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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56년 1월 30일, 이승만 정부의 정보기관장이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길에 암살되었다.
현직 육군 대령이 지휘한 암살단의 배후에는 현직 제2군사령관(중장)에 이어 육군 참모총장까지 있었다.
이 사건은 건국 이후 국가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진 최대의 정치·군사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사건의 실체는 충분히 규명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에게 김창룡은 ‘독재정권의 비밀경찰’, ‘고문과 조작의 상징’, ‘김구 암살의 배후’로 기억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는 과연 사실에 입각한 것인가.
『김창룡의 재조명』은 대한민국 건국과 호국의 격동기 속에서 사실상의 국가 정보기관장 김창룡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왜 그는 도중에 흉탄에 쓰러졌는지를 새롭게 추적한 연구서이다.
이 책은 김창룡 암살사건 재판기록, 군 자료, 당시 언론, 회고록과 증언 등을 종합 분석하여 사건의 실상을 복원하는 한편, 김창룡이라는 인물이 사후 어떻게 대한민국 현대사의 ‘악인’으로 재구성되었는지도 함께 추적한다.
아울러 이 책은 건국 초기 한국 정치가 왜 파동과 투쟁으로 점철되었는지도 구명한다.
이 책은 제목 ‘김창룡의 재조명’에 머물지 않고 그가 몸담았던 이승만 시대의 정치에 대한 전면적 재해석도 시도한다.
목차
발간사
머리말
제1부 김창룡 사건의 진실과 왜곡
1 1956년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2 6·25전쟁 후 육군 특무부대 팽창과 작전계통과의 충돌
3 한국 현대사의 악인이 된 김창룡
보론 김창룡 장군 유족의 KBS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청구 사건 판결
4 대한민국 건국기 군 정보수사기구의 조직과 활동
제2부 한국 정치의 원형
5 대한민국 초창기 정치사의 재해석
제3부 나의 아버지 김창룡
6 아버지의 아리아
7 오래 기다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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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이영훈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85).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1977~1982).
한신대학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를 거쳐 2002년 이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7년에 정년을 하였다.
경제사학회, 한국고문서학회, 한국제도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이승만학당의 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
저 : 주익종
서울대에서 일제하 한국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현재 이승만학당 이사로서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교육 업무를 하고 있다.
저서로『대군의 척후』(푸른역사, 2008)와 『고도성장 시대를 열다』(공저, 해남, 2017),『반일 종족주의』1·2권(공저, 미래사, 2019~2020),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이승만북스, 2023) 등의 저서가 있다.
저 : 정안기
교토(京都)대학에서 일본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학술진흥재단(JSPS) 특별연구원,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을 거쳐 현재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 한국연구재단(NRF) 인문사회학술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조선, 일본, 만주를 넘나들며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충성과 반역』(조갑제닷컴, 2020), 공저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미래사, 2020), 『...
책 속으로
(김창룡 암살 사건의 진상) 1956년 1월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의 본질은 군 고위층의 비리를 파헤치던 김창룡과, 그 수사망에 포착된 정일권 파벌 사이의 정면충돌이었다.
김창룡이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에 대한 수사 내용을 이승만에게 직보하려 들자, 정일권 파벌은 대대적 숙군에 따른 공멸 위기를 직감했다.
이에 정일권은 허태영의 약점과 자신의 권력을 활용해 암살을 기획·유도하고, 사건 이후에도 허위 보고, 수사 정보 유출, 도피자금 제공 등 사후 수습에 개입했다.
실행은 허태영 일당의 몫이었으나, 그 배후에는 비리 폭로를 두려워한 정일권 파벌의 조직적 암살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 요컨대, 김창룡은 정일권 파벌과 부패와의 전쟁에서 희생당한 순국자였다
--- p.77
(암살의 배후 정일권, 강문봉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은 이유) 이승만은 정일권 기소에 따른 함경도 파벌의 연공합작 쿠데타 등 군부 파열과 급변 사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강문봉의 감형과 정일권의 불기소라는 소프트 랜딩soft-landing으로 사건을 갈무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군 내부의 동요와 파열을 저지하고 사건을 조속히 수습하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 p.80
(이승만 대통령의 군 관리와 김창룡 암살) 6·25전쟁을 겪으면서 군부가 가장 영향력이 큰 사회집단으로 성장하고 대통령의 통치권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자 이승만은 군내 파벌을 조성해서 서로 경쟁시키고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유도하는 통치술을 구사했다.
백선엽파, 정일권파, 이형근파 등 3개 군벌이 군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벌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군내부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이승만은 특무부대를 활용해서 그러한 정보를 수집, 통치권 행사에 활용했다....
김창룡 특무부대장의 개인적 캐릭터와 함께 그에게 그러한 권한을 부여해준 법률적·제도적 요인이 중첩되어 특무대의 기능이 팽창하고, 그 결과 군의 지휘권이 작전권한과 정보권한으로 이원화되면서 결국 두 권한이 충돌하여 김창룡 특무부대장이 암살되는 사건을 낳았다.
국가최고통치권자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정보를 범정부 차원에서 종합하여 보고하고, 부문정보기관을 통합·조정하는 권한을 가진 별도의 국가정보기관이 없었던 당시의 국가정보구조적 결함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 p.133
(김창룡 악인화는 국가 서사의 변화 때문) 세계 냉전체제 속에서 반공 투쟁을 통해 건국된 자유국이라는 국가 서사가 지배적이던 1950년대에는 김창룡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몸을 바친 모범적 군인이었다...
그는 이 나라 타공사打共史에 찬연히 빛나는 공훈을 세운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1960~70년대에 국가 서사에 변화가 왔다.
박정희는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난 이승만 정권을 비하했으며 이승만을 격하하고 김구를 상찬하였다.
국가 서사에서 반공주의에 민족주의가 더해졌다.
이와 함께 역사학계에서 민족주의가 강화되었는데, 그에 수반하여 1970년대 말부터 반공국가의 정당성을 문제삼는 분단체제론, 친일미청산론이 등장하였고 이는 1980년대에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였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에서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국토와 국민을 폭력으로 두 동강내고 통일을 염원하는 수많은 국민과 지사들을 탄압한 일대 해악害惡으로 서술된다...
민중민족주의 역사학은 처음엔, 좌익 폭동의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되었다는 국가폭력 서사를 만들고 그에 기반해 희생자 추모 및 명예회복운동을 벌였다.
이것이 4·3 특별법 등으로 공식적 지위를 얻자 이 역사학은 더 나아가 타공 투쟁 자체를 국가폭력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과거 제주4·3폭동, 여순반란으로 불리던 것이 교과서에서는 제주4·3사건, 여수순천10·19사건이라 쓰이고,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4·3항쟁, 여순항쟁으로까지 불린다...
국가에 대한 반역이 부당한 지배체제에 대한 항쟁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이렇게 국가 서사가 바뀌자, 타공 투쟁의 대표 전사요 공훈자이던 김창룡은 ‘고문-조작의 기술자’를 거쳐서 친일-반민족-냉전 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김창룡이 오늘날 한국 현대사의 일대 악인, 빌런이 된 것은 새로 밝혀진 그의 행적 때문이 아니라, 국가 서사에서 냉전 정당성보다 민족 정당성이 우선시되고 자유민주주의보다 통일민족국가가 더 중시되는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 p.182~184
(KBS 사자명예훼손 소송) KBS가 허위 사실로 사자(死者) 김창룡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유족의 소송은 1심부터 3심 대법원에서까지 모두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드라마 제작진이 김창룡을 김구 암살 배후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제작진에게 사실 여부의 검증 책임을 면책하였다.
이 판결은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를 사실상 방치한 것이다
--- 「현성삼, 제3장 보론」 중에서
(이승만 정부의 특무대에 대한 평가) 이승만이 설치한 한국군 방첩대, 그리고 후속의 육군 특무부대는 이념적 투쟁과 혼란의 시기에 국가 유지에 필수적인 방첩 활동을 하였다.
방첩대와 후속 육군 특무부대는 남로당의 남한 내 조직과 북로당이 파견한 간첩 등에 의한 사회혼란, 폭동, 반란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부에 보고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그것들에 대응하는 방안을 갖출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기구는 부패 등에 대하여서도 이를 미연에 방지하거나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따라서 건국기의 군 정보수사기구는 당시의 국가안보와 사회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 p.251~252
(당쟁하는 마음으로 작성된 제헌헌법) 신익희가 헌법기초위원회에 이승만도 내각제에 찬성했다고 전한 것은 그의 의도적인 와전임이 분명하다.
당시 이승만은 누구보다 강력한 영향력의 지도자였으며, 그를 배제하고선 새로운 나라의 성립을 선포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달리 말해 이승만은 새로운 나라의 정부형태에 관해 누구보다 강력한 발언권을 보유하였다.
그런 사람의 입장을 듣지 않고 신익희 등이 사사롭게 헌법 초안을 작성하고 국회의 심의에 부친 것 자체가 졸속일 뿐 아니라 당파적이었다....(283쪽)
1948년 이 나라의 헌법 제정에 참여한 법률가나 정치인 대다수는 ...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각종 권리와 특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이 국회가 통제할 수 없는 전제정치로 변질할 위험성을 방지하는 데만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은 장차 대통령으로 선출될 이승만과 대립해 온 정치세력의 당쟁하는 마음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배경에서 1948년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4년 임기에 1차 중임이라는 대통령 임기 규정이 이후 두고두고 이어질 정변의 불씨로 헌법에 심어졌다
--- p.291
(이승만은 독재자였나) 김성수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탄하였을 때 그 독재는 문자 그대로 인사나 국정을 홀로 재단한다는 뜻이었다.
그러한 지도자의 행태는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금기시한 바였다.
매사에 원만하고 중용을 취하는 김성수의 성품은 부지불식간에 도덕정치의 원리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수준의 독재와 그로 인해 발생한 실정에 책임을 지지 않은 것을 두고 근대 정치사에서 때때로 출현하여 국민의 자유 제권을 억압하고, 법의 지배를 부정하거나 의회권력을 해산하거나 정적을 수용하거나 살해하는, 그 전형을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에서 확인하는 이념 내지 계급의 독재와 같은 것으로 감각하는 것만큼 커다란 범주 착오도 없을 것이다.
김성수가 선창한 이승만 독재론은 전통시대의 도덕정치가 비판한 문자 그대로의 독재에, 관점을 달리하면 대통령제의 충실한 실현에 다름이 아니었다
--- p.314~315
출판사 리뷰
김창룡은 누구인가?
1916년 함남 영흥 출생. 만주의 일본군 헌병대에서 공산주의자 수사의 실무를 익혔고, 1946년 월남 후 대한민국 육군에 투신하였다.
해방후 남한에서 공산 세력은 미국 후원 하의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남북 공산 세력은 국회와 사법부 내 첩자 침투, 군대의 반란, 무장유격대 파견으로 신생 국가의 내부 전복을 기도하였다.
이때 김창룡은 미군정의 CIC를 모델로 형성된 한국군 정보수사기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군 내외 공산주의 세력 색출에 앞장섰다.
그는 대한민국 국가 수호와 안보 역량 구축의 핵심 공신이었다.
그는 1951년 육군 특무부대장에 취임한 뒤, 1956년 1월 암살당할 때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부 최고의 정보기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대공 수사는 집요하고 철저했다.
그는 혐의만으로 서둘러 체포하지 않았으며, 확실한 증거가 포착될 때까지 몇 달이고 잠복과 미행을 거듭하였다.
유족과 부하들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청렴하고 강직한 군인이었다.
계절별 두 벌의 군복이 그가 가진 외출복의 전부였고, 5년 가까이 정보기관장직에 있었지만 부정하게 남긴 재산은 한 푼도 없었다.
신상필벌에 엄격하여 부하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사적으로는 자애로운 상관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의 식당 구분을 없앴으며, 일상 대화에선 하급자에게도 경어를 썼다.
일이 바쁘면 사무실 야전침대에서 군복을 입은 채 잠들곤 했다는 부하들의 증언도 남아 있다.
하지만 1956년 1월, 김창룡은 일단의 군부 인사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이 아니라, 특무부대의 군 비리 수사와 군벌 간 갈등, 작전계통과 정보계통의 충돌, 이승만의 군 통제체제와 군 파벌의 대립이 한꺼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본서는 암살사건 재판기록을 토대로 그 과정을 치밀하게 복원한다.
특무기관장은 왜 육군 참모총장 일당에 의해 암살되었나?
1956년 1월 30일 아침, 출근길에 나선 김창룡의 지프를 번호판 없는 차량이 가로막았다.
군복 차림의 괴한 둘이 다가와 권총 여섯 발을 쏘았다. 다섯 발이 명중했고 김창룡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현역 육군 대령 허태영 일당의 범행이었다.
70년간 이 사건은 ‘사원私怨이 빚어낸 비극’ 혹은 ‘군부 파벌 싸움의 결과’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보다 깊다. 김창룡 암살은 단순한 개인 원한 사건도, 단순한 비리 은폐 살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승만 통치체제를 지탱하던 두 축, 곧 군부 내 최대 실력집단이던 정일권 군벌과 대통령 직속 정보기구 역할을 하던 김창룡 특무대가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당시 김창룡의 특무부대는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을 정점으로 하는 함경도 파벌의 비리를 수사하고 있었다.
국방부 원면 부정 사건, 장성들의 비자금과 사생활 문제, 군 고위층의 부패가 수사망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정일권 군벌은 단순한 부패 집단이 아니었다.
6·25전쟁 이후 비대해진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정일권은 이승만 정부가 군을 통솔하는 데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핵심 인물이었고, 자유당의 2인자 이기붕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반면 김창룡 특무대 역시 이승만이 군부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의지한 또 하나의 핵심 보루였다.
결국 김창룡 암살은 이승만 체제 외부에서 가해진 공격이 아니라, 그 체제를 떠받치던 내부 세력들 사이의 충돌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승만은 군벌을 이용해 군을 통제했고, 특무대를 이용해 그 군벌을 감시했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구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특무대의 정보권은 군 지휘계통의 작전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의 비리와 파벌을 파헤치던 김창룡은 바로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희생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에 대한 전면적 수사가 군 통수체제의 파탄을 초래할 것을 우려하여 수사 범위를 제한하였다.
그 결과 사건의 최고 배후로 지목될 정일권은 끝내 단죄되지 않았다.
김창룡 암살은 군 고위층 비리 은폐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신생 대한민국이 군부를 장악하고 국가정보체계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빚어진 통치체제 내부의 파열이었다.
희생자가 ‘현대사의 악인’이 된 이유는?
1956년 암살 직후, 이승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조차 그를 '타공전선의 제1인자', '공과 사를 엄연히 구별한 모범적 군인'으로 애도하였다.
그러나 불과 30~40년 뒤 그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 '김구 암살의 배후'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무엇이 이 극적인 전도를 가능하게 하였는가.
악마화의 시동을 건 것은 암살범들 자신이었다.
허태영과 강문봉 등은 김창룡을 '전횡과 조작의 화신'으로 매도하였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5·16 이후 암살 가해자들이 오히려 득세하자 가해자들이 '민주화 영웅'의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자기 정당화 서사가 대중에 유포되었다.
결정적인 전환은 1980~90년대 민중민족주의 사관의 확산과 함께 왔다.
'반공투쟁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성립'이라는 국가 서사가 '분단과 양민학살'의 서사로 뒤바뀌면서, 반공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김창룡은 '국가폭력의 상징'이 되었다.
KBS 드라마는 아무런 사실적 근거 없이 그를 김구 암살의 배후로 묘사하여 이 이미지를 수천만 시청자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유족이 사자명예훼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법원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기각하였다.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으면 허위 사실도 방송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역사 왜곡에 법원까지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 책이 밝히듯이 김창룡 개인의 악마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역사 서사 전복과 동전의 양면이다. 역사의 공로자를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
김창룡의 특무부대가 지키고자 한 이승만 정권은 오늘날 흔히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독재정권이었다고 평가된다.
이 책의 제2부는 이승만 정권이 독재정권이었는가를 정면으로 다룬다.
당시 야당은 부산정치파동(1952)과 사사오입 개헌(1954)을 이승만 독재의 증거로 내세웠고,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것은 당파적 입장에서의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1948년 제헌헌법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과반수 의결기관이며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준내각제적' 체제였다.
유진오 등 몇몇 법률가와 임정 출신의 신익희와 한민당 등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도 내각제적 헌법으로 실권을 국회에 붙들어두려 했다.
1948년 당시 세계에서 대통령 임기를 4년의 1차 중임으로 제한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였다.
제헌헌법이 일그러진 공화체제를 담았던 것은 이승만에 대한 제헌의원들의 ‘당쟁하는 마음’에서 기인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직선제 및 중임제한 철폐의 두 차례 개헌을 관철하였는데, 그것은 억압과 무리수를 동반하는 정치파동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 책은 1950년대 정치사의 혼란을 이승만 개인의 권력욕으로 돌리는 통설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야당이 내세운 '민주주의'는 막스 베버가 말하는 '신념윤리'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것은 선의와 정의라는 명분에 따라 행동하되 그 결과는 중요시하지 않는 전통적 도덕정치였다.
조선왕조 이래 혈연·지연·학연에 기초한 가산제(家産制) 문화와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정치 풍토에서 이승만은 국가와 민족의 생존이라는 목표를 위해 강건한 책임윤리의 정치를 추구한 것이었다.
이런 해석이 타당하다면, 야당이 '독재'라 규탄한 이승만의 행동은 전통적 당파 정치의 한계를 뚫고 근대적 책임윤리의 정치를 실현하려는 소명의 과정이었다고 재해석될 수 있다.
이승만은 1904년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에서부터 국민이 선출하는 대통령중심제를 '인간 사회가 고안한 가장 선미한 정부형태'로 보았다.
야당과 한국 정치학계는 이 점을 외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고 또 야당의 거센 당쟁을 이겨내고 군을 통솔하는 가운데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통치체제의 핵심 보루였던 김창룡 특무부대의 역할 역시 새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왜 지금 김창룡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건국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건국을 반대한 김구가 국부로 추앙받고, 이승만은 친일 독재자로 매도된다.
아울러 김창룡도 국가폭력의 실행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한 국가의 성립과 유지 과정에서 폭력 여하가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이 실제로 어떠한 위협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정보·수사체계를 필요로 했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왜 훗날 ‘국가폭력’의 서사로만 기억되게 되었는가.
이 책은 우리가 이 질문에 새로 답할 것을 촉구한다.
가족이 기록한 ‘인간 김창룡’
본서 제3부에는 김창룡의 두 딸이 쓴 글이 수록되었다.
아버지가 암살된 뒤 가족은 긴 세월 사회적 낙인과 왜곡된 기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먼 브라질로의 이민, 타국에서의 생존과 자립,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
현대사의 악인’으로 기억되는 인물 의 실재 모습과 남겨진 가족의 삶 역시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91023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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