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한국근대사 연구 (독서기록)/1.한국근대사

친일파의 굴욕 친일이라는 이름 뒤의 ‘수모’와 ‘불안’, 그들은 과연 호의호식만 했을까

동방박사님 2025. 12. 8. 22:13
728x90

책소개
친일파들은 과연 마음이 편했을까?
한없는 부를 축적하고 권세를 누리며 떵떵거리기만 했을까?

친일파들이 겪은 수모와 치욕,
작지만 위대한 민중의 반격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대사’를 다시 읽는다!

-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은 22살 독립투사 이재명의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고, 집도 불탔다
- 을사오적 권중현은 총에 맞아 죽을 뻔했고, 아우에게 의절당했다
- 을사오적 이근택은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지만 겨우 살아났다
-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던 조희연은 빚더미에 올라 귀족 작위를 박탈당했다
- 친일내각 총리를 지낸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 3.1만세 시위를 비웃던 최병혁은 관사에서 대한독립단원의 총에 맞아 즉사했다

목차
서문 - 당한 역사만 있는가, 일격을 가한 역사도 있다

제1장 동학혁명과 그 이후

01. 조선 왕실의 관료,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우다
- 을미사변과 고종 폐위에 관여하고 12년 동안 일본 망명 생활을 한 구연수
02. 왕의 포박령, 빚더미, 그리고 잃어버린 작위
- 일본으로 도주한 ‘중전 살해 4인방’ 조희연의 굴곡진 친일 행적
03. 친일 총리, 길거리에서 맞아죽다
- 영화의 한 장면처럼 쓰러진 김홍집
04. 오적암살단의 육혈포가 불을 뿜었지만…
- 일제에 오래오래 충성했지만 아우에게 의절당한 권중현
05. 두 번의 암살 시도, 그러나 그의 명줄은 길었다
- 몸종과 취객에게까지 봉변당하고 암살 시도에 벌벌 떨었던 을사오적 이근택
06. 새를 잡았으니 활은 꺼져라?
-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이바지한 ‘친일 2관왕’ 고영희의 굴욕

제2장 3 · 1운동과 그 이후

07. 광란의 총질, 만세 시위 군중 53명을 살상하다
- 3 · 1 운동 단 하루의 악독한 행위로 영원히 ‘친일파’로 박제된 강병일
08.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죽인다!”
- 만세 시위를 비웃다가 대한독립단에 의해 총살된 최병혁
09. 안중근과 한용운도 속인 더러운 가면의 사나이
- 독립운동가 행세하다 밀정임이 들통나 세상의 이목을 피한 엄인섭
10. 신일본주의 외치다 제국호텔에서 칼에 찔리다
- ‘무늬만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의로운 칼에 고꾸라진 민원식
11. 칼에 찔리고, 집은 불타고, 손자와 며느리는 사기를 치다
- 살아생전 독립투사들의 표적이 되고, 죽어서도 망신당한 이완용
12. ‘감자’와 ‘고구마’ 사이, 순수문학에서 황국문학으로
- 황군위문단을 자청했다 퇴짜 맞은 김동인
13. 1919년의 ‘민족대표’, 1944년에는 ‘친일대표’가 되다
- 교계 쿠데타를 만난 정춘수

제3장 해방과 그 이후

14. 일왕의 항복 방송에 눈물이 방울방울
- 일제 패망 시에도 일본을 위해 동분서주하다 공개 면박을 당한 김대우
15. 건준으로 갈아탄 친일파, 한여름밤의 꿈을 꾸다
- 해방 다음 날 총독부 기관지를 접수하려다 실패한 양재하
16. 명태 100마리 선물했지만 소련군 포로 신세가 되다
- 정보원에게 뒤통수 맞고 부하들 손에 암살당한 친일 군인 김창룡
17. ‘이상하게도’ 일제의 육군 중장이 된 한국인의 최후
- 일본의 군대에서 출세했으나 일제에게 버림받고 처형된 홍사익
18. 친일파들이여, 한민당으로 어서들 오시오!
- 해방 후 새로운 친일 세상을 구축하다 독립투사들의 총에 쓰러진 장덕수
19. 100년 전 K-무용의 전설, 일왕을 위해 춤을 추다
- 남에서 친일하고 북에서 숙청당한 최승희

제4장 반민특위와 그 이후

20. 생선 한 마리로 시작한 친일, 군함과 비행기로 덩치를 키우다
- 죽을 죄를 지었다며 머리 조아린 문명기
21. 카프문학의 기수, 황국문학으로 투항하다
- 세종문화회관 별관 앞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김기진
22. 어느 친일 판사의 행방불명
- 일제에 부역하고도 반민특위는 피했지만 납북을 당한 강동진의 최후
23. 4 · 19 때 ‘모국’으로 쫓겨난 친일 판사
- 3 · 15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국회의원 제명된 장경근

에필로그 - 친일 문제는 어찌보면 승리의 역사다
참고문헌 및 참고자료


저자 소개
저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방문학자로 활동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문화유산채널](구 [헤리티지채널])의 자문위원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

문화유산채널]에 명사 칼럼을, 「민족 21」과 웅진씽크빅의 「생각쟁이」에 역사 기고문을 연재했으며, 「오마이뉴스」에 [김종성의 ...

책 속으로
국권침탈 얼마 뒤부터 그는 불어나는 채무를 감당하지 못해고, 재산까지 압류당하는 지경에 빠졌다.

 그래서 전 황제인 순종이 이 때문에 특별 하사금 2,500원을 내려주기까지 했다. 

조희연은 순종을 황제 자리에서 내쫓는 데 기여했다. 

그런 인물이 염치없게도 순종의 돈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2,500원이라는 큰돈도 언 발에 오줌누기였는지, 조희연의 재정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결국 귀족 작위도 잃었다. 

『친일인명사전』은 “계속되는 채무로 재산을 탕진해 작위 유지가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는 체면 유지를 위해 작위를 반납하도록 종용”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죽기 두 달 전에 남작 작위를 반납했다. 

일본 귀족의 체면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빚더미에 올라앉은 결과였다.

 형식상으로는 작위 ‘반납’이지만 사실상 작위 ‘박탈’이었다. 

그것은 일본의 독촉을 받은 결과였다. 

금전적 이유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충성을 바친 일본의 압력을 받고 작위를 빼앗긴 것은 친일파인 그의 입장에서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 「조희연」 중에서

고종은 김홍집 등을 해임하면서 포박령도 내렸다. 

이로 인해 그야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극적인 장면들이 연출됐다. 

왕명에 따라 순검이 그를 체포했지만, 그를 관아로 끌고 가지는 못했다. 

관아로 가는 도중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검에 의해 끌려가는 그를 도중에 가로챈 이들이 있었다. 거리의 민중들이었다.

양력으로 고종 33년 2월 11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김홍집은 “민중에 의해 살해됐다.

” 송치 도중에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던 것이다.

파멸은 김홍집 한 사람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김홍집 내각 자체가 동일한 운명에 처해졌다.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역시 길거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권영진 · 유길준 · 이진호· 우범선 · 장박 · 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달아났다.

친일 내각 전체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그 정도로 무섭게 표출됐던 것이다.
--- p.51~52

외교권을 팔아넘기고도 뻔뻔하게 행동하는 권중현을 세상 사람들은 곱게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세상은 그에게 생명 위협과 더불어 굴욕감을 안겨줬다. 

『친일파 99인』은 1907년에 지금의 서울 인사동에서 을사오적 암살단이 벌인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양복을 차려 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은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싼 채 지나가고 있었다.

 이홍래가 용기 있게 앞을 가로막고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협대(夾袋)에 간직한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권중현의 하인들이 일제히 이홍래를 붙잡았다. 

그러자 동지 강원상이 육혈포를 꺼내 권중현을 행해 쏘았으나, 권중현은 급히 피하여 길가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 「권중현」 중에서

기산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이근택 암살 작전에 착수했다. 

1906년 2월 17일 새벽 1시가 넘은 시각, 기산도는 동지 두 명과 함께 이근택의 집에 침입했다. 

그는 촛불 빛이 새어나오는 이근택의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이근택의 첩도 있었다. 

기산도를 포함한 세 명의 항일투사는 이근택을 마구 찔렀다.

 이근택은 온힘을 다해 촛불을 껐다.

 깜깜해진 이 상황에서도 항일투사들은 계속해서 이근택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그 집을 호위하던 최소 10인 이상의 병력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날이 이근택의 제삿날이 됐을 것이다.
--- 「이근택」 중에서

망언 1년 반 뒤인 1920년 8월 15일 밤 11시 무렵이었다.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은율군수 관사 앞에 나타났다.

 단원 이지표가 담장을 뛰어넘어 방안으로 침입한 뒤 군수 최병혁의 오른쪽 가슴에 권총을 겨눴다.

 이지표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죽인다.

”라고 선고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권총이 불을 뿜었고, 총알은 최병혁의 오른쪽 가슴에 명중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독립운동 만세 시위대를 공개적으로 모독한 일이 1년 반 뒤에 비참한 최후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독립운동 진영은 최병혁을 처단함으로써 ‘친일의 대가는 이런 것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세상에 던졌다.
--- 「최병혁」 중에서

이완용은 서울 여의도 면적의 1.9배나 되는 부동산을 보유했다. 

1910년 당시 재산은 지금 기준으로 약 200억 원이었다. 

사망 1년 전인 1925년에는 최소 600억 원이 됐다. 

그 시절에 이완용은 ‘경성 최대의 현금 부자’로 통했다. 

민족 반역으로 돈을 벌어들인 말 그대로 ‘매국노’였던 것이다. 

이런 삶은 세상의 증오를 받는 원인이 됐다. 을사늑약 때는 그의 집이 불탔다. 

이때 그가 이근택 등과 함께 서울 남산 진고개의 ‘일본인 타운’으로 피신했다고 앞에서 말했다. 

이때 화를 입은 것은 이완용의 집뿐만이 아니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조상들의 신주가 모두 불타버렸다. 

당시에 조상의 신주가 불타는 것은 집이 불타는 것보다 훨씬 막중한 일이었고, 실제로 이완용도 신주가 불타버린 것에 대해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친일로 인해 이완용이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이완용의 친일은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라 죽을 뻔한 지경으로도 그를 내몰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지 2개월이 조금 안 되는 1909년 12월 22일, 51세의 이완용은 22세 청년 이재명의 기습을 받았다.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 이완용이 거기에 간 것은 벨기에왕 레오폴 2세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남의 추도식에 갔다가 그 자신이 죽을 뻔했던 것이다.
--- 「이완용」 중에서

출판사 리뷰
고구마’ 근현대사는 그만! 속이 뻥 뚫리는 ‘사이다’ 근현대사가 온다!

‘친일파’. 태어난 지 100년도 넘은 이 단어는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편하다.

 정확한 학술적 개념까지도 필요 없이, 상식적으로 친일파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대중을 피 빨아먹고 살았던 부역자들’을 통틀어 부르는 말인데, 그들은 친일 매국 행위를 하면서 일말의 불안이나 걱정도 없이 그저 호의호식만 했을까? 

과연 민중은 순순히 굴종하고, 친일파들의 막가파식 매국 행위를 손 놓고 지켜보기만 했을까?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 『친일파의 굴욕』은 친일파 23명의 ‘친일 연대기’와 더불어 그들이 민중과 일제로부터 당했던 ‘굴욕’과 ‘수모’를 사료와 신문기사, 증언과 회고록 등을 토대로 알려주면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근현대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우리 역사에는 친일파들을 직접 처단함으로써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만방에 알리고자 했던 이들도 많았고,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여 목숨까지 잃거나 고통을 당한 이들도 많았다. 

친일파들은 크고 작은 공격을 받아 불안에 떨었으며, 사병들과 일본군들의 호위 속에서야 길을 다닐 수 있었고, 형제로부터 의절당하거나 심지어 집에서 부리던 몸종에게 욕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책에서 ‘친일파’의 행적 위주로 역사를 배운다. 『

친일파의 굴욕』은 역사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지만, 친일파들이 수많은 민중의 증오와 공격의 대상 또한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들, 작지만 위대한 수많은 민중이 반격한 역사도 많았음을 알려준다.

친일내각 총리는 길거리에서 맞아 죽었고, 을사오적은 칼에 찔리고 집이 불탔다

예를 들어 친일 내각의 총리였던 김홍집의 최후는 처참했다. 

고종은 김홍집 등을 해임하면서 포박령도 내렸다. 왕명에 따라 순검이 그를 체포했지만, 끌려가는 그를 민중들이 가로챘고,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성난 민중들에게 맞아 죽었다. 

김홍집 내각의 농상공부대신이었던 정병하 역시 맞아 죽었다. 

또 다른 친일 내각 각료와 을미사변 관련자들은 일본으로 달아나서 10년 이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조희연은 친일로 벌어들인 돈을 모두 탕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고, 결국 남작 작위까지 박탈당했다. 

이용 가치가 없어지자 일제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박제순)에 대해서는 민중들이 어떻게 반격했을까? ‘

매국의 아이콘’ 이완용은 22살의 청년 독립투사 이재명의 칼에 찔려 폐가 상하는 치명상을 입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이완용의 뻔뻔한 매국 행위에 성난 민중들은 그의 집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그때 집이 타서 재산상의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조상들의 신주까지 몽땅 타버렸다.

 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절인지라 이완용은 집이 탄 것보다 신주가 타버린 것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근택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항상 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출퇴근을 했다. 

그러나 독립투사 기산도 의사 일행은 이근택의 집으로 침입하여 그를 칼로 찔렀고, 중상을 입은 이근택은 병원에서 여러 날 입원 치료를 받고 겨우 살아났다. 

권중현 역시 생명의 위협과 더불어 굴욕을 당했다. 

권중현은 서울 인사동에서 일군본과 순사 대여섯 명의 호위 속에 길을 가다가 암살단의 습격을 받았다. 

을사늑약 이후에 결성된 ‘을사오적 암살단’은 인사동에서 인력거를 타고 가던 권중현을 가로막고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육혈포를 쏘았으나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혼비백산한 권중현은 근처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숨었다.

 권중현은 두 살 아래의 아우로부터도 의절당했다. 아우는 형제의 연을 끊고 산중에 은거해버렸다.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일어난 3.1만세 시위를 진압하려 출동한 헌병보조원 강병일은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53명을 살상했지만, 분노한 시위 군중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의로운 분노는 현장에서 그를 응징해버렸던 것이다. 

3.1만세 시위를 비웃는 망언을 했던 황해도 은율군수 최병혁은 망언 1년 반 뒤에 군수 관사에 나타난 대한독립단 단원들이 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이

때 단원들은 친일파인 그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명확히 고지했다. 

최병혁의 오른쪽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죽인다.

”라고 선고한 뒤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독립운동 진영은 최병혁을 처단함으로써 ‘친일의 대가는 이런 것이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세상에 던졌다.

100년 전 이야기로 되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친일파의 굴욕』은 1894년, 1919년, 1945년, 1949년을 기준으로 우리 민족과 그들 사이에 벌어진 항쟁을 정리하면서, 각 시기별로 친일파 몇 명을 골라내 그들의 친일 행위와 그들이 민중과 일제에게 당한 굴욕과 수모를 살펴보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지은이가 〈서문〉에서 말한 ‘당한 역사만 있는가, 일격을 가한 역사도 있다’는 『친일파의 굴욕』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기도 하다.

“을사년, 정미년, 경술년은 친일파들이 제국주의와 합세해 한국인들을 괴롭힌 연도다. 

이런 연도들은 우리 머릿속에 잘 각인된 반면, 한민족이 그들에게 타격을 가한 연도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격을 가한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있었다.

 아니, 많았다. 그런 타격이 특히 심대했던 연도들도 있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여러 해 있었다. 

그런데도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중략) 

이 책은 을사년, 정미년, 경술년처럼 친일파들이 승리한 연도를 분기점으로 친일의 역사를 정리하지 않는다.

 이 책은 친일 진영과 일제를 응징하고 무릎을 꿇린 네 개의 연도를 중심으로 친일의 역사를 서술하고자 한다.

 네 개의 연도는 1894년, 1919년, 1945년, 1949년이다. 

그해에 우리 민족은 강력한 에너지를 모아 제국주의 및 친일파에 당당히 맞섰거나 그들을 무너뜨렸다.”

『친일파의 굴욕』은 100년 전 친일파들 이야기다.

책에 등장하는 친일파들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일제에 빌붙어 오욕의 삶을 살던 이들도,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분투하던 독립투사들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이제 와서 100년 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기서 다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명언을 생각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하고 그것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작지만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도 모두 우리 세대의 책무다.

역사 앞에 죄를 지은 자에 대한 민중이 내린 단죄는 흔히 말하는 ‘사적 복수’가 아니라 분노를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로 권중현을 총으로 응징하는 데 실패한 나철 등은 자수하면서 서면을 제출했다. 

이번 일의 책임이 정부의 간신배들에게 있다는 내용이었다. 당당히 자수한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굴욕』은 100년 전 친일파의 뒤틀린 초상과 어떻게든 그들의 죄과를 묻고, 응징하려 목숨 걸고 싸웠던 ‘작지만 위대한 민중’들의 행적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날카롭게 되묻는 역사책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5104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