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국가의 이해 (독서기록)/5.중동이집트(이슬람)

아주 짧은 이집트사 (2026) - 파라오의 영광부터 현대의 격동까지 핵심만 골라 읽는 이집트 문명사

동방박사님 2026. 6. 10.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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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고대 왕조의 영광부터 현대 공화국의 피땀까지
한 권으로 읽는 가장 입체적인 5,000년 이집트의 역사

우리는 흔히 이집트를 잘 안다고 착각한다.

 피라미드와 미라, 투탕카멘과 클레오파트라라는 강렬한 이미지의 파편 속에 고대 이집트를 가두어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소비해 온 고대의 영광은 실제 이집트라는 거대한 역사적 공간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이집트 문명은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파라오의 신전이 교회로, 그리고 다시 모스크로 형태를 바꾸었을 뿐 나일강은 여전히 흐르고 그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은 5,000년 동안 도도하게 계속되어 왔다.

『아주 짧은 이집트사』는 바로 이 긴 시간을 가장 입체적으로 담아낸 책이다. 

1799년 로제타석의 발견과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의 천재적인 문자 해독으로 고대 문명이 침묵을 깨고 ‘보이는 역사’에서 ‘읽히는 역사’로 부활한 순간부터 시작하여 거대 제국의 침략과 종교적 대전환 그리고 현대 공화국의 격동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사의 전체 흐름을 단 한 권으로 명쾌하게 관통한다. 

이 책은 두 저자의 강점이 결합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집트 현장을 발로 뛰어온 이집트 전문 가이드 양보미와 외신 기자이자 날카로운 통찰로 중동 문제 해설자로 활동해 온 알파고 시나씨가 함께 집필했다. 

현장의 생생한 경험과 국제정세를 읽는 넓은 시야가 만나 독자들은 고대 문명과 현대 중동을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찬란했던 고대 왕조의 전성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페르시아와 로마의 지배를 받던 외세 지배기, 콥트 기독교의 박해와 이슬람령으로의 편입, 십자군을 무너뜨린 살라딘과 노예 군주 맘루크의 신화, 근대화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가 마주한 수에즈 운하의 그늘, 그리고 나세르·사다트·무바라크로 이어지는 현대 공화국의 잔혹한 독재와 타흐리르 광장의 생생한 혁명 현장까지 완벽하게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이집트를 다시 읽게 만드는 책이다.

목차
책을 시작하며
프롤로그
인트로_ 우리가 아는 이집트는 언제 발견되었나

1부 고대 이집트 - 파라오들의 전성 시대

나일강의 선물과 고대 문명의 탄생
상.하 이집트와 최초의 통일
파라오 권력의 전성기, 피라미드에서 제국으로
[별면] 피라미드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신왕국의 시작과 정복의 시대
[별면] 센무트와 하트셉수트, 그리고 사라진 이름의 정치학
말기 왕조와 페르시아, 그리스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별면] 고대 이집트 파라오 연대표

2부 로마 기독교와 이슬람 - 제국의 땅이 된 이집트

파라오의 신들이 떠난 자리, 기독교와 로마의 지배
이슬람과 아랍의 시대
[별면] 십자군 원정 한눈에 보기
거대 제국의 변방, 오스만 시대의 이집트
나일강의 사자 무함마드 알리와 근대의 서막
[별면] 이슬람의 등장과 이집트 이슬람 왕조의 흐름

3부 현대 이집트 - 독립과 혁명 그리고 국가의 재편

나세르의 꿈, 아랍 민족주의의 시대
[별면] 아랍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전쟁에서 평화로, 사다트와 시나이의 귀환
[별면] 한눈에 보는 중동전쟁
[별면] 피로 맺은 혈맹과 냉혹한 국익 : 이집트와 북한의 기묘한 동행
멈춰 버린 30년, 무바라크와 안정이 낳은 침체
사막에 새긴 신기루, 토슈카 프로젝트의 명암
타흐리르의 함성, 아랍의 봄과 독재의 종말
다시 돌아온 군부, 엘시시 시대의 빛과 그림자
[별면] 현대 이집트 지도자 연혁

에필로그

저자 소개
저 : 양보미
이집트 전문 가이드이자 역사 스토리텔러. 아프리카어를 전공했고 23세에 떠난 인도 여행을 계기로 해외 생활을 시작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한 후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며 29세에 단돈 40만 원을 들고 이집트로 향했다. 

다합에서 게스트하우스 운영과 김밥 장사 등으로 생활 기반을 다진 뒤 카이로에 거주하며 본격적인 가이드 활동을 시작했다. 기독교 성지 순례부터 고대·현대 이집트 역사에 능통한 전...

저 : 알파고 시나씨 
터키에서 가장 높은 산인 아라랏 산은 성서 속 ‘노아의 방주’가 발견된 곳이다. 아라랏 산 인근의 으드르 시에서 태어난 알파고 시나씨는 열네 살이 되던 해 어머니의 품을 떠나 ‘성모 마리아가 마지막 생애를 보낸 고대 도시’ 에페소스에 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2004년 기술대학 중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이스탄불 기술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부처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동양에서 공부하고 싶어 한국에 왔다....

책 속으로
신전은 남아 있었지만 그 의미를 설명해 줄 언어와 문자가 사라졌고 이집트는 마치 봉인된 책처럼 침묵 속에 잠겨 갔다. 이 문명은 오랫동안 침묵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수많은 기록을 남겼지만 그 문자는 수세기 동안 읽히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 대부분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독되기 시작한 결과다. 

다시 말해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문명이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야 읽히기 시작한 문명이었다.
--- p.15~16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지만 학문적으로는 인류사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는 전쟁에서는 물러났지만 그의 연구팀이 남긴 기록과 발견은 전 세계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나폴레옹의 야심과 로제타석의 발견은 고대 이집트를 ‘사라진 문명’에서 ‘연구 가능한 역사’로 끌어올린 결정적인 계기였다.
--- p.19

피라미드 건설은 흔히 상상되는 것처럼 노예 노동의 결과가 아니었다. 

1990년대 이후 기자의 피라미드 인근에서 발견된 ‘노동자 마을’ 유적은 이러한 편견을 정면으로 뒤엎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곳에 거주했던 수천 명의 노동자는 숙련된 석공과 장인, 그리고 나일강 범람기에 동원된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매일 신선한 빵과 고기, 맥주를 배급받았으며 이는 당시 일반 백성보다 훨씬 양질의 식단이었다.

 특히 발견된 유골 가운데에는 부러진 뼈가 정교하게 치료되어 완치된 흔적이 남아 있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이는 건설 현장에 전문 인력이 상주하며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의료 혜택이 제공되었음을 보여 준다. 

결국 피라미드 건설은 강제 노역이라기보다 농한기 노동을 조직적으로 활용한 국가 사업이자 파라오에게 바치는 종교적 봉헌에 가까웠다. 

이는 고왕국 이집트가 단순한 전제 국가를 넘어 대규모 인력을 효율적으로 조직하고 보급을 관리할 수 있는 정교한 행정 체계와 복지 시스템을 갖춘 사회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 p.47

이집트 역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성 통치자는 단연 클레오파트라 7세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특정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통치자들이 반복해서 사용한 왕명이다.

 이 이름은 ‘아버지의 영광’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까지 모두 일곱 명의 클레오파트라가 존재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클레오파트라는 그 마지막 인물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흔히 미모로 역사를 흔든 여왕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감각과 언어 능력을 겸비한 통치자였다. 

그녀는 최소 일곱 개의 언어를 구사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통치자들 가운데 드물게 이집트어를 자유롭게 사용했다. 

이는 그녀가 그리스계 왕조의 한계를 넘어 이집트인들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 

오늘날 클레오파트라는 종종 위대한 여왕으로 기억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녀는 거대한 국제 질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결국 나라를 지켜 내지 못한 비극적인 통치자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삶은 개인의 야망과 국가의 운명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힐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은 한 왕조의 끝이자 고대 이집트가 완전히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퇴장한 순간이었다.
--- p.101

오늘날 이집트의 수도는 카이로다. 많은 사람이 카이로나 카이로 인근 기자에서 피라미드를 보다 보니 이집트의 수도가 예전부터 늘 카이로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집트의 수도는 기원전 약 3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900년 넘게 알렉산드리아였다. (…) 그런데 7세기 이후 이슬람이 이집트에 진출하면서 수도의 자리가 다시 바뀐다. (…) 

이슬람 군의 병력은 많지 않았지만 당시 이집트는 내부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콥트 교회와 제국 사이의 갈등이 깊었고 동로마 제국 역시 전쟁과 내분으로 지쳐 있었다. 

이 틈을 타 이슬람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집트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집트는 이슬람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아므르는 수도를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신이 머물렀던 푸스타트로 옮겼다. 

900년 이상 이집트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이때부터 사실상 수도 기능을 잃게 되었다.
--- p.123~128

중앙 정부인 우마이야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끈질긴 박해를 피해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긴 시아파 세력은 서기 909년 마침내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직계 후손임을 자처하며 아바스 왕조를 가짜로 규정하고 자신들만이 이슬람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라 주장했다.

 파티마 왕조의 최종 목표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가 있는 아라비아반도였다. 

이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전략적 관문이 이집트였다. 

마침 이 시기 이집트는 이흐시드 왕조의 권력 승계 문제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파티마 왕조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969년 파티마 왕조의 명장 자우하르는 1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단숨에 점령했다.

 승기를 잡은 그는 기존 수도인 푸스타트의 북쪽 벌판에 파티마 제국의 위험을 과시할 새로운 계획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기초를 닦던 날 밤, 하늘에는 붉고 강렬한 빛을 내뿜는 ‘화성’이 떠 있었다. 

파티마인들은 이를 승리의 징조로 여겨 새 수도의 이름을 ‘승리의 별이 지배하는 도시’라는 듯의 ‘알 카히라’라 명명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이로’라는 이름의 어원이다.
--- p.132

1801년, 프랑스군이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권력의 공백이 남았다. 

명목상의 주인인 오스만 제국과 세력을 회복하려는 맘루크 집단, 그리고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일조한 영국군까지 뒤엉키면서 카이로는 그야말로 주인 없는 들판이 되었다.

 바로 이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오스만 제국이 파견한 알바니아 출신 지원병 부대의 부사령관 무함마드 알리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 그는 임명직에 불과한 총독 자리를 자신과 후손이 대대로 이어갈 ‘세습 권력’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가장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였던 맘루크 세력을 제거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811년 그는 아들의 원정 출산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맘루크 지도자들을 카이로 성채로 초대했다. 

연회가 절정에 달하던 순간, 성채의 육중한 성문이 굳게 닫혔다. 당황한 맘루크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매복해 있던 보병대의 일제 사격이었다. 

수백 년간 이집트를 지배해 온 맘루크 엘리트들은 단 하룻밤 사이에 몰살되었다. 

이 사건은 훗날 ‘카이로 성채 학살’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이집트의 옛 질서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제 이집트에는 오직 하나의 권력만이 남게 되었다. 바로 무함마드 알리였다.
--- p.160~161

화려했던 개통식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이집트의 재정은 급격히 곪아 갔다.

 운하 개통 이듬해인 1870년 이집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큰 혼란에 빠진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 경제적 지원이 끊기자 무리한 근대화 사업으로 막대한 외채를 짊어지고 있던 이스마일 파샤 정부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채무 상환 압박을 이기지 못한 그는 결국 1875년 이집트의 자존심이자 마지막 보류였던 수에즈 운하 지분을 매각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다. 

운하를 통해 얻으리라 기대했던 장기적 이익마저 유럽 열강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이집트 정부가 보유한 지분은 전체의 약 44퍼센트인 17만 6,602주. 매입가는 당시 돈으로 400만 파운드,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약 5억 6,000만 파운드에 해당한다. (…) 

영국은 하룻밤 사이에 수에즈 운하의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주식 거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인도로 향하는 제국의 대동맥을 통째로 사들인 것과 다름없는 사건이었다.
--- p.179~180

당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세력권을 넓히며 각국에 선택을 강요하던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러나 나세르는 어느 한쪽에도 줄 서지 않는 ‘비동맹 양팔 정책’을 선언했다. 

그는 필요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경제 원조를 끌어내고 동시에 소련과는 군사 거래를 체결하는 영악한 실용주의적 외교 노선을 택했다. 

실제로 그는 소련의 무기를 대량으로 매입해 군을 현대화하는 한편, 서방과는 무역과 수에즈 운하 협력을 유지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그 배경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와도 같은 이스라엘과의 긴장 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국외 정세의 균형을 꾀한 나세르가 국내 자립을 위해 내놓은 회심의 카드는 ‘아스완 하이댐’ 건설이었다.

 이는 나일강의 불규칙한 범람을 통제하고 가뭄과 홍수 피해를 줄이며 대규모 수력 발전을 통해 이집트의 산업화를 이루겠다는 원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 하이댐 건설 자금을 빌리는 데 실패했지만 나세르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서방이 문을 닫아 버린 순간을 오히려 역사의 판을 뒤집을 기회로 삼았다.

 그리고 마침내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릴 승부수를 던졌다. 바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였다.
--- p.194~195

이집트는 국토와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고 이스라엘은 점령의 부담을 줄이고 싶었다.

 이해관계가 맞닿은 지점에서 기적과 같은 합의가 탄생했다. 

1978년 9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13일간 난항을 거듭한 끝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극적 합의를 이루어 낸 것이다. 

그 핵심은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해 영토를 반환하고 그 대신 이집트가 아랍 세계의 오랜 금기를 깨고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국교를 수립한다’는 데 있었다. 

이 협정은 단순히 중동의 국경선을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수천 년에 걸친 적대의 역사를 넘어 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이 숭고한 결단으로 사다트와 베긴은 이듬해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나란히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 그러나 국제사회의 찬사와 달리 중동 내 부의 반응은 싸늘했다.

 범아랍주의의 중심이자 이슬람 세계에서 상징적 권위를 지닌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손을 잡는다는 사실은 많은 아랍인들에게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랍 국가들은 이집트를 맹렬히 비난했고 이집트 내부에서도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 분노와 갈등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2년 뒤인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는 제4차 중동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열병식 도중 암살당했다.
--- p.222~223

사람들은 이집트 혁명을 ‘18일의 기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피로 쓴 18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지만 그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한번 거리에서 깨어난 시민은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사실을 타흐리르 광장은 세상에 보여 주었다. 광장에서 울려 퍼진 ‘빵, 자유, 사회 정의’라는 구호는 이 혁명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이 자문한다.

 ‘그래서 이집트의 혁명은 성공한 것인가?’ 앞서 말했든 30년간 집권한 호스니 무바라크는 이 민주화 혁명으로 퇴진했다. 이집트는 분명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혁명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집트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 봄바람이 불었다고 해서 곧바로 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독재가 무너진 자리에는 곧 격렬한 혼란이 밀려왔고 이집트는 그 이후 또 다른 격동의 시간을 지나게 된다.

 자스민 혁명은 ‘끝’이자 동시에 ‘시작’이었다.

 무바라크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이집트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진행형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 p.258~259

출판사 리뷰
이집트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문명이 아니라
최근에야 읽히기 시작한 문명이다

우리가 이집트를 떠올릴 때 마주하는 피라미드, 미라, 투탕카멘, 클레오파트라 같은 강렬한 이미지들은 대개 고대 문명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이후 이집트는 로마 제국의 지배, 기독교의 확산, 이슬람 세계로의 편입, 오스만 제국과 영국의 영향, 그리고 현대 이집트 공화국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계속 이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익숙하게 떠올리는 고대 이집트 문명조차 오랫동안 ‘보이는 유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전과 피라미드는 남아 있었지만 그 안에 새겨진 상형문자는 수세기 동안 해독되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묻혀 있었다.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과정에서 로제타석이 발견되고 1822년 프랑스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집트는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이집트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보이는 문자’가 ‘읽히는 문자’로 해독된 순간 파라오와 사제들의 세계 속에 가려져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제도가 복원되었다. 

저자들은 이 극적인 부활의 서사를 시작으로 복잡하게 얽힌 이집트 5,000년사의 대동맥을 5가지 나침반을 통해 마스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나일강의 축복에서 현대 중동의 핵심 국가까지
이집트사를 관통하는 5가지 나침반

첫 번째 나침반은 ‘통일과 파라오의 개창’이다. 기원전 3100년경 상이집트와 하이집트의 오랜 분열을 끝낸 초대 왕 나르메르의 이야기부터 출발한다.

 ‘나르메르 팔레트’에 새겨진 통일의 정체성이 어떻게 고왕국의 절대 왕권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노예의 강제 노역이 아닌 농한기 농민들의 조직적 봉헌으로 세워진 기자 대피라미드 건축의 과학적 비밀과 행정 체계의 진실을 현대 고고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명쾌하게 추적한다.

두 번째 나침반은 ‘천 년의 침묵과 해독’이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죽음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하고 로마의 속주가 된 이집트가 외세의 지배 속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잃고 침묵 속에 잠겨갔는지 살펴본다. 

헤로도토스와 마네토가 세워둔 역사적 뼈대 위에 나폴레옹의 원정단이 남긴 학문적 기록과 로제타석의 기적이 어떻게 고대 이집트를 ‘연구 가능한 역사’로 끌어올렸는지 그 짜릿한 해독의 과정을 펼쳐 보인다.

세 번째 나침반은 ‘이슬람 제국의 보루’이다. 로마와 비잔틴 제국의 지독한 교리 갈등 속에서 박해받던 독자적 전통의 콥트 기독교 시대를 지나 7세기 아라비아반도에서 진입한 이슬람 세력과의 만남을 다룬다. 

시아파 파티마 왕조가 세운 승리의 도시 ‘카이로(알 카히라)’의 탄생, 십자군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탈환한 수니파의 영웅 살라딘, 그리고 몽골의 불패 신화를 멈춰 세우며 이슬람 문명을 수호한 전쟁 노예 출신의 군주 ‘맘루크’의 잔혹하고도 찬란한 연대기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네 번째 나침반은 ‘수에즈 운하와 자주독립의 꿈’이다. 19세기 초 오스만 제국의 지배 세력이던 맘루크를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근대화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야망을 다룬다.

 고대 유물인 오벨리스크를 외교 카드로 활용하며 유럽 열강과 대등한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그의 기틀 위에서 수만 명 이집트 농민들의 강제 노역과 피땀으로 건설된 수에즈 운하의 비극을 파헤친다.

 화려한 개통식 뒤편에서 거대한 채무의 늪에 빠져 영국의 지배라는 가혹한 부메랑으로 돌아온 이집트 잔혹사는 자주독립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

다섯 번째 나침반은 ‘현대 공화국의 도전과 혁명’이다. 

1952년 부패한 왕정을 무너뜨린 자유장교단의 혁명과 가말 압델 나세르의 등장을 다룬다. 

냉전의 틈새를 공략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단행하고 ‘현대판 피라미드’인 아스완 하이댐을 건설한 나세르의 빛과 그늘, 아랍의 금기를 깨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가 암살당한 사다트, 그리고 안정이 가져온 침체 속에서 권력 세습을 시도하다가 2011년 타흐리르 광장의 거대한 함성 앞에 무너진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독재 종말까지 현대 이집트의 격동을 완벽하게 마스터할 수 있다

스토리텔러와 언론인의 만남,
가장 완벽하고 유쾌한 문명사 가이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저자들의 독보적인 전문성과 현장감에 있다. 단돈 40만 원을 들고 이집트로 향해 다합과 카이로에서 수년간 현장을 발로 뛰며 기독교 성지순례, 고대사, 현대 문화에 능통한 베테랑 가이드로 자리 잡은 양보미의 생생한 현장 경험이 글 곳곳에 녹아 있다.

 여기에 한국을 사랑하는 중동 전문가이자 날카로운 국제 정세 분석가인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의 통찰이 더해졌다. 

특히 저자들은 아스완 하이댐의 건설이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라 댐 한 곳이 타격을 받으면 국가 전체가 마비될 수 있다는 ‘단일 취약점’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한 고도의 안보적 리스크 분산 전략(토슈카 프로젝트)이었다는 거시적 분석을 제시하며 역사적 인과관계를 매끄럽게 연결해 낸다.

 또한 중동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로 맺어졌던 이집트와 북한의 기묘한 혈맹 관계 등 기존 역사서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흥미진진한 비화까지 거침없이 풀어낸다.

왜 지금 이집트를 읽어야 하는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세계사의 흐름을 보여 준다

이집트를 읽는다는 것은 오래된 문명의 유적을 살펴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이집트의 역사는 한 사회가 어떻게 힘을 얻고, 왜 흔들리며, 어떤 조건에서 다시 자신을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자연환경의 축복이 언제까지나 번영을 보장하지는 않으며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도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을 때는 오히려 위기가 될 수 있다.

이집트는 세계사의 여러 질문이 반복해서 지나간 자리다. 

강한 중앙 권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국은 왜 특정 지역을 차지하려 하는가. 종교와 언어가 바뀌면 한 사회의 정체성도 완전히 사라지는가. 

근대화는 언제 발전이 되고, 언제 외세 의존과 부채의 통로가 되는가. 혁명은 한 사회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는가.

『아주 짧은 이집트사』는 이런 질문들을 이집트라는 한 나라의 긴 시간을 통해 따라가되 사건의 순서를 알려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한 문명이 어떻게 제도를 만들고, 외부 질서 속에서 흔들리며, 종교와 권력의 변화 속에서도 새로운 국가로 재편되는지를 보여 준다.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과 발전을 고민해 온 한국 독자에게도 이집트는 중요한 비교의 시선을 제공한다. 

『아주 짧은 이집트사』는 이집트를 통해 국가의 운명, 문명의 생명력, 그리고 시대 변화에 대응하는 힘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914807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