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평택 원균 장군 사당에 있는 현대의 원균 영정
제2대 조선 수군 삼도수군통제사
1597년 4월 12일~1597년 8월 27일
별명 자(字): 평중(平仲)
아호(雅號): 매월당(梅月堂)
출생일 1540년 2월 12일
출생지 조선 경기도 진위현 여방면 내리
(現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사망일 1597년 8월 27일(추정)
사망지 조선 경상도 거제군 거제면 거제도
학력 1567년 식년무과에 을과 급제
본관 원주(原州)
부모 평원부원군 원준량(부) / 남원 양씨 부인(모)
배우자 정경부인 파평 윤씨
자녀 원사웅
친척 원연(동생)
원용(동생)
원전(동생)
원사립(조카)
종교 유교(성리학)
복무 조선군
복무기간 1567년~1597년
근무 조산보만호
전라좌도수군
경상우도수군
삼도수군통제사
최종계급 종2품 삼도수군통제사
지휘 삼도수군
주요 참전 한산도 대첩 / 칠천량 해전
서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1등 공신
원릉군
추증 좌찬성
원균
한글 표기: 원균
한자 표기: 元均
개정 로마자 표기: Won Gyun
매큔-라이샤워 표기: Wŏn Kyun
예일 표기: Wen Kyun
평중
한글 표기: 평중
한자 표기: 平仲
개정 로마자 표기: Pyeongjung
매큔-라이샤워 표기: P'yŏngjung
예일 표기: Phyengcwung
원균
원균(元均, 1540년 2월 12일 (음력 1월 5일)~1597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1]))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원주 원씨 원성백파로 자는 평중(平仲)이다.
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었고 그 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7년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정유재란을 맞았다.
일본 수군과 여러 차례 교전하던 끝에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며 전사하였다.
사후 권율, 이순신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책록되었고 좌찬성으로 추증되며 원릉군(原陵君)의 작위가 수여되었다.다만 별도의 시호는 없다.
1540년 지금의 평택 인근에서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67년 2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과 조산 만호를 지냈다.
조산은 함경도 경흥 관내의 두만강과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로 조선은 이곳에 조산보를 두어 강을 방비하였다.
원균은 이곳에서 여진 부족과 전투를 치러 공적을 쌓았고 종성부사가 되었다.
일본의 동태가 심상치 않게 되자 조선은 북방의 실전 경험이 있는 무관들을 남쪽 수군에 배치하였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이순신이 전라 좌수사, 박홍이 경상좌수사로 임명될 무렵 원균은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순신과 원균은 때로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는 관계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하여 무너지자 나머지 조선 수군은 서로 협력하여 일본을 상대하여야만 하였다.
이순신은 초기에 원균의 지원을 주저하였으나 부하들의 강한 전의를 보고 남해안 전역에서 원균과 협력하여 한산도대첩, 부산포 해전과 같은 성과를 일구어 내었다.
임진왜란의 진행 과정에서 각 지역별로 편재되어 있던 조선 수군의 합동 작전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수군 전체를 지휘할 삼도수군통제사가 신설되어 이순신이 임명되었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의 지휘를 받았으나 둘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갈등이 컸다.
이순신도 원균을 좋게 보지 않았지만, 원균 역시 자신이 다섯 살이나 위이고 무관 경력 역시 일찍 시작하였는데도 이순신의 지휘를 받아야 하는 것에 분개하였다.
선조는 멀리 의주까지 몽진한 상태에서 남해에서 벌어지는 수군의 작전에 대한 명령을 내렸으나 이순신은 현장의 상황에 따라 판단하며 움직였기 때문에 선조와 갈등을 겪었다.
1597년 일본이 다시 공세로 돌아설 기미가 보이고 가토 기요마사가 선봉에 선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선조는 요격을 명령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항명의 죄를 물어 파직하고 원균을 2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던 이순신에 대한 불만이 컸고 평소 과감한 적진 돌격을 주장하던 원균을 지원하고 있었다.
원균의 전술은 적 발견 초기에 용맹히 돌진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화기의 사용이 일반화된 근세 시기 해전에서 전통적인 돌격전은 성과가 좋을 수 없었다.
이순신의 학익진이 화력집중에 의한 포위 섬멸의 개념을 사용하여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있는 평가를 받는 것과 대비된다.
몇 차례의 교전에서 돌격 전술이 통하지 않자 원균은 선조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보다 신중한 작전을 펴고자 하였으나 선조는 권율에게 지시하여 원균에게 징계를 주며 압박하였다.
1597년 7월이 되자 원균은 왕명을 따르지 않을 경우 자신도 이순신의 전철을 밟게 될 상황에 처한 상태에서 해전에 임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진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대패하였고 원균은 전사하고 만다.
원균의 전사 후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며 자신이 판단을 잘못하였다고 사과한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은 이후 오랫 동안 원균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
평소 과격했던 원균의 성품이나 작전 중에 술을 먹는 행동 등을 언급하며 패전의 원인을 원균의 성품으로 돌리는 평가도 있다.
특히 정조 시기 이순신이 신격화된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비되는 인물로 그려졌다.
원균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현대에 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부터 원씨 문중이나 평택사학계를 중심으로 원균에 대한 재조명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평택문화원과 같은 평택의 향토사학계는 원균을 구국의 명장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엔 혈연이나 지연과 얽혀 오히려 객관성을 잃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평택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인 원유철이 원균을 옹호하고 나서자 많은 비판이 있었다.
원균 역시 일본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맞아 전장에서 싸운 장군의 한 명이라는 점은 분명하나 그의 패전에 대해서는 전쟁사의 관점에 바탕을 둔 객관적 평가가 필요하다.
이순신이 일본을 맞아 연전 연승한 이유는 지형, 조류, 날씨 등에 대한 종합적인 판단이 큰 반면, 원균의 칠천량 해전은 가장 좋지 않은 날씨에 가장 불리한 지형과 조류를 택했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출생과 가계
원균은 경기도 영신현 출신이다.
영신현은 조선 중기 무렵 진위현에 속해 있었고 오늘날 평택시 도일동에 해당한다.
1540년 음력 1월 5일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위현에는 원씨, 소씨, 석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는데 원균의 가문인 원주 원씨 원성백파의 입향 시조인 원몽은 진주 소씨와 결혼하며 이곳에 정착하였다.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명종 시기 전라우수사, 경상좌수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관이었으며 이에 따라 형제와 자녀들 역시 상당수가 무관으로 재직한 무인 가문이었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이다.
원준량과 남원 양씨 사이에는 원균을 비롯하여 원연, 원전 등의 아들이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원연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대동여지도에 그려진 종성부 인근
초기 경력
조선왕조실록은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에 대해 성격이 거칠고 욕심이 많은 관리로 기록한다.
여러 이유로 파직과 유배를 반복하였으나 거듭 복직되었는데 당시 실세였던 윤원형이 두둔하였기 때문이다.
명종 24년인 1564년 원준량은 자식의 무과 시험에 개입하여 탄핵되었는데당시 무과 시험에 응시할 자식에 원균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원균은 명종 재위 시기에는 과거를 치르지 못하였다.
원균이 과거에 응시한 것은 선조가 즉위한 이후인 1567년의 일이다.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윤두수와 인척이 되어 다시 집권층의 비호를 받을 수 있었고 선조 역시 윤두수와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선조는 원준량과 원균 부자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원균은 선전관을 거쳐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가 되었다.
조산보는 여진으로 부터 두만강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원균은 이곳에서 실전을 경험하며 무공을 세워 종성부사가 되었다.
종성은 세종 시대의 4군6진 설립과 함께 조선의 영토로 편입된 곳으로 조선 중기까지 여진과의 충돌이 그치지 않던 곳이다.
조선은 새롭게 편입된 함경도 지역에 사민 정책을 실시하며 지배를 강화하는 한편 여전히 함경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의 부족장들을 번호(藩胡)로 삼아 일정한 자치를 보장하며 회유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만주 일대에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하자 조선에 편입되었던 번호들 역시 동요하였고 결국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니탕개의 난이 평정된 후로도 북방 여진의 동태는 늘 불안정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여진 부락이 조선군의 둔전을 공격하자 이일은 여진족의 중심지인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정벌하였는데 원균은 이일의 지휘를 받아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북방을 견제할 여력이 없게 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이어진 북방 여진과의 갈등은 결국 후금의 건국 이후로도 이어지게 된다.
1591년 여러 경로를 통해 일본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쟁을 원치 않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도입명"(假道入明,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공격한다)를 내세워 대마도에 선봉장이 되라고 압박하는 것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대마도주가 일본의 정세를 알리며 조선에 일본과의 교섭을 요청하자 조선은 통신사를 파견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전쟁에 대한 대비를 진행하였다.
조선은 전쟁 대비의 일환으로 북방의 실전 경험이 있는 무관들을 남해안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임명된 경상좌수사 박홍,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은 모두 북방에서 여진과 전투 경험이 있는 무관들이었다.
종성에서 실전을 경험한 원균 역시 이러한 대비의 일환으로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부산진 순절도
개전 초기
선조 시기까지 조선은 대마도를 중계자로 삼아 일본과 교류하고 있었다.
부산포, 오늘날 진해인 내이포, 울산의 염포에 왜관을 두어 일본인의 거주와 무역을 허락하고 있었으나 삼포왜란 이후 교역량과 인원을 줄였고 명종 시기 발생한 을묘왜변 이후 교역은 더욱 줄어들었다.
일본이 센고쿠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면서 조선과 일본 사이의 외교는 거의 중단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각지를 장악하며 실권을 잡았고 대마도주에게 선봉장이 되어 조선을 침략할 것을 압박하였다.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도요토미가 제시한 "가도입명"(假道入明, 조선의 길을 빌려 명나라를 공격한다)을 공격 의사가 아니라 조선의 육로를 통해 명나라에 조공하고자 한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전쟁을 막고자 하였으나, 도요토미의 전쟁 의사가 분명해지자 조선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여 조선과 일본의 직접 교섭을 추진하였다.
조선은 황윤길을 정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하여 통신사를 파견하고 일본의 정세를 살피도록 하였다.
황윤길은 일본의 군사 태세가 심상치 않아 전쟁의 우려가 있다고 보고하였으나 김성일은 이를 부정하였다.
조선은 일본의 침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의 왜란들과 비슷한 규모일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1591년 부터 조선은 남해안의 주요 요충지를 보수하고 북방에서 실전 경험을 갖춘 무관들을 남부의 수군에 배치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원균이 경상우수사가 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일본의 침공은 전례가 없던 규모였다. 일본이 동원한 병력은 총 30여 만명에 달하였고 1592년 4월 14일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700여 척에 병력을 나누어 싣고 오우라항을 출발하여 그 날 오후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조선 수군에서 이들을 처음으로 상대한 지휘관은 경상좌수사였던 박홍이었다.
박홍은 예상 외의 대군이 공격해 오자 도망쳐버렸다.
당시 조선 수군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세 도로 분산되어 있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는 다시 좌도와 우도로 구분하여 관할 구역을 책임지게 하고 있었다.
경상좌수영은 부산진을 비롯한 삼포 방면을 관할하고 있었고, 원균이 있던 경상우수영은 남해군과 거제도 방면을 책임지고 있었다.
박홍이 도망가면서 경상좌수영이 와해되자 원균은 홀로 일본을 상대할 수 밖에 없었다.
부산진 전투에서 정발이 전사한 뒤 일본은 순식간에 부산진과 동래를 장악하여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원균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전라좌수사인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순신은 원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은 거제도 인근을 기점으로 이웃하고 있었고 《난중일기》에 묘사된 원균의 모습은 성격이 거칠고 부하들에게 모질며 욕심이 많은 모습이었다.[50]
한편 원균 역시 자신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이순신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선조는 둘의 불화를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이 둘을 의도적으로 경쟁시킨 것으로 보인다.[50]
그러나 지휘관 사이의 불화와 상관 없이 조선은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고 부하들이 일본과 대항하기를 강력히 요청하자 이순신은 원군을 구성하여 출진하였다.
1592년 5월 7일 이렇게 하여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합세한 옥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개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맞을 수 있었다.[49] 같은 날 조선 수군은 합포 해전을 치르며 다시 한 번 승리하였다.
5월 29일에는 다시 사천 해전을 벌여 적선 13척을 불태웠다. 이날 거북선이 처음으로 실전을 치렀다.
이후 6월 2일의 당포 해전, 6월 5일의 당항포 해전, 6월 7일의 율포 해전을 거치며 조선 수군은 일본의 후방을 끈질기게 괴롭혔다.
한산도대첩
개전 이후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조선 수군은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일본의 함선을 격파하며 선전하고 있었으나 육군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6월 7일 삼도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이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일본의 북진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6월 9일 선조는 새벽에 도성을 빠져나와 몽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바다의 전황은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선조는 육전의 연이은 패배와 달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이순신에게 정2품의 자헌대부를 원균과 이억기에게는 종2품의 가선대부를 가자하는 포상을 내렸다.

한산도대첩 상상도
7월이 되자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지휘 아래 재편되고 있었다.
전쟁 이전에 경상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은 동등한 품계였으나 초기 전투에서 전라좌수영이 주도하게 되자 이순신의 품계가 더 높아지게 된 것이다.
개전 초기 경상도 지역의 수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어 원균의 경우 휘하의 함선이 극히 적은 "병사 없는 장군"이 된 것이 이유였으나, 이순신과 원균의 경쟁과 갈등은 여전히 봉합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개전 초기 해전의 연이은 패배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을 강하게 질책하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에게 조선 수군과 일전을 명령하였다.
일본 수군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의 규모였다.
이에 맞선 조선 수군의 전선은 이순신 휘하의 전라좌수영이 26척, 이억기 휘하의 전라우수영이 21척, 원균 휘하의 경상우수영이 7척으로 58척 규모였다.
이순신은 적의 대규모 함대를 견내량으로 유인하여 조류의 잇점을 살리고 그 유명한 학익진으로 화망을 구성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하였다.
학익진은 포위 섬멸을 위한 육지 전투의 진형에서 가져 온 것으로 일본 역시 센고쿠 시대를 걸쳐 보아온 익숙한 진형이었고 측면 돌파에 취약하다는 약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한 조류에 떠밀린 일본 수군은 제대로 된 진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조선 수군의 집중 포화를 맞으며 침몰하였다. 이날 일본 수군은 47척이 파괴되고 12척이 나포되어 그야말로 궤멸하였다.
한산도대첩은 육지의 전선이 한반도의 중심을 가르며 길어진 상황에서 해로를 통해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려던 일본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전략적 전환점이었다. 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게 해전 금지령을 내렸다.
이 전투로 이순신은 정헌대부에 원균과 이억기는 가의대부에 올랐다.
조선 수군이 대승을 거둔 뒤 원균은 이순신에게 공동으로 장계를 올리자고 제안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
사실상 "병사 없는 장수"로 참전한 원균이 특별히 내세울 공로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원균은 이순신의 이러한 행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순신과의 불화
일본은 해전을 피하고 거제도 북부에 왜성을 쌓아 수비로 전환하였다.
한편 조선 수군 역시 육지 깊숙이 상륙할 병력은 되지 못하여 두 진영은 대치 상황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전쟁 2년차를 맞이한 1593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을 보다 전략적 요충지인 한산도로 이전하였고 그 해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로서 원균은 공식적으로 이순신 휘하의 지휘관이 되었는데 원균은 이러한 조치에 불만을 품었다.
1594년이 되어 임진왜란이 장기화되자 경상도는 사실상 일본의 점령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선의 지방관은 전사하거나 도망쳤고 조선은 임시 지방관을 새로 임명하며 항전을 독려하였다.
경상도를 장악한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에 대해 원균은 지방 수령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64] 육군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공격할 수 없다는 장계를 올렸다.
당시 조정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원균의 지휘 능력과 성격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었고 상관인 이순신과의 불화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만 원균과 인척 관계인 서인 영수 윤두수가 원균을 비호하였고 선조 역시 이를 두둔하였다.

상당산성 남문
충청·전라병사
1594년 11월 12일 선조는 전란의 와중에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경연을 열고 여러 현안을 신하들과 논의하였다.
이 중에 이순신이 스스로 삼도수군통제사를 사직하겠다고 한 문제가 거론되었다.
신하들은 원균이 10세에 불과한 자신의 서자를 전공에 포함시키자 이순신이 이를 몹시 불쾌하게 여겼다고 보고하였고, 선조는 여전히 원균이 병이 난 몸을 이끌고 분전하고 있다고 두둔하였으나, 이순신 아니면 원균 둘 중 하나를 다른 곳에 보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란 것에는 동의하였다.
몇 일 뒤인 11월 17일 수군과 육군이 일본의 거점이었던 거제도를 협공하였다가 실패한 일이 보고되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무관들은 저 마다 따로 장계를 올렸다.
원균은 자신의 실패는 감추고 적군 한 명을 생포한 사실만을 보고하였다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조정의 신하들은 작전에 참여한 장수들 사이에 불화가 크고 결과마저 거짓으로 보고한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이제는 더 이상 두둔만으로 무마할 수 없게된 선조는 원균을 충청병사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사간원이 전쟁 중 장수를 교체하는 일에 따르는 위험을 들어 만류하였으나 선조의 뜻은 확고하였다.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원균의 전근은 해를 넘겨서야 이루어졌다.
원균은 이러한 전근 조치에 불만을 품고 지체한 것으로 보인다.
원균의 후임자로 임명된 배설이 1595년 2월이 되어서도 부임하지 못하였고 그해 3월이 되어서도 조정은 원균이 제대로 임지에 당도하였는 지 알지못해 우려하였다.
4월이 되어서야 충청병사 원균이 전마를 요청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충청병사로 재직하면서 원균은 상당산성을 보수하였으나 전횡과 학정을 일삼는다는 탄핵을 받게된다.
콩을 받고 군역을 일찍 마치게 하여 착복하였고 무리하게 형벌을 집행하였다는 것이 이유였다.
사헌부는 원균의 파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조는 어려운 와중에 명장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두둔하였다.
이후로도 원균은 사사로이 종사관을 임명하였다가 제지를 받는 등 문제를 일으켰으나 선조가 계속하여 비호하여 파직을 면할 수 있었다.
문제가 계속되자 선조는 원균을 전라병사로 임명하여 전근시킨다.
전라도는 일본이 침공하지 못하여 비교적 안전한 후방이었다. 일종의 좌천인 셈이다.

일본 측이 그린 제2차 평양성 전투
정유재란
임진왜란 초기 일본은 부산 상륙 이후 18일 만인 1592년 5월 2일 서울을 함락하였고 다시 6월 14일 평양성 전투를 통해 평양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개전 2개월이 지난 뒤에는 함경도까지 장악하였으나 7월 이후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전황은 장기전으로 변화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의 원군 요청에 오히려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협공해 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였으나 칙사로 파견된 설지가 조선이 항전 의지가 강하다는 점과 함께 조선이 정복당할 경우 일본이 곧바로 명나라 본토로 공격해 올것이라고 보고하자 본격적으로 원군 파병을 결정한다.
첫 파병은 3천 명 규모의 소부대로 7월의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명나라는 오히려 이여송을 필두로 파병 인원을 5만명 규모로 늘려 1593년 1월 제4차 평양성 전투를 통해 평양을 탈환하였다.
조선의 전황이 화급한 상황을 피하게 되자 명나라는 확전을 피하고 소극적 자세를 보였고 조선은 오히려 원군으로 온 명나라 병사들의 무리한 요구와 민가 약탈에 골머리를 앓았다.
한편 일본 역시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보급 문제가 심각하였다. 일본의 원래 계획은 6개월 분의 식량을 미리 준비하여 전쟁을 치르고 이후에는 조선에서 점령한 곳에서 식량을 조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군의 연이은 패배로 서해안 지역 진출이 막히고 육지에서도 제1차 진주성 전투로 후퇴하여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점령할 수 없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활약하여 보급로가 취약해지자 약탈을 자행하며 식량을 확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큐슈와 시코쿠에서 확보한 군량은 직할 부대와 함께 부산에 보관되어 있었고 참전한 다이묘들은 각자의 영지에서 스스로 군량을 확충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보급 사정은 점차 악화되었다.
식량 확보를 위한 일본의 약탈은 오히려 더욱 거센 의병 활동을 불러오는 악순환을 겪었다.
1593년 2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을 수복하고 남진하였으나 벽제관 전투에서 의외의 패배를 겪고 주춤하게 되었고 일본은 조명연합군을 저지하였으나 모든 병력을 한성부로 집결 시킨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후퇴의 승락까지 받은 상태였다.
계속되는 보급 문제와 겹쳐 권율 등의 거센 반격으로 병력 손실까지 커지자 일본은 경상남도의 남해안까지 후퇴한 상태에서 휴전협상을 시작하였다.
조선은 자신의 영토에서 두 외국이 휴전을 협상하는 불편한 상황을 맞이하였으나 협상 결렬을 예측하고 전쟁을 준비하였다.
휴전 회담이 계속되어 전쟁이 소강 상태였던 1596년 선조는 전라병사로 재직하고 있던 원균에게 말을 하사하며 그를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인다.
명나라의 만력제와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로 조금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조선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휴전 회담을 담당한 심유경은 명과 일본 사이에서 상대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요구들은 자기 선에서 조율하면서 어떻게든 휴전을 성사시키고자 하였으나 결국 거짓이 들통나며 양쪽 모두의 신의를 잃게 되었고 협상 역시 결렬되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력 14만을 집결시키고 재침공을 준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제승당
삼도수군통제사
명과 일본의 협상은 조선의 입장에선 자칫 영토를 상실할 수 있는 위기였다.
선조는 이 사이에서 조선의 존재를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선조는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임명하고 남부지방의 사정을 확인하는 한편 이순신에게 지속적인 공격을 명령하였다.[90] 그러나 이순신은 선조의 명령에 미온적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병력 부족이었고 현장의 상황 변화를 고려하지 않는 무리한 지시도 원인이었다.
선조가 통제영을 한산도에서 거제도로 이전하라고 지시하자 이순신은 전략적 이점을 버리고 적의 본진에 너무 근접할 수 없다는 답변을 하였고, 부산을 공격하라는 지시에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조는 자신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이순신을 원망하였다.
이후 선조는 이순신을 교체할 의사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순신과 원균을 비교해 보라는 말에 도체찰사 이원익은 둘 다 공과가 있으나 전쟁이 한창이기 때문에 통제사 교체는 어렵고 원균은 용맹하나 평소 무리를 많이 일으키니 필요할 때에만 병력을 주라고 대답하였다.
일본의 재침공 소식을 들은 원균은 도해 중인 일본을 요격하자는 주장을 펼쳤고 이는 선조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다.이순신이 계속하여 먼 바다에서의 요격 명령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자 선조는 이순신을 의심하였고 원균을 전방에 내세우고자 하였다.
선조는 일원화 되어 있던 수군의 지휘체계를 분할하여 이순신을 충청 방면 통제사로 돌리고 원균을 전라 방면 통제사로 임명하여 전선에 배치하는 결정을 내린다.
정유재란의 일본 측 주력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였는데 둘 역시 원균과 이순신 못지 않은 앙숙으로 알려져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재침공의 선봉을 가토 기요마사에게 맡겼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정보를 조선측에 흘렸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요격을 명령하였지만 이순신은 이를 기만전술로 판단하고 따르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가 대군을 이끌고 상륙하자 선조는 항명의 죄를 물어 이순신을 파직하고 한성으로 압송하였고 원균을 단독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여 수군 전체의 지휘권을 주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은 우선적으로 선조의 명령을 이행하고자 하였다.
이순신이 항명의 죄로 파직된 상황은 이제 원균 스스로의 지휘에 부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실제로 당시 조선 수군의 병력은 크게 줄어 있었다.
평시에도 수군은 육군과 달리 군역이 길고 고되서 기피의 대상이었는데 전쟁이 장기화 되자 탈영이 속출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파직 이후로도 그대로 남아 있던 휘하 무관들의 태도 역시 원균에게 부담이 되었다.
무관들은 이순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입장을 보였고 원균의 지휘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원균은 명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 무관들을 벌하여 주기를 청하였고 선조는 이를 다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일부를 다른 곳으로 보내며 원균의 지휘권 강화를 지원하였다.
원균이 이순신의 다섯 아들이라 지목하였던 권준, 배홍립 등의 부관들[95]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거제 장문포 왜성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후 일본 측의 수비 태세를 정찰하고 소규모 전투를 치렀다.
1597년 3월 원균이 적선 3척을 나포하고 수급 47급을 바치자 선조는 크게 고무되어 비변사가 이에 대해 논상하라고 지시한다.[99]
비변사는 조사 결과 나무를 하러 나온 왜적을 죽인 것이라 싸움에서 공을 세운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고하였지만 선조는 나무를 하러 나온 왜적도 적이 분명하니 상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조는 이를 통해 이순신을 교체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점과 원균이 주저말고 공격에 앞장서기를 동시에 노렸을 것이다. 원균은 적진을 정찰하고 소규모 전투를 이어갔지만 선조가 원하는 것은 일본의 배후인 부산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었다.[13]
그러나 당시 일본은 가덕도, 거제도 등에 성을 쌓고 후방을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병력 4천5백 명에 불과한 수군의 힘만으로 부산을 타격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거듭되는 선조의 공격 명령은 원균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원균은 30만 명의 정병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당시 조명연합군의 병력 상황을 고려할 때 이는 수군 단독으로는 공격이 어렵다는 사실을 애둘러 보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실제 경상도 남해안에 건축된 일본의 왜성은 여러 겹의 성벽이 놓인 복합구조로 되어 있어서 공략이 쉽지 않았고 조명연합군은 성을 포위하고 식량을 고갈시키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원균마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선조는 보다 강하게 원균을 압박하였다.
도원수였던 권율이 전장의 상황이 원균이 말한 바와 같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고 보고하였으나 선조는 비변사를 통해 구체적인 작전 목표와 방법을 지시하며 현장 지휘관의 의견을 묵살하였다.
비변사의 작전은 거제도의 점령과 부산 앞바다의 재해권 장악이었다.
원균의 입장에서는 소수의 병력으로 적의 본진 한 가운데를 뚫고 들어가라는 명령이었기 때문에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선조는 권율에게 원균을 명령불복종으로 징계하라고 지시하였고 원균은 권율에게 불려가 곤장을 맞았다.
이제 원균에게는 명령대로 진격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에도시대 일본에서 발간된 《화본태합기》의 칠천량 해전을 묘사한 삽화
칠천량 해전
1597년 6월 18일 원균은 1백 척의 규모로 출진하였다.
선봉은 30척을 이끌고 조선 수군의 중군을 지휘하였던 안홍국이었다.
원균의 전술은 적을 발견하면 초기에 용맹히 돌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
선조와 비변사 역시 조선의 전함이 일본의 것보다 내구성이 뛰어나므로 근접전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원균 스스로도 가토 기요마사가 해전을 회피하고 육지에서 싸우려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화기가 일반화된 당시 해전에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접근전 우선 전술은 여러 가지 문제를 노출했다.
일본은 조선 수군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화망 형성과 집중 포화를 두려워 하였고 불리한 상황이 되면 산개하여 도주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은 정규군이라기 보다는 왜구 활동을 기반으로 한 비정규군 체계였고 주력인 육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리한 경우 도주하는 것은 그들에겐 자연스러운 전술이었다.

원균의 진격 및 퇴각로
원균이 소규모 선단을 발견하고 추격하자 이들 역시 곧바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원균은 선조의 명령 때문이라도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도주하는 적을 무리하게 추격하였으나 풍향과 조류가 불리하여 결국 가덕도 방향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안골포에 매복하여 있던 일본 수군이 배후를 기습하여 왔다.
이렇게 하여 벌어진 가덕도 해전에서 앞장서 적선을 추격하던 선봉장 안홍국의 배가 고립되며 적선 수십척에 포위되었다. 안홍국은 분전하였으나 결국 이마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원균은 한산도로 후퇴하여 안홍국 전사 사실을 이원익에게 보고하였다.
이원익은 가덕도 해전의 전황과 함께 안골포와 가덕도 사이의 수로가 좁아 적들을 뚫고 전진하기 어렵다는 점을 다시 보고하였지만 선조는 후퇴하지 말고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하였다. 선조는 원균에게 이전과 같이 공격하다 후퇴하면 죄를 묻겠다고 못박았다.
이 시점에서 원균의 지휘권은 크게 축소되어 독자적 작전 수행 권한이 훼손되었다고 할 수 있다.
7월 초 조선 수군의 전병력이라 할 수 있는 2백척 규모로 다시 출전한 원균은 7월 5일 칠천도, 7월 6일 옥포에 정박한 뒤 7월 7일 가덕도의 말곶 앞바다를 경유하였고, 다대포에서 적선 8 척을 불사른 뒤 7월 8일 절영도 앞바다에 다다랐다.
거제도 이후로는 여러 해안과 섬에 일본의 성과 진지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움직임은 그대로 일본 지휘부에 전달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고 절영도 앞바다에 1천여 척의 배를 집결하여 조선 수군을 상대하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때 일본이 일부가 공격해 들어왔다가 후퇴를 반복하는 전술을 펼쳤다고 묘사한다.
풍향과 조류가 불리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일본의 기동력을 살린 분산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20여 척을 잃은 뒤 후퇴하였다.
하루 종일 적의 교대 공격에 노출되어 있던 조선 수군은 지칠대로 지쳐 가덕도에 상륙하였으나 기습을 받고 4백여 명이 희생되었다. 원균은 급히 배를 돌려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향했으나
여기서도 적의 매복을 당하였고 칠천도로 후퇴하였다.
선조가 이미 후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고성까지 나와있던 권율은 다시 원균을 불러들여 곤장을 친 뒤 출전을 명령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도는 적진과 가까워 위험하니 좀 더 후퇴한 뒤 전열을 재정비하자고 건의하였으나 전투 상황이 불리하여 후퇴하였다는 이유로 곤장까지 맞은 원균의 입장에서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 원균은 술을 많이 마셨다.

칠천량의 위치
칠천량은 거제도 실전리와 칠천도 하정리 사이의 좁은 해협이다.
이 자리에 2000년 개통된 칠천교의 길이는 455 m 이다.
일본은 칠천량을 포위 차단하고 조선 수군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7월 15일 새벽 일본의 소규모 선단이 기습하여 정박중인 조선 수군의 전함 4척이 불에 탔다.
적의 동태를 살피지 못한 경계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이미 거제도에 육군을 주둔하고 있었던 일본은 수륙 양면에서 조선 수군을 압박하였다.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의 일본 수군이 다시 한번 교대로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하는 사이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육군이 칠천도로 상륙하여 공격해 들어왔다.
적의 총공세에 직면한 7월 16일 새벽 조선 수군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여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다.
원균은 우선 칠천량의 북단으로 향하여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적의 포위가 두터워 다시 배를 남단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곳 역시 이미 수륙 양면이 모두 포위된 상황이었다.
좁은 해역에서 많은 배가 급작스럽게 선회를 반복하며 진형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원균은 고성 방면으로 탈출할 수 있었으나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등은 전사하였다.
조선 수군의 주력은 고성의 춘원포에 상륙하였다.
여전히 고성에 머물고 있던 권율의 원군을 요청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육군으로 퇴로를 차단한 상태였고 원균은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함대 대부분을 잃은 조선 수군은 수륙 양면으로 패주하였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12척의 배를 이끌고 벗어날 수 있었고 순천부사 우치적을 비롯한 일부 병력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본 측은 칠천량 해전에서 160여 척의 조선 수군 전함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칠천량 해전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은 전략적 측면에서 현장 지휘권을 인정하지 않은 선조의 무리한 명령이 있을 것이지만 원균의 근접전 일변도의 단순한 전술 운용과 전장의 날씨와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기동, 공격 자원을 집중하지 않은 작전 운용 등이 실패 원인으로 지목된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선조는 오히려 큰 위기를 자초하게 되었다.
전황을 알기 위해 급파되었던 선전관 김식이 패전 소식을 전하자 조정은 아무도 대비책을 말하지 못하는 충격에 휩쌓였다.
선조는 패전을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천운으로 돌리면서 그제서야 왜 한산도로 후퇴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원균장군묘
사후
칠천량 패전 직후 조선의 당면 과제는 궤멸한 수군의 재건과 방비책 마련이었다.
우선은 참전하였던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사들에게 책임이 돌아갔는데, 이들은 상관인 원균에게 진격하면 질 수 밖에 없는 명령은 왕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말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권율은 한산도의 상황을 파악한 뒤 전선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식량과 병력은 생각보다 피해가 크지 않다고 보고하며 이순신의 재임명을 건의하였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냐"며 사과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켰다.
이때까지 원균의 생사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선조는 원균을 벌주기는 하여야겠으나 생사를 확인한 뒤 하자고 지시한다.
원균의 전사가 확실해지자 사헌부는 권율 역시 전장의 상황을 살피지 않고 곤장을 쳐가며 원균을 독촉하였다는 이유로 탄핵을 주장하였다.
남원 전투의 패배로 남원이 함락된 책임 역시 권율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자신의 명령때문에 패전을 자초한 선조 입장에서 이러한 건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선조는 패전의 책임을 치휘관 한 사람에게만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었다.
칠천량에서 대승을 거둔 일본은 숙원이었던 전라도 해안 공격을 개시하고자 하였으나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격퇴되었다. 이로서 조선 수군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현재 평택시에 조성되어 있는 원균장군묘는 선조가 하사하였던 원균의 말이 원균의 신발을 물고왔다는 설화가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포위당하여 전사한 원균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유품만을 넣은 가묘인 것으로 추정된다.
거제도, 고성 등지에 실제 원균이 매장된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가 옛부터 계속되어 왔다.

원균의 선무공신 교지 (부분)
평가
이덕형 등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원균 개인의 품성 탓으로 돌렸고 성품마저 미련하다고 하였지만 선조는 원균이 실패하였을 지언정 용맹한 장수였다고 평가하였다.
결국 7년간의 전쟁이 끝난 뒤 벌어진 논공행상에서 선조는 이순신 권율과 함께 원균을 공신으로 인정하면서 나머지에 대해서는 오직 명나라가 참전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에 따라 원균은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원릉군의 작위를 받았다. 선조는 일본과 싸워 무공이 있는 사람들 보다 자신을 호종하여 의주 파천을 함께한 사람들을 더 인정하였는데 전란 극복이 명나라 덕분이라는 발언과 함께 전쟁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피하고 왕권을 지키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
수군지휘관으로서 원균은 화약 무기가 일반화된 해전에서 전장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패전한 장수이다.
비록 선조의 강압적인 명령 때문에 지휘관의 재량을 다 발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주력 부대의 대다수가 궤멸한 패전의 책임을 피하기는 어렵다.
다만 원균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점차 악화되었는데, 정조는 이순신을 충신의 모범으로 삼아 《이충무공전서》를 간행하였고 이후 이순신은 국난극복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한번 일본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부각되었고 현대에 들어서도 박정희 정권이 현충사를 성역화 하였다.
이순신이 영웅으로 부각될수록 원균은 그에 대비되는 인물로 비춰졌다.
일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원균에 대한 재조명 요구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1981년 평택의 원주 원씨 문중은 조상에 대한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원균장군묘를 비롯한 일대의 무덤과 비석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평택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원주 원씨는 원균의 시신이 매장된 진짜 무덤을 찾는 한 편 1992년부터 원균장군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3년 이재범이 《원균정론》을 발간하며 재평가를 주장하였고 평택문화원의 김인호가 원주 원씨 대종회, 원주 원씨 삼산공파 등과 함께 원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하여 《원균 평전 - 타는 바다》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재조명 사업은 혈연, 지연으로 오히려 객관적 평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2018년 평택시는 원균기념관을 개관하였으나 이 역시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평택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인 원유철이 원균을 옹호하고 나서자 많은 비판이 있었다.
이후로도 원균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하는 주장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가족 관계
부친 : 원준량(元俊良)
모친 : 양희증(梁希曾)의 딸 남원 양씨
장인 : 파평 윤씨 파원군(坡原君) 윤언성(尹彦誠, 1524~?)
장모 : 조우신(趙又新)의 딸 평양 조씨
정부인 : 정경부인() 윤차심(尹次深, 1546년~1642년 9월 16일)
적장녀 : 청주 한씨 한억(韓嶷)의 처
측실 : 미상
서자 : 원사웅(元士雄, 1575~1646 이전)
자부 : 구삼락(具三樂)의 딸 능성 구씨
손자 : 원필(元珌)
자부 : 성여학(成汝學)의 딸 창녕 성씨
손자 : 원염(元琰)
측실 : 미상
서장녀 : 이신춘(李新春)의 측실
서차녀 : 원정일(元貞一) - 의신군(義信君) 이비(李備)의 측실
외손자 : 원평부령(原平副令) 이박(李珀, 1598~?)
외손자 : 원계부령(原溪副令) 이경(李瓊, 1601~?)
외손자 : 원흥부령(原興副令) 이거(李琚, 1602~?)
외손자 : 원창군(原昌君) 이구(李玖, 1605~?)
외손녀 : 이혜숙(李蕙淑, 1609~?)
외손녀 : 이의숙(李懿淑, 1611~?)
외손자 : 원인부령(原仁副令) 이락(李珞, 1613~?)
외손자 : 이기숙(李己淑, 1620~?)
서3녀 : 조정견(趙廷堅)의 측실
서4녀 : 정항(鄭沆)의 측실
Sources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