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지)/4.일본군함도

미이케탄광 (만다겡)

동방박사님 2017. 8. 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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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케 탄광의 역사 [일본리플렛 내용]

미이케 탄광은 1496년에 한 농부가 석탄을 발견 했다는 전승이 있습니다. 1860년대부터 근대국가를 지향한 일본은 1873년 미이케탄광을 국영탄광으로 하였습니다. 이후 신규갱도를 조영하여, 석탄의 인양에 증기동력이 사용되는 동서양의 기술이 도입되어 근대화의 첫발을 내디었습니다. 동시에 산출된 석탄은 증기동력이나 제철에 사용되어 근대산업의 중요한 자원이 되었습니다. 1889년 미이케탄광은 미츠이가 경영을 시작하여 국영탄광시대부터  기술자였던 타쿠마의 진두지휘하에 한층 더 근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유럽의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캇타치갱, 미야노하라갱이 개갱되고 그 집대성으로 개갱된 것이 만다갱 입니다.

 

미이케 탄광과 만다갱

만다갱은 미이케탄광 시스템의 하나로서 가능해 졌습니다.  만다갱은 메이지시대에 오오우라갱, 나나우라갱, 캇다치갱.미야노하라  갱에 이어 1902년에 열려 1910년경에는 만다갱이나 미야노하라 갱에서 채굴된 석탄을 미이케 항까지 전용철도를 운반하여 미이케항에서 수출하는 석탄운반 시스템이 확립되었습니다. 그후 미이케탄광은 석탄화학 콤비나이트로서 발전하여, 채굴 구역이 아리아케해 해저까지 넓어져 미이케탄광은 본경적으로 해저탄광이 되었습니다. 

 

개관시간 : 09:30 ~17:00휴관일 : 매주월요릴 (휴일인경우 익일) 12월29일 ~1월3일TEL : 0968-57-9166 (만다스테이션)

         공개일이 변경되는 경우가 있으니공개시산을 확인하여 견학하시기 바랍니다

 

 

 

미쓰이는 어떤 기업인가?

1부

미쓰이는 전전 (戰前) 일본의 최대재벌 그룹이자 오늘 날에도 일본을 대표하는 6대기업 집단의  선두로 꼽힌다. 잡화상 미쓰이 다토시(1622~1694)가 1673년 에도 니혼바시에 에치고야 라는 포목점을 연 것이 기업의 효시이다. 미쓰이 가문은 정부와의 돈독한 관계에 힘입어  1876년 미쓰이 물산과 미쓰이은행, 1892년 미쓰이광산을 차례로 설립했다. 에치고야는 1904년 일불어 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백화점이 재탄생되었다.

1904년 구미를 시찰하고 돌아온 마스다다카시 미쓰이물산 사장의 귀국보고서에 기초해 미쓰이 재벌의 개편이 시작됐다.  핵심지주회사로서 미쓰이은행, 미쓰이물산, 미쓰이광산 등의 직게사업을 미롯해 미쓰이가의 사업을 지배하는 자본금 5,000만엔 의 미쓰이 합명을 설립한 것이다. 그러나 1925년 1월 뇌물 스캔들인 이른바 "지맨스 사건이 터지면서 수렁에 빠졌다. 일본이 독일의 무기회사인 지맨스 몰래 더 높은 수수료를 제의한 영국 버커스와 계약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지멘스 사건에 대한수사가 진전되면서 미쓰이물산이 비커스의 대리점으로서 해군측에 뇌물을 건넨 혐의가 포착 됐으며 이에 따라 미쓰이 물산의 중역들이 모두 퇴진하였다. 같은해 8월  마스다다카시가 미쓰이 합명 고문직에서  사임하고 경영수뇌인 이사장 자리에 미쓰이 단다쿠마가 취임했지만 미쓰이에 대한 세간의 감정은 매우 악화된 상태였다.

 

2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교전국들이 무역의 수요가 급증하자 미쓰이는 다른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사세를 대폭 신장시켰다. 제1차세계대전은 러일전쟁을 치르느라 대량의 외채를 모집했던 일본을 채무 불이행의 위기에서 건져 냈을 뿐아니라 비약적인 경제부흥으로 재벌들의 독점화까지 크게 진전시켰다. 미쓰이를 필두로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종합재벌은 지주회사인 본사 (미쓰이 합명, 미쓰이 합자, 스미토모합자 등)를 정점으로 생산, 유통,금융에 이르는 거의 전산업분야에 자회사를 두는 다각적 콘체른 시쓰템을 확립했다. 산하회사의 인사 자금 원재료조달, 제품 판매 등의 기본정책으 본사를 중심으로 한 수직적 통제원리를 따랐다.미쓰이의 경우단다쿠마가 이를 진두지휘 했다.그는 일본 경제연맹 장과 공업클럽 이사장을 겸하면서 일본재계의 대부가 됐다. 1931년 만주사변에 따른 군수경기등의 부활 등으로 일본 재벌들은 다시 한번 호황을 누렸다. 미쓰이 역시 사업범위를 더욱 확장하여 황금시대를 맞았다. 반면 당시 일본 사회는 실업자 대량 발생, 연이은 흉작으로 인한 농촌 황폐하 등 심각한 사회 불안을 겪고 있었다. 이와함게 반 재벌정서가 강해지고 파시즘적 국가개조를 주장하는 군부 소장파와 민간 우익단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미쓰이는 특히 표적이 됐다.당시 이누카이 스요시 내각이 공황 탈출을 명분으로 세계 화폐제도의 대세였던 금본위제에서 이탈하여 금 수츨 금지조치를 단행 했는데, 이를 에견한 미스이가 미리 엔화를 처분하고 달러를 사들이는 환투기 행각을 벌여 거액의 이득을 챙겼기 때문이다. 재벌과 정치권의 유착부패에 대한 국민의 비판은 강해졌다.

 

3부

그런 상황에서 1932년 3월4일 미쓰이 최고경영자 단다쿠마가 암살됐다. 오전11시쯤 평소처럼 자동차를 타고 미쓰이 본사에 도착해 현관으로 향할때 극우파 테러단체 혈맹단 소고의 한 청년이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한것이다. 1932년에는 이누카이 총리가 관저에서 대낮에 해군 청년장교들에 피살당하는 5.15사건까지 벌어졌다. 이후 미쓰이는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고심했다. 자신들이 탐욕스럽게 이윤추구만 매달리지 않으며 재벌도 국가정책에 협력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본격적인 우익세력 및 군부와 유착했다. 육사생도를 만주로 시찰보내고 우익단체 관계자들은 만주 국경으로 이주시키는 비용도 부담했다. 또 우익의 거물 기타 잇키에게 매년 2만 엔을 기부하면서 극우파의 반 미쓰이 행동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단타쿠마의 뒤를 이은 최고경영자 이케다 시케아키는 이 같은 유착을 주도하면서 퇴임 직후인 1937년 운신의 폭을 넓혀 일본은행 총재에 취임햇고 1938년에는 급기야 대장성겸 상공상에 입각했다 (그는 패전뒤 A급 전범용의자로 지목됐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미쓰이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이래  병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