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국제평화 (박사전공독서)/2.외교국제정치

나토의 동진 (2025) - 나토의 확장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 패권주의의 충돌

동방박사님 2025. 11. 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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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냉전 이후 나토의 동진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역학 관계를 파헤친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관계 전문가 서로티 교수는 《나토의 동진》에서 냉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나토(NATO)와 러시아 간의 긴장 관계, 특히 베를린장벽의 붕괴 이후 나토의 동진을 둘러싼 미-러 간의 복잡한 역학 관계를 파헤친다. 

이 책은 냉전 이후 새로운 유럽 안보 체제가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1900년대 주요 강대국들의 결정이 오늘날의 지정학적 긴장을 어떻게 빚어냈는지를 러시아, 미국, 독일, 기타 나토 회원국 등 다양한 관점에서 예리하게 분석한다. 

수백 명 이상 되는 사건 당사자들과의 인터뷰, 대학 도서관, 백악관, 나토 동맹, 외무부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기밀문서들, 당사자들의 자서전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1990년대의 국제관계사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포린 어페어스〉 선정 ‘외교 정책 분야 최고의 도서’, 〈파이낸셜 타임스〉 선정 ‘올해의 도서’로 뽑힌 바 있다.

목차
일러두기_이름과 장소 관련 참고사항
약어

서문_봉쇄옵션

1부 수확과 폭풍, 1989~1992

1장 드레스덴에서의 이틀 밤
2장 알게 뭐야!
3장 선을 넘다
4장 망각과 기회

2부 철수, 1993~1994

5장 삼각형을 사각형으로
6장 흥망성쇠

3부 냉담, 1995~1999

7장 무거운 책임
8장 인치당 비용
9장 오직 시작뿐
10장 미래를 위하여

결론_새로운 시대
감사의 말

저자 소개
저 : 메리 엘리스 서로티
국제관계 분야의 독보적인 전문가이자 세계적인 역사학자국제관계 역사학자이다. 

현재 존스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소속의 헨리 키신저 글로벌 어페어스 센터(Henry A. Kissinger Center for Global Affairs)에서 ‘마리-조세 헨리 R. 크라비스 역사학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하버드 대학교 유럽연구센터의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1968년생인 서로티 교수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역 : 권은하 
미국 UCLA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유엔(UN),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에서 인턴 생활을 거친 후 귀국하여 국가출연연구소에서 십수 년 근무했다.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 또한 문학의 한 장르라는 생각으로 전문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좋은 책을 번역하여 국내외 저자와 독자 사이의 소통을 돕고자 한다. 

옮긴 책으로는 《시진핑의 중국몽》,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 《다...

책 속으로
그 중요한 10년 동안 미국과 러시아가 내린 결정은 실로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원자력 시대가 도래한 이래 가장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는 포괄적·전략적 핵군축의 기회의 창은 비교적 빨리 닫혔다. 

이 책에서 보여주듯 1990년대 말까지 정보기관들은 새로운 핵 경쟁이 도래했음을 보고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형태의 경쟁이 나타났는데, 특히 어렵게 합의한 군비통제협정이 깨졌다. 

이러한 합의가 거의 전적으로 결여된 오늘날의 관대한 세계 환경은 양측이 핵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력의 역할 또한 재평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최

근 몇 년 동안 유럽에서는 탈냉전 이후 미군의 병력 감축과 러시아군의 동진이 모두 역전되었다.
--- 「서문 봉쇄옵션」 중에서

동독의 집권 정권은 “국가안보”를 이유로 그러한 개방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유지할 계획이었는데, 이는 동독인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했던 거짓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무능함을 보여주면서, 동독 정권은 더 큰 여행 기회에 대한 암시를 주려고 했던 시도를 망쳤다. 

1989년 11월 9일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는 책임을 맡았던 불운한 정치국, 혹은 중앙위원회 위원은 마치 정권이 오히려 베를린 장벽의 개방을 선언한 것처럼 들리는 선언을 했다. 

격동의 그해 어수선했던 분위기 속에서 이 실수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날 밤 수천, 수만, 수십만 명의 군중이 국경으로 몰려들어 홍수처럼 넘쳐났고, 아무런 지시를 받지 않은 국경 경비대가 하나둘씩 밀려드는 인파에 양보하기로 함에 따라 그날 밤은 환희의 밤이 되었다.
--- 「1장 드레스덴에서의 이틀 밤」 중에서

베이커는 셰바르드나제와의 대화에서 나온 핵심 개념들을 질문의 형태로 다시 반복해 말하며 본의 아니게 이후 수십 년 동안 논쟁이 될 이슈를 건드렸다.

 “당신은 NATO 밖에서 독립적이고 미군이 없는 통일된 독일을 보고 싶습니까, 아니면 NATO의 관할권이 현재의 위치에서 동쪽으로 1인치도 이동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으면서 통일된 독일이 NATO에 묶여 있기를 원합니까?”

 고르바초프는 어떠한 형태로든 “NATO 관할권”의 확장은 용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베이커 역시 “우리도 그에 동의한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모스크바의 지도자들은 이 대화를 근거로 삼아 미·소 양국 사이에 NATO가 냉전의 경계선을 넘어 동쪽으로 확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해 왔다. 

반면 베이커와 그의 보좌관 및 지지자들은 이것은 가정적인 표현으로서 베이커 국무장관이 제시한 여러 잠재적 옵션 중 하나였을 뿐이고 이후 서면 합의가 없었음을 지적하곤 했다.
--- 「2장 알게 뭐야!」 중에서

결국 고르바초프는 양보하고 타협을 제안했다. 만약 NATO가 소련이 철수한 후 동독 영토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독일군만 주둔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통일을 허용할 것이다.

 두 가지 제한 모두 워싱턴이 피하기를 희망했던 제한이었지만, 독일의 완전한 비핵화만큼의 협상 결렬 요소는 아니었으며, 어쨌든 미국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콜과 겐셔는 양보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독일 연방군 병력의 미래 상한선을 37만 명으로 하는 것에도 동의했다.

 콜은 가능한 한 빨리 기자회견을 열었고,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그 이야기를 방송하기에 바빴다. 

나중에 총리는 부시가 2월에 계획했던 전략이 이제 결실을 맺고 있음을 확인했다. 

콜은 “나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나온 당신의 공식을 사용했다”고 회상하며, 독일은 주권 국가로서 “동맹관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 「3장 선을 넘다」 중에서

옐친은 또한 만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없이 훨씬 더 작은 공화국들의 정치적 연방에 홀로 남겨진다면,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의 빚더미에 시달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러시아는 다른 공화국에 보조금을 지원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옐친은 나머지 연방 국가가 폭풍 속으로 가라앉는 동안 자신의 국민을 물 위에서 지켜줄 일종의 정치적 방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 세르히 플로히는 “옐친과 그의 측근들은 제국의 부담을 스스로 계속할 것인지 혹은 제국을 그만둘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며 그들은 후자 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는 “러시아 방주가 소련 부두를 떠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2월 1일에 예정된 우크라이나의 독립 투표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다. 

옐친은 이 순간을 소련 전체의 미래를 결정할 순간으로 삼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옐친이 부시에게 말했듯이 우크라이나인들이 70% 이상의 차이로 독립에 투표한다면 그는 즉시 우크라이나를 별개의 국가로 인정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 「4장 망각과 기회」 중에서

독일의 동쪽 측면도 취약했다. 콜은 아르키즈 회담에서 옛 동독 영토에서 핵무기를 영구적으로 금지하는 데 동의했고 마가릿 대처가 예측했듯 독일은 그들의 정부가 위치할 곳으로 가장 취약한 도시인 베를린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일은 약점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통일 이후에도 모스크바의 의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런 이유에서 폴란드가 독일 대신 NATO의 최전선을 맡게 된다면 독일의 안보는 훨씬 더 개선될 것이었다.

 루헤의 수석보좌관 중 한 명이었던 울리히 바이저 중장은 “독일을 방어하는 것은 독일 땅보다는 폴란드 땅에서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콜 역시 이러한 고려사항에 대해 알고 있었고 클린턴에게 언급하기도 했다.

 총리는 통일 이후 자신의 나라가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대처하고 있는 동안 동맹의 가장 동쪽 끝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다. 

반면 정부는 또한 미국 국무부가 요약한 바와 같이 “유럽에 ‘새로운 선을 그리는’ 것 같지 않은” 방식으로 새로운 구성원을 추가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 「5장 삼각형을 사각형으로

러시아 개혁주의자들의 해외 지인들 (뉴욕에서 코지레프와 함께 지내며 친해졌던 헝가리 태생의 미국 외교관인 가티 등)은 제1차 체첸 전쟁을 보고 절망에 빠졌다.

 가티는 나중에 그 전쟁이 분수령이었다고 보았다.

 당시 그를 포함한 서방 국가의 사람들은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지만, 러시아는 결코 코지레프가 바랐던 방향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뉴욕타임스〉의 어느 기자는 체첸 침공에 대해 “러시아의 자유주의적 꿈의 끝”이라고 말했다. 

이 분쟁은 또한 러시아가 NATO 확장에 반대할 여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는 러시아가 여전히 군사적 위협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국가들이 옳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동맹국을 찾는 것은 과도한 걱정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코지레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체첸 전쟁이 “수년간 서방 파트너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고 후회했다.
--- 「6장 흥망성쇠」 중에서

클린턴은 러시아가 보스니아에서 NATO와 협력함으로써 확장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만들고자 했다. 

그 부산물은 병든 옐친이 유권자들에게 헌신적인 세계 지도자처럼 보이게 하여 그가 재선을 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콜은 클린턴에게 발칸반도의 평화가 “러시아를 방정식에 포함시키는 경우에만” 지속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는 게 워싱턴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조언했다. 

클린턴은 이 주장에 따라 러시아 대통령에게 “러시아는 최소한 보스니아 재건을 돕기 위한 보조 작전은 수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옐친은 그 임무는 보조 작전이라기보다는 특수 작전이라고 부르는 게 옳으며 러시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도 말했다.

 클린턴은 NATO 확장의 주요 반대자가 되어가고 있는 페리와 그라체프가 이 문제에 함께 협력할 것을 제안했다. 그들의 성공적인 협력은 국무부 내에서 잠시나마 낙관론을 불러일으켰다.
--- 「7장 무거움 책임」 중에서

클린턴은 탤벗을 지지하며 옐친에게 보내는 편지에 “유럽의 새로운 민주 국가들에 대해 미리 회원 가입을 배제할 이유가 없다”고 썼다. 

비록 미국 대통령이 이를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1인치도”는 새로운 의미를 얻고 있었다. 동맹에게 1인치의 제한도 없다는 의미였다. 

한편 콜 총리의 실망 속에 NATO 확장을 추진하려는 압박은 계속해서 커져갔다. 

클린턴을 상대할 공화당 대선 후보인 로버트 돌 상원의원은 콜이 말했듯이 “러시아는 크고 중요한 나라”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했다.

 옐친의 재선 캠페인과 병환 중에 공화당은 일부 민주당원들의 지지를 받아 NATO 확장촉진법을 추진했다. 

이 법안은 클린턴에 의해 통과되어 법으로 제정되며 폴란드, 헝가리, 체코에 6천만 달러를 지원하여 NATO 가입 가능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 「8장 인치당 비용」 중에서

러시아만 마드리드 정상 회담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첫 번째 확대에서는 가장 적은 수의 국가들만을 가입시키길 원하는 미국의 방침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샌디 버거 국가안보보좌관은 마드리드에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세 나라, 즉 체코, 헝가리, 폴란드만을 받아들이고 “강력한 개방의 문 패키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들은 “첫 번째 신규 회원이 마지막이 아니며, 분명히 두 번째 확대 결정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회의적인 NATO 동맹국들을 설득해야 했다. 

일부는 확대 자체에 대해 주저했고, 일부는 한 차례 이상 확대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일부는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도 즉시 추가하길 원했다. 

올브라이트는 대통령에게 그들이 “과장된 행동과 불만을 견뎌야 하며, 좁은 이해관계보다 큰 그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9장 오직 시작뿐」 중에서

NATO는 러시아 대통령과 그의 우크라이나 동료인 레오니드 쿠치마 사이에 다시금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두 슬라브 국가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세바스토폴 항구를 모항으로 하는 러시아 흑해 함대 소속 해군 항공대의 장비를 현대화하는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협상의 일환으로 옐친은 키이우가 NATO와의 관계를 “제한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가 “유럽-대서양 구조를 우선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러시아에 “점점 더 큰 불안”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통령은 NATO가 흑해 함대의 모항에 미 해군의 전투함을 배치하는 악몽을 막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치마는 여기에 대해 확답을 피했고, 우크라이나가 1999년 4월에 열리는 NATO 창설 50주년 기념 정상회의에 초대받았음에도 러시아의 거부 압력에 저항했다. 

NATO와 서방과의 관계를 둘러싼 모스크바와 키이우 간의 갈등은 21세기의 또 다른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 분명했으며 그 여파는 양국 국경 너머로 미칠 것이었다.
--- 「10장 미래를 위하여」 중에서

NATO는 동맹국들이 기존의 군사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NATO에 가입하는 것은 반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푸틴은 기존 갈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에는 조지아에서, 2014년에는 우크라이나에서 말이다. 

탈냉전 시대에는 이런 무력 충돌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행동은 그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푸틴은 또한 러시아의 재래식 군사 예산을 확장하고, 새로운 미사일 방어 및 우주 능력을 개발하며, 러시아의 비축 핵무기를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NATO의 지도자들은 NATO-러시아 협의를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NATO와 러시아 간의 모든 실질적인 협력을 중단”했다. 

오늘날의 상황을 냉전 이후 질서를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가능했던 다른 결과들과 비교하면, 현재 상황이 더 나은 대안들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지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전문가인 스티븐 세스타노비치가 1993년 〈뉴욕 타임스〉에 쓴 기고문에서 예리하게 언급했듯이 “러시아와의 협력을 위한 많은 대안들”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이 의문들은 러시아 민주주의가 실패한 후 우리가 느끼게 될 좌절과 무력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결론 새로운 시대」 중에서

출판사 리뷰
방대한 자료와 인터뷰를 토대로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10년의 국제관계사를 정리한 외교 분야 최고의 역작

이 책 《나토의 동진》은 NATO의 확장을 둘러싼 분쟁을 내용을 관통하는 줄거리로 삼고 있다. 

동맹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10여 년에 걸쳐 자신들의 세력을 중·동유럽까지 넓히려고 했던 미국과 러시아 지도자들의 전략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이 오늘날 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 무게에 관한 이야기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국제관계 전문가 서로티 교수는 이 책에서 냉전 이후 새로운 유럽 안보 체제가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1900년대 주요 강대국들의 결정이 오늘날의 지정학적 긴장을 어떻게 빚어냈는지를 러시아, 미국, 독일, 기타 나토 회원국 등 다양한 관점에서 예리하게 분석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인 ‘Not One Inch’는 제임스 베이커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말했던 나토가 동쪽으로 “일 인치도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발언에서 따왔다.

 베이커의 이 제안은 처음에는 은밀히 진행되었으나 곧 언론에 공개되면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10년 후의 상황이다. 

자신의 약속대로 독일에서 물러난 고르바초프와 달리, 워싱턴은 1991년 12월 소련 붕괴 이후 자신의 옵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990년대 미국의 선택은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비극적인 실패와 더불어 냉전 이후 협력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미-러 관계를 쇠퇴하게 만들었다.

1부(1989~1992년)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부상한 1989년부터 1992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부시 대통령과 콜 총리는 불과 329일 만에 냉전의 국경을 넘어 동독에 이르는 독일의 통일과 NATO의 확대를 모두 성사시켰다. 

곧이어 콜이 예언한 대로 모스크바에서는 권력 다툼이 벌어졌지만, 폭풍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력했다. 

1993~94년을 다룬 2부에서는 이 폭풍 이후 미-러 관계의 청산과 그것이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러시아에서 개혁과 서방과의 협력을 기꺼이 이행하려는 지도자 보리스 옐친이 권력을 잡고, 빠른 속도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미-러 관계는 진전되었다. 

하지만 1993년 말과 1994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체첸의 반대자들을 상대로 한 모스크바의 무력 사용, 워싱턴에서의 공화당의 부활과 내부 인사들의 숙련된 공작들이 맞물리면서 클린턴은 결국 러시아와의 동반관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995~99년을 다룬 3부에서는 ‘보리스와 빌’의 관계가 술에 취한 옐친의 폭언과 코소보에서의 NATO의 군사작전으로 붕괴되면서, 클린턴이 NATO 확대에 보다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는 과정을 기록한다. 

러시아에서 푸틴이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이 클린턴을 흔들면서 미-러 관계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모스크바와 워싱턴 모두 냉전 이후 해빙기에 지속적인 협력을 구축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1990년 콜이 우려했던 대로 러시아 반동세력이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 

수백 명 이상 되는 사건 당사자들과의 인터뷰, 대학 도서관, 백악관, NATO 동맹, 외무부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수많은 기밀문서들, 국제 외교 무대에서 활약한 당사자들의 자서전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쓰인 이 책은 1990년대의 국제관계사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지난 역사적 선택들이 어떻게 오늘의 세계를 형성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있는 곳에 도달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판단해야 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7453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