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한국사의 이해 [웹북] <역사탐구>/3.조선시대사 (1392~1910)

[웹북] 조선의 문화

동방박사님 2026. 7. 1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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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문화

한국의 전 역사를 통하여 문화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은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제정이었다.

세종은 1446년에 최만리 등 고루한 학자들의 반대를 일축하고, 한민족 최대의 문화적 창조물인 한글을 창제, 반포하였다.

민족의식의 대두와 문자의 실용성에 착안하여 한자에서 음절 단위의 원리를 채용함과 동시에 알파벳 문자에서 단음요소의 원리를 채택하여 한국 고유의 문자를 만든 것은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우수한 과학적인 문자의 하나로서 민족문화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자로 <용비어천가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등을 지어 간행했으며, 그 뒤에는 여러 가지 불경과 두보의 시 등이 한국어로 번역되었고 후기에 이르러서는 실학사상 이 보급되면서부터는 신경준·황윤석·유희 등의 학자가 나와 이 방면에 깊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왕권이 안정됨에 따라 각종 서적의 편찬 사업이 활발히 일어났다.

우선 역사는 정치의 귀감으로서, 지지는 정치의 자료로서 절대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초기부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사서로서는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전조의 역사와 한편으로는 조선 역대왕의 실록이 대대로 편찬, 보관되었다.

세조때부터는 국조보감이 편찬되어 그 뒤에도 계속되었고, 성종때는 중국의 자치통감을 본받아 동국통감이 만들어졌다.

지지로는 세종 때의 팔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이 편찬되었다.

 

조선 초기에 국가의 주자가례 보급 노력은 사대부 가문의 불교식 제례 설행을 제한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부터 그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육전등록등의 뒤를 이어 만세성법으로서 종합적으로 재편성하여 이루어진 것이 성종 때의 경국대전이었다.

그러나 그 뒤 부분적인 개혁이 있었으므로 영조 때의 속대전정조 때의 대전통편고종 때의 대전회통등의 편찬을 보게 되었다.

정조는 궐내에 규장각을 두고 재주 있는 문사를 뽑아 학문의 연구와 서적편찬에 종사케 했고, 홍재전서라는 자신의 문집을 남기는 한편 대학유의, 주서백선, 오경백선등 왕이 친히 편찬한 것도 있었다. (조선 후기 문화 발췌)

 

조선 왕조 초에는 과학과 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여러 가지 발명과 저술이 출현하였다.

농업에 관해서는 농사직설, 강희맹이 지은 사시찬요, 잠서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천문학 또한 크게 발달하여 측우기와 천문관측기인 대·소 간의, 천구의인 혼천의, 해시계인 앙부일영, 물시계인 자격루 등이 만들어졌는데 장영실 등의 공이 컸다.

군사에서는 동국병감, 병장도설등의 병서와 화포·병선이 제작되었으며, 의학서로는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동의보감등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국가의 편찬 사업은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와서 계미자·갑인자 등의 금속 활자가 대량으로 주조되었고, 그 후 인쇄술은 더욱 발달하여 각종 활자의 출현을 보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양반들은 미술을 장인들이 하는 일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양반으로서 미술을 즐긴다는 것은 여기에 불과했고 이러한 경향이 회화에서 문인화라고 불리는 수묵화를 유행시켰다. 조선 초의 화가로는 양반 출신의 강희안, 화원이었던 안견·이상좌·최경 등이 있었다

서예|서도에서는 안평대군·양사언·한호 등이 명필로 이름이 높았으나 대체로 전래의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공예에서는 조선자기의 대표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되는 백자가 있었다.

조선 초기 이후 자기는 차츰 가냘프고 곡선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소박하고 순수한 직선적 형태로 변했다.

 

보부상단을 조직하여 훈도

태조는 행상단(行商團)의 대표자인 백달원에게 유아부보상지인장(唯我負褓商之印章)이라는 옥도장을 하사하여 부보상의 명칭을 부여하였고 사람의 도리로서 위상애당(爲上愛黨) 병구사장(病救死葬)의 여덟 글자의 교서를 내려 훈도하였다.

몇 가지 전설에 따르면 백달원이 이성계(李成桂)의 건국 창업에 충성을 다해 그 대가로 부상청이 설치되었다 한다.

태조는 즉위 뒤 백달원의 소원에 따라 소자본인 8도 행상인을 구제할 목적으로 각 주(()에 임방(任房)을 설치하게 하고, 침식, 질병의 치료, 장의(葬儀) 등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보부상(褓負商)이라 불리는 행상(行商)의 기원(起源)은 이미 고대 사회에서 비롯되었지만, 전국적인 상인 단체로 조직된 것은 조선 초기로 추정되고 있다.

보부상은 한성부에서 8도의 도접장(都接長)을 차출하면 일종의 신분증인 도서(圖書 또는 驗標라고도 함)를 함께 발급함으로써 보상의 신분을 보장하였다.

1883년인 고종 20년에는 혜상공국(惠商公局)을 설치하면서 부상단과 보상단을 통합하여 군국아문(軍國衙門)에 소속시킨다.

나중에는 다시 황국협회(皇國協會)에 이속시키게 된다.

 

려계 신덕왕후 묘터의 석재를 활용하여 축조한 중심 통로의 대광통교

권근  표전 문제.

대광통교는 태조 때 토교(土橋)로 축조하였던 것인데, 1410년 태종 10년에 홍수로 파괴되자 다시 석교(石橋)로 개축하였다.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 통로에 큰 다리라는 뜻이었다.

다리 건설에 사용되었던 석재는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의 묘인 정릉의 천장(遷葬)으로 봉토하려던 12개의 석각신장(石刻神將)을 뽑아 이용하였다.

신덕왕후의 친정인 신천 강씨 가문은 고려말의 권문세족으로, 신라 말엽 강호경의 아들은 태조 왕건의 외고조부였다. 정종·태종는 신의왕후의 소생으로 신의왕후의 본관은 안변(安邊)인데, 안변 한씨의 본관은 사실상 청주와 곡산 2본으로 되어있으나 청주 한씨로 일원화하였다.

곡산 한씨는 송나라에서 귀화한 한예(韓銳)를 시조로 하고 있고, 청주 한씨는 기자(箕子)의 후예인 우량(友諒)의 원손 한란(韓蘭)을 시조로 하고 있다.

한란은 고려 태조가 견훤(甄萱)을 정벌할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워 삼중대광 문하태위(三重大匡門下太尉)가 되고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에 녹훈되었다.

 

품계가 아닌 왕실 의례에 따른 상하를 따져 관복을 제도화

태조 초년부터 복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자체의 제정보다도 명나라 사신이 왕의 면복(冕服)이나 왕비의 관복 등을 가지고 오면 그것을 착용하였다.

고려 시대에는 960년 광종 113월부터 관료제도에 따라 사색공복제도를 정하여 자삼(紫衫), 단삼(丹衫), 비삼(緋衫), 녹삼(綠衫)의 사색공복을 입는다.

1426년 세종 8년에는 의례(儀禮)의 성격에 따라 입는 옷을 구분하여 제도화한다.

조정에 들어가서 임금에게 치하(致賀)의 말을 올릴 때는 조복(朝服), 제례(祭禮) 때는 제복(祭服),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제복으로는 공복(公服), 평상 집무시에는 상복을 입도록 정하였다.

이 복제도(服制度)가 정해지기 전에는 관복은 한가지만으로 두루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분별로 집의 크기와 세부치장을 제한

조선시대의 주택법규로 1395년 태조 4년에 신분별로 집터의 크기를 제한하는 가대제한(家垈制限)을 마련하며 법령이 제정된 후인 1431년 세종 13년에는 주택의 규모와 장식을 제한하는 가사제한이 반포되었다.

이후 1440년 세종 22년에 개정된 법령에서는 대군의 경우 전체규모 60간 안에 누() 10, 정침(正寢), 익랑(翼廊)을 두고, 주요구조부재의 치수를 제한하는 등 규제내용이 세분화되었으며, 1449년 세종 31년의 개정에서는 누 10, 정침, 익랑 외에 서청(西廳), 내루(內樓), 내고(內庫) 및 사랑(斜廊)과 행랑(行廊)으로 규제대상 건물이 더욱 세분화되었다.

주요 구조부재의 치수도 전면간의 길이(間長)와 전후퇴간을 합친 길이(間前後退竝) 및 퇴기둥(退柱)의 높이 등으로 각 건물의 규모를 구체적으로 규제하였다.

조선시대 주택이 신분에 따라 집의 규모는 물론 세부치장까지 엄격히 제한받게 된다.

 

조선 중기의 문화

되풀이되는 사화로 많은 학자들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사색적이고 이론적인 학문의 연구와 후진 교육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의 비위에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을 탐구하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자학과 같은 학문이 적합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시에 주자학의 대가를 배출하여 그 융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같은 주자학이라도 여기에는 두 가지 계통이 있었다.

그 하나는 주리파(主理派), 다른 하나는 주기파(主氣派)였다.

주리파의 선구자는 이언적(李彦迪)이며, 이를 대성한 이는 이황이었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주자학을 마음의 학문으로 심화하였다.

이황 이후 주리파는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제자들이 영남학파(嶺南學派)로서 계통을 이어 내려왔다.

주기파의 선구자는 서경덕이었으며, 그 뒤 기대승이 나서 이황과 논쟁을 폄에 이르러 주기파가 세를 떨쳤는데, 이를 대성한 이가 이이였다.

 

본래 주기설은 우주의 근원적 존재를 신비적인 이()보다는 물질적인 기()에서 구하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이 주기파에서는 사물의 법칙성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에 서는 것이다.

이 주기파는 이이의 학우인 송익필(宋翼弼), 그의 제자인 김장생 등 소위 기호학파(畿湖學派)에 계승되었다.

 

한문학적인 경향이 짙은 경기체가(景幾體歌)나 악장(樂章)을 대신하여 조선 중기에는 가사(歌辭)가 크게 발달하였다.

가사를 대성한 이는 정철(鄭澈)이며, 그는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비롯하여 많은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또한 고려 말기 이래로 시조(時調)가 발생하더니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발전하여 조선 왕조 국문학의 대표적인 한 분야가 되었다.

조선 왕조의 시조문학은 박인량·신흠 등을 거쳐 윤선도에 이르러 대성되었다.

물론 이 밖에도 무수한 시조 작가들이 있었고, 그들이 읊은 제재(題材)도 갖가지였다.

그런 중에서 최대의 시조 작가 윤선도의 작품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짙게 나타나 있다.

 

특히 달마와 같은 선승과 신선을 주로 그렸는데, 이는 17세기 초의 이단 사상의 유행과 짝을 이루는 화단의 이단이었고 명나라 저장 지방 화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이후로 청초 남종화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18세기의 영·정 시대에 진경산수가 등장했고 이 시기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던 의궤와 국방 지도 제작에 화원들이 참가하여 한국의 산수를 그려 넣는 과정에서 개성 있는 화풍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에 천기·진기주의 문학을 강조하던 김창업, 김창협, 김창흡의 후원은 받은 영조대의 정선이 진경산수의 대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양반 출신으로서 화원이 된 그는 금강산을 비롯하여 한양 주변의 수려한 경관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냈는데, 날카로운 바위산은 선묘로, 부드러운 흙산은 묵묘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김홍도는 현감을 지낸 양반이었으나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궁정 화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병풍, 행렬도, 의궤 등 궁중 풍속을 많이 그렸는데, 이는 기록화의 의미를 지닌 까닭에 섬세하고 정교한 필치를 더 필요로 하였다.

김홍도는 밭갈이·추수·집짓기·대장간·씨름·풍악놀이·혼인풍속 등 농촌서민들의 생활상을 낙천적이고 익살스런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는 정조 시대의 밝고 활기찬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슷한 화풍을 지닌 김득신·김석신 형제도 정조 때 활약했다 김홍도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신윤복은 김홍도와 대조적으로 주로 도시인의 풍류 생활과 부녀자의 풍속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인 필치로 묘사하였다.

심사정은 18세기 화가로서 정교하고 세련된 필치의 산수를 잘 그려 정선의 그림과는 대조를 보였다.

정조 때의 이인상·강세황은 뛰어난 문인화가였다. 특히 강세황은 시··화의 삼절로 널리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서양 수채화의 기법을 동양화와 접목시켜 새로운 산수화풍을 성립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공예 예술도 발전하였다.

그릇 공예에서는 종전의 분청사기가 자취를 감추고, 다종다양한 형태의 청화백자가 널리 유행하였다. 흰 바탕에 푸른 유약을 발라 꽃··산수·인물 등 다양한 그릇을 넣어 예술성이 높아졌는데, 중국에서 수입하던 푸른 유약을 자체 개발·생산한 것이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장롱, 책상, 소반, 의자 등 실생활과 문방구로서 실제 기능을 가진 목공예의 발전은 조선 후기 산업 발달에 따라 주민 생활의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특히 쇠뿔을 쪼개어 아름다운 무늬를 표현하는 화각 공예의 발달은 조선 특유의 멋이기도 하였다.

조선 말기의 땔감장수 또는 나뭇꾼

서민 문화

조선 후기의 문학작품이 판소리와 잡가, 소설과 가면극의 형태로 나타난 것도 이 시대 문학의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판소리는 지방마다 창법이 달라 서편제·동편제의 구별이 있었다.

각종 가면을 쓰고 노래와 춤으로 엮어지는 가면극(탈춤)19세기에 이르러 더욱 정리되고 성행되었는데, 황해도 봉산탈춤〉〈강령탈춤, 안동의 하회탈춤, 송파의 산대놀이, 통영의 오광대놀이, 함경도 북청의 사자춤이 유명하다.

탈춤은 무당의 굿판과 연계되어 뒤풀이로 벌어지는 것이 관례로서, 내용은 귀신을 축복하고 양반사회를 풍자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었다.

19세기에는 대중소설이 유행하여 민간부녀자 사이에 널리 인기를 끌었다.

 특히 19세기 중엽에 완월 방대한 분량으로 효제충신의 내용을 담은 것이다.

또한 농촌의 세시풍속을 노래한 농가월령가, 한양의 아름다움과 번영을 노래한 한양가, 중국의 사행을 노래한 연행가, 그리고 규방가사도 널리 불렸다.

이 밖에 꼭두각시극과 같은 인형극이 유행했다 19세기의 그림은 한양의 도시적 번영과 한양 양반들의 귀족적 취향을 반영하여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노출을 꺼리는 목욕과 백색피부 선호

제례(祭禮)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해야 하는 관습과 백색피부를 호상(好尙)으로 여김에 인하여 목욕이 성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가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淨房)을 집안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노출을 꺼리는 생활관습으로 인하여 벌거숭이 상태로 목욕하지 않고, 옷을 입은 채로 신체의 부분 부분을 씻어나갔다.

이 때문에 대형의 욕조가 불필요해진 대신 대형 함지박과 대야가 다수 제조되었다.

한편, 조선시대는 질병치료를 위한 온천 목욕 및 한증도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최대의 국립 공업 단지는 한양

궁녀  조선의 궁녀 

조선시대 수공업과 관련된 관청은 모두 한양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한양은 전국에서 가장 결집된 수공업 단지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양에 궁궐과 관아가 집중적으로 배치되면서, 이들이 필요로 하는 수공업 제품을 가까이에서 신속히 조달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오늘날의 종로와 중구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먼저 종로에는 공조를 비롯하여, 경복궁·창덕궁·창경궁 안에 상의원과 사옹원이 있었고, 창의문 밖에는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다.

이 밖에도 수공업 관련 작업장이 종로에 산재해 있었는데 당주동의 내섬시(內贍寺)와 봉상시(奉常寺), 원서동의 사도시(司䆃寺)와 관상감(觀象監), 도렴동의 의영고(義盈庫), 명륜동의 양현고(養賢庫), 적선동의 사온서(司醞署)와 장흥고(長興庫), 견지동의 도화서(圖畵署)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작업장은 공조·상의원·사옹원·조지서 등의 작업장에 비하면 규모가 작고 장인의 수도 적었으나, 대개 궁궐에 납품하는 물건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이 뛰어났고, 자연히 제품도 우수하였다.

 

조선 태종의 도참술서 소각 이후 마을풍수론과 주택풍수론

조선 왕조에서는 유교적인 사회이념과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도참은 유학자들에 의하여 강력히 비판되었고 엄격하게 배제되었다.

다만 조선중후기에 민간에서는 정감록류의 풍수도참서가 널리 유행하기도 했다.

 

조선 왕조에서는 고려 왕조와 달리 유교적인 이념과 합리주의에 근거하였기에, 불교사상이 포함된 도선의 비보풍수론과 예언적·미신적인 도참사상은 유학자들에 의하여 비판되어 배제되었다.

조선 초 1417년에 태종은 도참을 금()하는 왕명을 내려, 도참술서(圖讖術書)가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기에, 개인이 소장한 전국의 모든 도참술서를 모아서 불태우게 했다.

 

조선시대의 풍수 과거과목이 묘지풍수서가 위주가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에 조선 왕조가 유교적인 효 이데올로기와 연관하여 풍수를 수용했던 사회이념적인 정황을 잘 말해준다.

조선시대 풍수론의 특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요소는 마을풍수론과 주택풍수론이다.

조선시대의 묘지풍수론과 주거풍수론은 도참을 철저히 배제하고 풍수논리 자체에 치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운용에 있어서 유교지식인 계층이 주도한 풍수담론이었다.

 

조선후기에 실학자들은 '이상적인 주거지를 선택하고 생활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으로서 풍수 논의를 수용하고 전개하였다.

 

Sources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