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도 義理的 仇討> 상영
1919년 10월27일, 단성사는 최초의 한국인에 의해 국내 자본으로 만들어진
<의리적 구토 義理的 仇討>를 상영했다. 김도산 극본, 연출과 박승필의 제작으로 만들어졌다. 악랄한 계모에 맞서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찿으려는 청년의 다툼과 응징을 다룬 내용이다. 제목의 구토(仇討)는 일본식 표현으로 ‘복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의리적 구토> 연극에 영화 장면을 삽입한 “연쇄극” 형태이다. 연쇄극은 연극 장면중 무대에서 실제로 묘사하기 어렵거나 불가능한 장면을 영화로 촬영해 무대공연을 활용한 형태이다. 연쇄극은 한국여화가 발아하는 과정에서 생긴 과도기적 형식 이었지만 한구영화의 등장을 촉발하는 매개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영화의날‘은 <의리적수토>가 단성사에서 개봉된 날인 10월27일을 기념하여 제벙되었다.
1919 활동연쇄극의 탄생
일제강점기에 영화의 대중적 인기가 상승하자 신파극이 위협을 받게 되면서 신극좌, 김도산과 단성사의 박승필은 대응방법을 찿았다. 신파극에 영화를 접목해서 새로운 장르인 연쇄극을 제작하였다. 신파극단에서 활동하던 인물들 상당수가 영화계로 옮겨가면서 한국영화 제작 초기 단게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의리적 구토>는 서울 시내 풍경속의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함 으로서 비싼 입장료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를 계기로 단성사의 박승필은 조선영화 제작에 저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단성사의 초일 (初日) 관객이 물미듯이 드러와
<<매일신보>> 1919년 10월 2일자
개봉 당일 단성사의 만원사례을 기사로 다루었다. 단성사는 관객들로 연일 성황을 이루었 고 한 달 동안 장기공연을 하였다. 이후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이어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조선일보> 1928년 1월28일자
당시의 영화관의 광고이다. 우미관, 단성사,조선극장 광고이다.
<의리적 구토>의 필름은 현재 남아있지 않기에 어렸을 적에 단성사에서 <의리적 구토>를 본 것을 기록한 글로 연쇄극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과 영화가 연결되어 바뀌며 이때 호루라기 신호로 나누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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