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
편향되고 정치적인 역사부정론을 거부한다”
현대사 연구자 31인, ‘사실’을 파고들다
‘해전사’ ‘해공점시’를 잇는 문제의식
한국 현대사 연구는 1979년 1권을 선보인 《해방 전후사의 인식》는 지식인 사회와 운동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쳐 이후의 현대사 연구는 그 자장磁場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어 2018년 푸른역사에서 냈던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이하 ‘해공점시’)은, 당시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사 교과서 파동’을 포함해 역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는 역사부정론에 대한 역사학계의 진지한 응답으로 평가받았다.
‘해공점시’ 필자들이 중심이 되어 8년 만에 낸 『점령과 전쟁』·『분단과 냉전』(‘오늘의 한국 현대사’ 시리즈 1·2권)은, 앞선 두 책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연구 지평을 넓힌 후속작이다.
전작 ‘해공점시’가 한미관계에 초점을 맞춰 해방 3년사를 다루었다면, 이 책은 사실史實에 대한 ‘종합적 분석’을 통해 해방 이후 전두환 정권기까지를 ‘점령과 분단’, ‘전쟁과 평화’, ‘냉전과 개발’, ‘민주주의와 역사인식’의 네 가지 키워드로 다루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제1부】 냉전과 개발
1. 이동원 ‘전쟁 영웅’ 밴 플리트의 전후 민간투자 중개와 한미관계
2. 김수향 한국전쟁이 바꾼 정부의 식량정책과 농민의 부담
3. 이소라 냉전과 재건의 이중주: 1950년대 미군 대한원조 프로그램의 수립과 시행
4. 최혜린 ‘냉전 지식’으로서 경영학 보급과 한국의 수용: 1950년대 워싱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5. 한진금 1950년대 ‘한국 국보전’ 개최와 한국 ‘전통’의 구현
6. 윤성민 냉전 속 ‘평화’를 외치다: 주한 미평화봉사단의 탄생
7. 한봉석 미국의 식량 원조와 인도주의 구호: 주한케아의 ‘근로를 위한 식량’을 중심으로
8. 장초 북한의 ‘자립적 중공업화’ 전략 선택과 추진(1945∼1956)
9. 옥창준 냉전기 북한의 상상 지리와 ‘평양 선언’
【제2부】 민주주의와 역사 인식
1. 고지훈 5?16 다시 보기 …254
2. 신재준 발전의 그림자: 1970년 전후 공해의 일상화와 환경권 인식의 씨앗
3. 조민지 5공의 어머니: 전두환 정권의 영부인 정치와 새세대육영회
4. 권혁은 87년 체제의 한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대공분실의 생명 연장
5. 정무용 ‘역사전쟁’의 서장: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
6. 신승욱 공공성 가치의 위축과 특권 유지: 서울대 법인화 논의의 역사
7. 오제연 10년 주기로 본 한국 사회의 한일협정 인식 60년
8. 정용욱 한국의 역사 갈등과 과거사 정리: 묵은 갈등의 소환인가 새 정체성 형성의 진통인가
저자 소개
정용욱 서울대 역사학부 명예교수 | 한국 현대 지성사와 사회사 고지훈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 한국 현대사 권혁은 서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조교수 | 국가폭력과 민주주의, 냉전기술사 김수향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 한국 현대 경제사 신승욱 서울대 국사학과 석사 | 한국 현대사 신재준 전주교대 사회교육과 조교수 | 한국 현대사 및 한일관계사 오제연 성균관대 사학과 부교수 | 한국 현대 운...
책 속으로
밴 플리트는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1951년 4월 14일부터 1953년 2월 12일까지 미 제8군 사령관을 역임했고, 한국군의 백白야전전투사령부 창설, 제2군단 창설, 4년제 육군사관학교 창설, 한국군 증강 및 증편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 ‘한국군의 아버지’라 칭송했고,
--- p.16
밴 플리트는…1954년 4월 극동 군사 원조를 검토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서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는 정유, 주택, 영화, 조선 등 다양한 한국 내 사업에 미국의 민간투자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제주도 목장 개발의 경우에는 사업을 직접 총괄, 주도했다.
5·16군사정변 이후에는 ‘군사혁명’을 지지하며 박정희 정부와 신뢰 관계를 형성했고, 미국의 ‘민간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하여 대한 민간투자를 유치했다.
--- p.17
1962년 5월 11일, 밴 플리트가 26명의 미국 ‘실업인 시찰단’을 인솔하고 들어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나면서 현실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박정희는 “적극적인 경제원조를 요망”했고, 시찰단은 5월 17일 울산 종합제철공장에 대한 투자합의서 서명을 시작으로 비료, 알루미늄, 합성수지PVC, 스트로 펄프공장 등의 가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 p.38
1956년엔 매년 20만 호로 집계되던 절량농가는 그해에 50만 호를 넘어섰다.
당시 전체 농가가 221만 호였으니 다섯 가족 중 한 가족은 먹을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로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 p.43
1950년대 중·후반 농민의 경제적 상황을 어렵게 만든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한국전쟁기에 시작된 현물납부 방식의 조세제도가 주는 부담, 농지개혁 후속 조치의 부진, 미국산 잉여농산물의 과도한 도입이다.
그중에서도 현물 납세제도(현물납제)는 농민이 생산한 농업생산물을 정부에 직접 이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농민의 식량 사정과 경제 사정 모두를 어렵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 p.44
정부가 1950년부터 지속적으로 지세 물납제를 추진한 이유는 세 가지였다.
우선 임시토지수득세는 각종 세금을 통합한 것으로 농지 상환곡보다 규모가 컸다.
〈임시토지수득세법〉에 의해 정부가 확보할 수 있는 양곡은 280만 석이었다.
다음으로 농지 상환곡과 달리 임시토지수득세는 강제징수가 가능했다.
--- p.50
1953년 9월 5일, 제8군 사령부는 대민 지원사업을 개시했다.
그리고 휘하 사령부에 각 지역의 필요와 여건에 맞는 다양한 공공 프로그램의 개발을 요청했다.
이후 10월 18일 이 프로그램은 ‘미군대한원조AFAK’라는 이름으로 변경 발표되었다.
지원 범위는 제8군 관할 지역에서 비무장지대 이남의 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 p.77
AFAK는 1959년 10월 기준 학교, 고아원, 공중보건 시설 등 4,007개의 프로젝트를 완료하며 한국 지역 사회의 재건에 실질적으로 기여했고, 1954년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95퍼센트의 높은 인지도와 긍정적 평가는 이러한 성과를 뒷받침한다.
--- p.93
1958년부터 1964년까지 미 대외 원조 프로그램의 ‘기술협조Technical Cooperation’ 항목으로서 고려대와 연세대에 공여된 워싱턴 프로젝트는 한국에 경영학 지식·기술이 보급, 확립되는 시발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 p.96
이 프로그램으로 고려대에서 12명, 연세대에서 13명의 교수가 워싱턴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한 고려대에서는 이 중 2명이, 연세대에서는 7명이 학위를 취득했다.
--- p.115
저개발국이었던 한국의 경우 노사협조보다는 인력 양성 및 기업가 교육에 집중한 미 원조 당국의 목표, 반공주의로 인한 노동자 계층의 미성장,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경제 제일주의 등의 요소로 인해 다른 선진국에 비해 기업가의 이익을 옹호하고 장려하는 형태로 경영학이 도입되고 전파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p.122
1960년 10월 25일 작성된 ‘딜론 각서’에서는 한국 정부가 1930년대 대공황기 미국과 유사한 사업을 수립한다면, 이를 미 공법 480호 2관의 “새로운 조항”에 따라 지원할 수 있다고 명시하였다.
그 결과가 바로 장면 정권의 국토 건설사업이었다.
--- p.192
미국 잉여농산물 운송 과정에서 한국의 4개 식품회사에 상품이 판매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 민주공화당이 곡물 유용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 민주공화당-보건사회부-대한개척단 단장으로 이어지는 커넥션이 존재한다는 점 등에 주목하였다.
케아는 상품 유용을 인지한 이후 즉각적으로 잉여농산물 지원 중지를 결정하였다.
나아가…약 20만 달러에 달하는 위약금을 한국 정부 측에 청구하기도 했다.
--- p.198
“젊은 대령들”이란 호칭은 쿠데타 직후부터 대사관 전문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미국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인 사람들,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 도무지 설득이 안 되는 사람들, 뭔가 꿍꿍이를 하고 있는 작자들 등등의 뜻으로 사용했던 이 말은, 쿠데타를 미국의 입장에 맞게 인도하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사람들을 의미했다.
--- p.263
민정에 대한 개입 혹은 감시를 눈치챈 윤보선은“민간으로의 권력 이양 이후 군정이 계속해서 정치에 개입하고자 한다.
한국은 버마와 같은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 p.267
1962년 봄에 찾아온 한미관계의 위기는 증권시장 조작, 송요찬의 사임, 통화개혁 등 5~6월을 거쳐 확대되면서, ‘컨트리팀’ 회의에서는 최종 목표물을 정했다.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이다.
--- p.273
박정희가 김종필을 출국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대사관에서는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선거를 “두고 보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18 성명(박정희의 민정 참가 거부)과 3·15 성명(군정 연장) 등으로 혼란(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운)이 빚어지기는 했지만, 미국이 숨겨놓은 무기인 원조 중단 등의 협박을 통해서 모두 철회되었고, 비로소 선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 p.277
1960년대 중반 이후 공해가 어느 정도 심각해졌는지 엿볼 수 있다.
눈길이 가는 것은 공해 관련 진정 또한 1966년 337건에서 1970년 2,585건으로 7배 이상 증가했다는 점이다.
공해가 비단 수치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상의 문제가 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 p.288
공해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덩달아 도마에 오른 게 〈공해방지법〉이었다.…“하나의 치레로서 낮잠만 자고 있는” 또는 “제정되자마자 망각된 법률”이라는 비아냥과 “그럴 바에야 법을 폐기하라”는 비판을 받았다.…
첫째, 법의 적용 범위를 공해방지 구역으로 제한했다. 방지 구역을 벗어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둘째, 공장·사업장 건설 시 오염물질 배출·정화 시설을 설치토록 하는 규정이 없어 사전 규제가 불가능했고,…
셋째, 업자들의 공해방지 노력 외에 정부의 의무사항은 규정하지 않은 것이나 피해 발생 시 피해보상 청구 규정이 없던 것도 결점이었다.
--- p.294
개정법(1971. 1. 22, 법률 제2305호)은 1963년의 첫 법률과 비교해 개선된 측면이 분명했다.
우선 공해방지 구역을 폐지하고, 전국의 모든 배출 시설을 적용 대상으로 삼은 것은(제2조) 이전보다 나아진 부분이다.
안전 기준의 경우 배출 허용 기준과 피해지점 허용 기준을 구분했고(제3조), 기준 자체도 강화했다.
허가(제4조) 및 검사(제5조)를 의무화했고, 행정명령 위반 시 업체 허가 취소 권한을 부여했으며(제8, 9조), 벌칙도 강화했다(제26조).
--- p.299
영부인의 외부 활동을 보좌했던 ‘양지회’의 봉사 활동이었다. 정부 관료 및 국영기업체 책임자들의 ‘부인’을 조직한 사회사업체로, 육영수는 1965년부터 이 단체를 적극적으로 활용 했다.
크게 각종 성금, 수재의연금, 장학금 등을 모아 전달하는 모금 활동과 고아원, 양로원, 일선 장병을 방문하는 위문 활동이 주축이었고,
그동안 대중적으로 접할 기회가 없던 바자회라는 행사도 선보였다.
--- p.311
1981년 5월 사단법인 새세대육영회가 출범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다만 육영재단에 이사장을 따로 두고 주요 행사에만 등장하여 사진 찍히기에 주력했던 육영수와 달리, 이순자의 경우 법인을 설립하는 과정부터 회장으로 조직 전면에 등장했다.…
영부인은 정기총회나 이사회에서 회의를 주도했다.
의사 진행 자체가 매번 회장의 발언을 듣고 회원들이 이의 없이 찬성하는 식이었다.
--- p.314
육영회는 영부인의 홍보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정부가 정책적으로 업계의 지형 자체를 바꾸려던 분야에 주요 행위자로 등장했다.…
서울시나 중앙 정부 부처로부터 간헐적으로 보조금을 받기는 했지만, 출범한 직후 초기 3년간 영부인이 주요 기업에서 걷은 대규모의 기부금이 핵심이었다.…
육영회가 출범한 첫해 영부인 비서실에서 접수한 기부금만 120억 원이 넘었다.
--- p.318
1984년 회장으로 정기총회를 주관한 자리에서, 영부인은 새로운 사업으로 청소년을 위한 “새세대 생활관”을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1…청소년 범죄는 결손가정에서 발생하므로, 이들에게 정상가정을 실습해볼 기회를 주어 향후 정상가정을 재생산하도록 하는 일종의 청소년 교육이었다.
--- p.326
1980년대 안기부와 보안사가 각각 5,000~6,000명 규모였던 데 비해 경찰은 그 열 배가 넘는 5만~8만명으로,…안기부와 보안사만으로는 운동이 급진화·대중화되는 상황에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며, 거꾸로 경찰의 역할이 없었다면 그토록 많은 조작사건이 만들어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대공경찰과 대공분실이 있었다.
--- p.336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는 민주화운동에 대응할 정책적·조직적 변화가 필요했다. 나아가 운동의 급진화·대중화 경향은 대공경찰과 대공분실 확대를 추동했다.
--- p.346
그는 5월 13일에 “80년 5월 광주의 희생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고, 오늘의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있다”라며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조성’, ‘관련 전과 기록 말소’, ‘사망·행불·부상자 추가 신고 기회 제공’ 등의 방안을 담은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에 대해서는 “진상규명과 관련해 미흡한 부분은 훗날 역사에 맡겨야 하고, 오늘 다시 보복적 한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며 반대 입장을 나타냈다.
--- p.368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5·18 피고소·피고발인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리자 그 직후부터 이에 항의하는 집회와 국회 청원을 위한 서명운동 등이 이어졌다.
--- p.370
1997년 하반기의 경제위기와 대선 정국 속에서 김영삼이 제창한 역사 바로 세우기는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선을 앞두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결성된 한나라당은 당헌 전문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삭제했다. 야권의 대선 후보인 국민회의 김대중도 사면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 p.380
김종필의 자민련과 손을 잡아 탄생한 김대중 정권은 동서 화합의 차원에서 박정희시기 역사를 끌어안고자 했다.
1999년 5월 13일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대해 정부 차원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 p.382
출판사 리뷰
북한·만주에서 대공분실까지…시야를 넓히다
‘오늘의 한국 현대사’는 ‘해전사’와 ‘해공점시’의 주제를 시·공간적으로 확장했다.
우선 1·2권에 수록된 32편의 글 중 8편이 북한과 만주·중국을 다루면서 공간적으로 범위를 넓혔다.
사회주의 ‘형제국’에 보내진 북한 전재고아들의 실상이나 북한의 ‘자립적 중공업화’를 분석한 글 등이다. 한국 현대사라 하면 흔히 남한의 현대사로 이해한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경제적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불가분의 관계인 북한 연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북한 연구를 포함한 한국 현대사 서적의 발간은 의미 있는 시도라 하겠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창설에 간여한 여운형 그룹의 월북 목적, 그들의 활동, 이후 행적 등 흥미로운 비화도 등장한다. 연구 대상 시기도 확장했다.
1945년 9월 15일, 즉 미군 상륙 약 일주일 후 집회 허가제를 선포한 사실에서, 5공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상과 배경까지 짚어내어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성과 자본주의 불평등성의 뿌리를 캐냈다.
지세 물납제·경영학 이식까지…깊이를 더하다
연구 범위도 정치 이외에 경제·사회·문화·교육 등 다양한 이슈를 짚어내며 깊이를 더했다.
1956년 절량絶糧농가가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꼴에 이르도록 늘어난 이유가, 정부 편의만 도모한 지세地稅 물납제에 있음을 통계적으로 입증한 김수향의 글이 좋은 예다.
미국 워싱턴대의 지원으로 경영학과가 국내 처음으로 고려대와 연세대에 개설된 과정을 추적해 미국의 냉전 전략을 보여주기도 하고, 1950년대 첫 ‘한국 국보전’ 해외 개최의 의미를 살피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공해’가 어떻게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는지, 어떤 우여곡절을 거쳐 ‘환경권’으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분석하고, 새세대육영회를 중심으로 ‘5공의 어머니’ 이순자 여사의 영부인 정치를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공공성 가치의 위축과 특권 유지란 측면에서 서울대 법인화 논의를 역사적으로 다루는 등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글들이 실렸다.
현대사 연구의 성과와 역량을 한눈에
이 책의 필진은 한국역사연구회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에서 이루어진 수업과 세미나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 2025년 퇴임한 정용욱 서울대 역사학부 명예교수의 학은(學恩)을 입은 제자와 후배 연구자들로 구성되었다.
베니스국립대의 안종철 교수 등 중견 연구자들부터 서울대 국사학과의 이동원 교수를 비롯한 ‘차세대’ 교수들, 거기에 젊은 강사들도 다수 참여해 탄탄한 연구 성과를 제공했다.
여기에 임찬혁 연변대 역사학과 조교수, 장초 흑룡강대학 세계역사학과 전임강사와 요네즈 토쿠야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강사 등 해외학자도 참여했다.
한국 현대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 중인 필자들이 대거 참여한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현대사 연구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책이라 하겠다.
이 책은 한 마디로 한국 현대사 연구의 ‘이정표’라 부를 수 있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73933780>
'45.한국역사의 이해 (독서요약) > 2.한국사일반 (백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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