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기독교유산 (2016~현재) <여행> 347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2025.5.19(일)

잡혀온 천주교인들은 해미읍성에 있는 감옥 두곳에 가두어 놓았다가 처형하였다.처형된 자들에 대한 자료는 교회측기록 67명 관측기록 65명과 무명순교자로 기록된 47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밖에 이름모를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은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하였는데 이송사실과 이송자들에 대한 이름은 기록에 남겨져 있다고 한다.해미읍성이나 여숫골에서 처형된 자들의 대부분은 홍성이나 공주로 이송되지 못한 서민층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다.또한 1866년 10월 병인양요 이후에는 먼저 처형한 뒤에 조정에 보고하는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이 내려진터라 천주교 신자들을 ..

해미 순교자 국제성지 (해미골) - 2025.5.19(일)

해미국제성지 종파 로마 가톨릭교회소속 관구 서울관구소속 교구 천주교 대전교구소재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설립일 2003년 6월 17일웹사이트 http://www.haemi.or.kr/ 해미국제성지 전경 노천 성당과 해미 순교탑해미국제성지(海美國際聖地, 영어: Haemi Sanctuarium Internationale)는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에 위치한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 순교 성지이다. 성지가 위치한 일대는 '여숫골'이라고도 불린다. 1866년 병인박해 때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천주교도 색출과 처벌의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충청도와 경기도 평택에 이르는 해미현 관아 관할지역에서 붙잡힌 천주교도들은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는데, 1872년까지 6년간 이어진 박해기간 동안에 붙..

서울 북촌 가회동 성당 (2025-01-17 (금)

가회동성당 嘉會洞聖堂Gahoe-dong Catholic Church종파 로마 가톨릭교회위치 국가 대한민국소속 관구 서울관구소속 교구 천주교 서울대교구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57설립일 1949년 9월 17일주보성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웹사이트 가회동성당가회동성당(嘉會洞聖堂)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 위치한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의 성당이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촌로 57이다. 가회동성당은 지하 3층 및 지상 3층, 대지면적 1150m2, 연면적 3738m2 규모로 지어졌다. 한국 전통의 한옥과 현대 성당 건물인 양옥이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로, 본 성당 건물은 양옥으로, 들어가는 입구 건물은 한옥으로 되어 있어 조화를 이룬다. 2016년에는 그해 처음으로 시작된 '서울 우수한옥..

서울 새문안교회 역사관(2)

1904~1919  복음의 능력, 조선을 일깨우다 : 뿌리내려 발전하는 새문안새문안은 1910년 현 위치에 벽돌 예배당을 세우고 20여 교회를 개척한 어머니교회로서 교회 연합에 힘썼다. 언더우드는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해 성서를 완역하고(1910) 한국교회를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웠으며, 연희 전문학교를 설립하고 1916년에 별세하였다. 조선 복음화의 꿈은 부인 호던여사와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언더우드 별세 후 경신학교장 쿤스 선교사가 부임해 교회를 정비하고 발전 시켰다.

서울 새문안교회 역사관(1) - 2024. 10. 16(수). 방문

~1886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 새문안이 있기까지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시는데 특별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거 동방에는 한민족을 하나님을 믿는 민족으로 세우셨다. 17세기에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왔다. 정부는 천주교를 박해하여 수천 명의 순교ㅏ즐 냈다. 19세기 후반에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의 선경번역 선교로 소수의 조선 청년들이 복음을 믿어 자발적으로 성경 번역을 돕고 전파해 화해도 소래에는 자생적 교횔 세웠다

성거산 성지 (천주교 대전교구) 2024-06-08 (토)

천안성거산 성지 (소학골 교우촌과 순교자묘지 안내)주소:  31058 충남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위례산길 394경기, 충북, 충남 삼도 접도구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중에서 보기드믄 해발 579m 차령산맥줄기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천혜의 성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충청남도 내포 교회가 튼 타격을 받고 1811-1813년에도 연이어 박해가 일어나면서 내포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인근의 충청도와 경기도, 멀리는 서울과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이렇게 박해를 피해 이주하기 시작한 신자들로 인하여 7개의 교우촌이 주변에 형성되었고 그중에서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형성된 곳이 바로 '소학골' 이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부터 1871년 무렵까지 순교사가 계속되었..

문익환 통일의 집 (2024-04-13)

문익환 문익환文益煥 /출생 1918년 6월 1일/중화민국 지린성 룽징시 밍둥촌(明東村)/사망 1994년 1월 18일(75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국적 대한민국/직업 개신교 목사/사회운동가/시인/학력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 신학석사 종교 한국기독교장로회/필명 호는 만춘/활동기간 1947년 ~ 1994년/장르 시문학/부모 문재린(부), 김신묵(모) 배우자 박용길/자녀 문호근(장남), 문영금(딸)/문의근(차남), 문성근(3남)/친지 문동환(동생), 문영환(동생)/문은희 여동생) 문익환(文益煥 한어병음: wén yì huàn) 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은 중화민국 출생의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시인이었다. 장준하, 송몽규, 시인 윤동주와 절친한 것으로도 유명하..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2024-04-13)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봉로 159 1939년 설립자인 서울 승동장로교회의 노석 김대현 장로가 사재를 헌금하여 설립하였지만 장공 김재준 목사가 실질적으로 설립을 주도했다. 1940년 4월 19일에 동 교회에서 개교하였고 제1대 학장 겸 재단 이사장으로 김대현 장로가 선출되었다. 한신대학교의 출발은 조선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1947년 대한민국 최초의 신학대학으로 정규대학 인가, 1951년에 옛 이름이자 본말에 해당되는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이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다. 1958년에 수유리 캠퍼스(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사회혁신경영대학원)를 열었다. 민주화와 인권, 인문학을 위해 헌신한 진보대학으로, 유신독재가 선포된 직후인 1973년에는 삭발투쟁으..

2024-01-13 (토) 절두산 순교성지 답사

절두산 순교성지는?조선시대부터 양화나루 잠두봉이라 불리며, 한강변의 명승지로 불리던 이곳은 병인박해(1866)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들의 머리가 잘려 숨졌다고 하여 현재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고 있다.한국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님의 순교가 있고, 100년 후인 1946년 전국단위의 한국천주교순교자헌양회가 조직되어,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 지역을 성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고, 병인순교 100년이 되던 1967년 비로서 성당과 박물이 준공되었다. 1997년, 우리 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 399호 (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유적)로 지정되었다.2018년9월'천주교 서울 순례길이 교황청 공식승인을 받은 세계 국제순례지가 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문화유..

포천 광암 이벽 유적지 / 광암 이벽 기념성당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화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포천 광암 이벽 전시관

이곳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한국천주교화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자생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한 주역인 이벽李蘗(1754~1785)의 생가이자 순교지를 재현한 곳으로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 541-22번지(구 내천면 화현리 신기동)에 위치하고 있다. 1750년대 당시에는' 내촌면(內村面)'을 '안마을'  화현리 (花峴里)'를 꽃마루' 신기동(新基洞) 을 '새터' 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서 탄생하였음은 이벽전과 이격장군의 후손 이응우씨등의 전승과 증언. 부친 이부만의 집을 4대째 관리하던 관리인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 확인되었다.이벽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광암(曠庵), 자는 덕조(德璪)이며 세례명은 요한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이부만(李禣萬)이과 어머니 청주한씨 사이..

제주순례길 1, 2, 4코스(3) 3/27

역사의 현장 (3)장로교 분열 : 1953년. 전국적으로 장로교회분열이 일어나 제주장로교회도 기장과 에장으로 분열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도 모교회인 서부교회(제주성내교회가 1942년 동부교회를 분립한 후 서부교회라 칭함)도 기장은 성내교회로, 예장은 성안교회로 개칭하였다.빚진자의 사명 도약하는 제주교회 : 장로교 분열의 시련을 딛고 제주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한다. 기도와 협력으로 아픔을 극복하는 가운데 한국전쟁으로 제주도로 피난왔던 많은 교인들이 제주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킨다.1951년 12월31일 이북에서 제주도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모여 교회를 세울것을 결의하고 이듬해 1월6일 김린모 장로의 설교로 제주영락교회는 첫 예배를 드린다.제주중앙감리교회는 1951년 제주시 일도 1동 인근의 피난촌이었던 동..

모슬포교회 (이기풍기념관) 3/27

모슬포교회모슬포교회는 1909년 9월1일 이기풍선교사에 의해 세워졌으며, 1914년 부임한 윤식명목사에 의해 초석이 다져졌다. 윤목사는 1918년 전도여행중 태을 교도들에게 폭행을 당해 왼쪽팔을 잃었지만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었다. 조남수목사도 1947~1960년 까지 모슬포교회를 시무하였다. 한국기독교 장로교 총회는 2006년 모슬포교회를 역사유적교회로 지정했다.

제주순례실1, 2, 4코스 (2) 3/27, 역사현장

제주도의 복음전파 제주도의 복음전파는 성령대부흥운동(1903~1910)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밀본 자문관이 한국의 각 부처에 상주함으로써 자주권을 잃었고 을사늑약(1905), 정미7조약(1907)으로 조선이 독립국가의 지위를 상실했던 시기였다. 국가의 운명이 마지막으로 향해가던 시기에 성령대부흥운동은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암흑의 시기에 제주도에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을 품게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