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반도 평화 (박사전공독서)/4.한국전쟁 6.25

위기에서 승리로 (2026) - 크로마이트 작전의 비사

동방박사님 2026. 6. 12.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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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당시, 김일성 역시 유엔군의 인천 상륙 계획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민군이 상륙 날짜를 몰랐고 주력 부대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어 인천 방어에 실패했다는 것이 통념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원산 등지의 후방에 대기 중이던 인민군 예비사 단 2개를 인천 방어에 급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 병력이 제때 인천으로 이동했 다면 전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급박한 순간, 전세를 뒤바꾼 것은 북한 후방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던 대북첩보부대원들의 활약이었다. 

김동 석 대령과 그의 부대원이었던 김근성(필자의 선친), 이병철, 장희성, 조세란, 홍도일 등은 강원도 와 함경남도가 접하는 영흥만 인근(원산, 청진 일대)에서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이 벌 인 이른바 ‘ 그림자 작전 ’ 은 인민군의 발을 완벽하게 묶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민군 예비 병력은 첩보부대의 거센 교란 작전에 휘말려 영흥만 남쪽으로 남하하지 못했다. 

훗날 한국전쟁 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동석 대령은 필자에게 “이들이 적을 묶어두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 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 이라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증언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 이클 샬러 역시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의 장군』(1989)을 통해 “당시 인민군 예비 병력이 북 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이름 없이 산화해 간 첩보부대원들의 가려 진 공로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처럼 책은 전쟁의 주요 전환점 뒤에 숨겨진 인물들과 결정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쟁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주변국의 대응까지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전쟁 발발 초기 중국의 움직 임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았다. 김일성은 전면 남침 날짜를 중국에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프랑스 통신사인 AFP를 통해 처음 접했다.

당시 일요일이었던 탓에 저우언라이도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김일성의 이러한 행태에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향후 한반도에서의 군사 개입 가능성에 대비해 ‘ 동북변방 군 ’ 을 창설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은밀한 움직임과 개입 신호를 과소평가했으나, 맥 아더는 훗날 이 시기를 회고하며 “7~8월이 중국 파병의 결정적 시기였으며, 만약 그 시점에 개 입이 이루어졌다면 전쟁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 이라고 평가했다. 결

국 동북변방군 은 1950년 10월 19일 ‘ 중국인민지원군 ’ 으로 재편되어 압록강을 건넜고, 이로써 한반도 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 너머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폭풍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전쟁 초기부터 축적된 국군의 눈물겨운 사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복합적인 배경을 토대로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두 가지 핵심 축으로 나누어 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 축은 인 민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된 6월 25일부터 인민군 제4사단 선발대가 경남 창녕 낙동강 기강나루 터에 도달한 8월 4일까지의 ‘ 고통스러운 40일 ’ 이다. 

저자는 국군이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

” 라는 전략 아래 펼친 처절한 지연전의 기록을 미시적으로 파헤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축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전세를 역전시킬 크로마이트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한 ‘ 반격의 40일 ’ 이다. 

이 책은 이 80일간의 기록을 미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제1부 전쟁발발부터 서울 수복까지

제1장 38선 붕괴와 서울의 혼돈
제2장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 초기 실책
제3장. 미국의 참전과 타이완해협 봉쇄
제4장. 한강 방어선과 질서 있는 퇴각
제5장. 낙동강 전선 : 8월 대공세의 격전
제6장. 운명의 도전 : 8월 23일의 결단
제7장. 9월 대공세와 최후의 방어
제8장. 평양을 폭격하라
제9장. 크로마이트 작전 개시
제10장. 망치와 모루 : 대반격의 시작
제11장. 전쟁의 참상 : 양민 학살의 비극
제12장. 비극의 시대 : 엇갈린 인간 군상
제13장. 일본인의 한국전쟁 참전

제2부 분단과 갈등 : 38선, 비극의 씨앗

제14장. 한반도 분단의 국제적 형성
제15장. 원폭 투하와 분단의 서막
제16장. 미국 · 소련의 점령과 분단의 심화
제17장. 해방공간에서의 좌우 충돌
제18장. 샴쌍둥이(남북)의 탄생
제19장.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불안정
제20장. 전쟁으로 가는 길

에필로그
참고문헌
영어 · 한자 표기 안내
추천사

저 : 김주환 
강원도 고성 출생으로 속초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학사와 석사를, 인하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2년간 UNTAC(유엔 캄보디아 과도행정기구)에서 활동하며 국제 현장을 경험하였으며, 1993년 YTN 공채 1기로 입사하였다. 

이후 29년간 정치부와 사회부 등 주요 부서를 거치며 정치 · 안보 전문기자로 활약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공군 정책자문위원 등...

출판사 리뷰
정전 76주년,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의 가슴 졸이는 비사들 완전 공개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 는‘ 고통의 40일 ’ 지연작전과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크로마이트 작전을 준비한 ‘ 반격의 40일’, 그 80일의 미시적 기록

“우리는 인천에 상륙해 적을 박살낼 겁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크로마이트 작전)을 앞두고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가 한 말이다.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더글라서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서울 영등포의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뒤, 인천상륙작전 구상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 다. 

그런데 일본 도쿄의 극동군사령부 참모들이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반대하자, 맥아더는 “민주 주의를 위한 군대는 있어도, 군대 내에 민주주의는 없다” 라는 말로 반대 여론을 잠재웠다. 

도 쿄 참모들을 설득한 맥아더 앞에는 워싱턴 합동참모본부의 더 큰 반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미 합참 차장이었던 매튜 리지웨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을 골프의 홀인원 확률 ‘3,000 분의 1 ’ 보다 낮은 ‘5,000분의 1 ’ 이라 혹평하며 반대했다. 

맥아더는 "적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에 오히려 허점을 찌를 수 있다” 라며 끝까지 밀어붙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매섭게 작전을 비판했던 리지웨이는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되자 후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자신 이 반대했던 작전으로 지켜낸 전선을 직접 책임지게 되었다.

이처럼 성공 확률보다 실패 요인이 더 많았던 인천상륙작전의 가슴 졸이는 비사들이 정전 76주 년인 2026년 6월 세상에 온전히 공개되었다.

 아시아출판사의 신간 『위기에서 승리로: 크로마이 트 작전의 비사』(저자 김주환)는 제1부에서 개전 초기 80일간의 긴박했던 기록을 새로운 시각 으로 재구성하며 역사적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제2부에서는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근 원을 추적하고 있다.

크로마이트 작전이 성공하기까지는 숱한 난제들을 돌파해야 했다.

 특히 10m에 이르는 인천의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는 작전 성패의 핵심 요인이었다. 작전을 충족할 수 있는 날짜도 9월 15 일, 10월 11일, 11월 3일뿐이었다. 

그런데 최악의 자연조건을 가진 인천을 상륙 지점으로 맥아더 의 머릿속에 입력시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전 일본 육군 정보부장 아리스에 세이조 중장과 그 가 이끈 ‘ 대(對)연합군 육군연락위원회 ’ (일명 아리스에 기관)이었다. 

핵심 간부 15명을 포함해 수백 명의 전직 장교들로 구성된 이 정보 네트워크는 인천상륙작전 구상 단계에서 중추적인 역 할을 했다. 

맥아더는 이 작전으로 10만 명의 아군 희생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식량 안보 측면도 치밀하게 고려했다. 

작전이 10월 이후로 지연되면 남한 최대의 곡창지대를 인 민군에게 빼앗겨 극심한 식량난과 국가적 대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맥아더가 대통령의 승인 없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진행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분노했다. 

그 러나 낙동강 전선이 붕괴 직전인 상황에서 패배의 위험을 막아야 했던 트루먼은 현실적인 결단 을 내려야 했다. 

군사령관이 대통령을 건너뛰는 전례나 실패 시의 정치적 후폭풍이 우려됐지만, 결국 그는 "도박이지만 판돈을 걸 수밖에 없다.” 라며 1950년 8월 28일 작전을 최종 승인했다. 

하지만 디데이까지 남은 기간은 19일에 불과해 준비 시간이 극도로 촉박했다. 

설상가상으로 작 전 계획은 이미 도쿄 극동군사령부 주변에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으며, 작전 개시 직전에는 간첩 허길송과 좌익 세력을 통해 일부 기밀이 평양으로 유출되는 심각한 사태까지 벌어졌다. (본문 p. 317)

인천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암초가 나타났다. 

1950년 9월 5일, 낙동강 방어선 전체가 흔들리는 최악의 위기가 닥친 것이다.

이날 하루에만 미군 사상자가 1,245명에 달하자, 워커 유엔군 지상군 사령관은 ‘ 플랜 B ’ 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미군은 밀양 인근 ‘ 데이비슨 라인 ’ 까지 후퇴한 뒤, 상황이 악화될 경우 일본으로 전면 철수할 예정이었다. 

나아가 한국 정부와 민간인 10만 명을 남태평양 서사모아 제도로 이주시켜 국가를 재건한다는 충격적인 ‘ 뉴 코리아 플랜 ’ 도 함께 담겨 있었다. 

그러나 워커 사령관은 국군의 투혼에 마지막 도박을 걸기로 했다. 그는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전략적 요충 지인 영천을 되찾지 못하면, 크로마이트 작전(인천상륙작전)은 즉시 취소된다.” 기적이 일어났다. 

국군은 혼신의 사투 끝에 크로마이트 작전 개시를 불과 이틀 앞둔 9월 13일, 극적으로 영천 탈환에 성공했다. 

이 영천 전투의 승리는 취소 위기에 몰렸던 인천상륙작전을 다시 궤도에 올려 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제 작전은 최종 실행 단계에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상륙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천재지변이 앞을 가로막았다. 태풍 ‘ 제인 ’ 이 일본 고베항을 강타해 미 제7함대 함정들을 파손시키고 항만에 적재해 놓은 각종 군수물자에 큰 피해를 입혔다.

위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더 강력한 태풍 ‘ 케지아 ’ 가 필리핀 해역에서 북상하고 있었다. 

작전의 성패는 오직 시간에 달려 있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항에서 상륙이 가능한 최고 만 조 시각은 오전 6시 59분과 오후 7시 19분, 단 두 차례뿐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함대는 갯벌 에 고립되어 적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태풍 케지아의 북상으로 어렵게 확보한 작전 기회 마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때 미 공군 기상대는 작전의 명운을 가를 결정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태풍이 12일과 13일 사 이 대한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금 즉시 출항한다면 태풍의 위력이 상대적으로 약 한 왼쪽 항로(가항반원)를 따라 폭풍우를 뚫고 항해할 수 있습니다.”

맥아더는 주저하지 않았다. 

작전 개시를 불과 나흘 앞둔 9월 11일, 그는 모든 함정에 인천으로 의 총진군을 명령했다.

 그 결과, 9월 15일 새벽에 이르러서야 260여 척의 함정이 인천 앞바다에 집결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날의 만조 시각은, 5년 전인 1945년 9월 8일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당시의 만조 시각과 절묘하게 일치하는 기상 조건이었 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유리한 조수 조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작전의 이면에는 예상 밖의 조력자들이 있었다. 

당시 투입된 전차상륙함(LST) 47척 중 30여 척의 조타를 일본인 선원들이 담당하며 상륙 함대의 운용을 지원했다. 

이들의 지원 아래 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새벽 월미 도를 점령한 뒤, 오후 만조 시각에 인천 본토로 상륙을 감행했다. 그 결과 상륙군은 저녁까지 인천항과 시가지를 확보하며 작전 첫날의 목표를 완수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자, 맥아더는 직접 전선 시찰에 나섰다. 9월 17일 이른 아침, 그는 기함인 미 해군 마운트 매킨리함에서 내려 인천 시내에 마련한 미 제1해병연대본부를 방 문했다. 

맥아더 외에도 유엔군사령부 및 제10군단 소속 장군들, 참모장교들, 그리고 종군기자들 이 대거 동행했다. 

일행은 연대 지휘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미군 항공기의 공격으로 파괴된 인 민군 전차 5대의 잔해를 목격했다. 

그러나 위험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숨어 있었다. 

맥아더 일행이 현장을 떠난 직후, 미 해병대 장병들은 도로변 배수로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민군 병 사 7명을 발견해 생포했다. 

만약 이들이 조금 더 일찍 발견되지 않았다면, 전선 시찰에 나선 연 합군 최고 지휘부가 예상치 못한 위협에 노출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본문 p. 389)

영국의 역사학자 맥스 헤이스팅스가 “1950년 9월 15일의 상륙작전은 맥아더의 걸작이었다.” 라 고 평가했듯이, 이 작전의 성공은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낙동강 전선의 적을 급속히 와해 시켰고, 보급로를 차단했으며, 확보된 항만과 보급 시설을 향후 서울 탈환 및 북진 작전에 활용 할 수 있게 했다. 

특히 특히 국군과 유엔군은 단 13일 만에 서울을 탈환하며 전체 작전 기간을 3분의 1로 단축시켰고, 결과적으로 아군 병력 약 14만 명을 보존하고 민간인 200만여 명의 피해 를 줄일 수 있었다. 

19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긴장감이 고조되던 당시, 김일성 역시 유엔군의 인천 상륙 계획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민군이 상륙 날짜를 몰랐고 주력 부대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어 인천 방어에 실패했다는 것이 통념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달랐다. 

김일성은 유엔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원산 등지의 후방에 대기 중이던 인민군 예비사 단 2개를 인천 방어에 급파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만약 이 병력이 제때 인천으로 이동했 다면 전황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급박한 순간, 전세를 뒤바꾼 것은 북한 후방에서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던 대북첩보부대원들의 활약이었다. 

김동 석 대령과 그의 부대원이었던 김근성(필자의 선친), 이병철, 장희성, 조세란, 홍도일 등은 강원도 와 함경남도가 접하는 영흥만 인근(원산, 청진 일대)에서 치열한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들이 벌 인 이른바 ‘ 그림자 작전 ’ 은 인민군의 발을 완벽하게 묶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인민군 예비 병력은 첩보부대의 거센 교란 작전에 휘말려 영흥만 남쪽으로 남하하지 못했다. 훗날 한국전쟁 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김동석 대령은 필자에게 “이들이 적을 묶어두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 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 이라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증언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마 이클 샬러 역시 『더글라스 맥아더: 극동의 장군』(1989)을 통해 “당시 인민군 예비 병력이 북 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이름 없이 산화해 간 첩보부대원들의 가려 진 공로를 역사적으로 뒷받침했다.
이처럼 책은 전쟁의 주요 전환점 뒤에 숨겨진 인물들과 결정들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쟁을 둘러싼 국제정세와 주변국의 대응까지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전쟁 발발 초기 중국의 움직 임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았다. 김일성은 전면 남침 날짜를 중국에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 결과, 마오쩌둥은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프랑스 통신사인 AFP를 통해 처음 접했 다. 

당시 일요일이었던 탓에 저우언라이도 모처럼 늦잠을 자고 있었다.

 중국 지도부는 김일성의 이러한 행태에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향후 한반도에서의 군사 개입 가능성에 대비해 ‘ 동북변방 군 ’ 을 창설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이러한 은밀한 움직임과 개입 신호를 과소평가했으나, 맥 아더는 훗날 이 시기를 회고하며 “7~8월이 중국 파병의 결정적 시기였으며, 만약 그 시점에 개 입이 이루어졌다면 전쟁의 양상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을 것” 이라고 평가했다.

 결국 동북변방군 은 1950년 10월 19일 ‘ 중국인민지원군 ’ 으로 재편되어 압록강을 건넜고, 이로써 한반도 전쟁은 다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압록강 너머에서 불어오는 거대한 폭풍과 인천상륙작전이라는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전쟁 초기부터 축적된 국군의 눈물겨운 사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책은 바로 그 복합적인 배

경을 토대로 한국전쟁의 전환점을 두 가지 핵심 축으로 나누어 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 축은 인 민군의 전면 남침이 시작된 6월 25일부터 인민군 제4사단 선발대가 경남 창녕 낙동강 기강나루 터에 도달한 8월 4일까지의 ‘ 고통스러운 40일 ’ 이다.

 저자는 국군이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 라는 전략 아래 펼친 처절한 지연전의 기록을 미시적으로 파헤친다. 

이어지는 두 번째 축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전세를 역전시킬 크로마이트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한 ‘ 반격의 40일 ’ 이다. 이 책은 이 80일간의 기록을 미시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애초 소련 군사고문단이 구상한 초단기 남침 시나리오는 독일식 전격전을 모태로 했다. 

이들은 T-34 전차를 앞세워 1~2일 이내에 서울을, 5일 이내에 수원-원주-삼척선을 확보한 뒤, 한 달 안 에 부산을 점령하여 8월 15일 이전에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시속 53km로 질주하는 T-34 전차 의 기동력상, 기습 당일 서울을 함락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계산이었다.

그러나 서울 진공을 목표로 삼았던 인민군 제4사단은 전차를 독립적인 타격 자산으로 운용하지 않고, 보병의 행군 속도에 맞추는 치명적인 전술적 실책을 범했다.

결국 전차의 압도적인 기동 력이 인간의 발걸음에 묶이면서 전격전의 위력은 스스로 반감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의 구데리안(하루 62km)이나 미군의 패튼(하루 48km)이 보여준 기동력에 비하면, 당시 인민군 의 진격 속도는 하루 평균 14km에 불과했다.

 인민군이 38선에서 서울까지의 직선거리 48km를 주파하는 데 꼬박 사흘(72시간)이나 걸린 이유가 바로 이 전술적 오판에 있었다. (본문 p. 82)

책은 1950년 6월 28일 공산 세력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 대한민국 제2대 국회 본회의 재소집 ’ 을 공고했다는 사실도 기술하고 있다. 

이는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 간선제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여, 정권의 법적 정통성을 찬탈하려 한 치밀한 정치적 술책이었다. 

그러나 정족수 미달로 국회 본회의가 무산되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로채려던 북한의 위장 전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외에 전쟁 초기 경북 안동까지 진출했던 소련군 군사고문단의 일화도 흥미롭다. 

안동 길안면 천지리의 한 기와집에 인민군 수십 명과 함께 특유의 체취가 심 하고 손목시계를 여러 개 찬 외국인 3~4명이 며칠간 투숙한 적이 있다.

 이들이 손목시계를 여러 개 착용하고 있었던 점은 영국의 전쟁사학자 앤터니 비버가『베를린 함락 1945』(2002)에서 기 술한 사실을 연상시킨다. 

비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에 진주한 소련군 병사들이 전리품 인 손목시계 3~4개씩을 차고 다녔으며, 이는 각각 현지 시각, 고향 시각, 모스크바 시각을 확인 하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전 총리의 외아들인 랜돌프 처칠이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종군기자로 참전했다는 사실 또한 매우 흥미롭다.

 그는 1950년 8월 중순 경북 왜관에서 총상을 입고 홍콩으 로 후송되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전선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외신기자는 총 17명에 달하 며, 이들은 자유를 향한 필사의 기록을 마지막 유산으로 남겼다. (본문, p. 250)

이 책의 독창성은 저자의 남다른 생애 궤적에서 비롯된다. 

대북첩보부대원이었던 선친의 영향으 로 강원도 고성에서 성장한 저자는 실향민의 고뇌와 증언을 체득하며 전쟁을 생생한 현실로 겪 었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에 30년간의 방송기자 경력을 더한 저자는, 철저한 사료 검증과 방대 한 증언 청취를 통해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 순간들을 생생하게 복원해 냈다.

추천평
“이 책은 단순한 작전 보고서에 머물지 않는다. 이는 인간과 전쟁, 그리고 역사의 교차로에서 건져 올린 뜨거운 기록이자, 상처 입은 시대의 기억을 달래는 진혼가다.”
- 김해석 (전 국방대학교 총장)


“이 책은 단순한 전쟁 기록이나 군사사적 서술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 · 경제 · 사회 · 지정학적 구조와 인간의 운명을 교차시켜 새롭게 조명한 저작이다. 저자는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개인의 노력과 체제의 굴레가 어떻게 맞물리며 역사를 형성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 정춘일 (한국전략문제연구소 부소장)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91546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