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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세기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 리센코,
그가 옳았다고?
리센코는 20세기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다. 우리에게 리센코는 20세기 중반 소련 생물학계를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비롯해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과학자들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리센코가 옳았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었다.
“현대생물학에 의해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의 진리가 확인되었다.”
“센세이션!: 리센코 원사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나!”
“트로핌, 당신이 옳았소!”
“위대한 생물학자 리센코를 기리며”
러시아 언론이나 블로그에서 리센코를 재평가하며 붙인 제목이다. 리센코가 옳았다고? 이제 와서? 논란의 발단은 후성유전학이다. 리센코를 ‘틀린’ 과학자로 규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획득 형질 유전설’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리센코는 당시 서방에서 주류를 이루던 다윈주의 유전학을 거부하고 획득 형질도 유전된다는 일종의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였다. 다윈주의 유전학에서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서방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는 틀린 이론을 붙들고 자국의 과학계를 좌지우지한 리센코가 공포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획득 형질이 유전되는 것으로 보이는,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해야 할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리센코가 정치적으로 ‘나쁜’ 과학자였을지언정, ‘틀린’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인가? 리센코는 수많은 비운의 선지자들처럼,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할 운명을 지녔던 걸까?
이 책은 ‘리센코는 옳았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 후성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의 이론, 소비에트 과학계의 모순, 현재 러시아의 실상을 폭넓게 조망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리센코 현상’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곁들이며 리센코 현상에 숨어 있는 디테일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리센코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과학과 정치, 국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구조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질문의 답은 명확해질 것이다. 리센코는 옳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
그가 옳았다고?
리센코는 20세기 가장 악명 높은 과학자다. 우리에게 리센코는 20세기 중반 소련 생물학계를 망하게 만든 원흉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의 비호 아래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비롯해 자신의 반대편에 있던 과학자들을 숙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리센코가 옳았다는 주장이 속속 제기되었다.
“현대생물학에 의해 트로핌 데니소비치 리센코의 진리가 확인되었다.”
“센세이션!: 리센코 원사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나!”
“트로핌, 당신이 옳았소!”
“위대한 생물학자 리센코를 기리며”
러시아 언론이나 블로그에서 리센코를 재평가하며 붙인 제목이다. 리센코가 옳았다고? 이제 와서? 논란의 발단은 후성유전학이다. 리센코를 ‘틀린’ 과학자로 규정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획득 형질 유전설’이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주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리센코는 당시 서방에서 주류를 이루던 다윈주의 유전학을 거부하고 획득 형질도 유전된다는 일종의 후성유전학을 받아들였다. 다윈주의 유전학에서는 획득 형질의 유전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서방 세계의 과학자들에게는 틀린 이론을 붙들고 자국의 과학계를 좌지우지한 리센코가 공포의 대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획득 형질이 유전되는 것으로 보이는, 후성유전학으로 설명해야 할 사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비록 리센코가 정치적으로 ‘나쁜’ 과학자였을지언정, ‘틀린’ 과학자는 아니었던 것인가? 리센코는 수많은 비운의 선지자들처럼,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할 운명을 지녔던 걸까?
이 책은 ‘리센코는 옳았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당시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 후성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의 이론, 소비에트 과학계의 모순, 현재 러시아의 실상을 폭넓게 조망한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아직 끝나지 않은 이 ‘리센코 현상’은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미스터리 소설 같은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을 곁들이며 리센코 현상에 숨어 있는 디테일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리센코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갈수록 과학과 정치, 국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구조가 보인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질문의 답은 명확해질 것이다. 리센코는 옳았는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
목차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1장 시베리아의 다정한 여우들
2장 획득 형질의 유전
3장 생물학계의 이단아 파울 캄머러
4장 1920년대 러시아 인간 유전 대논쟁
5장 리센코와의 조우
6장 리센코의 생물학
7장 후성유전학
8장 리센코주의의 부활
9장 신리센코주의의 충격
10장 반리센코주의적 획득 형질의 유전
서론
1장 시베리아의 다정한 여우들
2장 획득 형질의 유전
3장 생물학계의 이단아 파울 캄머러
4장 1920년대 러시아 인간 유전 대논쟁
5장 리센코와의 조우
6장 리센코의 생물학
7장 후성유전학
8장 리센코주의의 부활
9장 신리센코주의의 충격
10장 반리센코주의적 획득 형질의 유전
출판사 리뷰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후성유전학의 전통
후성유전학과 러시아 생물학, 그리고 우생학
리센코의 현상을 이해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제반 사항이 있다. 바로 후성유전학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에 관한 믿음은, 그것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2000년이 넘도록 거의 보편적으로 유지되어 온 관념”이었다.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라이엘도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다윈도 자신의 진화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부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획득 형질의 유전을 수용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은 라마르크가 내세운 이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라마르크 이전에도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인 생물학자는 많았고, 그런 전통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 간의 모순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어쨌든 둘 다 ‘진화론’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힘을 얻으며 획득 형질 유전에 관한 이론이 비판을 받기 시작했지만 라마르크주의자들이 많던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에 유리한 방식으로 최신 유전학을 수용했다. 요컨대 소련 내에서 획득 형질 유전의 중요성은 리센코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떠오르던 우생학은 정치적으로 여러 논란을 일으킨다. 생물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커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만 우생학적 기획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우생학을 적용하려던 생물학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과학적?정치적 지형이 리센코주의가 태동할 토양이 되었다.
논란의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다
역사가의 앞에 둔 리센코의 변명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가장 손에 땀을 쥐는 대목은 저자인 로렌 그레이엄이 리센코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책을 쓴 로렌 그레이엄은 1933년생으로 90세를 넘긴 노학자다. 영미권에서 러시아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1년 어느 날 그는 러시아 최고 도서관인 레닌도서관에서 리센코에 대해 연구하다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과학자의 집’이라는 레스토랑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미 명예가 실추된, 평생의 연구 대상인 리센코를 직면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리센코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리센코가 악명을 떨치게 된 행위를 한 개인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책이기도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에 매우 신경을 쓴다. 단순히 상황을 서술하거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를 부각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내용에 빠져들도록 만든다.
하지만 ‘리센코는 옳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리센코가 내세운 이론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 장을 할애해 리센코의 연구 방식, 이론의 핵심, 결론, 파급 효과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리센코 이론은 신화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 현대유전학과 결정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이 부분 때문에 서방 세계 과학자들은 리센코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논란의 한 축을 담당하는 후성유전학도 다룬다. 현대 후성유전학이 등장하고 발달한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기초적인 수준에서 후성유전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리센코주의와의 관련성을 논한다.
현재진행형인 리센코주의의 논란들
리센코주의는 러시아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리센코의 망령』은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된 리센코에 관한 단행본 분량의 책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을 아는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그 이름을 생물학이나 과학사 책에서 스쳐가듯 보았을 것이다. 예전 소련에 리센코라는 가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소련 생물학계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정도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그를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 이제라도 출간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지적하는 건, 이게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 또한 매우 중층적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역사적인 맥락에서뿐 아니라 현재적인 맥락에서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진다.
일단 러시아 내에서 극우 공산주의(자칫 형용 모순처럼 들리는 이 표현은 현재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성립될 수 있다) 성향의 세력이 리센코를 복권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 시대의 향수를 일으키려 한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리센코가 옳았고, 리센코에 힘을 실어줬던 스탈린 체제도 옳았다는 논리 구조는 이들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반대로 러시아 주류 유전학계에서는 리센코가 옳았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될까 봐 후성유전학 연구를 기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후성유전학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기근 연구가 러시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그것이 리센코주의를 확증할까 두려워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부의 종교, 정치 상황 때문에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왜곡되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리센코의 망령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보면 과학사에 나타나는 여러 부조리를 알 수 있다. 몇 번이고 강조되는, ‘용례(usage)’가 ‘정확성(accuracy)’을 압도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라마르크는 획득 형질 유전설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리센코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리센코 또한 라마르크주의자였어야 한다. 그런데 리센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마르크주의적 관점에서 행해진 작업에서는 그 어떠한 긍정적인 결과도 얻을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이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라마르크는 당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였고, 획득 형질 유전설은 그가 주장한 다양한 이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하기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주장한 다른 생물학자도 매우 많았고 라마르크의 이론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일반 대중뿐 아니라 과학자들도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시한다. 용례가 정확성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과학자보다는 과학사가들이 더 잘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공모를 리센코 현상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한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 발견을 했다는 뉴스를 본다. 많은 경우 과학적 발견의 내용이나 과정보다는 그 발견이 향후 이뤄낼 수 있는 성과나 ‘한국인’이 그 발견을 해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곤 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한국인의 긍지나 위상을 높여주는 수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뉴스 수용자 입장에서 과학적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게 엄청난 발견이라든지, 한국인이 이룬 업적이라는 건 눈길을 끌기 쉽다. 다행인 것은 한국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리센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이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러시아 과학계는 후성유전학의 발전을 아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리센코의 사례를 마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황우석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 책만큼 과학과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사점을 던지는 연구도 많지 않을 것이다.
후성유전학과 러시아 생물학, 그리고 우생학
리센코의 현상을 이해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제반 사항이 있다. 바로 후성유전학과 20세기 초반 러시아 생물학계의 상황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에 관한 믿음은, 그것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2000년이 넘도록 거의 보편적으로 유지되어 온 관념”이었다.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찰스 라이엘도 획득 형질이 유전된다고 믿었다. 심지어는 다윈도 자신의 진화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부 변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획득 형질의 유전을 수용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은 라마르크가 내세운 이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라마르크 이전에도 획득 형질이 유전한다는 관념을 받아들인 생물학자는 많았고, 그런 전통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는 러시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후반까지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 간의 모순이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어쨌든 둘 다 ‘진화론’이었기 때문이다. 20세기 들어 영국과 미국 등에서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힘을 얻으며 획득 형질 유전에 관한 이론이 비판을 받기 시작했지만 라마르크주의자들이 많던 러시아에서는 라마르크주의에 유리한 방식으로 최신 유전학을 수용했다. 요컨대 소련 내에서 획득 형질 유전의 중요성은 리센코가 본격적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전학이 발전함에 따라 떠오르던 우생학은 정치적으로 여러 논란을 일으킨다. 생물학이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 운영에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커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만 우생학적 기획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에 따라 우생학을 적용하려던 생물학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과학적?정치적 지형이 리센코주의가 태동할 토양이 되었다.
논란의 당사자를 직접 대면하다
역사가의 앞에 둔 리센코의 변명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가장 손에 땀을 쥐는 대목은 저자인 로렌 그레이엄이 리센코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 책을 쓴 로렌 그레이엄은 1933년생으로 90세를 넘긴 노학자다. 영미권에서 러시아 과학사 분야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1년 어느 날 그는 러시아 최고 도서관인 레닌도서관에서 리센코에 대해 연구하다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과학자의 집’이라는 레스토랑을 찾는다. 그곳에서 이미 명예가 실추된, 평생의 연구 대상인 리센코를 직면한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이야기를 나눈다. 리센코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격정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리센코가 악명을 떨치게 된 행위를 한 개인적인 이유를 추론할 수 있다. 이 책은 과학책이기도 역사책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토리텔링에 매우 신경을 쓴다. 단순히 상황을 서술하거나 이론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캐릭터를 부각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내용에 빠져들도록 만든다.
하지만 ‘리센코는 옳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리센코가 내세운 이론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이 책에서는 한 장을 할애해 리센코의 연구 방식, 이론의 핵심, 결론, 파급 효과 등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 리센코 이론은 신화화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 현대유전학과 결정적으로 입장을 달리한다. 이 부분 때문에 서방 세계 과학자들은 리센코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논란의 한 축을 담당하는 후성유전학도 다룬다. 현대 후성유전학이 등장하고 발달한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이 기초적인 수준에서 후성유전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리센코주의와의 관련성을 논한다.
현재진행형인 리센코주의의 논란들
리센코주의는 러시아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리센코의 망령』은 국내에는 처음으로 번역 출간된 리센코에 관한 단행본 분량의 책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을 아는 국내 독자들은 대부분 그 이름을 생물학이나 과학사 책에서 스쳐가듯 보았을 것이다. 예전 소련에 리센코라는 가짜 과학자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소련 생물학계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정도의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리센코’라는 이름의 중요성과 파급력을 생각했을 때 그를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이 이제라도 출간된 것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지적하는 건, 이게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그 의미 또한 매우 중층적이다.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리센코와 관련된 논란은 역사적인 맥락에서뿐 아니라 현재적인 맥락에서도 커다란 시사점을 던진다.
일단 러시아 내에서 극우 공산주의(자칫 형용 모순처럼 들리는 이 표현은 현재 러시아의 상황에서는 성립될 수 있다) 성향의 세력이 리센코를 복권시킴으로써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스탈린 시대의 향수를 일으키려 한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리센코가 옳았고, 리센코에 힘을 실어줬던 스탈린 체제도 옳았다는 논리 구조는 이들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반대로 러시아 주류 유전학계에서는 리센코가 옳았다는 결론을 지지하게 될까 봐 후성유전학 연구를 기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또한 후성유전학의 주요한 사례가 될 수 있는 기근 연구가 러시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그것이 리센코주의를 확증할까 두려워서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으로는 러시아 내부의 종교, 정치 상황 때문에 후성유전학의 연구가 왜곡되는 사례도 발견되고 있다.
사라지지 않는 리센코의 망령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 책을 보면 과학사에 나타나는 여러 부조리를 알 수 있다. 몇 번이고 강조되는, ‘용례(usage)’가 ‘정확성(accuracy)’을 압도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이다. 라마르크는 획득 형질 유전설의 대표자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리센코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신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리센코 또한 라마르크주의자였어야 한다. 그런데 리센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마르크주의적 관점에서 행해진 작업에서는 그 어떠한 긍정적인 결과도 얻을 수 없다.” 이게 말이 되는가? ‘획득 형질 유전설’을 ‘라마르크주의’와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이 의문은 어렵지 않게 풀린다. 라마르크는 당대를 대표하는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였고, 획득 형질 유전설은 그가 주장한 다양한 이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하게 취급하기엔, 획득 형질 유전설을 주장한 다른 생물학자도 매우 많았고 라마르크의 이론도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지만 일반 대중뿐 아니라 과학자들도 획득 형질 유전설과 라마르크주의를 동일시한다. 용례가 정확성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과학자보다는 과학사가들이 더 잘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와 과학의 관계,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공모를 리센코 현상처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심심치 않게 한국 연구진이 세계 최초로 과학적 발견을 했다는 뉴스를 본다. 많은 경우 과학적 발견의 내용이나 과정보다는 그 발견이 향후 이뤄낼 수 있는 성과나 ‘한국인’이 그 발견을 해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춰지곤 한다. 그러니까 과학이 한국인의 긍지나 위상을 높여주는 수단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뉴스 수용자 입장에서 과학적 내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게 엄청난 발견이라든지, 한국인이 이룬 업적이라는 건 눈길을 끌기 쉽다. 다행인 것은 한국만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 리센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이런 흐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역사적 상처를 간직한 러시아 과학계는 후성유전학의 발전을 아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리센코의 사례를 마냥 남의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도 황우석의 그림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 책만큼 과학과 역사,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사점을 던지는 연구도 많지 않을 것이다.
추천평
시베리아의 여우 농장에서 시작해 소비에트 인간형 창조를 위한 유전학과 우생학 논쟁을 거쳐, 리센코의 성공과 몰락, 냉정한 평가에 도달하는 여정을 긴장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낸다. 유전학, 우생학과 사회주의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권한다. 특히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면 꼭 읽어야 한다.
-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낙인찍힌 몸』 저자)
-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낙인찍힌 몸』 저자)
리센코 또는 리센코주의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는 “과학과 정치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 사례로 간혹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좋은 역사가라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얼마나 기묘하거나 예외적인 일이었는지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그 시대의 맥락 안에서 인물과 사건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시도했고, 리센코를 해외 토픽이나 “세상에 이런 일이”의 세계에서 과학과 과학사의 세계로 다시 데려왔다.
- 김태호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오답이라는 해답』 저자)
- 김태호 (전북대학교 한국과학문명학연구소 교수. 『오답이라는 해답』 저자)
‘리센코주의’ 논쟁으로 소련 생물학계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는 최근까지도 스탈린주의 시대 유사과학과 그로 인한 한 학문 분과의 괴멸에 가까운 퇴보로 기억되어 왔다. 후성유전학 분야의 발전을 계기로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일부 학자들이 트로핌 리센코를 복권시키려 하지만, 저자는 엄밀한 과학사가로서 러시아 유전학의 전통, 리센코주의 논쟁의 역사, 그리고 현대 후성유전학과 리센코주의 이론 간의 괴리를 치밀하게 서술함으로써, 리센코와 리센코주의는 과학적 이론으로서 정립될 수 없으며, 이를 둘러싼 여러 현상들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 김동혁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러시아사/기술사 전문가)
- 김동혁 (광주과학기술원 기초교육학부 교수, 러시아사/기술사 전문가)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악명 높고 중요하지만, 가장 덜 알려진 사건에 대한 안내서. 그레이엄은 이 분야 최고의 전문가이다.
- 에드워드 O. 윌슨 (하버드대학교 교수, 『사회생물학』, 『통섭』 저자)
- 에드워드 O. 윌슨 (하버드대학교 교수, 『사회생물학』, 『통섭』 저자)
시의적절하고 중요한 그레이엄의 이 책은 유전에 관한 주류 담론과 배치된 모든 것을 리센코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 마우리치오 멜로니 (《사이언스》)
- 마우리치오 멜로니 (《사이언스》)
그레이엄에 따르면, 리센코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일련의 배경에는 소련 우생학 운동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 길지 않은 책은 과학적 탐구의 진실성을 위협하는 두 가지 종류의 위협을 다룬다. 즉, 과학계 외부로부터의 제도적인 간섭과 내부에서의 정치적 감염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의 위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 소련의 리센코주의와 우생학에 관한 그레이엄의 연구는 과학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에 관해 중대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 니콜라스 웨이드 (《월스트리트저널》)
- 니콜라스 웨이드 (《월스트리트저널》)
『리센코의 망령』의 핵심은 온갖 종류의 정치, 종교, 문화적 규범, 이데올로기가 과학을 왜곡시키는 방식들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들은 사실에 관한 우리의 해석을 변형시키며, 자연적인 현상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구성한다.
- 매기 코스-베이커 (《테크놀로지 리뷰》)
- 매기 코스-베이커 (《테크놀로지 리뷰》)
이 책은 특히 러시아와 리센코주의를 중심으로, 후성유전학이라는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분야의 여러 쟁점과 그것이 획득형질의 유전을 둘러싼 유서 깊은 논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새로우면서도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레이엄은 방대한 관련 자료를 완벽하게 다루고 있으며, 그 많은 자료들을 섭렵한 극소수의 연구자 중 한 명이다.
- 에버렛 멘델손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
- 에버렛 멘델손 (하버드대학교 과학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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