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쿠샤, 세상에 알려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500여년 된 은행나무 옆에는붉은 벽돌으 서양식 가옥이 오래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950년대 이후 이 집은 주변의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귀신이 나오는 집'으로 불렸습니다.
1990년대에는 " 대한매일신보사옥"이나 "베델하우스"로 추측하였습니다. 서울시와 관련단체에서 이 가옥을 옛집 문화재 지정 및 언론사적공원 조성지로 추진했으나,DIKUSHA 1923이라는 정초석이 무었인지 밝히지 못해 중단 하였습니다. 붉은 벽돌집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이 집의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던 중 2005년 서일대학교 김익상교수는 브루스T.테일러가 일제강점기 시절 지명으로맘 집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어 이곳을 찿는데 약 2개월이 걸렸습니다. 이 집의 이름은 딜쿠샤 DIKUSHA였고, 외국인 부부앨버트W.테일러와 메리L.테일러가 거주 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2006년 브루스T. 테일러는 딜쿠샤를 더나온지 66년 만에 자신이 태어난 집을 찿았습니다. 이로써 은행나무골 붉은 벽돌의 집 딜쿠샤에 숨겨져 있었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상
1.테일러부부가 떠난 이후의 딜쿠샤 :KBS다큐공강 딜쿠샤
2.데일러가문 앨범 : Album 인디어-코리아 (1914~1917)
3.테일러가문 앨범 : Album3 1917. 1919~1924 DILKUSHA
테일러 부부가 떠난 이후의 딜쿠샤
테일러 부부가 떠난후,딜쿠샤는 윌리암W.테일러에 의해 잠시 관리되다 1959년 자유당 조경규의원에게 매입 되었습니다. 이후 가옥의 일부분이 다른사람에게 임대, 매매되기도 하엿습니다 1963년 조경규의 재산이 국가에 넘어감에 따라 딜쿠샤도 국가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기존에 거주하던 딜쿠샤 입주민들과의 법적 정리 없이 가옥을 그대로 방치하였습니다. 거주민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딜쿠샤를 증. 개축 하였고, 딜쿠샤는 본래의 모습과 다르게 변해 갔습니다.
2006년 딜쿠샤를 다시찿은 브루스T.테일러는 어릴적 딜쿠샤에서 생활 하였던 모습을 회상하엿습니다. 그는 딜쿠샤가 잘 보존되지 못한채 훼손 및 변화된 것에 대해 실망스럽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그저 집이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딜쿠샤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현재 다른 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딜쿠샤는 하우스뮤지엄으로 전환하기 위해 복원공사를 앞두고 있다.
딜쿠샤 복원 공사사업
딜쿠샤는 테일러 부부가 떠난 이후 1960년대부터 다세대 가구가 거주하는 공동주택으로 변했다.
딜쿠샤는 3.1운동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린 앨버트W. 테일러의 가옥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으며 서양 근대 건축기술이 도입된 서울의 몇 안되는 서양식 가옥이기도 하다. 또한 공동벽 쌓기라는 특이한 건축기법을 사용하여 희귀성이 있다고 할수있다.
딜쿠샤 1층 면적은 264.46 제곱미터 이며 현재는 방13개, 창고7개, 그리고 주방 및 다용도실, 화장실이 모두7개이다. 복원공사 이후에는 방2개, 거실, 식당, 부엌으로 구조를 변경하여 전시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2층은 방 12개, 주방, 화장실, 창고가 각각 2개씩 있고 건물뒤편에는 별도의 출입구가 있다. 복원공사 이후에는 방4개, 거실, 화장실 등을 각각 설치하고 베란다와 포치도 복원하여 역시 전시장으로 사용될 에정이다. 이 밖에도 본래 있었던 굴뚝과 지붕, 가옥 뒷부분도 복원을 진행하여 본래의 모습을 되찿도록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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