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의 역사 / History of Singapore

식민지 이전 싱가포르
영국의 식민지배 (1819~1942)
일본 점령기 (1942~1945)
왕령식민지 (1946~1959)
자치주 (1959~1965)
독립 이후 (1965~현재)
싱가포르의 역사
싱가포르의 역사는 19세기 오늘날 '싱가포르'의 수립 이후와 그 이전 역사로 구별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14세기부터 싱가포르는 국제 무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잡았다.
싱가포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 싱가푸라 왕국이 13세기 말부터 약 100년 간 싱가포르를 지배했고, 뒤이어 이슬람 국가였던 믈라카 술탄국과 조호르 술탄국이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인도 제국 예하 행정구역이었던 벤클룬 주재관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가 1819년 조호르 술탄국 술탄과 협상을 하여 싱가포르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했고, 1826년 싱가포르는 페낭 및 믈라카와 함께 해협 식민지가 되었다. 1830년부터 1867년까지 해협 식민지는 인도 제국의 행정 구역에 속해 있었고, 1863년 싱가포르는 영국의 왕령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15년 싱가포르에서 폭동이 발생했지만 곧 진압되었다.
20세기 싱가포르는 영국 해군의 해군 기지 역할을 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싱가포르에 영국 해군과 영국 공군 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2년 태평양 전쟁 중 싱가포르는 일본 제국 육군과 해군의 합동 공격에 함락되었다.
함락 직후 일본군은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이곳에서 중국계를 비롯한 반일 싱가포르인을 학살하였다.
이후 3년 간 싱가포르는 쇼난도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마라야의 사실상 행정 수도 역할을 하였고, 일본 제국의 병참 기지로 활용되었다.
1945년 9월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는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영국 정부는 싱가포르 정계와 협상 끝에 1959년 싱가포르의 자치를 인정했지만, 여전히 국방, 안보 등 주요 문제는 영국 정부가 맡았다.
그러나 1959년 완전한 자치를 얻었을 때, 싱가포르 주정부는 국기, 군, 국가, 문장 등 오늘날 싱가포르의 국가 상징을 제작하였다.
1962년 영국 정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추진하기 위해 인민행동당의 당수였던 리콴유가 말라야 연방의 툰쿠 압둘 라만과 회담을 가졌고, 국민투표 이후 1963년 말레이시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말레이 정계와 싱가포르 주정부는 여러 사안에 대해 충돌했고, 1964년 싱가포르 인종 폭동 이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1965년 8월 7일 싱가포르 독립에 합의하였다.
싱가포르는 1965년 8월 9일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불황과 인종 갈등을 극복하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부상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유엔 등 주요 국제 기구에 참여하며 지역 강국으로 성장했다.
고대 싱가포르
이 부분의 본문은 테마섹입니다.

파라메스와르를 묘사한 그림

13세기 무렵 제작된 싱가포르석. 아직 문구가 해독되어 있지 않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기에 말레이반도는 막연하게 나마 "황금 반도"(고대 그리스어 Χρυσῆ Χερσόνησος, 크리세 케르소네소스)로 알려져 있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는 싱가포르에 해당하는 지역을 반도의 끝이란 의미에서 "사바나"라고 불렀다.
3세기 무렵 중국은 싱가포르섬을 포라중(蒲羅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말레이어의 "풀라우 우종(Pulau Ujong, 끄트머리 섬)을 음사한 것이다..
7세기에서 10세기 무렵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해역을 장악하고 있던 스리위자야의 지배 아래 있었다.
1025년 남인도를 근거지로 하고 있던 촐라의 라젠드라 1세가 인도양을 건너 스리위자야를 침공하였다.
촐라는 싱가포르섬에 있던 테마섹(Temasek)을 수십 년 동안 점령하였는데 이 이름은 중국에서 단마석(單馬錫)이라고 음차하였다.
그러나 촐라의 테마세크 점령은 촐라측 기록엔 남아있지 않고 《말레이 연대기》에 언급되어 있다.
자바섬 출신의 시인 나가라크레타가마이 1365년 쓴 서사시는 싱가포르섬에 세워진 도시를 "투마시크"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아마도 "항구"를 뜻하는 말일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 연대기》는 스리위자야의 왕자 스리 트리 부와나(상 닐라 우타마)가 13세기 무렵 테마세크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스리 트리 부와나가 사냥을 떠나 싱가포르섬에 상륙하여 보니 낮선 짐승이 있었는데 주민들이 그것을 사자라고 부렀다고 한다.
스리 트리 부와나는 이를 상서로운 징조로 여기고 도시를 세우고 사자의 도시 즉, "싱가푸라"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싱가포르의 기원이지만 실제 싱가포르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무비지》에 그려진 〈정화 항해도〉에 표시된 싱가포르. 담마석(淡馬錫)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 옆의 용아문(龍牙門)은 오늘날 케펠항이다.
1320년 몽골 제국은 오늘날 케펠항에 해당하는 롱야먼(龍牙門, 용아문)으로 무역 사절을 파견하였다.
1330년 무렵 중국의 여행가 왕다유안(汪大渊, 왕대연)이 싱가포르섬을 방문하고 롱야먼이 테마세크와 말레이반도의 반주(班卒, 반졸]]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였다.
반주는 오늘날 포트 캐닝힐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싱가포르 고고학회는 개닝 힐 요새를 발굴하고 14세기 무렵 이 자리가 중요한 무역 거점이었음을 밝혔다.
왕다유안은 롱야먼에 싱가포르섬 원주민인 오랑 라우트와 중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싱가포르는 가장 먼저 중국 밖에 화교 사회가 형성된 지역들 가운데 하나로서 많은 고고학적 발굴 및 역사 연구가 있어왔다.
14세기 무렵이 되면 스리위자야는 이미 멸망하였고 싱가포르섬을 비롯한 말레이반도는 시암(오늘날의 태국)과 마자파힛 제국 사이의 각축장이 되었다.
《말레이 연대기》는 마자파힛이 싱가포르섬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으나 몇 년 후 세워진 믈라카 술탄국이 말레이반도 전역과 싱가포르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기록에는 팔렘방이 거점이었던 팔라메스와라 술탄이 데마세크의 시암인 지배자를 죽였고 그가 믈라카 술탄국을 세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고고학 발굴 결과는 이 무렵 포트 캐닝의 거주지는 폐허가 되었지만 싱가포르섬에는 작은 규모의 무역 거점이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믈라카주가 중심지였던 믈라카 술탄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하여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섬 그리고 인근 다른 섬들까지 지배하게 되었다.
16세기 무렵 포르투갈이 동남아시아 해역에 들어왔을 당시 싱가포르는 이미 쇠락한 상태였다.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는 싱가포르섬에 대해 "거대한 폐허"만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은 믈라카 술탄국을 침공하였고 믈라카가 함락되자 술탄은 도피하여 조호르 술탄국을 세웠다. 싱가포르섬은 이후 조호르 술탄국의 지배를 받았다.
1613년 포르투갈은 싱가포르섬을 점령하였고 이후 2세기 동안 이슬람은 싱가포르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1819년: 영국령 싱가포르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16세기에서 19세기 사이 말레이 제도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주의가 횡행하였다.
첫발을 디딘 곳은 1509년 믈라카에 도착한 포르투갈이었고 17세기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식민지 점령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말레이 제도의 중요 항구를 거의 모두 점령하여 네덜란드 식민제국으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플랜테이션을 독점하여 막대한 부를 거머쥐었다.
한편 네덜란드의 사례를 본 영국도 영국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인도 아대륙에 대한 식민 점령을 시작하였으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1818년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식민지인 영국령 븡쿨루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말레이 제도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영국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당시 영국 제국의 주요 무역로였던 인도와 중국 사이의 항로의 결정적 위치에 영국 소유의 항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당시 동남아 지역에서 영국 소유의 항구는 말레이반도 서안의 피낭이 유일하였다.
1819년 1월 28일 싱가포르에 도착한 래플스는 믈라카 해협에 인접한 이곳이 자신이 구상한 새 항구를 세울 적지라고 직감하였다. 싱가포르섬은 식수도 충분하였고 숲이 울창하여 선박을 수리할 목재를 구하기도 쉬웠다.
무엇보다 인도와 중국 사이를 왕복하는 무역로는 반드시 싱가포르 앞바다를 지나야만 하였다.
래플스가 싱가포르강 하구에서 새 항구 건설지를 무색하고 있을 당시 그곳에는 대략 150명의 말레이 인과 30여 명의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 지역을 관리하고 있던 세력은 조호르 술탄국이 파견한 관리인 테멘궁과 1811년 조호르에서 건너온 1백여 명의 말레이 인이었다.
그 외에 오랑 라우트와 같은 원주민까지 합쳐 당시 싱가포르섬의 전체 인구는 1천 명 가량이었다.
싱가포르섬은 명목상 조호르 술탄국의 영토였지만 당시 조호르는 네덜란드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또한 조호르는 술탄인 후세인 샤와 그의 동생 텡쿠 압둘 라흐만 사이의 알력으로 지배층이 분열되어 있었다.
래플스는 둘 사이의 알력을 이용하여 술탄 후세인 샤에게 연공으로 5천 스페인 달러를 그리고 싱가포르의 총독 격인 테멩공 에게 3천 스페인 달러를 지불하고 싱가포르의 관할권을 사들였다.
후세인 샤는 그 댓가로 영국이 싱가포르에 무역항을 건설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1819년 2월 6일 조약이 채결됨에 따라 싱가포르에 무역항이 세워지게 되었다.
래플스가 처음 싱가포르에 도착 했을 당시 인구는 대부분 말레이인으로 1천여 명 정도였고 수십 명의 중국인이 있을 뿐이었지만 근대적인 중계 항구가 되면서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첫 인구 조사가 이루어진 1824년에는 10,683 명이 되었으며 이 가운데 6,505 명은 말레이족과 부기족이었다.
영국이 항구를 건설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부터 다수의 중국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1826년 인구 조사 때는 이미 중국인의 인구가 말레이족의 수를 넘어서 부기족과 자와인 다음의 3위에 올라서 있었다.
싱가포르의 이민과 인구 성장은 꾸준히 지속되었으며 이민자들은 주로 말레이반도, 중국, 인도 등지 출신이었다. 1871년 싱가포르 인구는 10만 명을 바라보게 되었고 이 가운데 절반은 중국인이었다.
중국이나 인도에서 건너 온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플랜테이션이나 주석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이들은 몇 년 동안 일하여 돈을 모으면 다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희망으로 남성 노동자 혼자 싱가포르로 들어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성장한 이후인 20세기 초에서 중반 사이의 이민은 앞 세대와 달리 온 가족이 함께 영구적으로 정착하고자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들과 그 후손이 현재 싱가포르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1819–1826년: 성장 초기

1822년 싱가포르 도시 계획
1819–1826년: 성장 초기 / 식민지 초기 싱가포르
래플스는 싱가포르 조약을 채결 한 뒤 곧바로 자신의 집무지인 븡쿨루로 귀환하였고 후속 조치는 윌리엄 파커(William Farquhar) 대령의 관할 아래 이루어졌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항구를 건설하는 일은 매우 힘든 사업이었다.
싱가포르를 경제자유구역인 자유항으로 두려는 패플스의 계획에 따라 파커는 항구를 드나드는 수송선에 대해 아무런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파커는 세인트 존스 아일랜드에 사무실을 세우고 믈라카 해협을 지나는 선박들이 싱가포르에 기항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한편 세수를 위해 이민 장려 정책을 실시하였다.
1819년 싱가포르를 경유한 무역량은 40만 스페인 달러였지만 몇 년 뒤인 1821년 싱가포르의 인구는 약 5천여 명으로 늘었고 무역량은 8백만 달러로 급증하였다.
1824년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고 무역량이 2천2백만 달러에 이르면서 싱가포르는 장기간 유지될 수 있는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래플스는 1822년 10월 싱가포로 돌아와 파커가 내린 많은 결정들을 재검토 하였다.
초기 항구 건설의 어려움 속에서도 파커는 비교적 괜찮은 지도력을 발휘하였으나 래플스가 생각하는 도시 발전과는 다른 정책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파커는 세수 확보를 위해 도박장과 아편 판매를 허용하였고 노예 무역과 무기 암거래를 눈감아 주고 있었다.
이로 인해 싱가포르는 도박과 아편이 만연한 도시가 되어 가고 있었으며 래플스는 파커의 이러한 조치들을 취소하였다.[34] 래플스는 파커의 지위를 해제하고 그 자리에 존 크로퍼드를 임명하였다.
래플스는 싱가포르의 도시 계획을 수립하였다.
1823년 6월 7일 새 행정관이 된 존 크로퍼드는 싱가포르에 대한 권한을 놓고 조호르의 술탄 그리고 술탄국의 명목상 싱가포르 총독인 테멩공과 2차 조약을 추진하였다.
크로퍼스는 매월 종신 연금으로 술탄에게 1500 달러, 그리고 테멩공에게 800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싱가포르의 조세 수취권을 비롯한 대부분의 권리를 매입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싱가포르는 기존의 말레이 관습이나 샤리아가 아닌 영국법에 의해 지배되었다.
1823년 10월 래플스는 영국으로 귀환하였고 몇 년 뒤 사망하였다.
한편 1824년 싱가포르는 조호르 술탄국의 주권이 완전히 부정되고 영국 동인도 회사에 귀속되었다.

1842년 건립된 천복궁(天福宮). 마조를 숭배하는 사원이다.

식민 초기 중국인 이주자들이 밀집한 상점가인 싱가포르 차이나타운. 빅토리아 양식 건축을 흉내낸 페인티드 레이디스(Painted ladies)의 특징을 보인다.
영국이 싱가포르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자 네덜란드는 이를 동아시아 네덜란드 식민 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겼고 영국이 계속하여 싱가포르를 지배할 수 있을 지는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매우 중요한 거점 항구로 발전하자 영국은 싱가포르에 대한 지배를 영속화하고자 하였다. 둘은 1824년 네덜란드-영국 조약을 통해 싱가포르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말레이반도 북부를 포함한 믈라카 해협 전체를 두 나라의 공동 관리 아래 두기로 합의하였다.
1826년 싱가포르는 영국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는 해협식민지의 일원이 되었다.
1830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싱가포르를 다른 해협 식민지들과 함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자산"으로서 벵갈 지구로 편입하였는데 이는 이후 인도 제국 시기까지 유지되었다.
이 시기 싱가포르가 믈라카 해협의 중요한 거점 항구로 성공한 원인으로는 다음의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인도와 중국 사이를 왕복하는 필수적인 항로였고 때마침 도입된 증기선의 출현으로 해상 무역량이 증가하였으며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유럽까지의 수송 비용이 극적으로 낮아져 해운 수요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또한 결국 말레이반도 대다수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영국이 세운 영국령 말라야에서 생산되는 고무 역시 산업화의 진전과 함께 수요가 폭발하였다.
한편 싱가포르의 경쟁 항구인 바타위아(오늘날의 자카르타)나 마닐라는 여전히 출입 선박에 대해 세금을 부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세금이 없는 자유항인 싱가포르가 더욱 경쟁력을 지닐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영국 선박 뿐만아니라 인도나 이슬람, 중국 상선들도 다른 곳 보다 싱가포르를 선호하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싱가포르의 연간 화물 유통량은 더욱 급증하여 1880년 1백 5천만 톤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증기선 수송량은 약 80% 정도였다.
싱가포르 상업 활동의 근간은 중계무역으로 수입된 화물은 통관 절차 없이 보세구역에서 바로 다시 수출되었다.
이 때문에 국제 무역상은 약간의 수수료와 창고 비용만으로 무역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인도에서 온 화물선은 싱가포르에서 화물을 내리고 중국산 화물을 되실어 인도로 돌아가는 것이 직접 중국을 왕복하는 것 보다 이익이 크다.
당시 싱가포르를 출입하는 상선은 대부분 유럽 상사 소속이었지만 중국의 양행(洋行)을 비롯하여 아랍, 아메리카, 인도 등 세계 각지의 선박이 싱가포르로 몰렸다.
1827년이 되자 중국인이 싱가포르 주민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중국인의 후손은 현지 주민과 섞이면서 프라나칸 또는 바바뇨냐(민난어峇峇娘惹)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인들은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과 노동자로 일하는 쿨리 같이 다양한 계층이 있었다.
1839년 - 1842년 사이의 제1차 아편 전쟁과 1856년 - 1860년 사이의 제2차 아편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인의 수는 감소하였지만 전쟁이 끝나자 중국인의 수는 곧바로 더 늘어났다.
말레이족은 싱가포르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사람들로 어부에서 장인을 비롯하여 각양 각종의 일에 종사하였다. 이들은 말레이어로 항구를 뜻하는 "캄풍"이라 불리는 지역에 몰려 살았다.
1860년 이후 인도에서 일거리를 찾아 이민자가 몰려왔다.
이들은 각종 비숙련 노동에 종사하였다.
또한 세포이 역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병력으로서 싱가포르에 들어왔다.
이처럼 싱가포르는 급격히 성장하면서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갖는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복잡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영국 당국의 관심은 무역항의 유지와 수익에 있을 뿐 도시 자체에 대한 공공 행정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이 시기 세계는 처음으로 전 세계가 동시에 같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펜데믹을 겪었다.
콜레라와 천연두가 전 세계에 만연한 것이다.
싱가포르도 1830년에서 1867년 사이 이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공공 의료 서비스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싱가포르의 규모는 급격히 증가하였지만 영국 동인도 회사의 관리 인력 수는 제자리 였고, 더욱이 책임자는 싱가포르가 아니라 멀리 동인도 회사 본부에 앉아 있었다.
행정 공백으로 막지 못하여 창궐한 역병에 주로 임시로 거주하는 일용직 남성 노동자가 희생되었고 도시는 무법 천지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1850년 싱가포르의 인구는 대략 6만 여명이었지만 경찰관은 고작 12명에 불과하였다.
이 때문에 매춘과 도박 그리고 아편이 만연하였다.
오늘날 삼합회의 전신인 중국계 폭력 조직은 조직원이 1만 명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경쟁자와 전쟁을 일삼았고 수 백명의 조직원이 살해 당하기도 하였다.
도시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유럽계 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하였다.
1854년 《싱가포르 자유 출판》은 싱가포르를 "마약에 찌든 동남아인들이 모인 작은 섬"이라고 묘사하였다.

1890년 독일에서 제작된 지도에 실린 싱가포르
왕령 식민지 시기
싱가포르는 꾸준히 성장하였지만 해협식민지 당국의 무능한 행정으로 싱가포르에 기반한 상업 커뮤니티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1867년 4월 1일 영국은 해협 식민지를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는 인도 제국에서 분리하여 국왕 직할의 왕령 식민지에 편입하였다. 왕령식민지는 런던의 식민지부가 직접 관할하였다.
왕령 식민지라 하더라도 대부분의 식민지에 대한 통치는 동인도 회사 등에 대해 위임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였지만 싱가포르에서 보인 동인도 회사의 무능으로 인해 이루어진 이번 조치는 싱가포르의 경우 현지의 식민지 행정위원회와 해협 식민지 입법회에 의해 행정기관이 작동하도록 하였다.
각 위원회의 위원은 임명직이긴 하였으나 영국은 해가 지날수록 위원으로 뽑히는 사람 가운데 현지인을 늘려 불만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1914년 무렵 독일의 여행 안내서 《베데커》에 실린 싱가포르의 지도.
새롭게 정비된 식민지 정부는 당면한 몇 가지 주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1877년 중국인 관리 담당이었던 윌리엄 피커링은 화교 사회에 대해 쿨리를 노예처럼 사고 파는 행위와 여성에 대한 매춘 강요를 금지한다고 선포하였다.
1889년 싱가포르 지사 세실 클러먼티 스미스는 폭력 조직을 추방하였다.
이후 조직 폭력단은 공공연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사회의 고질적 문제는 여전하였는데 특히 보건 문제와 주택 부족 문제는 전후 시대까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남았다.
싱가포르의 범죄 조직 역시 지하로 숨어들었을 뿐 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홍콩과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에 퍼져 있던 조직 폭력단들과 연계하여 국제적인 범죄 조직망인 삼합회의 일원이 되었다.
싱가포르 삼합회 조직인 훗날 네덜란드에 거점을 마련하고 아콩으로 악명을 얻었다.
중국인이 과반인 싱가포르의 상황은 정치 영역에서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쑨원이 청나라 타도를 위해 결성한 중국동맹회는 1906년 싱가포르 지부를 창설하였다.
중국동맹회 싱가포르 지부는 이후 동남아시아의 거점이 되었다.
중국동맹회는 결국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을 세우는 데 일조한다.

1890년대 싱가포르 탄종 파가르의 빅토리아 도크
제1차 세계 대전은 싱가포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
당시 전장은 주로 유럽과 대서양 지역이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는 전쟁의 영향을 비켜갈 수 있었다.
1차 대전과 관련하여 싱가포르에서 일어난 사건은 영국이 치안 유지를 위해 고용한 세포이들이 오히려 전쟁을 틈타 영국에 반기를 든 1915년 싱가포르 폭동이 유일한 군사적 충돌이었다.
이 반란은 영국이 무슬림이 대부분이던 세포이를 오스만 제국과 싸우도록 출병을 명령한 것 때문에 일어났다.
세포이의 입장에서 이러한 영국 제국의 명령은 동족 상잔을 부추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차 대전 후 영국은 커져가는 일본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싱가포르 군항을 설치하기 위한 자원을 집중하였다.
5억 달러의 비용이 들어간 군항은 1939년 완공되었으며 당시 세계 최대의 건선거와 3위의 부선거를 갖추었다.
싱가포르 군항은 영국 해군의 반년 치 보급 물자를 비축하였다.
또한 군항 수비를 위해 15 인치 해안포를 설치하고 텡아흐 공군 기지를 건설하여 영국 왕립공군 전투비행단를 배치하였다.
윈스턴 처칠은 싱가포르 군항의 지정학적 가치를 "동방의 지브롤터"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싱가포르 군항은 이곳을 기항으로 삼는 함대가 없었다.
대신 본국의 연안 함대를 필요할 경우 수에즈를 경유하여 싱가포르에 파견하는 것이 영국 해군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막상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연안 함대는 모두 영국 본토 항공전에 발이 묶여 영국을 벗어날 수 없었다.
Sources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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