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조선시대의 이해 (독서요약)/4.조선역사문화

조선과 명나라의 사행 외교사 1 전환, 운영, 노정, 접경

동방박사님 2025. 11. 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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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행使行의 역할·구성·절차에서 문화적 영향까지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를 넓고 깊게 보다
당대 조·명관계 연구 성과를 집약

근래 한중관계는 국내외 정세 변화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전근대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 역시 시기별로 큰 변화를 겪지만 조선과 명의 관계는 오늘날 한미관계와 유사한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당대의 최강국 명을 상대로 안전을 보장받고 경제·문화적 실리를 추구할 전략이 필요했다. 

더구나 변방을 수시로 위협했던 여진과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지는 데에도 명과의 관계 안정이 필요했다.

한중 관계사의 중요성이 높아진 시점에, 우리 시대의 전문가들이 합심해 양국 관계가 가장 원만했다고 알려진 시기의 조·명 관계를 종합적으로 살폈다는 점에서 학술사적 의미가 남다른 저작이다.

목차
ㆍ 책머리에

01 사행의 시대적 전환
고려-몽골 사행에서 조선-명 사행으로의 전환_정동훈
북경 천도를 통해 재편된 조명관계와 ‘순망치한’_조영헌
임진왜란기의 대명 사행: 전쟁 직전~책봉 결정기_김경태
조명 사행에서 조청 사행으로: 조선과 후금의 사신 파견과 접대_장정수

02 사행 운영과 노정
조선 전기 대명 사행의 조직 운영과 외교적 역할_구도영
조선 초기 대명 정보의 수집·활용과 사행 파견_이규철
조선과 명의 사행로 변화와 호행체계_정은주

03 접경 지역, 평안도와 요동
조선의 대명 사행과 평안도_권내현
15세기 조선의 대명 사행과 요동도사_이규철
조명관계의 중개지, 요동아문과 동강진_장정수


저자 소개
저 : 조영헌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학자(2003~2004)와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의 방문연구원(2004~2006)을 거쳐, 2006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에서 「대운하와 휘주상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를 거쳐 현재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다. 

중국 근세 시대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가 주된 연구 주제이고, 최근에는 북경 수도론과 동아시아 ...


저 : 구도영 
경희대학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요 연구 분야는 조선 전기 조선과 명 간의 외교와 무역이다. 

경희대, 서일대, 한밭대 등에서 한국사와 동아시아사를 강의했으며,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연구원, 덕성여자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연구교수를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역사연구소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中宗代 事大認識의 變化」(2006), 「조선 전기 對明 陸路使行의 형태와...


저 : 김경태
전남대학교 역사교육과 부교수. 고려대학교에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허세와 타협 -임진왜란을 둘러싼 삼국의 협상-』 등의 저서와 『편역 사대문궤』 등의 역서가 있으며, 「동경대학(東京大學) 사료편찬소(史料編纂所) 소장 「사료고본(史料稿本)」의 임진왜란 초기 서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임진왜란기 조선의 이미지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 「2000년대 이후 임진왜란 연구의 새로운 경향과 ...

책 속으로
홍무제는…고려 사절단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것은 모두 염탐을 위한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다. 

홍무 5년(1372) 연말에 쏟아 낸 이른바 ‘힐난 성지’에서 홍무제는 고려 사신이 요동-산 동을 지나서 온 것도, 늦게 온 것도, 한인은 물론 몽골인이나 회회 사람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것도 모두 중국의 사정을 엿보려 한 것이라고 몰아세웠다.
--- p.52

고려의 입장에서 명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경제적·문화적 이익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국가의 명운을 건 과제였다.

 잦은 사신 파견은 명 황제와 조정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래하는 길, 명이 공격을 가해 올 경우 예상되는 바로 그 경로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 p.53

영락제는 1409년 2월 첫 번째 북경 순행을 떠나면서 조선에서 진헌한 권씨를 맞이하여 현인비에 봉하는 동시에 권씨의 오라비 권영균에게는 정3품에 해당하는 광록시경을 제수했다. 

이를 매개했던 조선 출신 태감 황엄이 “잘 생긴 여자[生得好的女子]”를 원하는 영락제의 뜻을, 기록으로 남는 문서가 아닌 구두 형태의 선유宣諭 성지聖旨로 조선에 전했던 시기는 1408년 4월의 일이었다.
--- p.70

조선과 명의 관계가 ‘순망치한’의 관계로 변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 계기…

영락제의 북경 천도로부터 약 170년 뒤,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명이 조선에 파병한 이유 역시 조선이 단지 ‘인접국’이거나 모범적인 ‘조공국’이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수도 북경과 가장 인접해서였다.

 명의 수도가 전기처럼 남경이라면 파병이 이뤄지기는 어려웠다. 

문제는 북경의 취약한 물류체계에 있었다.…

대운하를 제외한 대안적 물류인 해로를 폐쇄한 상태였고,…

일본의 조선 침략이 북경의 물류적 취약성을 위협했기에 …

결국 북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병이 결정된 것이다.
--- p.92

조선에서는 후금 사신을 금차金差라고 불렀고 호차胡差라는 표현도 함께 썼다. 

드물게 노사虜使로 칭하기도 했다. 

가장 먼저 파견된 ‘금차’는 정묘호란 당시 강화도로 온 유해劉海 혹은 유흥조劉興祚였다. 

그는 인조를 접견한 최초의 금차였으며 사신으로서 공식적인 대접을 받았다.
--- p.173

정조사는 설날을, 동지사는 동지를 하례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행이고,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 천추사는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보내는 사행이다.…

관압사는 4년에 한 번씩 말 50마리를 보내는 사행으로, 정조사와 동행했다. 

관압사는…임무 특성상…‘1년 3사使’에 포함되지 않았다. 

15세기에는 명에 매년 정조사와 성절사를 파견하고, 황태자가 있을 경우 천추사를 파견하는 1년 3사 체제가 지속된다.
--- p.188

세종 6년 (1424) 9월 평안감사는 요동에서 가져온 황태자의 유시문을 바탕으로 영락제의 사망 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영락제가 친정 중 7월 유목천에서 사망했다는 것이다.…

영락제의 사망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즉시 홍무제의 상례를 기준으로 의례를 시행했다. 

그리고 황제의 죽음에 대한 명의 통보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진향사 최이와 진위사 안순을 파견하며 진위표와 진향제문을 보냈다.…

명사는 황제의 사망에 관한 조서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사적으로 소식을 파악해 사행을 파견하는 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진향사 최이와 진위사 안순 등은…

황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선 국왕이 이미 상례를 행했으니 사행을 파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명사는…사신이 먼저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것은 조선의 실수이고 사적으로 소식을 통한 일에 대해 반드시 죄를 물을 것이라 경고했다.
--- pp.237-239

조선 초에는 부경사신을 영송하기 위해 평안도 정병이 군사로 차출되었다. 

사행을 전송할 때는 4대 100명에게 호송을 맡겼다. 

사신을 맞이해서 오는 영래군迎來軍의 경우 매번 요동에 군사를 보내 호송하기 때문에 반수로 감하여 2대 50명을 조직했다. 

부사가 없는 단사單使일경우에는 전송하고 맞이할 때 모두 50명을 보냈고, 요동으로 파견한 관원에게는 3오伍, 즉 15명을 보급했다.
--- p.266

조선의 부경사행에 대한 명의 민심은 그리 좋지 않았다. 

부경사행이 짐을 수레에 옮겨 싣는데 명의 역참마다 “우리가 너희 나라 때문에 못살겠다”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조선인이 중국
역졸을 매질하는 모습을 그려 걸어 놓거나, 과거시험에 “어떻게 하면 조선인들을 자주 왕래하지 못하게 하여 폐단을 없앨 것인가”라는 제목의 책문策問이 출제되기까지 했다. 

조선인들이 장사 이득을 얻기 위해 중국을 왕래한다고 간주하여 불만이 몹시 컸던 것이다.
--- p.268

대명 사행에서…평안도에서 차출한 호송군은 조선과 명의 사신이 오갈 때 요동팔참 구간의 호위를 담당하였다. 

명으로 가는 조선이나 명의 사신을 호위하는 이들을 호송군, 조선으로 오는 명 사신을 호위하는 군사를 영봉군迎逢軍, 명에서 돌아오는 조선 사신을 호위하는 군사를 영래군迎來軍으로 구분하기도 했으나 보통 이들을 아울러 호송군이라 하였다.…

세종 대에는 정원이 40명에서 100명으로 늘었는데, 요동에서 돌아오는 사행의 호송군은 절반인 50명이었다.
--- p.295

요동도사는 조선의 사행이 육로를 통해 남경이나 북경으로 갈 때 항상 통해야 하는 관문이었다. 

태조 대 명에서 조선의 사행을 거부했을 때에도 요동의 관문까지는 이동이 가능했다.

 명에서 조선의 사행을 거절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요동도사에서 서로의 입장을 교환했다. 

긴장 상황에서도 요동도사를 통해 조선과 명은 최소한의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 p.335

요동도사보다 높은 명의 관원들이 ‘흠차欽差’라는 명목으로 조선 땅에 머물면서…조선은 접대도감을 설치하 고, 경략·제독뿐만 아니라 휘하의 고위 장수들에게도 접반사·접반관·역관·통사를 제공하였다.…

사신이 아닌 관료와의 접촉은 사교私交로 간주되었다. 

사실 접대도감이라는 비상설 기구도 명의 칙사를 접대하는 영접도감迎接都監과 구분하기 위해 신설한 것이었다. 

조선 국왕이 경략·제독처럼 품계와 지위가 높은 명나라 관원을 직접 마주한 것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 p.345

출판사 리뷰
힘의 우열에 따른 ‘의례’ 행위를 넘어선 의미 부여

사행은 근대적인 국제 관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대표적인 외교 행위였다. 

명은 주변국에 조공 이외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조선 사행은 외교 문서와 함께 예물을 전달하고 답례품을 받아 돌아왔다. 

물론 명 사행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조선 국왕을 인정하거나 명 황실의 변화를 알리는 외교 문서의 전달이었다. 

그러나 양국 사행은 힘의 우열에 따른 표면적 의례 행위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방적 희생으로 지탱되지는 않았다. 

사행 과정을 통해 조선과 명은 사실상 초기의 일시적인 마찰을 극복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원병에서 보듯 ‘순망치한脣亡齒寒’처럼 장기간 상호 안전을 도모할 수 있었다. 

더불어 조선 사행은 명의 정세에 관한 정보 파악에 열중하였으며 교역을 통한 이익 확보에도 관심을 가졌다. 양국 사신이 오가며 지적 교류를 넓혀 나간 것은 문화적 자산이 되었다.

미술사·해양사 등 다양한 연구자들의 입체적 조명

이 저서는 조명 관계를 사행에 초점을 맞추어 그 구체적인 면모를 다양한 소재를 통해 분석한 최초의 성과물이다. 

여기에는 고려시대사, 조선시대사, 명·청사, 미술사, 한문학, 고전문학을 전공하는 13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이들은 4년에 걸쳐 매달 워크숍을 열고, 개별 논문 완성 후에도 수차례 토론과 수정을 거치며 완성도를 높였다. 

사행에 관한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 양국 간 사행 자체는 물론 여기에서 평안도의 호송군 부담, 조명 외교의 중개자 요동아문 등 파생된 양상들까지 다양한 소재로 분석을 시도하였다. 

1권에서는 조선에서 명으로 향한 사행의 시기별 변화, 사행의 운영 양상과 노정, 접경 지역인 평안도와 요동의 사행 지원에 대해 다루었다.

 2권에서는 명의 조선 사행, 상호 인식과 이해, 사행 의례와 무역, 주변 지역인 여진, 일본, 여송(오늘날 필리핀의 루손 섬)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명 사신과 조선 접반사 등이 시를 주고받는 ‘창화倡和외교’가 조선 문단에 미친 영향 등 문화적 의미도 짚어냈다.

새로운 시각과 흥미로운 사실들

조·명 관계에 관한, 당대의 연구 성과를 망라한 덕분에 책은 학술사적 의미에 더해 새롭고 흥미로운 사실을 담고 있어 읽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임진왜란 당시 명에서 원병을 보낸 이유가, 조선이 단순히 ‘모범 조공국’이어서가 아니라 수도 베이징에 대한 실질적 위협 때문이라는 분석(북경천도를 통해 재편된 조명관계와 ‘순망치한’-조영헌)이 대표적 예다. 

명이 위협을 느낀 이유가 베이징을 향한 식량 운반로가 일본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는 실증에는 무릎을 치게 된다. 

1593년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교섭이 시작되면서 히데요시가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요구했다든가, 그를 국왕에 임명하는 명의 책봉사를 보내면서 조선 ‘사절’을 딸려보내기로 했다는 등의 낯선 사실도 보여준다. 

조선은 회유를 위해 여진인의 내조來朝를 허용했는데 처우에 불만을 품은 여진인들이 술과 반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예조정랑 신숙정을 때리거나 임금이 준 관교와 하사품을 내던지는 만행을 부리기도 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책을 기획한 권내현 교수는 필자들을 대표하여 “여전히 부족하거나 빠진 내용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겸양을 보이면서도 “사행과 그로 인해 파생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어 조명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 지침서로서도 충분할 역할을 하리라”고 자부한다. 

말 그대로, 학술사적 의미와 더불어 교과서에서 만나기 힘든 흥미로운 사실들이 담긴 이 책은 교양서로의 역할도 기대할 만하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6408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