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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제국의 도시생활 (2024) - 황제부터 노비까지, 화려한 제국 시대의 모든 것

동방박사님 2024. 11. 24.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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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도시를 중심으로
대명제국의 일상생활이
베일을 벗다
세밀화처럼 복원된 물질문명의 겉과 속

얼마 전 탕웨이 주연의 「대명풍화」라는 중국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되었다. 

손약미라는 여인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을 포기하고 명나라 황태손 주첨기에게 시집을 가서 그를 도와 자신의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질과 재능을 발휘해 위기에 빠진 명 왕조를 구해내는 이야기다. 

눈길을 끄는 것 중 하나는 황궁 사람들의 화려한 차림새였다. 

현대적으로 꾸민 것도 있겠지만 사료를 기초로 되살린 명대의 의복 문화는 당시의 물질문명이 어느 정도의 세련됨을 구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간 명나라 시대의 삶을 다룬 문화사, 사회사 서적으로는 레이황의 『1587, 아무것도 없었던 해』, 티모시 브룩의 『쾌락의 혼돈』, 우런수의 『사치의 제국』 등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 가운데 『쾌락의 혼돈』이 사회의 변화를 이끈 구조적 문제에 천착하고, 『사치의 제국』이 사대부 문인층과 상인 재력가들의 정체성 경쟁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에 나온 『대명제국의 일상생활』은 ‘도시’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다양한 계층과 민속, 의식주, 이를 구속하는 사회체제와 일탈, 사상의 변화와 함께 나아가는 물질문명의 양상 등을 짚어낸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 천바오량은 『중국유맹사』로 일찍이 우리 독서계에 알려진 사회사 전공자로서 명나라의 세부를 그려내기 위해 매우 광범위한 사료를 운용했다는 점은 앞서 나온 책들에 비해 압도적인 면모라 할 수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제1장 도시 풍경

거리의 풍경
호동(골목)에 들어서다
도시 사람과 시골사람

제2장 일상생활

궁정의 차림새와 민간의 차림새
진수성찬과 거친 음식
황궁의 위세, 사대부의 여운, 백성의 실용

제3장 세밀한 예의 제도

사교 예의
가례: 관혼상제

제4장 시정 민속

명절과 의식
인생의 즐거움
대중언론: 민요
분장하고 무대에 오르다
여행
무료함을 달래다

제5장 조정에서 강호까지

황제와 관료들의 심리
황제 후손들의 일상
태감의 일상
사대부들의 백태
시정 공간의 이모저모
강호에 살다
부녀자의 면면

제6장 흔들리는 전통

도시의 경계선
문화 변혁의 충격

저자 소개 
저 : 천바오량 (陳寶良) 
저장성 사오싱紹興 출신으로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싱가포르국립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싱가포르국립대학 중문학과, 베이징사범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시난대학西南大學 역사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베이징대학 명청사연구센터 연구원과 중국명사학회, 중국사회사학회 이사를 겸하고 있다. 중국 사회사를 전공했으며 중국 전통사회의 구조와 계층 간 생활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연구해왔다...

역 : 이화승 (李和承) 
전북 전주 출신으로 타이완 국립사범대학 역사연구소에서 중국 상업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디지털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중국 전통 상인과 상업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저서로 『중국의 고리대금업』 『상인이야기』 등이 있다. 중국 학계에서 비교적 고전에 속하는 정관응의 『성세위언』, 주둥륜의 『장거정평전』과 현대 학자인 리보중의 『중국 경제사 연구의 새로운 모색』 『조총과 장부』, 판수...

출판사 리뷰
7대 대도시의 풍속: 소주의 호고好古 취미와 개봉의 성인용품점까지

이 책은 크게 보면 도시를 하나의 권역으로 삼아 권역끼리의 문화적 표현 양상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경, 남경, 개봉, 소주, 항주, 광주, 양주 등이 주요 도시들이다.

소주 사람들은 옛것을 좋아해서 골동품들을 모방한 고서화나 각종 제기류를 만들어냈고 책상과 침대도 특별한 기교 없이 수수하게 만들면서 고품격을 추구해 전국의 유행을 이끌었다.

항주 풍속은 허황되고 경망하며 각종 소문이 난무하고 사람들이 서로의 명예를 존중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북경은 바둑판처럼 만든 계획도시로 많은 마차와 사람, 정월 대보름날 등록의 화려한 모습, 궁중 주변의 궁시에서 나온 진귀한 골동품,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특산품, 후퉁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소곡 등으로 유명했다.

남경은 호랑이와 용의 형세를 지닌 육조六朝의 수도였고 진회하 양쪽 천변의 건물들과 노젓는 소리, 이름난 기생들로 유명했다. 양주揚州는 소금의 고장이었다.

양주 권역으로 묶이는 휘주 상인들은 소금 장사로 큰돈을 벌었고, 화려한 유흥을 즐겨서 더 유명해졌다.

이곳 문인들은 거문고, 바둑, 서화를 즐기는 것으로 유명했다.

개봉은 북송 시기부터 번성한 도시로, 명대 사람들은 개봉의 ‘성인용품 상점’에서 살 수 있다던 기괴한 성인용품이나 회춘약 등에 기억이 머물곤 했다.

도시 문화를 이끈 두 계층: 상인과 기생

도시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성안에는 의관을 정제한 사대부, 관료로부터 악기를 두드리며 골목을 누비는 소매상들,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흉기를 휘두르는 무뢰한들, 걸칠 옷도 없어 비전원悲田院(수용소)을 들락거리는 거지들, 온몸을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요염함을 자랑하는 미녀와 기생들로 가득했다.

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존재는 상인과 기생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상인은 사·농·공·상 중 사회적 지위가 가장 낮았다. 명대 중기 이후 상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점차 높아져 전국을 돌아다니며 유명 기생집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에 푹 빠졌다.

그렇다고 명대의 상인들이 풍족한 생활, 엄청난 재력, 일확천금, 일시적인 쾌락만을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여러 방법을 이용해서 사회적 지위, 가문의 명예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왕도곤汪道昆은 『태함집太函集』에 휘주 상인 왕汪씨가 자식 교육과 관련해 남긴 “우리 집안은 대대로 평민이었지만 이제 유학을 배워 집안을 빛내려 하니, 앞으로 자손들은 교육을 시키고 장사는 시키지 마라”고 한 말을 수록했다. 

상인들은 돈을 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자손들을 과거 시험으로 정계에 진출시켜 가문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동시에 다양한 문화 활동에 참여하며 사회 명사들과 교류를 맺었다. 

진계유陳繼儒는 『만향당소품晩香堂小品』에서 “휘주의 돈 많은 상인들이 헛된 명성을 좇아 지식인들과 교류를 즐겼다”고 했는데 상인들은 더 높은 수준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연극과 노래를 즐기고 책상 위나 행낭에는 항상 통속소설류를 소지했으며 화려한 정원을 가꾸고 골동품과 서화로 장식하거나 스스로 능숙하게 시문을 지어 높은 문예적 수준을 내보이기도 했다.

가정(1522~1566), 융경(1567~1572), 만력(1573~1620) 연간, 상인들의 사회적 지위에는 현저한 변화가 발생했다. 

당시 문단의 거두인 왕세정王世貞이 휘주 출신 친구인 첨경풍詹景風에게 “휘주 상인들이 소주 문인들을 보면 마치 파리떼가 양 노린내에 꼬이듯 달려든다”라고 비꼬자, 첨경풍이 “소주 문인들도 휘주 상인들을 보면 파리떼가 양 노린내에 꼬이듯 달려든다”라고 답하니 왕세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자부하던 왕세정은 휘주 상인들이 경제력을 앞세워 문화적 욕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을 지적했지만, 첨경풍은 한 수 더 높게 성인임을 자처하면서도 이익을 좇는 문인들의 배금주의적 비열함을 간파하고 맞받아쳤던 것이다.

정덕에서 만력에 이르는 전성기의 소비문화

정덕부터 만력에 이르는 100여 년 동안 도시는 최고의 번성기를 구가했다. 

정덕 초년 남경의 물가는 매우 낮았다. 장작·거위·오리·생선·고기 등 생활용품 가격이 저렴해지자, 고관대작이나 거상 가문에서는 주지육림의 사치를 즐겼다. 

식구가 여럿인 집에서 매일 고기를 먹어도 은 2~3전이면 충분했다. 

짐을 나르는 서민들도 하루 20~30문을 벌었으니, 저녁마다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꾼의 우스갯소리를 들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계절 놀이를 즐겨 태평성대의 호사를 누렸다.

숭정 연간(1628~1644), 이자성이 병사를 일으켜 사방이 소란스러웠지만 소흥紹興 사람들은 여전히 취생몽사에 빠져 있었다. 장대張岱는 『장자시비張子詩枇』 「우산사녀유춘곡寓山士女游春曲」에서 아직도 태평성세라는 환상 속에서 쾌락에 탐닉하고 있는 상황을 기록했다. 

“동이 트기 전, 들뜬 젊은 남녀들을 태운 유람선은 교외 우산寓山(산양山陽 기씨祁氏 명원名園)으로 떠났다. 

아가씨들은 옷을 곱게 차려입고 짙은 화장에 기름기가 번뜩였으며 경박한 젊은이들이 아가씨들 사이를 바쁘게 비집고 다니며 시답잖은 농담을 건네자 아가씨들은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여 키득거렸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까지 놀다가 배에서 재촉하는 북소리가 들리면 아쉽게 귀갓길에 오르곤 했다.”

이자성의 군대가 성을 공격하는 포성이 울려 퍼지고 나서야 북경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비로소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북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강남에 전해지자 인심은 극도로 불안해져 어쩔 줄을 몰랐다. 뒤이어 여진족 팔기병의 말굽이 산해관을 넘어 도시의 골목골목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번화함

갑신과 을유(1644~1645) 사이 왕조가 바뀌어 사대부들이 즐겼던 풍족하고 화려했던 시대는 막을 내리고 곤궁과 혼란의 구렁텅이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경과 항주는 쇠락하여 가슴 아픈 이야기들만 떠돌았다. 과거 금릉金陵(남경의 옛이름)과 항주의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은 흔적도 찾을 수 없고, 북경의 번화함 역시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진회하 천변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생기 가득하고 여행객이 끊이지 않던 서호는 드문드문 말이 물을 먹는 황량한 곳으로 변했다. 

한때 이곳을 방문하던 여행객들은 이제 청산에 뼈를 묻었고, 미인들도 찾지 않아 옛 정취는 감히 돌이켜 볼 수도 없었다.

명청 변혁기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대부에게 왕조의 교체는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과거의 번성을 간직한 진회하 천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누군가 부서진 판교 옆에서 퉁소를 불자 무너진 집터에서 할멈이 문을 열고 나와 “유망했던 젊은 장괴관張魁官의 퉁소 소리 아닌가!”라고 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어렴풋하고 아련한 기억 속에 사람은 간 곳이 없고 애잔한 악기 소리만 허공을 맴돌았다.

기존 도덕에 대한 반발을 자신의 문화로 삼은 명대 도시

청나라 초, 명나라 유민들은 감상주의적인 문학 작품들을 쏟아냈다.

 여회余懷는 『판교잡기板橋雜記』에서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하며 슬픈 정서로 진회하의 흥망사를 기록했다. 모양冒襄은 『영매암억어影梅庵憶語』에서 자신의 첩이었던 동소완董小宛을 생각하며 풍류와 운치 가득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여몽록如夢錄』은 번성했던 개봉이 이자성에 의해 둑이 무너지자 아름답던 중원 도시가 하루아침에 물에 잠겨 화려했던 풍광이 꿈이 되어버린 과정을 묘사했다.

 장대는 『도암몽억陶庵夢憶』 『서호몽심西湖夢尋』에서 남경, 소주, 양주, 항주, 소흥의 연극계·화류계 소식과 명절 모습 등을 산문 형식으로 기록했다.

사대부들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명대 도시의 풍광과 화려한 모습은 과연 어떠했는가?

 물론 원대, 몽골족이 만들었던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被髮左?’던 ‘호풍’의 과거 풍습을 완전히 씻어내고 한·당 시대의 문물을 회복했었다. 

이는 훗날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며 정착시킨 ‘변발剃髮’ ‘정재화령頂載花翎(붉은 솔이 달린 관모)’ ‘기포旗袍(옆 깃이 허리까지 트인 치마)’로 대표되는 청대 문화와도 다른 것이었다.

 명대 도시는 한·당 이래 중원의 전통에 새롭고 독특한 특징을 더해, 기존 전통에 대해서는 일종의 반발로 ‘반도난덕反道亂德(도에 어긋나고 덕을 그르친다)’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근대화라는 세계적 추세와 발을 맞추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는 어렴풋이 남아 있는 명나라 도시의 모습들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본다. 마치 문자로 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395759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