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설립된 단성사는 한국영화의 산실 역할을 한 서울의 대표적인 영화관이다. 특히 1919년에는 최초의 한국영화 <의리적 구토>가 단성사에서 상영되어 올해는 한국영화상영 10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또 이 영화가 개봉된 10월27일 “영화의 날”로 제정되어 기념해 오고 있다
이전까지 영화와 연극을 병행하던 단성사는 1918년 상설영화관으로 재개관하였고 종로 3가 네거리에서 자리를 굳게 지키며 영화 제작에도 힘썼다. 햅방이후 영화 제작의 부흥기를 맞아 다양한 한국영화를 상영하게 되는데 단성사의 제2의 전성기는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서편제> 등의 흥행에서 비롯 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대형 복합문화상영관의설립으로 위기를 맞았고 2012년 결국 문을 닫았다.
한국영화상영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많이 탄생시켰던 단성사의 역사와 함께 한국영화의 역사를 살펴본다.
단성사의 설립
1907년, 경성의 실업가였던 지명근,박태일, 주수영 등이 발기하여, 종로구 수은동(현재 종로구 묘동 56번지)에 단성사를 열었다. 당시에는 영화관이 아닌 창이나 무용공연 등이 열린 공연장이었다. 개관 이후 여러차례 소유자가 바뀌다가 1914년 일본이 실럽가 다무라의 위탁을 받아 광무대의 운영자 였던 박승필(1875~1932)이 운영하게 된다. 1918년 6월 부터는 박승필이 대관 형식으로 운영권을 인수해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단성사는 최초의 영화상설관으로 바귀게된다.
1907 단성사 주인 박승필
박승필은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 제작자이자 흥행가이다. 그는 1908년 9월부터 동대문의 전기회사에 부속된 활동 사진소 내에 만들어진 “광무대”의 운영을 맡게 된 것을 계기로 흥행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광무대는 설립이후 경영부진으로 크게 곤란을 겪고 있었지만, 그가 운영권을 인수한 후에는 빠르게 부진에서 벗어났다. 역시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단성사의 운영권까지 인수함으로써 그의 역량과 사업적 수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박승필이 운영한 1918년부터 1932년까지, 단성사는 초기 한국영화의 산실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는 1932년 1월4일 57세의 일기로 사망했으며, 그의 장례는 한국 최초의 극장장(劇場莊)인 단성사장으로 치러졌다. 박승필 사후 단성사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9년 6월, 일본인 이시바시료스케가 인수해 ‘대륙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나, 광복 후 1946년 1월에 단성사라는 이름을 다시 찿았다.
1934년 공사비 43,000원을 들여 신축한 단성사 건물 내부의 사진이다. 750석 규모의 3층 건물로 난방장치를 갖췄다.
'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 > 5.서울역사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효대교.동호대교 (0) | 2019.03.09 |
---|---|
동작대교 (0) | 2019.03.09 |
최초 한국영화 탄생 (0) | 2019.03.09 |
단성사의 제작과 상영 (0) | 2019.03.09 |
해방이후 단성사 (0) | 2019.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