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미술
1897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전환되면서 궁중미술에도 변화가 생겼다. 규범성이 강하고, 보수성이 짙은 궁중미술의 특성상 대하네 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기본적으로는 조선 후기 이래로 전해져 오던 전통이 지속됐지만, 황제가 된 고종의 위상에 맞춰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 용포(龍袍)와 의장물이 이전과 기록화에 새로이 등ㄹ장한 등 달라진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적으로 어렵던 당시의 상황 속에 황권을 강화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반영됐다. 본래 궁중 장식화는 본격적인 '그림"이라기보다 궁궐의 치장을 위한 일종의 "물건"으로 까지 여겨졌기 때문에 그 변화가 극히 드물게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고종 시기에 이르러서는 서양 및 일본 미술 등의 사실적이고도 세밀한 화풍을 수용, 변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면모는 궁중회화 이상으로 보수성이 강한 당시의 불교회화에도 나타나은 부분으로,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태극과 자두 꽃 문양이 장식된 신식 군복 차림의 호법신(護法神)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양상은 모두 대한 제국 궁중미술의 시차 없는 저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근대화의 일환으로서 대표적인 서구의 신식문물인 사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1880년대 한국에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로 어진이나 기록화 등 궁중회화의 상당 부분은 사진으로 대체되었다. 이는 사진이 특유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갖춘 새로운 장르로서가 아니라 극사 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회화를 보완하거나 혹은 대체하는 차원에서 인식, 수용됐음을 알려준다. 즉 당시의 초상사진이 초상화와의 뚜렷한 관련성 속에 회화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받아들이면서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또 반대로 특유의 사실성이 회화에 자극을 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황후의 초상, 가족 초상 등 그간 유교적인 관념 아래 등장할 수 없었던 대상이 사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점은 달라진 시대상과 근대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고종 태황제
고종이 순종에게 황제권을 양위한후 태황제 시기의 대표적인 사진이다. 대지 상단에 금색의 오얏골 문양이 하단에 " 경성 이타와 카나에 삼가 촬영하다,라고 압인 돼 있다. 1909년 순종황제와 황후의 사진을 촬영한 시기에 같이 촬영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은 1907년 8월이후 제정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태황제의 예복을 착용하고 있다. 군모와 더블 브레스티드 상의에 소매는 넓고 수장에는 군대의 계급을 상징하는 八자형 장식 대신 자두 꽃과 화려한 잎 문양이 장식돼 있다. 가슴에는 고종 탄신 50주년 기념장 (통천관. 1901) 고종 등극 40주년 및 망 육순 기념장 (1902). 황태자 전하 가례 기념장 (1907.1.24 비둘기 한쌍) 등이 부착되어 있다.
대원수복을 입은 고종 황제와 원수복을 입은 황태자 순종
1899년 6월 원수부 창설 이후 서구식 부국강병의 상징인 육군 대례복을 착용한 시기에 촬영된 대한제국의 변화를 가시 하환 대표적인 사진이다. 고종황제는 군 통수권자인 대원수 예복 차림을, 순종 황태자는 원수복 차림을 하고 있다. 1901년 잡지 [한반도]에 실린 것으로 보아 사진의 촬영시기는 1900년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와 황태자는 프로이센식 투구형 모자를 쓰고 있고 앞 중심에서 매듭단추가 여며지고 좌우 가슴에 걸쳐 장식선이 늘어져 있으며, 어깨의 견장을 단 화려한 늑골복 차림을 하고 있다. 군복의 계급을 나타내는 소매 끝의 수장 수가 대원수 황제는 11줄, 원수 황태자는 10줄이다. 촬영자는 청일 전쟁기부터 국내에 들어와 사진관 영업을 하다가 통감부 시기에 황실 관련 사진을 많이 촬영했던 무라카미 텐신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하단에 " 한국 폐하와 황태자 저하"라고 적어 판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러일 전쟁기 전후 국내에 들어온 서양인 들의 수집품이나 조선 관련 서적 , 사진엽서 등으로 다수 복제, 유포된 대표적 사진이다.
대원수 예복을 입은 고종황제
무라카미 텐신 ㅣ 1900년경 ㅣ 황철(黃鐵) 수집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황철의 사진집에 수록된 대한제국 황제로서의 고종 사진이다. 황철이 남긴 사진첩 3권 중에는 1883년 이후 그가 촬영한 사진들이 수록돼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이 촬영된 1900년 경 황철은 일본 망명 중이었고 1906년에야 일본 외무성을 통해 사면령을 받아 재귀국하기 때문에 이 사진을 직접 촬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순종 황태자와 함께 촬영한 사진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관에서 발행됐기 때문에 이 사진도 무라카미 텐신이 촬영할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사진 우측 계단 상단에 신이 놓여 있는 점은 다른 복제 인쇄물 사진들에서는 보이지 않아 추후 검토가 필요하다.
순종 황제 인물상
김은호 ㅣ 1923년 종이에 먹 ㅣ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은호 (1892~1979)가 그린 대한제국의 두번째 황제 순종(1874~1926)의 초상화 초본이다. 현재 이를 기초로 그린 정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김은호는 이미 1916년 익선관에 황룡포를 입은 순 종어진을 그렸었다. 이 초본에서는 순종은 육군대장복 차림인데 조선 황실 촉탁 사진사였던 이와타 카나에가 1909년경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1905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대한제국 황제의 게급이 대원수에서 육군대장으로 낮아지면서 소매 人자 표식도 11줄ㅇ서 9줄로 줄었다. 얼굴은 사진처럼 실감 나게 묘사했고 몸체는 굵은 선을 사용하여 윤곽만 그렸다. 오른편에는 '계해 중절이 당근김으호근사"라고 쓰고 도장 2개를 찍었다. 고려대학교에도 이와 비슷한 유지초본이 있다.
순종황제
이와타 가나에. 1909년 ㅣ 서울역사박물관소장
순종 36세인 1909년 사진으로 고종의 황제권 양위 이후 황제가 된 순종이 육군대장복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1898년부터 경성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일본인 사진사 이와타 카나에가 촬영했다. 테이블 위에 입전모 (立前毛)가 장식된 군모를 두고 왼손에 패검을 쥔 채 의자에 앉은 자세, 발이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클로즈업하여 인물에 보다 집중된 화면 등 메이지 천황의 어진영의 도상과 유사점을 보인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이 대원수 복장이라면 순종은 1906년 개정된 육군 복장 규칙에 따라 소매에 八자형 장식이 9개인 육군대장 복식을 입고 있더. 가슴에는 ㄷ대훈 위금 척서 성훈장을 비롯한 외국 부장과 기념장을 달고 있는 목에는 메이지 천황의 하사품인 대훈 위국 화장 경식을 드리우고 있다. 순종 승하 이후 1928년 성원 전에 봉안할 어진을 김은호가 모사할 당시에 기유 사진 본 즉 1909년 촬영된 이 사진을 범본으로 했다.
1907년 순종의 황제 즉위 이후 촬영된 사진이다. 세 장의 사진은 모두 대지의 재질과 크기, 문양이 같고 무라카미 텐신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식 자 수병 품을 배경으로 오른쪽 테이블을 두고 선체로 촬영한 순종과 영친왕의 사진은 같은 날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순종의 목에 1907년 10월 일본 황태지 방한 때 받은 메이지 천황의 하사품인 대훈 위국화 장경식이 걸려있는 점, 영친왕이 12월 5일 일본 유학을 떠난 점을 미루어볼 때
이 사진은 1907년 10월 17일 이후부터 12월 5일 사이에 촬영된 것이다. 무라카미 덴신은 당시 고종 , 순종, 순종비, 영친왕을 모두 단독 초상으로 촬영했다. 반면 순종의 사진 중 배경이 없는 사진은 육군대장 복식을 입고 있으나 대훈 위국 화장 경식을 걸고 있지 않고 수염도 길어 1907년 8월 즉위 이후부터 10월 일본 황태자 방문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세 사진은 순종 즉위 이후 황실 사진사 역할이 김규진에서 일본인 사진사로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대표젹 예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
19세기 중엽 이후 서구에서는 사진과 인쇄 기술의 발달로 이미지를 담은 출판물과 신문, 사진엽서와 같은 매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매체 속의 이미지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의 확산과 제국의 운영을 위한 정보의 확산, 나 아가 엽서, 상품카드 수집과 같은 소소한 취미생활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한국에 관한 정보를 취득하기 위한 백과사전적 이미지를 많이 활용했다면, 점차 제국주의를 향한 이권과 갈등의 충돌이 동아시아 전역에 더욱 첨예해지면서 정치, 경제적 측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자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생성되었다. 대한제국의 수립과 파리 만국박람회의 참여,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순종의 즉위에서 한일 강제병합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대사의 모든 장면은 대부분 타자의 손에 의해 생성되어 소비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결정화 괴고 정형화되어 갔다.
고종황제
프랑스, 1904년, 1월 29일 자, 이돈수 소장
기사에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공식 초상화이다. 오늘 자에 실린 본 지 삽화는 조셉드 라 네지에르가 작년 (1903년)에 서울에서 그린 초상화이다. 드라 네지에르 장 아잘베르의 기사를 통해 본지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듯이 1902년 안남(베트남) 황제의 초상화도 공식적으로 제작한 바 있다. 지금 소개하는 초상화는 대한제국 황제의 옥좌를 배경으로 한다. 황제의 모습은 다섯 개의 성상과 한국의 강 숲 그리고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 그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울러 하늘의 왼쪽에는 태양이 오른쪽에는 달이 빛나고 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고종 황제를 그렸던 조셉 드라 네지 에르가 그린 순종황제 초상이다. 그림의 우측 하단 "서울"이란 표기 밑에는 그의 서명을 찾아 볼 수 있다.
"황위는 이토 히로부미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황태자에게 이양됐다. 퇴위가 이뤄진 지난 주말쯤 서울에서 심각한 폭동이 발생했다.라는 기사와 함께 고종, 즉전 대한제국 황제의 폐위 모습이 정 중앙에 실렸다. 상단 왼쪽의 삽화에 " 종말의 시작 : 대한제국의 황제와 황후에게 일본의 보호령 선고" 란 설명이. 그 옆에는 "서울의 궁 안에 있는 황제의 공식 초상화: 프랑스 화가 작품". 마지막으로 맨 아래 삽화에는 " 유럽과 미국 종군기자를 접견하는 황제: 특파원들의 고종황제 일현(1904년) 이란 설명이 덧붙여 있다.
덕수궁에서 구 일본 소네통감의 부인과 함께 서 있는 순 현황 귀비의 모습을 담았다. 기사에는 순 현황 귀비를 " 사실상 포로가 되어버린 왕비"로 소개하며 " 엄빈는 시녀였다. 조선의 황제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첫째 부인은 죽고 엄비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자 그녀는 왕비가 되었다. 일본의 조선 합병 이후 조선의 모든 황족은 척결되고, 이제 그들은 궁의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순종의 장례행렬을 컬러 화보로 그린 프랑스 화보 신문이다
고종의 장례식에 등장한 죽안마의 모습이 그려졌다. 죽안마는 영혼을 하늘로 봉송하기 위한 인조 말을 말한다. 신문에는 조선 황제의 장례식 장면으로 망자가 하늘나라로 타고 갈 거대한 말을 앞세우고 간다"는 설명이 덧붙어 있다.
고종황제의 국장 사진들을 수록한 프랑스 신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지는 장면과 안중근 의사가 제압당하는 장면을 표지에 실은 이탈리아 화보 주간지이다.
조선인의 잔혹한 피의 처형- 프랑스 1904년 11월 18일
서울 특파원이 제공한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수채화로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사격연습에서 총상을 확인하기 위해 다가오는 일본 장교들의 모습을 그렸다. 1904년 (광무 8) 9월 21일에 마포 공덕리에서 일본군 헌병들이 군용 철도 방해죄로 의병 김성삼, 김춘근, 안순서 등을 포살 하는 장면이다. 기사에는 "철도 파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3명의 한국인이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린 뒤 총격을 받았다."라고 실려있다. 한국 정부는 이들의 공훈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하였다.
기사에는 "왕비를 여러 번 접견하였다는 한 외교관 부인에 의하면 45세의 왕비는 초상화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한다. 최근 조선의 수도은 마치 중세 연대기 작가의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참혹하고 잔인한 사건의 현장이다. 시체는 궁 밖에서 태워지고 재는 사방으로 뿌려졌다."라는 내용이 실렸다.
왼쪽 위의 사진부터 "황룡포를 입은 "대한제국 황제 사진." 서양 제복을 입은 이 척 황태자" 전통복식을 한 이척 황태자 모습" 이란 사진 설명이 붙어있다. 가장 아래쪽에 실린 사진은 " 서울 뽕나무 고궁(황학정)에서 활쏘기를 하는 궁사들" 이란 설명을 덧 붙여 놓았다.
"조선의 소식"이란 제목 아래 청일전쟁 당시 조선의 모습을 표지 사진과 기사로 소상히 묘사했다 기사에는 1. 조선의 여성들. 2. 조선의 군인들. 3. 최신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고종의 초상회와 관리"라는 삽화의 설명과 더불어"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혈투인 것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전권대신 민영의 일행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공식 접견 - 미국 1993년 9월 29일 자
1883년 9월 18일 미국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조. 미 수호조약 체결 1882년 5월 22일)과 외교관계 수립(1883년 5월 13일)을 기념하여 조선 정부가 파견한 정사 민영익, 부사 홍영식 등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일행이 고종황제의 국서를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하는 행사가 열렸다.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은 국무장관 등과 접견실에서 조선 보빙사 일행을 맞으려고 서 있고, 1883년 전권대신 민영의 일행이 체스터 아더 대통령의 알현에 앞서 큰절로 인사하는 장면을 담았다. 이 진귀한 모습을 신비롭게 여긴 미국 뉴욕의 언론이 삽화로 그린 것이다. 아더 대통령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기사에는 "과연 어떤 여행자가 루스벨트 양처럼 대한제국 황제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고종황제는 이 같은 행동이 한국의 오랜 관습에 어긋남에도 루스벨트 양의 알현을 허락하였고, 그녀를 초대한 식사자리에는 황태자 순종과 다른 왕자들, 대신 및 장군들도 함께하였다"라고 언급돼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모습을 담고 있다.
대한제국 선포 후 주변 강국에 의해 속박된 나라가 아닌, 당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1900년 프랑스의 초청을 받아 대한제국은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이때 대부분 프랑스 신문들은 한국관 화보나 사진을 실지 않았다 그러나 LE PETIT JOUMAL8면 중 중간 페이지 전면에 한국관 화보집을 실었다. 경복궁 근정전을 축소해 한국판을 꾸민 모습이다.
좌측 위쪽으로 주한 프랑스 공사를 지냈던 콜랭드 플랑시와 파리 한국관 전시기획자였던 민영찬, 그 아래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위원회 명예위원장이었던 이인영과 파리만국박람회 한국위원회 회원인 M.Ch 알레베크가 소개되어 있다. 이들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민영찬 閔泳瓚 (1974~1948)은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민영환의 동생이다.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특파대사로 파견됐고, 1902년 주 프랑스 공사에 임명됐다. 1903년에는 스위스에서 열린 적십자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외교분야에도 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 사진은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직함이 이사진의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1889년 2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을 개설한 미국 워싱턴 D.C. 로건 서클에 위치한 건물을 촬영한 사진으로 제작한 엽서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전까지 16년간 활발한 외교활동의 중심무대로 쓰인 외교 공간이었다.
흥영 군 이우( 1912~1945)의 초상화로 금관조복을 입고 호피가 깔린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이우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1877~1955)의 둘째 아들인데 흥선대원군의 장손인 이준용 (1870~1917)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우는 1922년 일본에 보내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소속으로 중국에서 복무했으며,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히로시마에서 근무하던 중 원폭으로 사망했다. 금관조복은 조선시대 문무백관이나 국가의 경사나 중요한 의식 때 입었다. 금관에는 다섯 개의 세로줄이 있어 1품 지위의 오랑관이 해당한다. 이우는 의자에 단정하게 앉은 채 양손에는 상아로 만든 홀을 들고 있다. 1933년 자신의 거처인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
1907년 순종 즉위 이후 황실 사진 관레상에서 가장 큰 변화는 근대적 가족 이미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순정효황후 (1884~1966)는 윤택영 (1876~1935)의 딸로 1904년에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가 사망하자 1906년 12월에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순종과 가례를 올렸고, 1907년 7월에 순종이 황제로 되면서 황후로 책봉됐다, 1907년 10월 일본 황태자의 방문 이후 황실사진을 도 맡았던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은 순종과 순종비, 영친왕과 고종태황제의 가족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들은 단독 초상의 형태로 촬영했으나 1908년 이후 각종 잡지나 엽서 등을 통해 가족이나 일부일처제의 근대적 부부의 모습으로 편집되어 유포됨으로써 통치를 정당화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이용됐다. 이후 양장을 한 고종과 엄비도 함께 부부의 모습읋 편집, 유포된다거나 수종과 순종비의 사진이 1907년 즉위 후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에 집중된 것은 통감부가 순종의 즉위와 통감정치를 가시화하고 문명화된 이미지의 일례로 사진을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제국 황실의 가족사진으로 구성한 존영이다. 왼쪽 위부터 순종, 영친왕, 영친왕비, 고종 아래줄 왼쪽부터 순정효황후, 이우 순헌황귀비 엄 씨의 모습니다. 황태손 이구(1931~2005)의 탄생을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정효황후
(니 와타 가나에 1909)
고관과 원로대신들
1908년 9월 8일 고종 탄일을 기념하여 열린 기로연 후에 고종이 기로소 대신들과 경운궁 준명당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왼쪽으로부터 이정로, 심상한, 김윤식, 김성근, 이용원, 고종, 김병익. 민종묵, 서정순, 이주영, 김영전이다.
1907년 10월 16일부터 20일 사이에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케히토 친왕과 요시히토 황태자(이후 다이쇼 천황) 일행의 한국 방문 기념 사진첩이다. 요시히토 황태자는 에이지 천황을 대신해 한일 신협약 체결과 순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영친왕과 순종은 인천에 나가 이들을 방문했다. 사진가 무라카미는 10월 17일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명을 받고 18일 오전 남산 통감관저에 가서 일본 황태자, 순종, 영친왕, 그리고 타케히토 친왕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어 창덕궁, 경복궁 경회루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어 창덕궁, 경복궁 경회루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 기록이 계기가 되어 무라카미는 이후 황실 사진을 여러 차례 촬영하게 된다.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순종의 서북지방(평안도) 순행 巡幸을 기록한 사진첩이다. 창덕궁 인정전 전경 장면에서 시작하여 의주, 평양, 개성 등지를 둘러보고 남대문에 도착, 2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앞에서 배종한 신하들과 이토 히로부미 통감과 기념촬영, 2월 6일 순종이 예방한 통감관저 사진까지 총 6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순종의 순행을 기록한 것이나 2장 이외에는 순종의 모습을 정면으로 촬영한 사진이 없고 대부분 이토 히로부미와 배종한 관리들, 순종의 행렬을 환영하기 위해 모인 인파들, 일장기와 태극기의 교차 계양된 장면 등이 주를 이루어 순종의 순행을 기록한 것이기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정치를 가시화하는데 초점이 주어진 사진첩이다. 당시 운행한 궁정 열차에 3명의 사진사와 2명의 무라사키 사진관 점원이 동행하여 사진기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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