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한국정치의 이해 (독서기록)/1.한국정치사상

이승만 독트린 (2026) - 정읍선언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작

동방박사님 2026. 8. 17.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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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정읍 선언’은 자유 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 독트린’이었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야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撤退)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1946년 6월 3일, 이른바 ‘정읍 선언’으로 알려져 온 이승만 발언의 요지다.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말뜻은 천지 차이로 달라진다.

 전후 맥락을 떼어내고 “우리는 남방만이라도”를 부각시키는 세력은 바로 이 한마디를 빌미로 이승만을 한반도 분단의 원흉으로 지목해 왔다.

그러나 1946년 ‘남선(南選) 순회’ 당시 이승만의 이 발언은 당시론 별달리 새로운 발언도 아니었다. 

소련의 발목잡기로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空轉)하여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발언은 정식 건국을 말하지도 않았다. 

문면 그대로 “소련이 철퇴(철수)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할 준비를 하자는 촉구였다. 

『이승만 독트린』(기파랑 刊, 2026)의 저자는 이승만의 이 호소가 “한반도 분단을 불러오긴커녕, 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소련의 야욕에 맞서 ‘반쪽의 자유’만이라도 지켜 낼 수 있게 한 ‘이승만 독트린’이었다”고 재평가한다.

목차
길을 떠나며
1. 얄타의 30분
2. 나라 찾기 폭로전
3. 스탈린과 38선
4. 미국의 귀국 방해
5. ‘분단의 원흉’은 누구?
6. 귀국 제일성 “소련 추방 자주통일”
7. 정읍 선언의 국제정치학
8. 스탈린과 김구
9. “하나님이 세운 나라”
나가며_‘이승만 독트린’은 말한다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인보길 (印輔吉)
1940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신문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를 수료했다. 조선일보 기자로 편집부장,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CTS본부장, 상무이사 뉴미디어연구소장, 종합미디어본부장 등을 지냈고, 디지틀 조선일보 대표이사로서 한국 최초의 인터넷신문을 창간했다. 

서울시문화상, 우남애국상 등을 수상했다. 엮은 책으로 『이승...

책 속으로
원한의 38선은 왜 생겼던가?
스탈린 때문이다.
38선은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자 물밀듯이 한반도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은 당초 일본 열도와 함께 한반도 역시 독일식으로 4개 연합국의 분할 점령 계획까지 짜 놓았는데 소련이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미국이 부랴부랴 38선을 그은 것은 일본의 항복 4일 전인 1948년 8월 10일 밤의 일이다. 

반발하던 소련이 11일 이를 수락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에게 패전 일본군의 항복과 일본인들의 처리를 위해 남북한을 나누어 관리하자는 ‘임시 분계선’이라 했다.
--- p.10 「길을 떠나며」 중에서

필자는 그동안 ‘정읍 발언’이라 폄하돼 온 호칭을 ‘정읍 선언’으로 격상시키고, 그 역사적 역할과 위상에 어울리는 ‘이승만 건국 독트린’, 줄여서 ‘이승만 독트린’으로 규정해야 올바른 평가라고 평소 주장해 왔다. 

미국에 세계를 움직인 먼로 독트린, 트루먼 독트린, 닉슨 독트린이 있다면 한국엔 이승만 독트린이 있다. 

아니, 당시 국내외적으로 ‘정읍 선언’의 세계사적 의미는 보다 더 크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조차 몰랐던 ‘냉전 시대’의 도래를 알려 주고, 소련에 붙잡힌 미국조차 구출해 주면서 ‘냉전 질서의 교통정리’까지 감당했던 세계평화 이정표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 p.19 「길을 떠나며」 중에서

JAPAN INSIDE OUT에서 이승만의 국제적 통찰력이 그려 내는 세계는 ‘두 가지 전쟁’에 대한 현실 고발과 미래 경고장이다. 

하나는 일본의 미국 공격이고, 또 하나는 민주주의 진영과 전체주의 진영이 벌이는 이념 전쟁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히틀러의 나치즘과 동질적이라 규정한 것이다. 

당시 루스벨트가 소련의 스탈린을 ‘연합국 친구’로 여겨 대일전에 참전시키려 할 때 나온 이승만이 문제 제기는 얼마나 빨리 시대를 앞선 선지적(先知的) 통찰인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전후(戰後) 세계의 ‘냉전’을 예견한 것 아닌가.
--- p.70 「2. 나라 찾기 폭로전」 중에서

미국은 처음부터 소련에 속았다. 이승만은 속지 않았다. 38선을 처음 알게 된 순간부터 이에 반대하고, 미·소의 ‘한국 흥정’을 내다보고 공동위원회 같은 기구 설치를 극력 반대하고 나섰다. 소련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38선은 스탈린의 영토적 야욕 때문에 생겼고, 스탈린은 애초부터 한반도를 독점하려 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p.85 「3. 스탈린과 38선」 중에서

스탈린은 38선 전면 봉쇄 명령을 내린다. 미군의 인천 상륙 후 일주일 지난 1945년 9월 15일경이다. 38선 봉쇄는 ‘한반도 분단 고착’의 최초의 조치로 강력한 증거이다.

 자유통행, 자유통상 경제 교류까지 차단한 민족의 허리 절단, 남과 북의 ‘국경선’으로 만든 스탈린이다. 

처칠이 지적한 소련의 ‘철의 장막’이 한반도 허리에 ‘공산화 체제 장벽’을 세운 것이었다.
사실은 이것도 한시적이었다. 왜냐하면 5년 후 스탈린은 38선을 깨고 6·25 남침을 강행하지 않는가.
--- p.148 「5. ‘분단의 원흉’은 누구?」 중에서

1948년 4월 24일, 북한 헌법에서 국명, 국기, 수도 평양 등이 확정된다. 2년 전(1946) 2월 8일 출범한 ‘임시인민위원회’에서 ‘임시’란 가면을 떼어 버리고 당당히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으로서 출발하는 소비에트 체제를 완비한 것이다. 일찍이 박헌영이 갈망했던 일이다.
이 북한 헌법 승인이 사실상 ‘분단의 쇠말뚝’을 박은 결정적 행위였다.

 이제 남한의 단독정권 출범을 기다려 그 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일만 남았다. 분단책임을 미국와 이승만에게 돌리기 위해서다.
--- p.263 「8. 스탈린과 김구」 중에서

스탈린이 지령한 총선 방해 폭동 와중에도 유엔 감시하에 1948년 5·10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5월 31일 중앙청 국회의사당에서 역사적인 제헌국회가 개원하였다. 

이날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 의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독립하게 되었으니 사상과 종교를 초월하여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리자”고 제의, 이윤영 의원(목사)의 인도로 모든 제헌국회의원 198명이 일어나 기도를 올렸다.
--- p.270 「9. “하나님이 세운 나라”」 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통일독립 대신 ‘분단이라는 차선(次善)’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니다. 모욕하지 말라. 자유통일의 화신(化身) 이승만은 ‘강요된 차선’ 조국의 분단을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다. 그는 말한다.
“한 줌도 안 되는 공산당만 추방하면 이천만 북한 동포는 해방된다.”
‘이승만 독트린’은 말한다.
“싸우라! 오천만 동포여, 오천만 이승만 되어 싸우라!”
--- p.313 「나가며_‘이승만 독트린’은 말한다」 중에서

출판사 리뷰
분단의 원흉은 누구인가

한반도 분단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2차대전 종전(終戰) 직전 미국이 제안하고 소련이 수용한 38선이다. 미국은 왜 38선을 그었나?
소련은 사실 2차대전에서 함께 피를 흘린 연합국도 아니었다. 전쟁 막바지에야 ‘무늬만 연합군’으로 가세한 소련은 독일과 이탈리아가 패망하자마자 폴란드를 시작으로 동유럽부터 공산화해 나가고 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의 항복까지 기정사실화 되자, 소련은 재빨리 한반도를 향해 군대를 진격시키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폴란드화’를 막으려는 미국이 부랴부랴 저지선으로 그은 것이 38선이다. 이미 개성을 넘어 서울을 코앞에 두고 있던 소련은 미국의 원자탄이 무서워 울며 겨자 먹기로 38선 너머로 물러났다. 아직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도 전의 일이다.
소련은 1945년 9월에 38선을 봉쇄해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막았다. 이때부터 6·25전쟁이 끝나는 1953년 7월까지 8년 동안, 북에서 남으로 향하는 대규모 피난 행렬 얘기는 수없이 많아도 남에서 북으로 향하는 피난 대열 얘기는 없다는 사실이, 38선 이북은 당시 이미 다른 세상이었음을 웅변한다.

대한민국은 ‘강요된 차선’이었다

정읍 선언에서 이승만은 “세계 공론에 호소”하자고 했다. 그 결실이 1년 5개월여 뒤, 1947년 11월 유엔총회의 ‘한국 결의안’이다. 결의안대로면 한반도에서는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다. 알다시피 총선은 그해 5월 10일에야, 북한 전역과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서만 실시될 수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알고도 제 입으로 말 못 하는 사람을 위해 다시 불러 준다. 북한은 총선거를 거부했고, 제주도는 공산 폭동으로 할 수 없었다. 남한만의 총선거는 이승만과 대한민국 국민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강요된 차선(次善)’이었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후 그해 12월 유엔 총회가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의 합법 정부”로 승인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이 1946년 정읍 선언의,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라는 상황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정읍 선언’ 후 80년이 흘렀다. ‘강요된 차선’은 돌이켜보면 ‘선택 가능했던 최선’이 아니었을까? 두 가지를 자문(自問)해 보면 안다.
첫째, ‘소련 치하의 공산 통일’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반쪽만의 자유’보다 더 행복했을까?
둘째, 만약에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한국을 포함한 다음 여섯 나라 중 어느 나라 순서로 태어나고 싶은가? (1)한국 (2)미국 (3)일본 (4)중국 (6)러시아 (6)북한
『이승만 독트린』을 읽고 나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위 질문의 답일 것이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95117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