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의 영화 제작과 상영
단성사는 무성영화 시절의 주옥같은 작품들, 즉 <황금광시대>, <카추샤><몬테크리스토 백작>, <파우스트> 등을 상영했다. 또한 상영에 그치지 않고, 자체 제작. 상영 배급을 했던 것이 다른 극장과 달랐다
<의리적 구토>는 일본인 촬영기사에 의해 촬영된 연쇄극이며, 이것의 흥행으로 1923년 박승필은 단성사 내에 영화 제작부를 만들어 서너 편의 무성영화를 제작했다. 1924년에 그들은 최초로 온전히 조선인 들의 힘으로 <장화홍련전>을 제작하였다. 조선키네마프로더션에 소속되어 영화제작을 하고 있던 나운규가 1927년 “아운규프로덕션”을 설립.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 바승필이 제정적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1924 순수 조선 영화
<장화홍련전>(1924) 은 순수 우리자본, 기술, 인력,으로 제작된 최초의 조선영화라는 의의를 가진다. 단성사에서10일간 성황리에 상영되었고, 1925년 순회 흥행을 하면사 인기를 끌었다. 1926년에 나운규가 감독, 출연한 <아리랑>은 일제하에서 민족의 아픔과 설음을 담은 작품이었다. 단성사에서 개봉한 첫날부터 유례없는 인기를 끌었고, 종로거리로 길게 줄을 서기 일쑤였다.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는 “ 목 놓아 우는 사람, 아리랑을 합창하는 사람, 심지어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는 사람까지 그야말로 감동의 소용돌이 였다.”“고 회고 했다. 변사의 임기웅변에 반일표현이 섞이기도 해 조선총독부에서 감시했다고 한다. <아리랑>은 2년 연속 상영이라는 흥행기록을 세웠으며, 영화감독이며 변사인 김영한<아리랑> 주제가를 편곡해 ” 민족의노래 아리랑“으로 확산 시키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단성사는 명실상부의 최고의 상설 영화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명우. 이필우 형제에 의해 만들어진 <춘향전>은 최초의 발성영화였다. 1935년 10월3일부터 13일 까지 10일간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발성영화는 한국영화의 오랜 숙원이어Tr, 이때부터 영화 화면에서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매일신보> 1924년 9월13일자
조선영화계에 처음보는 성황, 장화홍련전을 올린 단성사
외화상영
1920년대 경성의 조선인 영화관이었던 단성사, 우미관, 조선극장은 외화 특히 미국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1918년에 영화상설관으로 전환한 단성사는 일본의 콕카스, 다이카스 등과 같은 영화사로부터 외화공급을 받았다.
1923년 5월 모리스상회와의 계약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유니버살 영화를 확보 하면서 단성사는 비로서 자리를 잡게 된다.
당시에는 거리선전과 함께 영화의 내용을 심층적으로 소개하는 전단이 주된 홍보 수단이었다. 단성사의 주보와 팸플릿들은 양면 형식 혹은 여러
면의 책자 형식으로 배포되었다. 표지에는 영화스틸사진을 넣었고 내지에는 이번 주와 다음 주에 상영될 영화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었다.
團成社 週報, 일제 강점기 단성사 홍보 주보로 반으로 접어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영화 <영광 榮光>에 간
히 소개와 홍보글이 있다.
'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 > 5.서울역사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성사와 한국영화상영 100주년 (0) | 2019.03.09 |
---|---|
최초 한국영화 탄생 (0) | 2019.03.09 |
해방이후 단성사 (0) | 2019.03.09 |
최고 흥행작의 산실 단성사 (0) | 2019.03.09 |
단성사의 마지막 (0) | 2019.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