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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도서관은 어떻게 우리 근현대사의 무대가 되었을까?
도서관 덕후가 소개하는 ‘역사 속 도서관’과 ‘도서관 속 역사’
1899년 6월에 지어진 덕수궁 중명전(重?殿)의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황실도서관’이었던 이곳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가른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한제국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정부의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수옥헌에서 을사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굴욕적인 조약 체결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고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1979년 10월 16일 시작된 부산대·동아대·경남대 재학생들의 유신 철폐 시위는 곧 부마민주항쟁으로 확대되었다.
독재 시대를 끝내기 위한 열망은 10·26, 5·18 광주민중항쟁, 6월 항쟁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민주화에 이르렀는데 당시 세 대학교의 시위는 각 교내 중앙도서관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그저 단순한 책 보관소나 대여소, 혹은 문화센터로 여기지만, 실제 우리 도서관들은 당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영향이 빚어낸 결과물로서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굵직한 사건들의 무대였다.
‘역사책을 소장한 공간’인 동시에 ‘역사를 바꾼 공간’인 것이다.
‘도서관 덕후’를 자처하는 저자는 우리 역사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던 도서관과 만날 때마다 수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왜 어떤 도서관에서는 아직도 친일파와 독재자의 동상이 당당히 서 있을까?
일제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은 왜 지금도 남아 있을까?
부마민주항쟁과 6월 항쟁의 무대였던 도서관은 어디일까? 우리나라 최초의 사서는 누구였고,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은 어디일까?’
그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전국 500여 곳의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관련 서적과 자료, 논문을 뒤졌고 관계자를 만나 인터뷰했다.
이렇게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답사 경험, 그리고 자신의 단상을 엮어 한 편씩 글로 풀어내었다.
그리고 《오마이뉴스》에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제목과 다르게 ‘도서관 속 역사’와 ‘역사 속 도서관’ 이야기는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약 1년 반 동안 소개한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도서관들, 현대의 국립도서관, 공공도서관, 국회도서관, 대학도서관, 교회도서관, 사찰도서관이 소개하는 역사 이야기는 그 어느 것보다 묵직하고 울림이 있었다.
역사학자 심용환의 말처럼 ‘역사와 공간을 묶는 참신한 시도’는 곧 독자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자들의 요청과 성원에 힘입어 가장 인기 있고 유익했던 에피소드만을 추리고 내용을 수정·보완해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백창민 저자의 첫 단독 저서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은 근현대사의 무대가 되었던 30개 도서관의 역사와 그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
덕분에 독자들은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지닌 색다른 매력과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다채로운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책 말미에는 현재에도 운영 중인 도서관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도서관의 옛터를 답사하고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정리해 부록으로 실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우리 역사를 애정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읽고, 느끼고, 뜨겁게 경험해 보길 바란다.
목차
들어가는 말: 역사의 현장에서 ‘도서관’은 무엇인가?
1부 도서관의 정치학
우리가 유서 깊은 대학도서관을 갖지 못한 이유: 성균관 존경각
‘용산 대폭격’으로 사라진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 철도도서관
친일파 동상이 도서관에 서 있는 이유: 종로도서관
김일성은 왜 서울대 도서관 책을 가져가려 했을까?: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
도서관 이름에 새겨진 ‘박통’의 흔적: 정독도서관
공수처 비판으로 소환된 ‘사직동팀’의 추억: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
도서관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가?: 용산도서관
말죽거리, 신화와 잔혹사 사이에서: 도곡정보문화도서관
2부 혁명과 민주화 투쟁의 무대
‘도서관’을 통해 국권을 되찾고자 했던 시도: 우현서루와 경북대학교 중앙도서관
이승만에게 도서관 이름을 바친 대학 총장: 중앙대학교 학술정보원
‘혁명’을 기념하는 단 하나의 도서관: 4·19혁명기념도서관
유신 체제의 종말을 부른 부마민주항쟁의 불꽃: 부산대·동아대·경남대 도서관
‘스파르타의 300’은 알지만, ‘광주의 300’은 모르는 당신에게: 빛고을 광주의 도서관
‘도서관 점거 농성’은 어떻게 ‘6월 항쟁’으로 이어졌나?: 서울특별시청 을지로별관
‘대학의 심장’이 초토화된 사건: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
도서관이 ‘민주주의 보루’였던 시절은 언제일까?: 도서관 앞 광장
3부 제국부터 민국까지, 국가도서관 이야기
조선은 왜 ‘쉽게’ 망했을까?: 경복궁 집옥재
도서관으로 흥한 나라, 도서관에서 망한 나라: 덕수궁 중명전
‘책 없는 도서관’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조선총독부도서관
‘제국의 사서’ 이재욱과 박봉석은 ‘친일파’인가?: 국립도서관
국가도서관에 자리한 독재자의 ‘하사품’: 국립중앙도서관
의회는 왜 ‘도서관’이 필요할까?: 국회도서관
한반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평양에 있는 이유: 인민대학습당
4부 사서도 모르는 도서관의 숨은 역사
최초의 ‘사서’를 찾아서: 경성도서관과 경성부립도서관 옛터
도서관이 ‘산’으로 간 까닭은?: 남산도서관
도서관을 ‘세습’합니다? 초대형교회의 두 얼굴: 명성교회도서관
‘독립운동가’ 윤동주를 끝까지 증명한 사서들: 윤동주문학관
‘라이브러리’는 왜 ‘도서관’이 되었을까?: 삼청공원숲속도서관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반일’하면 3대가 망한 나라에서: 청운문학도서관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 길상도서관과 다라니다원
이 책에 나오는 도서관과 답사지 정보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백창민
책을 좋아해 ‘책사냥꾼’으로 일했다. 전자책 회사, 출판사에서 디지털과 아날로그 분야를 넘나들며 일했다.
북헌터 대표로 한겨레교육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한성대학교, 전국의 여러 도서관에서 강의와 답사를 하고 있으며, 《퍼블리싱 마케팅 트렌드》(공저)를 펴냈다. 도서관을 애정하면서 ‘도서관 덕후’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마이뉴스》에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와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연재했다. ‘도서...
요.
책 속으로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1000원권 지폐에는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성균관 명륜당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1000원권에 퇴계와 함께 명륜당을 인쇄한 이유는, 퇴계가 성균관 총장 격인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명륜당은 성균관의 강의실이고, 명륜당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 ‘존경각(尊經閣)’이다.
존경각은 성균관에서 도서관 역할을 한 곳으로, 조선 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대학도서관’이다.
성균관에 존경각을 설치한 시기는 조선 성종 때다. 책이 부족해서 유생이 어려움을 겪자, 한명회를 비롯한 대신이 임금에게 청을 올렸다.
1475년 성종은 신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많은 책을 하사하고, 책을 보관할 건물을 짓도록 했다.
존경각이라는 이름도 성종이 직접 지어 하사했다. ‘존경(尊經)’은 ‘경서(經書)를 소중하게 보관하라’는 뜻이다. 개교 77년 만에 성균관은 도서관을 갖게 되었다.
--- p.22~23
용산은 역 앞에 통감부 철도관리국, 철도 관사, 용산동인병원(철도병원의 전신), 철도종사원양성소(옛 경성철도학교) 같은 철도 핵심 시설이 모여 있는 ‘철도 기지’이기도 했다.
1908년부터는 용산 철도 기지 주변에 일본군 사령부가 주둔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용산에는 ‘철도’와 ‘군대’라는 조선 지배를 위한 핵심 인프라와 물리력이 모두 자리했다. (중략)
철도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용산역사박물관(옛 용산철도병원)을 지나면 용산철도고등학교가 있다.
그 맞은편에 철도도서관과 철도종사원양성소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1937년 일한서방(日韓書房)이 발행한 《대경성시가지도(大京城市街地圖)》를 보면, 철도도서관 위치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철도도서관은 용산4구역 용산시티파크 1단지 일대에 있었다.
용산4구역 주변에 둔지산 녹지가 있는데, 지금의 용산어린이정원이다. 철도도서관은 둔지산 남쪽에 자리했다.
철도도서관 옛터인 ‘용산4구역’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용산 참사’가 발생한 곳이다.
2009년 1월 20일 이곳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원 1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용산 참사가 발생한 남일당 터에는 43층짜리 용산센트럴파크타워를 비롯한 ‘마천루’가 들어섰다.
--- p.44~45
일제강점기에 틀이 놓은 우리 도서관 분야는 인적 청산뿐 아니라 일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한 걸까?
도서관 용어와 공간, 제도, 운영 면에서 우리는 식민 시대를 얼마나 극복한 걸까?
식민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을 해방 후 80년이 넘도록 유지하고 있는 우리 도서관은,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인가. (중략)
우리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서구로부터 ‘번안한 도서관’을 이식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도서관을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운영하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발 빠르게 도서관을 변화시켜 나갔다.
해방 후 우리 역시 미국과 세계로부터 ‘도서관학(문헌정보학)’을 수입했다. 세계 도서관 변화를 직접 목도하고, 그 흐름을 따라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번안해서 이식한 ‘식민지 도서관’에 갇혀 있는 상황은 아닐까?
--- p.64~65
식민지 조선 최대 규모를 자랑한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어디에 있었을까?
부속도서관은 경성제국대학 본관(지금의 구 서울대학교 본관)과 마주 보는 위치에 자리했다.
그러면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있던 도서관 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중략)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어, 서울대 도서관 건물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대표적인 건물은, ‘옛 샘터사 사옥’과 ‘아르코예술극장(옛 문예회관 공연장)’이다.
옛 샘터사 사옥과 아르코예술극장은 모두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옛 샘터사 사옥은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은 건물로, 붉은 벽돌 외관을 담쟁이넝쿨이 덮고 있어서, 대학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수근은 샘터사 사옥, 아르코예술극장, 아르코미술관(옛 문예회관 전시장)을 모두 붉은 벽돌로 지으며, “건축은 빛과 벽돌이 짓는 시”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 p.79~80
1977년 1월 4일 개관한 정독도서관은 직원이 98명이나 근무하는 매머드급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장서는 3만 4000권, 열람석은 남산도서관의 2배인 2868석을 갖춘 규모였다.
개관 당시 교실 3개를 하나의 열람실로 터서, 열람실 12개를 갖췄다. 정독도서관은 열람석 수를 기준으로,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공공도서관이었다.
개관하자마자 정독도서관에 자리를 잡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수천 명이 줄을 서는 풍경이 이어졌다.
인파에 떠밀려 행인이 길옆 축대로 떨어져, 다치는 사고도 잇따랐다. 도서관 측이 회초리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대기 행렬을 관리했다는 기사도 찾아볼 수 있다.
열람실 안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도 이용자가 가방을 비롯한 소지품을 챙겨 다니도록 했다.
직원이 열람실 앞을 지키고 앉아 있다가, 가방 같은 소지품을 휴대하지 않으면, 드나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용자가 서고에 출입할 때는 책 훔쳐 가는 걸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점퍼 같은 상의를 벗고 출입하도록 했다.
도서관 좌석에 대한 수요는 많고,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 공공도서관의 ‘갑질’ 이야기다. 군사 정부 시절이라지만, 그 시절 도서관은 ‘고압적’이었다.
--- p.85~86
서울 남산에는 남산도서관과 용산도서관, 두 곳의 대형 도서관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 종로도서관과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만큼은 아니지만, 용산도서관과 남산도서관은 지근거리라 할 만큼 가깝다.
도서관이 흔치 않던 시절, 대형 도서관 두 곳을 왜 이렇게 가까이 지었을까?
남산도서관은 1964년 소공동에서 남산으로 옮겨 왔고, 용산도서관은 1981년 남산도서관 근처에 문을 열었다.
두 도서관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사연은, 뒤늦게 문을 연 용산도서관 개관 과정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2019년 1월 남성 열람실 축소 문제로 이슈가 된 용산도서관은, 도서관 용도로 지은 건물이 아니다.
용산도서관 건물은 범상치 않은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바로 박정희 시대를 풍미한 공화당 중앙당사였다.
박정희 시대 공화당이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 수도 있겠다. 박정희 시대 여당 노릇을 한 민주공화당 말이다.
--- p.118~119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면서, 힘을 키워 국권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인재를 키워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고, 이 과정에서 ‘도서관’을 통해, 인재를 길러 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구에 세워진 ‘우현서루(友弦書樓)’는 1904년 경주 이씨 집안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이 설립하고, 그의 아들인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운영한 ‘도서관’이다.
우현서루는 한때 국내외에서 수집한 1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말 그대로 ‘만권당(萬卷堂)’이었던 셈이다.
일제의 국권 강탈 과정에서, 대구 지역에서 일어난 도서관 건립 시도는 흥미롭다.
남평 문씨 집안은 ‘인수문고(仁壽文庫)’라는 문중문고(門中文庫)를 만들어, 가문 차원의 인재 양성에 힘을 썼다. 인수문고 역시 만권당으로 불릴 만큼 장서량이 많았다.
--- p.141~142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이후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 세력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에 돌입했다.
7월 18일까지 63명을 체포해서 56명을 구속하고, 10월 말에는 조직 사건을 터뜨렸다.
10월 29일 각종 시위와 노사분규 배후에, 좌경용공 학생의 지하 단체인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가 있다고 밝히고,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과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 김근태의 구속을 발표했다.
이것이 28명이 구속되고, 17명이 수배된 ‘깃발-민추위 사건’이다.
‘깃발-민추위’를 주도한 사람 중에 유일하게 붙잡히지 않은 인물이 박종운이다. 박종운은 피신하는 동안 후배 집에 잠깐 들렀다. 이 때문에 그 후배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후배는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 때 농성 학생을 지원하는 가두시위에 참여했다가, 구류를 살기도 했다.
그 후배 이름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84학번 ‘박종철’이다. 누가 알았을까?
1985년 ‘미문화원 도서관 점거농성사건’이 ‘깃발-민추위 사건’과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질 줄을.
--- p.226
캠퍼스에 상주하는 기관원과 사복경찰을 피해 시위를 하려다 보니, 때로는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1978년 11월 13일 서울대 국사학과 3학년 김용흠은, 중앙도서관 5층 열람실 난방기에 나일론 끈을 고정했다.
몸에도 끈을 묶은 그는 도서관 창문 난간에 매달려, 메가폰으로 구호를 외치며, 유인물을 뿌렸다.
사복형사가 잡으려 하자, ‘뛰어내리겠다’라고 협박하며 시위를 이어 갔다.
시위가 지지부진해지면서 붙잡히긴 했으나, 끈에 의지해 도서관 난간에 매달린 김용흠은 ‘관악산 타잔’이라 불렸다.
‘관악산 타잔’을 필두로, 수많은 ‘도서관 타잔’이 출현했다. 시위를 주도한 학생은 도서관 건물에 매달린 채, 구호를 외치거나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거나 떨어져, 부상을 입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 p.254~255
도서관은 왜 ‘산’으로 갔을까? 시청이나 보건소 같은 공공시설이 산에 자리하면 불편하듯, 많은 시민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도서관 역시 마찬가지다.
남산도서관은 ‘산’으로 간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도서관 이전의 나쁜 사례라 할 만하다.(중략)
도서관이 장애인과 노약자를 포함한, 누구나 이용 가능한 문화 시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입지 자체가 ‘폭력적’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불편한 접근성 때문인지, 남산도서관은 1970년 문을 연 어린이 열람실과 주부 열람실을 불과 2년 만에 폐쇄했다.
공공도서관에 흔히 있는 어린이 자료실이 지금도 없는 이유는, 남산도서관의 접근성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책이 좋다 해도, 유모차를 밀거나 아이를 데리고, 산 중턱까지 오르내릴 부모가 얼마나 있겠는가?
--- p.422
서울시 강동구 명일동에 있는 명성교회도서관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교회도서관’일 것이다.
명성교회도서관은 1990년 교회 본당 5층에 마련한 7244권의 장서에서 출발했다.
명성교회는 1996년 1만 4500권 장서를 모아, 교회 신도를 대상으로 도서관을 개관했다.
2000년 11월에는 지역사회 주민에게도 도서관을 ‘개방’했다.
2001년에는 샬롬교육관 전 층을 도서관으로 확장했고, 2004년 1월에는 도서관을 신축해서 문을 열었다. 2014년에는 도서관 별관을 개관했다. (중략)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종교와 정치와 분리된 근대 사회에서, 교회도서관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교회 자료를 소장하고 보존하는 역할은 지금도 있지만, 과거처럼 사회의 지식 전승을 담당하는 기능은 퇴색했다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이 부족한 시절에는 지역 사회에서 부족한 공공도서관 인프라를 메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명성교회도서관은 서울 강동구에서, 수색장로교회도서관과 은광교회 김종대목사기념도서관은 서울 은평구에서 공공도서관 역할을 담당해 왔다.
--- p.437~439
동농 김가진이 바위에 새긴 ‘백운동천’ 글씨는, 청운문학도서관 아래 바위 절벽에 있다.
동농이 이완용처럼 친일 부역 행위를 했다면, 백운장 일대는 그의 집안 소유로, 대대손손 이어졌을지 모른다.
때로는 현실이 문학보다 더 극적일 수 있다지만, 백운장 동농 일가의 이야기는 언제까지 ‘비극’으로 방치될까. 정의롭지 않은 역사 속에, 우리는 후손에게 나라를 찾고, 지키는 데 ‘헌신’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동농과 그의 아들, 며느리는, 죽어서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상하이, 평양, 대전에 각각 묻혔다. 심지어 동농은, 일제가 조작한 걸로 알려진 의병장 체포 혐의로, 독립유공자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2019년은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동농이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조부 김가진의 서훈과 송환을 바라마지 않았던, ‘영원한 임시정부의 소년’ 김자동도 2022년 세상을 떠났다.
동농은 언제쯤 ‘독립유공자’로 조국에 돌아올 수 있을까?
성균관대학교 장유승 교수가 지적한 바처럼, 동농의 ‘망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독립하기를 소망했던 조국은 그를 잊은 건가, 버린 건가?.
--- p.490~491
출판사 리뷰
도서관, 투쟁과 민주화의 무대가 되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는 민주화다. 민주주의의 정착은 해방 이후 오랜 독재·군사 정권에 맞서 벌인 치열한 투쟁의 결과다.
민주화 운동의 무대 하면 시청·도청 같은 관공서나 광장·공원·시장 같은 공공장소가 먼저 떠오른다.
최근에는 비상계엄과 내란의 위협을 막아낸 여의도 국회 앞과 응원봉 집회의 광화문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못지않게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었던 도서관들이 있다. 어느 곳보다 정적이고 고요했지만 시대의 요구에 따라 격렬하게 요동쳤던 도서관들은 과연 어디일까?
1960년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유권자 매수와 깡패 동원, 대리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등 불법 선거를 자행했다.
마산에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 나갔고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시민 저항이 거세지자 마침내 이승만은 대통령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부정 선거의 주역 이기붕이 살던 저택은 이후 4·19 혁명 유족 단체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되었다.
혁명을 기념하는 도서관이 자리하기에 이보다 더 상징적인 곳은 없을 것이다.(165쪽)
1970년대 들어 한국은 경제적 풍요를 누렸지만 동시에 자유와 권리가 가장 제한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 체제 때문이었다.
1979년 10월 부산대·동아대·경남대 재학생들은 각 학교의 중앙도서관에서 유신 철폐 시위를 시작했다.
규모가 커지고 시민들이 합류하고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학생 시위’는 ‘민중 항쟁’으로 바뀌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디딤돌’로 평가받는 부산마산민주항쟁의 시작이었다.
왜 대학도서관이 항쟁의 시발점이 되었을까?
“학우여!”의 ‘학’자만 외쳐도 경찰과 정보기관원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대학도서관은 학생들이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175쪽)
1980년에도 전두환의 신군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 거셌다. 5월 21일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모인 10만여 명의 시위대를 향해 공수부대는 조준 사격을 실시했다.
시민을 죽여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신군부는 광주가 아니더라도 어딘가를 희생양으로 삼았을 것이다.
광주는 대한민국 전체가 겪었어야 할 희생을 대신했다.
전남대와 조선대 중앙도서관, 당시 헬기 사격을 받았던 전일빌딩 6층에 위치했던 사립 전일도서관, 5·18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한 무등도서관과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등 광주의 수많은 도서관이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다.(198쪽)
그리고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군부 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 중심에는 수많은 시민의 염원과 눈물, 그리고 도서관이 있었다.(244쪽)
도서관, 정치적 격변의 무대가 되다
우리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저항과 민주화의 장으로서 역할을 한 도서관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 격변과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이용당하고 소모된 도서관들도 있다.
전자의 도서관들이 간직한 피땀의 역사는 민주주의 정착이라는 환희와 긍지를 되새겨 준다.
반면 후자의 도서관들이 겪었던 일은 우리가 결코 되풀이해서는 안 될 정치적 오점과 실패를 짚어 줌으로써 역사적 교훈을 선사한다. 어느 곳보다도 정치적이었던 도서관이 꽁꽁 감추어 둔 흑역사는 무엇일까?
존경각은 조선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도서관 역할을 한, 조선 시대 유일의 대학도서관이었다.
과거 시험 준비에 필요한 책 위주로 수만 권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이용자는 주로 성균관 유생이었고, 관원이나 다른 관청에서 책을 빌려 가기도 했지만 일반 백성은 이용할 수 없었다.
성균관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고, 일제가 대한제국 국권을 강탈하자 대학의 기능을 상실했다.
이에 따라 존경각도 대학도서관이 아닌 ‘책 보관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존경각은 조선 왕조의 운명과 명맥을 함께한 안타깝고 쓸쓸한 공간인 셈이다.(19쪽)
철도도서관은 일제의 식민 통치 기구 중 하나였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운영한 도서관으로, 식민지 조선의 3대 도서관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규모와 위상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철도를 이용한 북한군 병력과 보급품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미군은 용산 폭격 작전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용산 철도도서관도 폭격을 피하지 못했고, 23만 권이 넘는 장서가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다. 철도도서관은 식민 통치를 위한 인프라인 동시에 근대 문화 시설이라는 이중성을 지닌 유산이었다.
우리는 해방 이후 식민 통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채 식민 시대의 ‘유산’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이런 불행의 역사가 압축된 곳이 바로 철도도서관이다.(31쪽)
잘못된 정치의 결과로 사라진 도서관과 다르게 정치적 목적에서 탄생한 도서관도 있다. 바로 정독도서관이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권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시행했고 많은 명문고가 강남으로 이전했다.
그중 경기고는 학교 측과 동문의 큰 반발이 일었고 그래서 유서 깊은 교정을 도서관으로 바꿔 유지하겠다는 타협책을 이끌어냈다. 정독도서관은 그렇게 개관했다.
이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정(正)’과 독서의 ‘독(讀)’을 한 글자씩 따서 이름을 지었다.
한 도서관의 탄생 과정에 강남 대개발, 강남 8학군 탄생으로 이어지는 굵직한 정책이 닿아 있는 것도 흥미롭지만, 더 놀라운 것은 정독도서관 자리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조직했으며 독립문을 세운 서재필의 집터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정독도서관에는 이런 내용을 알리는 표석 하나 없다. 독재자의 이름을 품고 있으면서 말이다.(83쪽)
1979년 5월 문을 연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현재 이름은 서울특별시교육청어린이도서관)의 역사에도 의외의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어린이도서관은 1983년 청와대 지시로 수상한 ‘세입자’를 받았는데 사직동팀이라는 비밀경찰 조직이었다.
1972년에 탄생한 치안국 특수대는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 기업인에 대한 특수 수사를 담당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는데 사직동 어린이도서관 건물에 입주하면서 ‘사직동팀’으로 불리게 되었고,
무려 18년 동안 건물 하나를 차지하고 안가(安家)로 사용했다.
2000년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사직동팀의 해체를 지시했고 안가는 2001년 서울시립어린이도서관의 품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뛰노는 공간에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어두운 과거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102쪽)
도서관, 삶과 사랑의 무대가 되다
우리 도서관은 격변과 정치의 무대이기도 했지만 때로 역사 속 인물의 삶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도서관인으로서 평생을 바친 이를 기억하는 도서관이 있는가 하면, 어느 위인의 업적을 기념하는 도서관도 있다.
각기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 현장을 엿보여 준다는 점에서 색다른 재미와 유익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서는 누구였을까? 1937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사서 검정시험에서 가장 먼저 자격증을 취득한 ‘조선인 1호 사서’는 최장수라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전후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되다 보니 일본이 번안한 도서관 개념과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일찍, 자격증 없이 사서로 일했던 조선인도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사서로 이름을 올린 이긍종이다.
하지만 이긍종은 경성도서관을 세운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다.
그는 조선은행원과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장을 거쳐, 친일 언론사와 친일 단체에서 두루 활약했다.(393쪽)
친일파 사서가 있었던가 하면 반대로 우리 역사를 새롭게 밝힌 일본인 사서도 있다.
1970년 10월 윤동주 서거 25주년과 국립중앙도서관 개관 25주년을 동시에 기념하는 ‘시인 윤동주 유고전’이 열렸는데, 당시 한국을 방문 중이던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사서 우지고 츠요시는 이 전시회를 살펴보고 윤동주의 독립운동 관련 기록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윤동주와 그의 절친 송몽규가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 투옥되었다는 내용이 담긴 일본 정부 서류를 발굴해 한국에 전했다.
‘일본인’으로서 그가 겪었을 고심에도 불구하고 ‘사서’로서 양심에 따라 한 행동 덕분에 우리는 윤동주와 송몽규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446쪽)
사서는 아니지만 누구 못지않은 사랑으로 도서관이라는 결실을 맺은 이도 있다. 바로 서울을 대표했던 요정 대원각의 주인 김영한이다.
1936년 4월 경성을 누비던 모던 보이 백석은 함흥에서 기생 김영한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자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 한국전쟁과 분단 등의 이유로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고 결국 백석은 북에 남게 되었다.
남에서 자야는 정치 거물이 드나드는 요정을 운영했는데,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화를 받아 1995년 대원각 부지 7000여 평의 땅과 40여 채의 건물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다.
약 1000억 원대에 이르는 전 재산을 시주한 게 아깝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야는 이렇게 답했다.
“천억이 백석의 시 한 줄보다 못하다.” 1997년 12월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도심 사찰로 새롭게 태어났고 이곳에는 국내에 몇 안 되는 사찰도서관인 길상도서관이 들어섰다.(492쪽)
북한의 김일성도 책과 도서관에 진심인 인물이었다. 해방 직후 김일성은 도서관 사업과 정책을 기본 과업 중 하나로 삼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대학교 도서관의 장서와 규장각 귀중본이 그대로 방치되고 말았는데, 서울대학교를 점령한 북한 인민군이 귀중본과 장서를 트럭에 실어 평양으로 가져가려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군의 폭격 때문에 의정부에 버려두고 떠나 버렸단다.
1982년에 새로운 이름으로 문을 연 인민대학습당은 단일 건물로는 세계 최대 도서관으로 꼽히는데 남북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인민대학습당은 도서관에 대한 북한 정권의 관심이 그만큼 컸음을 방증하지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체제 선전과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음도 부정할 수는 없다.(368쪽)
이처럼 우리 도서관은 책, 지식, 배움이라는 기능 외에도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가득한 공간이다.
이는 근현대사의 장면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또 ‘이토록 역사적인 도서관’에서 누구를, 어떤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
추천평
참신한 시도의 책이 나왔다. 근현대사와 도서관이라, 역사와 공간을 묶는 새로운 시도가 참 좋다.
한국 근현대사는 전통 왕조에서 근대 사회로 나아가는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지적인 변화 또한 컸는데 지식은 결국 도서관을 통해 유통되었다.
새로운 도서관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이 보급됨을 의미한다.
도서관의 흔적을 따르다 보면 역사의 자취와 만나게 된다. (중략)
30개의 도서관은 지금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재밌게 읽고, 직접 방문해서 입체적으로 우리 역사를 이해하기에 좋다. 읽고, 보고, 뜨겁게 경험해 보자.
- 심용환 (역사학자, 심용환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책에 실린 도서관 이야기는 무척이나 새롭다. 도서관 사서인 나로서도 이처럼 중요하고 도발적이기도 한 도서관 역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
지금은 사서와 함께 시민도 운영의 주체가 된 시대다. 바른 주체가 되려면 도서관 역사를 잘 알고 그 안에서 오늘과 내일의 방향과 의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책이 사서와 시민이 도서관 주체로 활동하는 데 분명하게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우리나라 역사와 도서관 현장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재미도 있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들은 꼭 읽어 보리라 기대한다.
- 이용훈 (도서관문화비평가, 한국도서관사연구회 회장)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3332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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