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중국.동아시아 이해 (독서요약)/1.중국역사문화

피터 볼의 중국 지성사 강의 (2025) - 무주에서 본 리터라티의 학 1100-1600

동방박사님 2025. 12. 1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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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도학(신유학), 문학, 박학, 고증학까지
어느 것도 조정과 수도에서 시작된 것은 없었다

『피터 볼의 중국 지성사 강의_무주에서 본 리터라티의 학 1100-1600』(원제 Localizing Learning: The Literati Enterprise in Wuzhou, 1100-1600)는 중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흐름 중 하나인 12세기 신유학의 확산에서 17세기 고증학의 시작까지, 중국 남동부 절강성의 무주에서 펼쳐진 신유학(도학), 문학, 박학이 각축했던 리터라티(사)의 ‘학문’을 5세기에 걸쳐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이 책을 열면 서론의 지도에서 부록까지 저자가 50년 중국 지성사 공부와 문제의식을 확장하기 위해 현지 조사와 디지털 인문학에 쏟은 뜨거운 열정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피터 볼은 이 책이 중국사를 보는 데에만 유용한지, 아니면 한국사를 생각하는 데도 유용한지를 생각해 보길 권한다. 

조선 사회에서는 신유학(도학) 성공이 문학, 박학, 의학 등을 지워 버린 것일까? 

지역의 맥락에서 드러내는 통합적 역사의 시각이 중국의 절강성 무주에만 해당할까? 

현재 수도권 중심에서 ‘지역적 전환’이 화두인 한국 사회에 큰 시사점을 던진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론 사의 학을 지역화하기
학學
시기: 12~16세기
출발점: 북송 시기를 돌아보다
리터라티로서의 사
사의 지역화
무주
책의 범위

1장 송대의 여조겸
과거시험, 서원, 스승
선생으로서의 여조겸
동지의 공동체 만들기
전기 작가로서의 여조겸
학자로서의 여조겸
사람들이 본 여조겸
사회적 영향

2장 학의 정치화
정치화된 학
과거시험을 위한 독서와 작문 그리고 출판
무주에서의 출판
학으로서의 논증적 글쓰기 형식
소식: 형식과 아이디어
책 쓰기

3장 세 편의 유서(類書)
『기찬연해』
『여지기승』
『군서고색』

4장 도학
금화 사선생
하기, 1188~1268
왕백, 1197~1274
김이상, 1232~1303
허겸, 1270~1337
계보의 끝

5장 원 정복에의 대처
덕행(윤리적 행위)
통치
문학: 학과 글쓰기
정복 이후 무주의 문장
유학과 문학을 아우르기

6장 연대와 혈연
사회적 맥락을 양적으로 살펴보기
“우리 무주”?지역 정체성과 사의 학
족보와 가문
사 가문의 지형

7장 명: 부흥과 분열
희망과 실망
부흥
장무 세대
장무
장무와 무주의 사 전통
명 시기 금화 사선생
왕양명으로의 전환
넓어지는 균열

8장 끝과 시작
“우리 무주”를 다시 정의하기
사들의 문제
지성사
호응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다

부록
2.1 _도학 저자들의 저서 목록
2.2 _비(非)도학 계열 저자들의 저서 목록
4.1_왕백의 저서
6.1_중국역사인물데이터베이스(CBDB) 데이터
6.2_무주의 인물 및 문학 선집
8.1_호응린의 현존 저작 목록


저자 소개 
저 : 피터 K. 볼 
미국 당송대 지성사 연구의 권위자로, 그의 연구는 주로 7세기 이래 중국에서 일어난 지성적·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하버드 대학 동아시아언어문명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Sung Dynasty Uses of the I Ching』(1990),『Ordering the World: Approaches to State and Society in Sung Dynasty China』(1...

역 : 민병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와 하버드대학교에서 동양사를 공부하였다. 

주희의 사회·정치적 구상으로서의 ‘학’에 대한 연구로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전남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홍익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과 동아시아의 지식, 사상, 사회를 연구하고 있다.

책 속으로
만약 ‘학’을 지성사의 주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곳에서는 어떤 학이 실천되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됩니다. 

예컨대 송·원의 무주와, 명·청의 금화에서는 주희의 학에 헌신한 이들, 즉 ‘금화 사선생金華四先生’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14세기의 송렴宋濂처럼 언어와 문학에 집중한 이들도 있었고, 12세기의 진량처럼 경세학에 집중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깊게 다루지 않은 다른 학문들도 있었는데, 예컨대 주진형朱震亨은 주희의 리理 개념을 활용하여 새로운 의학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다양한 학문이 공존했습니다

. 때때로 그들의 학은 서로 대립하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무주에서는 주희의 도학道學 추종
자들은 문학을 중시하는 교사, 역사학자, 과거 시험 준비자들과 항상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 p.9

1998년 봄, 나는 팡루진Fang Rujin, 공지엔펑Gong Jianfeng, ?

劍峰 교수를 따라서 동양강을 끼고 동쪽 방향으로 올라갔다.

 동양강은 산을 지나면 남쪽으로 방향이 바뀐다. 

우리는 곽흠지郭欽止가 850년 전에 세운 석동서원石洞書院을 보러 가고 있었다. 

좁은 평야를 건너면 ‘곽씨 가문 거주지郭宅’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는 여전히 곽흠지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서원 자체는 3년 전에 복원된 것으로, 이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다섯 번째 복원이다. 

이제는 박물관 같은 곳이 되어서, 장소를 유지하고 때때로 관광객을 맞이하고 지역의 학생들에게 강의를 제공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나는 이 서원에서 교육을 통해 사의 공동체를 만들려 한 노력에 관한 이야기로 이 장을 시작하려 한다. 

그 이유는 복건 출신의 주희朱熹, 그리고 금화의 여조겸呂祖謙과 영강의 진량陳亮이라는 무주 출신의 사士, 이들 12세기 세 사의 조각상이 이 서원 건물 앞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주희가 새겼다고 이야기되는 건너편 절벽의 큼직한 네 글자에 의거하여 이 지역에서는 그가 석동서원에서 가르쳤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주장한다.
--- p.69

도학 사이에서 과거시험 공부가 살아남았다고 말하기보다는, 도학이 과거시험 공부의 강력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무주에서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도학은 학문이 잘 정착된 곳(진사 학위 수로 입증할 수 있음)에서 추종자를 얻었지만, 모든 지역에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2세기 동안에 도학은 무주에서 입지를 다졌지만, 상업이 강했던 지역, 예컨대 양자강 하류의 부유한 중심지인 소주 蘇州나 명주에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익[利]’과 ‘의義’ 사이의 절대적인 도덕적 구분이 있다는 신유학의 주장이 이 지역의 가치관과 너무 상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 p.131

원의 정복 이후 사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는가? 

우선, 그들은 새로운 외국인 통치자들 ?

 몽골인, 중앙아시아인, 그리고 북쪽의 한인漢人들 ? 

을 맞이해야 했다. 이제 무주는 무주로?州路가 되었고, 두 명의 새로운 고위 관리가 배치되었다. 

바로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총관總管이다. 각 현縣의 현윤縣尹 옆에는 현 단위의 다루가치도 있었다. 

송과 명의 기록을 찾아보아도 이 새로운 관리들에 대한 정보가 이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기록된 첫 번째 다루가치는 몽골 지운Ji’un 부족 출신의 준시Junsi였으며, 이후에는 카를룩Qarluq 출신의 중앙아시아인 쿠툴룩Qutulug이 있었다.

 그러나 북방 한인으로 추정되는 우호례牛浩禮라는 인물도 있었다.

 총관 또한 다양한 민족 출신이었다. 한인인 맹순孟淳은 산서山西 출신이고, 하약수夏若水는 항주에서 왔다. 천바얀부카陳伯顔不花는 중국 성씨를 가졌지만 위구르식 이름을 가진 인물이었다. 

북방 및 서방의 ‘이적夷狄’ 출신 고위 지방 관리들은 자신들을 사로 여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후원자가 될 수 있었다.
--- p.277

2006년, 쉬엔빙샨Xuan Bingshan 교수와 스즈쥔Shi Zhijun 선생과 함께 영강에 위치한 호씨 가문의 ‘단성촌單姓村’ 중 하나인 호고상촌胡庫上村을 방문했다. (중략) 

마을 외곽에는 또 다른 사찰 단지가 건설 중이었다. 

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은 마오쩌둥이 썼다는 8글자가 쓰인 큰 벽면이었다. 

“위관일임, 조복일방 爲官一任, 造福一方[관직에 한 번 나아가 한 지역에 복을 내리다].

” 이 묘가 어떻게 이곳에 있게 되었는지 물으니,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항주에 있던 호칙의 묘를 훼손하자, 마을에서 트럭을 보내 호칙과 그의 아버지의 유골을 마을로 옮겨와 다시 묻었다고 한다. 

이 8글자는 그들이 어째서 그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지도 모른다.

 1959년, 마오쩌둥이 금화를 방문했을 때, 그는 영강 당 서기에게 호칙의 이야기와 그가 이 지역에 준 혜택(그는 세금 감면을 성사시켰다고 한다)을 이야기하며, 사람들이 어떻게 아직도 그를 숭배하는지를 말했다.

 공산당 간부 역시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 한다며, “관직에 한 번 나아가 한 지역에 복을 내리다”라는 말을 남겼다.

 마을은 이제 되찾아왔거나 (혹은 도굴했거나) 한 선조의 묘를 통해 당시 가장 강력한 권력자와의 연결고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누가 이 8글자에 도전할 수 있겠는가!
--- p.327

최근 몇 년 동안 옛 건물들이 있는 마을들을 방문하기 위해 시골 지역을 여행하면서, 이 장에서 다루어진 여러 인물의 후손들을 만났다. 

그들의 족보는 남송, 원, 명대에 이르는 조상들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날 ‘단성촌’이라 불리는 곳에 거주하며, 실제로 우리 연구팀이 방문한 모든 마을은 한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일화들은 동남 지역 농촌 풍경이 가문 중심의 마을들로 구성되었다는 일반적인 그림과 일치한다. 이런 현상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무주 지역에서는 이미 16세기 말에 확립되었으며,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의오현의 8개 면을 보여주는 지도들은 이러한 풍경을 독특하게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그림 6.1]이 그 한 예를 보여준다. 여기에서, 그리고 이 지도들 전체에서 마을들은 성씨로 식별된다.

 이 지역에서 단성촌이 성공적인 사회 구조로 등장한 시기는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 장에서 소개된 족보와 족보 기반 가문의 가치를 주장하는 방식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가문 중심의 마을은 단순히 친족 연대에서 오는 실질적인 이점의 결과였을 것이다.
--- p.384

출판사 리뷰
피터 볼 교수(하버드대)는‘왜 학문이 주제인가?

 이 기간을 왜 다루는가? 

사(士)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 지역에 대해 썼는가?’

라는 책을 관통하는 네 질문을 던지며 송-원-명 시기의 ‘사의 학’을 지성사와 사회사를 가로지르며 조망한다.

 그런데 왜‘지역’의 시각에서 접근했을까? 

12세기 여진의 침략에 따른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시대적 전환은 ‘지역적 전환’을 동반했다.

 남송 이후 특히 몽골 지배 시기를 지나면서 사대부의 존재 양상과 정체성 자체가 ‘지역’이라는 단위와 밀접하게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피터 볼이 제시하는 ‘지역적 전환’은 매우 강력한 논제다. 송-원-명 시대 문학(고문), 도학, 박학, 고증학 중 어느 것도 조정과 수도에서 시작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모두 당시의 권력자와 주류의 학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다. 이 책이 다루는 지역의 사(士)들 사이에서 발생했고, 그들 스스로의 손에 달려 있었던 지적,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운동의 산물이었다. 

사의 학이 지역에 따라 구체화하면서 정치적 중심지인 조정과 수도의 문화보다 이러한 ‘사의 학’은 중국 문화의 국가적 특성을 구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남동부 절강성의 무주(지금의 금화)라는 지역을 통해 드러나는 사의 학의 구체적 실상은, 유학의 여러 학파와 문학, 박학, 그리고 의학까지도 포함한 다양한 지적 전통들 사이의 복합적인 상호 관계, 긴장·갈등·타협, 그리고 이에 대한 정당화와 비판의 논리가 동아시아 지성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잘 보여준다.

왜 신유학에 단 한 장만 할애한 것인가?

『피터 볼의 중국 지성사 강의』가 다루는 송대에서 명 말에 이르는 1100년에서 1600년 사이의 중국 지성사는 통상 주자학에서 양명학, 그리고 고증학으로 이어지는 신유학의 계보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이 책이 지성사를 다룬다면서, 왜 당에서 청 사이에 일어난 중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인 신유학에 단 한 장만 할애한 것인가? 

왜 그토록 많은 부분을 문학, 과거시험 공부, 백과전서적 학문에 쏟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피터 볼은 학문을 좋은 사고, 좋은 행동, 좋은 글쓰기를 위한‘실천되는 것’으로 정의하며 “이곳에서는 어떤 학이 실천되고 있었는가?”에 주목한다. 

따라서 이 책이 조명하는 대상은 신유학의 전개를 중심에 두지 않고, 이곳 무주를 배경으로 각 시기의 단면 속에서 실제 현실에서 전개된 다채로운 지적, 문화적 추구와 그 복합적 관계를 살아 있는 주체로의 ‘사’의 활동 전반인 것이다.

남송 시기 여조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책을 펼쳐보자.

 여조겸은 주희의 조력자로서 도학(신유학)의 기본 교재가 된 『근사록』을 주희와 함께 편찬하는 등 신유학의 체계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보여주듯, 주희는 여조겸과 무주 지역의 사들이 추구한 학이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학과는 어긋난다고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여조겸은 분명 신유학자이지만 그가 행한 ‘학’의 모든 측면(지적, 문화적, 그리고 실천적 행위들)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곧 신유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 피터 볼의 주장이다. 

전작에서 이미 중국 지성사의 유학적 지향과 문학적 지향의 상호 관련성과 긴장 관계를 주된 주제로 제시한 바 있는 저자는 이 책에서 그 시각을 보다 구체적이고 풍부한 사례를 통해 전개한다. 

이 지역의 출판사에서 출간된 인기 있던 산문 문집에 주목하면서 12, 13세기의 ‘과거시험 교육’을 살펴본 후,『기찬연해』, 『여지기승』, 『군서고색』 3편의 유서(類書)를 통해 백과전서적 박학(博學)을 지향한 사들을 자세히 다루고, 문학적 수련과 표현을 가장 중시한 사들을 소개한다.

 또한 주자학의 정통을 자처한 금화의 4선생, 하기, 왕백, 김이상, 허겸이 주자의 학을 단 하나의 참된 앎의 방법으로 여기며 주자의 학과 학 자체를 동일시했음을 보여준다.

신유학과 고증학은 어떻게 병립하고 단절되었는가

12세기 중반, 남송의 무주(지금의 금화)에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북송 시대의 유산인 왕안석의 경세학, 정이 형제의 도학, 구양수와 소식의 문학까지 포함된 다양한 지적 전통들이 공존했지만, 주희에 의해 성립된 신유학(성리학, 도학)은 학의 경계를 새로 그리며, 리터라티로서 사가 학문을 하는 궁극적 목표를 재정의할 것을 요구했다. 

신유학의‘유일하게 올바른 학의 방식’에 대한 배타적 주장은 그 학문의 내용과 원리 자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신유학이라는 체계는 그 근본 전제(형이상학적 세계관과 이에 기반한 학의 실천 방식)를 인정하지 않으면 더 이상 신유학이라할 수 없다는 명확한 경계를 가진 학문이었다. 

이러한 전제란 곧, 우주의 모든 존재와 현상이 하나의 통합된 근본 원리에 따라 질서화되어 있다는 믿음을 뜻하며, 따라서 신유학자의 모든 지적 활동과 추구는 그 질서를 인식하고 드러내려는 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도학이 일부의 사들에게는 뚜렷한 준거점이 되었지만 실제 신유학자들의 현실적 행위는 단선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신유학이 제시한 학의 방식 외에도 다양한 학문을 동시에 추구했다. 

다만 자신이 진정으로 신유학적 정체성을 가진 사라면, 문학, 전장제도 연구, 의학, 천문학 등 어떤 학문을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속한 신유학의 체계와 어떠한 방식으로든 통합될 수 있음을 정당화해야 했다. 

그 정당화가 반드시 성공적이거나 논리적으로 완결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경계의 전제’가 학문을 규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인물, 호응린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는 무주의 전통에 대한 재해석과 새로운 종류의 텍스트 연구를 통해 학문의 사명이 도학적 수양과 문학적 성취를 결합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한 시대의 끝이 시작되는 지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호응린의 관점은 이후의 고증학과 유사성을 지니는데, 저자는 신유학과 고증학이 어떤 조건에서 병립하고 또 어떤 지점에서 단절되었는가를 들여다보는데 호응린은 하나의 창문을 제공한다고 본다.

사는 누구였을까? 왜 이들을 ‘리터라티’라 이르는가?

지역 엘리트가 사 엘리트로 전환되는 것은 송 이후 중국사에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는 국가 엘리트 중 하나였지, 중국의 유일한 국가 엘리트는 아니었다.

 당이나 송의 황실 가문은 왕조 말까지 2만 명에 달했고, 명대에도 존재했다. 원대에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세습적 엘리트였다. 

이밖에 행정 서리, 불교 승려와 도교 도사들도 의심할 여지 없이 국가 엘리트였다. 

송대 이전 시기 사라는 용어는 정부의 행정 관료를 지칭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1만 5천에서 3만 명 정도의 관료와 좀더 광범위한 집단으로 식별되었는데 주로 관직을 업으로 이어온 가문(세족)이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수도(장안과 낙양)를 잇는 중심축 지역을 따라 밀집해 있었다.

저자는 관직 보유만으로 사를 ‘리터라티’라 한 번역은 정당하지 못하다 지적한다. 

송대에 이르러 텍스트 전통과 문학적 작문을 익힌 사람들(리터라티)이 사로 취급되어 국가 엘리트 중 가장 중요한 집단이 되었으며, 출생보다는 학문이 전국적 엘리트의 구성원이 되는 자격을 제공해 주었다. 

이는 학의 본질, 목적, 방법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글쓰기에서의 고문과 도덕 사상에서의 도학이라는 사의 학의 국가적인 경향은 많은 저항 끝에 조정에서 인정받았으며, 과거시험과 학교를 통해 확산되었다. 

1126년 여진이 개봉을 함락시키며 북송에서 남송으로 바뀐 뒤 제도적 변화를 거친 과거제도는 세족들의 지배적 지위를 약화시켰다.

 송대에 사의 숫자가 가장 많이 증가한 곳은 현재의 절강성, 강소성, 복건성 등 중국 남부였다.

 13세기 중반에는 과거 응시자가 40만 명에 이르렀다. 

몽골의 1234년 화북, 1270년대 강남 지배 이후 상당 기간 사의 신분은 국가가 아닌 사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 유지되어야만 했다. 

부침이 있었지만 1315년 과거제도는 다시 제도화되었고 도학이 공식적으로 과거시험 커리큘럼에 포함되었다. 명 말에 이르면 과거 응시자는 50만 명에 달했다.

관직이나 가문의 명망은 어느 시대에나 매우 바라는 것이었지만 송대를 기점으로 사가 공유한 정체성은 ‘학’을 통해 규정되었다. 

텍스트를 읽고 문장을 쓰도록 훈련받는 교육이 이제는 잠재적 관료 집단인 전국적 엘리트에 누가 소속되는지를 정의하게 되었다. 학과 사의 신분 사이의 등식이 성립된 것이다.

“그들이 행한 학이 국가적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면, 왜 지역적 관점이 필요한가?”

북송에서 남송으로의 시간적 전환은 공간적(지역적) 전환과 함께했다. 절강성, 강서성, 복건성 등 출신의 지역 엘리트가 사 엘리트로 전환되는 것은 송 이후 중국사에서 핵심적 부분이었다. 

지역적 전환에서 중국의 남동부가 두드러진 까닭은 기후, 교통, 상업, 전쟁 지역과의 거리, 그리고 통치의 질 등 여러 측면에서 북부 지방보다 더 많은 사대부 가문을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절강성의 무주는 이 책의 서론에 수록된 지도들에서 드러나듯이 정치적 중심지나 상업이 번성한 소주와도 다소 떨어진, 한국의 안동이나 남원이 연상되는 산지 내륙이다. 

피터 볼이 무주를 선택한 이유로, 12세기 중엽 이곳이 도학의 초기 중심지의 하나이면서도 한편으로 도학 운동 비판자들의 고향이었으며, 특히 현존하는 자료가 가장 풍부했기 때문이라 밝힌 것처럼 이곳은 지방지와 지역 기록이 흔했다.

이 책은 중국인물데이터베이스에 기반한 무주의 친족 및 사회적 연계에 대한 비교 정량 분석을 활용하여 사들의 행동에서 나타난 실질적 변화를 보여준다.

 남송과 달리 원대 무주의 혼인 네트워크는 거의 전적으로 지역 내에서 이뤄졌으며, 그 대신 학문을 기반으로 한 연계가 강화되었다. 

사당을 짓고 족보를 작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공통된 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병행되는 수단이었다. 

사대부의 숫자는 지속적으로 증가했으며 이들은 지역의 일에 더 적극적이었고 교육에 더 많이 투자했다. 

12세기 중엽에 이곳의 현시는 200 대 1로 전국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았으며, 12세기 말에 이르면 무주 사람은 모든 과거시험에서 대략 10명의 진사를 배출했다. 

과거시험이 거의 중요하지 않았고, 신분에서 몽골인, 색목인, 한인(북부)에 이어 가장 아래인 남인으로서 원대 무주의 사는 자신들 지역의 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정체성은 명대에 부활했다.

무주의 역사는 어떻게 학문의 문화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었는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책은 이렇게 12세기부터 17세기까지 한 지역에서 학문이 어떻게 공통된 과업으로 자리 잡았는지, 독특한 지역 정체성의 추구가 지역적인 것을 통해 어떻게‘전국적’인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다.

지은이의 말
철학자들은 사상 자체에 관심이 있지만, 지성사 연구자들은 그들의 사상 자체뿐 아니라 철학자를 사회적 행위자, 즉 청중에게 말을 건넨 인물로서 관심을 가집니다.

 이 책에서 저는 주희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들, 그리고 주희의 다음 인물이 되길 바랐던 몇몇 사람들을 다루지만, 그들을 사회적 행위자로서도 바라보려고 하였습니다. (

중략) ‘철학’, ‘문학’과 달리 ‘학’은 우리가 ‘주희의 학’이라고 말할 수 있듯이 명사이지만, 동사이기도 합니다. 이는 학과 학을 하는 사람들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게 합니다. 학의 역사는 지성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문화사이자 사회사이기도 합니다. 이는 사회문화사이지만 아이디어는 때로 아이디어 자체로 다루어져야만 함을 이해해야만 하는 ‘사회문화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옮긴이의 말
피터 볼 교수가 오랫동안 선도적으로 이끌어 온 디지털 인문학을 적절히 활용하여, 무주 지역의 성격과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망을 한층 선명하게 분석하고 조명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중국 전기 자료 데이터베이스 분석과 GIS(지리정보시스템) 기법을 이용한 지리적 분석을 통해, 무주 지역의 사들이 활동한 공간적 범위와 상호 관계, 그리고 지역과 제국을 잇는 지적 네트워크의 구조가 구체적이고 정밀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절강성 무주, 현재의 금화 지역에서 이루어진 현장조사fieldwork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장 기반의 접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생생하고 밀도 높은 역사서술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 출처 : 예스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67467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