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한국근대사 연구 (독서기록)/2.개항기.구한말

일본의 조선 강점, 1868∼1910 (2025) - 국제관계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한 연구

동방박사님 2025. 12. 7.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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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40년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동아시아사를 연구했고, 미국아시아학회Association for Asian Studies가 힐러리 콘로이상(2011~ 논문)으로 기념하는 역사학자, 고(故) 힐러리 콘로이가 저술한 ‘동아시아 근대사 연구의 고전’이다.

저자는 1868년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까지의 역사를 세밀하고 풍부하게 서술하고 견고한 이론의 구조 안에서 분석한다.

 저자는 이 시기 일본의 주요 세력을 현실주의·자유주의적 이상주의·반동주의적 이상주의로 나눈 뒤 그들의 특징과 서로의 관계를 규정하고, 그것이 현실의 격동과 부딪치면서 변화하고 변질된 과정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일본의 조선 강점의 역사를 연구한다. 

이 책은 일본의 조선 강점 과정을 조선과 일본, 양국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국제관계에서 일본, 특히 일본의 현실주의 정치세력이 어떻게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게 되었는지, 달리 말해 일본의 현실주의 외교는 어떻게 실패하였는지를 신중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1950년대 말, 세계가 냉전 시대로 이르게 된 단적인 사례로 일본의 조선 강점을 분석하고 평가한 힐러리 콘로이의 통찰과 제안은, 이른바 신냉전의 시대, 21세기 한반도가 열강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조언이 될 것이다.


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9

머리말 13

1장 정한론―모욕과 복수, 그리고 긴 그림자 16
2장 확립된 현실주의―“안전하고 온건한” 조선 정책 84
3장 이상주의의 진입―정부의 신중한 태도에 도전한 자유주의적 열망 135
4장 재개된 현실주의 185
5장 “예기치 못한 사건들” 240
6장 좌절된 현실주의 1―이노우에의 실패, 1894∼1895년 285
7장 좌절된 현실주의 2―이토의 실패, 1905∼1909년 359
8장 역행한 이상주의―반동주의자들의 대두와 자유주의자들의 혼란 423
9장 몇 가지 경제적 문제 490
10장 결론 544

주 563
참고문헌 627
옮긴이의 글 645
찾아보기 651


저자 소개
저 : F. 힐러리 콘로이 (F. Hilary Conroy) 
1919년 미국 일리노이주 출생. 1941년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하고, 1942~1949년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4년 해군에 입대하여 언어학교 과정을 마치고 군사정보부 일본어 통역관으로 복무했고 1945~1946년에는 도쿄 주둔 맥아더 사령부에서 근무했다. 1954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도쿄대에서 연구했다. 1951~1990년까지 40년간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동아시아사)...

역 : 김범 
1970년 서울 출생.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이다. 

조선 전기 정치사를 연구해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에 『사화와 반정의 시대』 『연산군―그 인간과 시대의 내면』 『사람과 그의 글』 『민음 한국사―15세기』(공저), 번역서에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유형원과 조선 후기』(제임스 B. 팔레), 『조선왕조의 기원』(존 B. 던컨), 『무신과 문신』(에드워드 슐츠), 『조선의 변방과 반란, ...

책 속으로
정한론은 1870년대의 일본 문서와 신문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이다. 

유교적 의미로는 “일본이 조선을 정벌해 〔모욕에〕 정당하게 처벌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의미하지만 현실적 목적에서는 ‘조선 정벌 논쟁’으로 번역해도 충분하다. 이 논쟁은 1873년 10월 도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 p.20

1874년 오쿠보가 보여준 사례의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는 일본의 내부건설이지만 그것은 큰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에 일본 안에서 격렬한 반대를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1) 서구의 국제방식에서 정당화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신중히 계산되고 사려 깊게 제한된 해외 원정은 지나치게 위험하지 않으며 국내 문제를 더 관리하기 쉽게 만들 수 있다. 

 

(2) 그런 모험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실질적 문제는 매우 복잡해서 서양이 심각하게 반대할 때는 순순히 물러설 수 있도록 민첩하고, 일본의 옛 우방을 주저 없이 몰살시킬 만큼 무자비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 p.63

열흘 만에 실질적인 합의가 이뤄졌고 2월 26일 조약이 체결됐다. 

이 강화도조약은 조·일 국교수립을 규정하면서 일본에게 조선의 세 항구를 개항하고 조선 해역의 측량권을 약속했으며, 조선을 “일본과 동일한 주권”을 누리는 ‘독립’(영문본) 또는 ‘자치’(한문본) 국가로 지칭했다. 일본은 이것을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공개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조약이 원활하고 쉽게 체결된 것은 서울에서 진행된 협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협상이 시작된 2월 10일까지 중국에서 한 달 가까이 청·일·조선 관계를 주제로 논의가 이뤄진 사실이 깔려 있었다. 

처음에는 베이징에서 일본 특사 모리와 총리아문의 관원들 사이에, 그다음에는 베이징 근교의 보정부에서 모리와 이홍장 사이에 협상이 이뤄졌다.
--- p.70

일반적으로 임오군란 전까지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 주장에 대한 일본과 미국의 공식 태도는 전체적으로 거의 같았다. 

“그들의 말을 정중하게 듣되 무시하라. 그것은 과거의 목소리일 뿐 현재의 타당성이나 미래의 중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사건 뒤 청이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일본 외무성은 “우려”하고 미국 국무부는 “계속 우려하지 않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태도 차이가 나타났다.
--- p.121

이토는 매우 신중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이노우에가 조선 관원들과 협상하기 전 푸트 공사를 방문한 것처럼 그는 청에 가기 전 주일 미국공사 빙엄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빙엄은 “청과 일본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자신의 영토 안에서 조선 정부의 정당하고 배타적인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평화적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촉구했다.

 이토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청과 합의를 모색하겠다고 빙엄에게 말했다.
--- p.188

6월 7일 톈진조약에 따라 두 나라는 조선에 파병할 것을 상대방에게 공식 통지했다. 

청의 통지문에서는 “우리 속국의 평화를 회복하고 상업적 목적으로 조선에 거주하는 모든 국가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목적을 규정했다.
일본은 청의 통지를 받아들이면서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규정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1882년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독자적인 개입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이 철군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속국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현되지 않고 철군하기 전 앞으로 소요의 ‘악의 뿌리’를 끊기 위해 ‘청·일 합동 위원회’가 ‘철저히 조사’하고 조선 정부의 ‘폐정’을 개혁하는 ‘단호한 조처’를 ‘보장’해야 한다고 청에 제안하는 형태로 표현됐다.

 청은 6월 22일 이 제안을 거절했고 이홍장은 그것을 일본이 청과 “공동으로 조선을 통치”하자는 제안이라고 불렀다.
--- p.269

그들은[과두정치가들은] 일본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 전 청을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청이 물러간 뒤의 시대는 조선에서 특히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복잡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인 것이다. 

그래서 적십자단과 국제법에 정통한 변호사가 군대와 동행하는 ‘기독교식’으로 전쟁에 나아갔고 조선에 있는 서양인들을 모욕하지 않도록 조심한 것이다.
무츠는 주한 영국영사가 일본군과 언쟁을 벌인 사건에 대해 오토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영국영사와 관련해서는 그의 행동이 매우 이상하고 비난받을 만하지만, 영국은 조약 개정과 관련해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었고 러시아가 개입한 뒤에도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선의를 보여 왔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적대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더욱이 우리의 목적은 청과 조선에 대항하는 것이며, 다른 열강과는 되도록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 p.281

일본이 청으로부터 배상을 받기 위해 삼국에 의존할 것인지 아니면 배상 문제를 전체적으로 열강 회의에 상정할 것인지도 고려했다. 

5월 8일이 조약 비준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더 늦어지면 청이 비준하지 않을 기회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또한 앞으로 일본과 청의 관계는 늘 열강 회의로 가는 선례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리고 일본 정부와 국민으로서는 “배상에 대해 삼국에 감사를 표시해야 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에 대해서는 완전히 포기하되 청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5월 5일 일본은 삼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랴오둥반도의 영유권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고 통보했고, 5월 9일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행동한 것에 삼국의 축하를 받았다.
--- p.321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본 지도자들은 시모노세키 협상 과정에서 열강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인식하게 됐고, 삼국간섭을 정말 두려워했다.
--- p.326

이토와 야마가타는 니시·고무라·하야시 곤스케·가토와 함께 정책 전반에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고 자신들이 만·한 교환이라고 부른 것을 앞으로 러시아와 협상의 목표로 삼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모두 동의했지만 가토만은 “분노하면서 반대했다”.

러시아는 자국이 만주에서 절대적인 행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에서는 일본을 자국과 같은 지위로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고 가토는 지적했다.

가토는 영국공사로서 영국과 긴밀한 관계를 위해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아무튼 일본은 1902년 유럽의 정치적 경쟁과 신임 외무대신이 된 가토와 영국공사직을 이어받은 하야시의 영리한 외교가 결합돼 영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키면서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필요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 p.361

협상은 결렬되고 일본은 적대 행위를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는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을 일본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한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는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인을 위해 간섭할 수 없다”고 결정했고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승인함으로써 포츠머스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승인 신호를 보냈다. 

영국도 1905년 8월 영·일 동맹을 갱신할 때 같은 조치를 했다.
--- p.365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과 11월 22일에 발표된 조선에 관련된 ‘일본 정부의 선언’으로 이토가 조선 문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첫 번째는 “서울에 주재하는 통감”이 외교 문제를 ‘주로’ 담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나라에 공사관을 폐쇄하고 조선을 떠나라는 공개적인 초청이었다. 11월 22일의 ‘선언’에서는 그 까닭을 설명했다.
--- p.370

앞서 언급한 미국·영국·러시아와의 사전 합의는 그 정부들의 이의 제기가 없을 것을 보장했고, 그 정부들은 곧바로 조선에 상주하는 공사들을 소환했으며, 다른 국가들도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의도를 차례차례 ‘승인’했다.
--- p.370

책임감 있는 세계 여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오키 공사가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1907년 7월 20일과 26일 자 『뉴욕트리뷴』 사설이었을 것이다. 

“조선은 러시아에게 정복될 뻔했지만 일본의 구원을 받았고 일본 정부를 통해 외교 문제를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 이것은 전 세계가 인정한 합의다. (…) 부

하라의 에미르가 자신과 차르 사이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또는 베트남 국왕이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또는 인도 국왕이 인도 북부에서 영국을 추방하기 위해 헤이그에 사절단을 보냈다고 상상해 보면 일본이 모르게 대표단을 파견한 조선 황제가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는 직함은 러시아·프랑스·영국 또는 그 밖의 열강이 피지배 국가를 다스리는 것만큼 좋다. (…) 조선은 많은 문제의 근원이었으며 (…) 평화를 위협했다. (…) 위협은 제거하는 것이 좋다. 

세계의 평화와 진보가 더 중요하다.”
--- p.386

그렇게 일본의 현실 외교는 계몽된 이기주의의 높은 길을 버리고 억압과 잔인함, 살인의 낮은 길로 다시 한번 나아갔다. 

1894∼1895년 이노우에의 갑오개혁은 미우라에서 끝났고, 이제 이토는 데라우치로 이어졌다. 두 길은 서로 연결된 것처럼 보였다.
--- p.421

일본의 자유주의자가 대부분 조선의 진보와 자유의 증진을 포기하고 일본의 통치가 안정되면 언젠가 이런 자유주의적 목표가 실현될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조선의 상황을 안정시키려는 현실주의 과두세력의 노력을 지지했던 것처럼 반동주의자들은 일본의 통치가 안정되면 아시아의 통합과 부흥이 다시 올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낭만적 합방 대신 현실주의적 병합을 받아들였다.
이런 타협 과정에서 일본의 자유주의자와 반동주의자 모두 자신들의 조선인 세력을 잃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조국의 자유와 발전을 위해 일본과 협력했던 박영효나 동양의 유산을 되살리고자 그렇게 했던 이용구에게 최종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결국 일본의 자유주의자와 반동주의자가 모두 동의한 조선 문제의 ‘해결책’인 병합은 교류와 우호를 없애고 일본이 지배하고 조선이 지배되는 날카로운 구분선을 그렸다.
--- pp.485-486

일본의 조선 강점이 주는 교훈은 근대사의 한 단면일 뿐이지만 케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한 난제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가 주장한 일종의 현실적 균형(또는 반半균형)은 이론적으로는 논리적이고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싶다. 

조선의 사례는 거의 완벽한 조건 속에서 두드러진 실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주의 외교의 실험실 시험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상황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결과일 것이다.
--- p.549

조선의 사례는 아무리 전문적이고 당시의 대중적 생각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치가라도 그의 기준이 국익이라면, 그것이 계몽된 국익일지라도, 미안한 것보다는 안전한 것이 낫다는 가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그의 정책은 자동적으로 반동 쪽으로 기울고 현실주의는 잔인함에 빠지게 된다. 

균형과 절제 대신 방종이 일어나고, 현재의 군비 상태가 지속되면 머지않아 지구 전체를 파괴할 장치를 작동시킬 수밖에 없다.
--- p.553

다른 대안이 있을까?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국가가 자신의 국제적 행동에서 그저 영리하게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해져야 하며 추상적인 정의와 도덕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도전 과제들을 제시한다. 

그 도전은 국가 제도의 뿌리, 그 철학과 가정,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체스 경기가 경품 행사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는 어렵지만, 특히 오랫동안 진지하게 경기했어도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경품 행사는 이상하게 상쾌하고 신기하게 전염성이 강할 수 있다.
국제정치는 집안에서 하는 놀이가 아니지만, 몇 안 되는 사람만이 도달한 더 높은 차원에서 많은 사람이 행동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인간의 더 높은 열망과 일치하는 접근방식을 시도하는 것은 가치 있을 수 있는데, 다른 많은 것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열망이 표현된 이상주의가 분명히 포함될 것이므로 과거에 이상주의가 빠졌던 함정을 이해하고 피해야 한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또 다른 서툰 용어를 사용해 이 ‘더 나은’ 접근 방식을 “꾸준한 이상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 p.554

조선 문제의 구체적 상황으로 돌아가 이것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흥미롭게도 프랭크 윌리스턴은 미국의 정책이 국제정치의 더 넓은 관심사를 먼저 고려했기 때문에 합병 이전 시기에 “조선인에게 기본적으로 옳고 괜찮은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 그 책임의 일부를 그 시대의 조지 케넌에게 돌렸다. 

윌리스턴은 새로운 조지 케넌이 역사의 반복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윌리스턴은 자신의 논문이 발표되고 2년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그 증거로 여길지 궁금하다.
--- p.555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과 미국이 국익에 기반한 정책을 펼치기보다 꾸준한 이상주의를 적용했다면 조선과 자신들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이 됐을 수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국무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일본은 조선을 안전하게 확보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덜 느꼈을 것이다. 

다케조에와 포크는 갑신정변 세력을 설득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계자들은 고종이 동학의 청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함으로써 유쾌한 놀라움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898년 독립협회는 자금과 현명한 조언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세기가 바뀌고 태평양의 경쟁국이 된 뒤에도 미국과 일본은 각각 필리핀과 조선에 문명을 전파한다는 일정한 이념적 친연성이 있었기 때문에 영향권을 구분하지 않고 동질성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단을 교환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조선의 밀사들이 헤이그에 나타났을 때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허용했다면 헤이그 재판소가 미국의 필리핀 경영을 조사하도록 자원했을 수도 있다.
끝으로 세계의 전략적 분쟁 지역인 회랑지대·반도·섬을 기회 지역으로 다시 정의한다면 그곳에서 강대국들은 국제 여론의 조명 아래 사람들과 함께 각성해 자신들의 진정한 이익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 p.558

출판사 리뷰
조선 강점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어떻게 한반도에 접근하였는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조약과 동맹의 외교로?
미국 역사학자의 눈으로 바라본 일본의 현실주의 정치.

조선 강점에 이르는 몇몇 장면들

장면 1-톈진조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쳐 1885년이 됐을 때 일본의 정책 입안자들은 강화도조약 이후 극복했던 조선의 비타협적 태도뿐 아니라 청의 비타협적 태도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 정부는 앞으로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충돌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기본 합의를 모색했고,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이홍장-이토 조약이라고도 하는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청에 가기 전 주일 미국공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주일 미국공사는 청과 일본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조선 정부의 정당하고 배타적인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평화적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촉구했다.

 이토는 그런 견해에 동의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청과 합의를 모색하겠다고 공사에게 말했다.
톈진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정치·외교적으로 직접 압박하기보다는 무역과 온건한 개혁 계획을 후원함으로써 조선의 개혁에 더 느리지만 더 확실한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특히 미국의 정책과도 부합되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런 미국의 정책에서 거듭 단서를 얻었다.

 일본은 청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직접적인 외교적 도전은 피했다.

장면 2-청일전쟁

일본의 외무대신은 1894년 8월 16일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각서에서 조선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을 결정할 것을 내각에 촉구하면서 병합만이 조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최종 결론에 이르는 단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일본의 과두정치가들은 서양 국가들이 가르쳐준 방식에 따라 실용적이고 신중하며 현실적인 외교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약 개정이라는 위대한 사업에서 일본을 성공 직전까지 이끌었고, 그것은 일본이 본격적인 서양식 근대 국가로 인정받는 광명의 장소였다. 

자유주의에 입각했든 반동주의를 따랐든 그들이 주장하는 전쟁과 대의는 과두정치 현실주의자들에게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1894년 6월 7일,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과 청은 조선에 파병할 것을 상대방에게 공식 통지했다. 

철군하지 않겠다는 일본의 결심은 속국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표현되지 않고, 철군하기 전 앞으로 소요의 악의 뿌리를 끊기 위해 청·일 합동 위원회가 철저히 조사하고 조선 정부의 폐정을 개혁하는 단호한 조처를 보장해야 한다고 청에 제안하는 형태로 표현됐다.

일본이 이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은, 개혁 계획 방식이 실패하더라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좋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지만 조선의 정치 상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에게 속국 문제는 좋은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의 과두정치가들은 청과의 전쟁을 망설였다. 

그들은 일본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찾기 전 청을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됐지만, 이것만으로는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청이 물러간 뒤의 시대는 조선에서 특히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또 다른 복잡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그래서 일본의 과두정치가들은 적십자단과 국제법에 정통한 변호사가 군대와 동행하는 기독교식으로 전쟁에 나아갔고 조선에 있는 서양인들을 모욕하지 않도록 조심했다.

장면 3-을사조약과 통감부

아관파천 이후 일본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만·한滿韓 교환이라고 부른 것을 러시아와 협상의 목표로 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영국공사만은 반대했다. 

러시아는 자국이 만주에서 절대적인 행동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선에서는 일본을 자국과 같은 지위로 끌어내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협상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고 그는 지적했다. 

일본은 1902년 유럽의 정치적 경쟁과 신임 외무대신과 영국공사의 영리한 외교가 결합돼 영국과의 동맹을 성사시키면서 러시아와 협상하는 데 필요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러시아는 1905년 9월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조선을 일본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한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은 일본에 대항하는 조선인을 위해 간섭할 수 없다고 결정했고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승인함으로써 포츠머스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일본에게 조선에 대한 미국의 승인 신호를 보냈다. 영국도 1905년 8월 영·일 동맹을 갱신할 때 같은 조치를 했다.

국제적으로는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된 제2차 한일협약과 11월 22일에 발표된 조선에 관련된 ‘일본 정부의 선언’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문제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2차 한일협약은 서울에 주재하는 통감이 외교 문제를 주로 담당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모든 나라에 공사관을 폐쇄하고 조선을 떠나라는 공개적인 초청이었다. 

11월 22일의 선언에서는 그 까닭을 설명했다.

미국·영국·러시아와의 사전 합의는 그 정부들의 이의 제기가 없을 것을 보장했고, 그 정부들은 곧바로 조선에 상주하는 공사들을 소환했으며, 다른 국가들도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의도를 차례차례 승인했다.

장면 4-헤이그 특사 사건

고종의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 책임감 있는 세계 여론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1907년 7월 20일과 26일 자 『뉴욕트리뷴』 사설이었을 것이다. 

사설에 따르면, 조선은 러시아에게 정복될 뻔했지만 일본의 구원을 받았고 일본 정부를 통해 외교 문제를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이것은 전 세계가 인정한 합의다.

부하라Bokhara의 에미르Emir가 자신과 차르 사이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또는 베트남 국왕이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또는 인도 국왕이 인도 북부에서 영국을 추방하기 위해 헤이그에 사절단을 보냈다고 상상해 보면 일본이 모르게 대표단을 파견한 조선 황제가 얼마나 큰 범죄를 저질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이 조선을 다스리는 직함은 러시아·프랑스·영국 또는 그 밖의 열강이 피지배 국가를 다스리는 것만큼 좋다. (…) 조선은 많은 문제의 근원이었으며 (…) 평화를 위협했다. (…) 위협은 제거하는 것이 좋다. 세계의 평화와 진보가 더 중요하다.

현실주의 외교는 왜 실패하는가?

콘로이가 보기에, 조선 병합을 향한 일본의 과정은 산속에 있는 세 개의 샘처럼 이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세 개의 물줄기인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반동주의적 이상주의, 현실주의가 점차 합쳐져 조선을 집어삼킨 홍수가 된 것이다.

일본의 현실주의자는 1873년 정한을 둘러싼 대논쟁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 운영을 관리했으며, 1880년대와 1890년대에는 자유주의자에게, 그 뒤에는 반동주의자에게 방해받기는 했지만, 결코 주도권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미묘한 변화를 겪었는데, 조선을 일본의 부분적 통제와 지시를 받는 별도의 정치적 실체로 유지하겠다는 처음의 결심에서 한반도를 완전히 일본의 통치 아래 두겠다는 결정으로 바뀌었다.

왜 바뀌었을까?

콘로이는 국가가 서열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권력이 여왕인 국제정치의 체스판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현실주의 외교가 추구하는 현실적 균형(또는 반半균형)은 이론적으로는 논리적이고 실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조선의 사례는 보여준다. 

조선의 사례가 현실주의 외교의 실험실 시험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역사적 상황이 줄 수 있는 가장 근접한 결과일 것이다.
콘로이에 따르면, 조선의 사례는 아무리 전문적이고 대중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정치가라도 그의 기준이 ‘국익’이라면, 미안한 것보다는 안전한 것이 낫다는 가정에 따라 행동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되면 현실주의 정치가의 정책은 자동적으로 반동 쪽으로 기울고 현실주의는 잔인함에 빠지게 된다.

꾸준한 이상주의

그렇다면 현실주의 외교의 대안은 없을까?

있을 수 있지만, 그 대안은 국가가 영리하게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해져야 하며 추상적인 정의와 도덕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도전 과제들을 제시한다. 그

 도전은 국가 제도의 뿌리, 그 철학과 가정, 그리고 그 행동에 대한 것이다. 콘로이는 그 도전을 체스 경기가 경품 행사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표현한다. 콘로이는 말한다. 

그러기는 어렵지만, 특히 오랫동안 진지하게 경기했어도 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면 경품 행사는 이상하게 상쾌하고 신기하게 전염성이 강할 수 있다고.

콘로이는 이 경품행사에는 열망이 표현된 이상주의가 분명히 포함될 것인데, 우리는 과거에 이상주의가 빠졌던 함정을 이해하고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새로운 이상주의를 그는 “꾸준한 이상주의”라고 부른다.

콘로이는 조선 문제의 구체적 상황에 꾸준한 이상주의를 적용했다면, 미국과 일본이, 이른바 “조선인에게 기본적으로 옳고 괜찮은 것”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을지 모른다고 가정해 본다.

만약 미국 국무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일본은 조선을 안전하게 확보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덜 느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갑신정변 세력을 설득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후계자들은 고종이 동학의 청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함으로써 유쾌한 놀라움을 선사했을지도 모른다. 그

리고 1898년 독립협회는 자금과 현명한 조언을 모두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었다, 하지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는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었다. 한반도는 강점되었고, 광복을 맞이했으나, 이후 분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한반도의 역사가 민족의 상처와 균열을 반복하지 않고 회복하고 화합하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데에, 이 책이 단초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789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