2. 상족(商族)이 이주한 조선 위치 추정
3. 왕검성(왕험성)과 관련된 초기 기록과 왕검성 비정의 전제 조건
(1) 왕험성이 있던 창려(昌黎)와 관련된 기록
(2) 왕검성(왕험성)과 관련된 기록
(3) 왕험성(왕검성) 비정의 전제 조건 정리
4.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기록과 고조선 위치 비정

Ⅸ. 고조선 중심지(1) - 북경 유리하 유적(서주연도 유적)
1. 유리하 유적(琉璃河遺蹟, 서주西周燕都遺蹟) 개황(槪況)
2. 유리하 유적을 서주(西周)의 연나라 도성(燕都)으로 비정한 문제점 - 문명문 분석
(1) 연(燕) 소공(召公)의 봉지(封地)는 북경이 아닌 황하 이남
(2) 극뢰(克 ) 명문(銘文) 해석 문제
(3) 언( )을 연(燕)과 동일시 한 문제
(4) 한(漢)과 다른 고조선 고유 문자의 존재
(5) 필자의 반론 정리
3. 유리하 유적을 서주(西周)의 연나라 도성(燕都)으로 비정한 문제점 - 고고학적 분석
(1) 북경은 북방 빗살무늬(승문繩紋, 지자문之字紋) 도기(陶器) 문화권
(2) 북경은 서주(西周) 문화와 구분되는 토착 문화(張家園上層文化) 지역
(3) 서주(西周) 초기 북경 지역 민족 분석
4. ‘주나라 초 연나라가 북경에 있었다는 주장(주초연국북경설周初燕國北京說)’ 재고의 필요성

Ⅹ. 고조선 중심지(2) - 보정시 연하도 유적
1. 연하도 유적(燕下都遺蹟) 개황(槪況)
2. 전국시대 연나라 도성(戰國 燕都) 비정의 문제점
(1) 명도전(明刀錢) 분석
(2) 동검(銅劍)과 동모(銅) 분석
XI. 유리하 유적과 연하도 유적의 왕검성 가능성 검토
1. 상(商) 서주(西周) 시기 화북 지역 중심지 북경 유리하(琉璃河) 유적지
2. 전국시대 화북 지역 중심지 보정시 연하도 유적지

XII. 맺음말

XIII. 부록
1. 기존 학설과 본 책의 관점(차이점) 정리
2. 진(秦) 한(漢) 시기 형세도(본 책 내용 기반)

저자 소개
저 : 이기훈 (李基勳) 
저자는 중국어 전공자로서 고대 한자인 갑골문을 연구하던 중 중국 최초의 공인 왕조인 3,000년 전 상(은)나라의 문자(갑골문)가 뜻밖에도 중국보다 한국과 문화적으로 긴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 논문을 북경어언대학교(北京語言大學校)에 제출하여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나아가 3,000년 전 고대 황하 문명이 왜 한국 문화와 유사한지를 밝히기 위해 인하대학교 대학원 융합고고학과에서 연구를 ...

줄거리
고조선(위만조선)이 망한 뒤 세워진 낙랑군, 낙랑군(고조선) 유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건국된 진한과 신라, 신라를 이은 고려, 고려를 이은 이씨조선의 역사적 부침에 따른 강역 변동 과정에 대해 그동안 고찰 역시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전 왕조들의 강역을 살펴왔기 때문인데, 이러한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조선 강역을 찾는 한계는 고조선 영토를 고려의 강역 중심으로 추정하는 관습에서 줄곧 벗어나지 못한 사실에 기인한다.(제1장)

1920년대 이후 대부분 학자들이 ‘확고하게’ 받아들인 ‘낙랑군 평양설’에는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다. 

첫째는 평양 지역에서 낙랑 시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 이전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는 문헌 기록상 낙랑이 동시대에 ‘국가(國)’와 ‘군(郡)’ 형태로 각각 다른 지역에 존재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는 점이다.(제2장)

고조선 국경에 있던 갈석산이 중원 내륙의 황하(河) 또는 황하가 산서성 남부 기주(冀州)에 이르러 넓게 퍼지는 구하(九河)의 시작점에 있다는 기록(至於碣石疏九河)을 근거로 한다면, 이 하남성 황하 남안의 광무산(廣武山) 이외의 다른 지역은 갈석산으로 보기 어렵다.(제3장)

한나라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건넜던 고대 발해가 내륙에 있었음은 발해의 위치가 하북성 남부였음을 증명하는 많은 고대 문헌 기록들과, 발해가 현재의 바다와 달리 홍수로 인해 자주 범람했던 사실, 10미터 이상의 퇴적층이 한(漢) 이후 수천 년 동안 그 지역을 채운 사실, 그 지역이 움푹 파여 있고 현재까지도 염류 피해를 입고 있는 사실, 그 지역에서 고대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사실 등을 통해 추론할 수 있다.(제4장)

만리장성의 동쪽 끝 요동(遼東)의 기준이 되는 요주(遼州)는 현재 장성이 있는 발해만 북쪽 산해관 인근이나 현재의 요녕성 요하 인근이 아니라, 

고대부터 1912년까지 현 산서성 진중시 좌권현 인근에 있었다. 

따라서, 그곳이 『사기』에 기록된 장성의 끝인 요동(遼東)일 가능성이 높다.(제5장)

전국시대 중원 황하유역에서 사용되던 포전(布錢)과 구분되어 고발해(하북성 남부) 북쪽에서 사용되던 북방계 화폐인 명도전의 출토지 하한선이 석가장시임을 감안할 때,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 패수(浿水)는 현 하북성 서남 석가장시 인근에 있는 호타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제6장)

연나라 동쪽 끝에 있었던 요양(遼陽)의 위치를 살펴보면, 『위서』에 진군9년(448) 요양을 파하고 설치한 향현에 무향성(武?城)과 유사성(?社城)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요양은 현 산서성에 있는 진중시 유사현(?社縣)과 장치시 최북단의 무향현(武?縣) 인근, 즉, 고대 요하로 추정되는 산서성 남부 장하의 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제7장)

조선이 도끼(越, ??)의 모양으로 중국의 북방 호(胡)의 땅에 있었다면, 조선이 거하던 바다(海中)는 중원 황하 유역에 있던 고대 발해이며, 이 발해 건너 북쪽에 조선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즉, 황하 이북(古中國 이북) 태항산맥 동쪽에 조선이 있었던 것이다.(제8장)

북경시 유리하 유적, 보정시 역현 연하도 유적, 보정시 만성구 만성한묘 유적은 모두 전한(前漢) 무제가 고조선을 물리치기 전(BC 108년)까지 고발해(古渤海)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중국 정권이 아닌 고조선 정권에 속한 지역으로 볼 수 있다.(제9장)

‘연국(燕國) 북경설’은 주 무왕이 상나라(은나라) 중심지였던 하남성 안양시(安陽市) 인근을 정복한 뒤 북쪽으로 공격한 기록이 없고, 문헌 자료나 유물 분석을 통해서도 근거를 찾기 어려우나 현재 중국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지고 있다.(제10장)

북방 고조선 화폐 명도전이 주(主)가 되어 사용되고, 황하 유역 화폐인 포전(포폐)이 보조화폐로 사용되던 보정시 역현 연하도(燕下都) 유적지는 기록(위만의 조선 찬탈)과 유물의 성격, 규모의 방대함을 볼 때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성으로 비정하는데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제11장)

출판사 리뷰
이 책은 갈석산, 발해, 만리장성, 요동, 요수, 패수, 연(燕) 등 고조선 국경에 있던 주요 지표들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고조선의 중심지가 하북성 중부(보정시, 북경시 일대)에 위치했었다는 사실을 문헌 및 고고학적 자료로 논증하였다. 

이를 통해 필자는 이 지역의 중국 전국시대 최대 규모의 도성 유적인 북경 남쪽의 보정시 연하도 유적을 고조선 후기 위만조선의 수도 왕검성으로 비정하였다.

『양서』에 신라인은 그 선조가 진한(辰韓) 사람으로서,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유가 진한에서 1만 리 떨어진 진시황의 진(秦) 사람들이 노역을 피해 이주해 왔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고대인들이 재난을 만났을 때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상당히 먼 곳까지 이주했던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신라의 후손임을 인정한다면, 3세기 신라(진한)인이 고조선 후국(後國)인 낙랑 사람들을 ‘자신들의 잔여인(樂浪人本其殘餘人)’이라고 밝혔던 정사 『삼국지』의 기록을 주의 깊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기록대로라면 낙랑(고조선) 사람들이 대부분 진한(신라)에 이주해 왔다고 해석되는데, 비록 당시 낙랑(고조선) 사람 모두가 북경 일대로 추정되는 낙랑(고조선)에서 진한(신라)으로 이주해 왔다고는 볼 수는 없겠지만, 낙랑(고조선)의 주체 세력이 진한(신라)으로 대거 이주했다는 사실은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뿐 아니라 고조선(낙랑)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현 하북성 북부 지역(보정시, 북경시 일대) 역시 한국인의 기원지 중 한 곳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학계의 편견 없는 고찰이 요구된다.

현재 아시아대륙 서쪽 끝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튀르키예(터키)는 고구려와 전략적 협력관계에 있던 중앙아시아 돌궐국의 역사를 자신들 정체성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여 연구 중이다. 

실제로 튀르키예(터키)는 민족적으로 기원전 2000년 경에 중앙아시아 동남부에서 기원한 훈족(혹은 돌궐족)으로서 서기 10세기 내지 11세기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한국의 풍습과 언어면에서 근본적으로 비슷한 면이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고대 약 30개의 민족이 거주했던 ‘아나톨리아 영토사’를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한 자신들의 ‘민족사’와 구분하고 있다.

필자가 고조선 후기 중심지로 밝힌 하북성 중부 지역을 포함한 화북 지역(황하 이북)은 고대에 한반도인과 같은 민족이 살았으나 약 1,200년 전인 8세기 당(唐)나라 시기 이후로 한국인과 다른 민족으로 대체되면서 서로 유전적으로 달라진다. 

따라서 한국인 역시 튀르키예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중국 영토에 있지만 과거 다른 민족에 비해 같은 혈연과 문화를 공유한 선조들이 살았던 화북 지역(황하 이북)의 역사와 문화에 관해 더 많은 고찰과 포용적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한국인의 문화적, 정신적 정체성의 흐름을 밝히는 ‘한국 문명사(민족 정체성 역사)’와 한반도 영토 내에서 이루어졌던 ‘한반도 역사(한반도 영토 내 역사)’를 이원화하여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과장이나 폄하가 아닌, 미래 주변국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줄이는 객관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될 것이며, 이 책은 그러한 의미 있는 여정의 첫발을 떼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7713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