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8.국립현대미술관

대한제국의 미술-그림

동방박사님 2019. 2. 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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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통상조약체결기념연회도

 

1883년 (고종 20년)에 체결된 조일 통상조약을 기념한 연회의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12명이 둘러앉은 큰 테이블에 서양식 식기와 음식이 놓여 있다. 그림 왼편에 혼자 앉은 이가 조선 측 전권대신인 민영목이고, 그를 기준으로 왼편이 외교 고문인 묄렌도르프, 오른쪽이 일본 측 전권공사 다게조에이다. 조선 관리들은 관복과 전복 및 도포 차림이며, 일본식 의상을 입은 일본인과 중국식 의상을 착용한 여성, 그리고 조선 여성도 1명이 앉아 있다. 식탁 중앙에는 꽃을 꽂은 꽃병과 고임 음식이 놓였고 개인마다 생선모양의 음식과 나이프, 스푼, 술잔, 양념통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개화기 조선의 시대상과 서양식 연회 문화의 유입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도화서 화원 안중식이 그린 그림이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소장) 

 

예술로서의 회화 - 예술가로서의 화가

고종, 순종시기에는 도화서가 해체됨과 동시에 다양한 외부의 화가들이 궁중회화에 제작에 참여하게 됐다. 이들은 전문가로, 록은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기 시작했는데, 서구와 일본으로부터 '미술"의 개념이 전해지게 된 사실도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과거와 같은 익명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궁중회화들이 제작되기 시자했으며, 화원들과 달리 작가의식을 토대로 볻 창작적인 차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그들은 1920년경 제작된 창덕궁 벽화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존 궁중회화의 양식에 서양화풍과 일본 화풍을 가미한 시각적인 사실과 장식성이 강화된 그림을 선보이는 등 변화를 모색했다. 이것이 이후 화가들의 성격 및 화단 전체의 변화에 있어 전환점이 되었기에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또한 이들이 궁중회화의 제작보다 실력을 정교하게 가다듬고, 명성을 쌓으며 기성화가로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근대회화에 있어 대한 제국의 역할이 중요했음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 안중식, 조석진, 김규진에 의해 설립된 서화미술회와 서화연구회에서 양성된 화가들은 이후 근대 한구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모란도 牡丹圖

19세기말 비단에 채색, 4폭 병풍.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은 화려한 조형미를 지녔기에 궁중장식화로 많이 그려졌다. 특히 병풍으로 제작하여 궁궐 안의 공간을 치장하거나 꾸미는 기능을 했다. 또한 궁중의 길례, 흉례, 가례 등의 행사에도 왕실의 장엄한 격조를 갖춘 도상으로 활용됐다. 궁중 양식의 모란도에는 대부분 3-4그루의 줄기에 화사하게 만개한 꽃과 잎이 좌우대칭으로 풍성하게 배열돼 있다. 아래족은 지면을 표시한 위에 괴석을 배치했다. 모란곷은 일정한 정형에 다라 상면과 측면등 다양한 시점에서 본 형태로 그려져 있다. 밀도있는 구성, 흐트러짐없는 형태, 선명한 색감 등에서 조선말기 궁중양식 모란도 위 전형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책가도 冊架圖

19세기 비단 채색 2포 병풍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운현궁에 전해오는 한쌍을 이루는두 폭짜리 책가도 가운데 하나이다. 아래위 3단 서가에는 폭압에 싼 서책과 진귀한 기물들이 놓여있다. 서가의 각 칸마다 사 서낭 향으로 공간을 구획한 투시법이 적용됐다. 기물 묘사는 매우 사실적이며 정교하여 책가도 전문 화원화가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 책가도와 짝을 이루는 책가도에는"수 진보작"이라는 네 글자가 적힌 소리 모양 술잔이 있다. 수진보 작은 1865년 (고종 2년) 경복궁  둥건 공사 중 셕결루 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술잔이 담긴 그릇의 뚜껑에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는 시가 적혔다. 고종은 이를 매우 상서로운 일로 여겨 신하들에게 글을 받아 첩을 만들게 했다.

 

 

 

조경 단비 각재실 도형

조경단과 주변의 지형을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조경단은 전주 건지산 중턱에 위치한 전주 이 씨의 시조 이한의 묘소로 1899년 (광무 3) 7월에 영건 되었다. 묘소 좌우에 조경단과 비각을 그렸는데, 보이지 않는 비각의 앞모습과 비석의 모양 및 치수는 다른 종이에 그려 붙여 놓았다. 묘역 위쪽의 산등성이에 있는 재실도 화면 안에 들었다. 한 폭의 실경산수화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현실감이 있는 투시법과 근대적인 시점이 반영됐다.

조경단의 영건을 마친 뒤 이 지역을 살펴본 재신들이 그 결과를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화원을 시켜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특정 지역에 건물을 짓거나 정비사업을 마친 뒤 그 주변의 도형을 그려 올리는 일은 화원화가 들의 임무였다.

 

 

 

전주 건지산 도형

전주에 위치한 건지산 乾止山의 형세를 그린 그림이다. 전주 이 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역을 중심으로 건지산의 전경 全景을 조망한 시점으로 그렸다. 경물을 아래로 뉘어서 그린 전통적인 지도식 표현도 있지만, 건지산 일대의 능선과 물길, 주요 명소 등 지리적 현황을 충실히 재현한 회화식 지도에 가깝다. 건지산 일대는 녹색과 황색으로 채색하여 강조했고, 주요 장소에는 칸을 구획하여 지명을 서 넣었다. 화면의 공간 구성과 투시법, 서양 안료의 사용, 산수 묘사에서 19세기 말 근대를 지향한 시기에 그려진 도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1899년 (광무 3)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된 조경단 정비사업을 마친 뒤 그 결과를 왕실에 알리고, 후대에 남기기 위해 화원들이 명을 받아 그린 그림이다.

 

 

봉학도 鳳鶴圖  -  김창환 1917년

조석진의 제자인 김창환 (1805~?)의 "단청의 수재'라 불릴 정도로 채색화의 두각을 나타냈다. 1915년 조선물산 공진회에 출품한 그의 <봉황도>는 "일본식 화풍을 모방하였다 는 평가에도 이왕직에서 구입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1917년 3월 일본에 유학했더는 신문기사 '매일신보 9월 24일 자 가 있는데 그해 12월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가 신 일본화에 경도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는 한쌍의 백학과 본황을 마루 야파에 린파의 장식성을 절충하여 정교학 그린 채색 공필화이며, 제시 끝의 주문 방인 소운은 호로유학 이후에는 심묘로 바뀌었다. 1920년에는 심 묘화회와 예성회를 결성하여 새로운 '조선화"를 적극 모색하였으나, 이후에는 삽화가나 신문 기자로 전향한 것으로 보인다.

 

 

어해 노안도

이한복 (1897~1944)은 서화미술회가 설립된 1911년 입학했으며, 1918년 동경 미술학교 일본학과에 유학했다. 통상적으로 쏘가리의 한자인 궐은 궁궐을 의미하고, 게 등껍질인 갑은 장원급 제을 의미하기에 어해도는 남성의 입신양명을 기원한 것이다. 또한 노안도의 노안은 늙어서 평안하다는 노안과 발음이 같아 인기가 높았다. 1917년 12월 동일한 크기의 비단에  그려진 2폭 병풍의 길상화 다수가 국립 고둥 박물관에 현전 하는데, 이는 1917년 11월 창덕궁에 대화재 이후 재건사업으로 제작된 것이 아닌 가라는 의견도 있다. 1894년 도화서 폐지 이후 궁중 장식화가 서화 미술회 교원과 학생들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뒷받침해준다는 미술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신선도 神仙圖

김은호 (1892~1979)가 서화 미술회를 졸업한 이듬해에 그린 것으로 스승 안중식의 영향이 강하지만, 안정된 화면 구성과 섬세한 묘사, 맑은 색채감각은 그 안의 개성 덕 면모를 보여준다. 제1폭의 황초평과 종리 권부터 12폭의 이철괴롸 한 상자까지 인기 있는 도교 선인들이 거의 망라됐으며, 도상은 김홍도의 도석인물화와 상해 발간 화보인  육수당 화전 91883년) 점 석재 총회 (1885) 등에서 차용됐다. 마지막 폭의 김은호 근화는 황제의 만수무강이나 왕실의 영원을 기원하며 도석 인물화가 궁중 장식화로 주문 제작되었음을 알려주나. 또한 신선의  도상과 표혀법이 근대 도석인물화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회화사적으로도 중요하다.  

 

 

 

송학도

김은호는 그림에 입문한 초기부터 어진화가로 발탁되는 영광을 누렸고, 이후에도 황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1912년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여 스승이었던 안중식과 조선직 문하에서 사회교육을 받았던 그는 1917년부터 대한제국 황실에 헌상하는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여 대개 1920년까지 여러 점을 그렸다. 한자로 김은호 근사로 쓴 것에서 황실에 헌상할 목적으로 그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송학도>와 동일한 크기의 비단에 그린 <노안도>에 경신 (1920)년에 그렸다는 명문이 있어 같은 때 그린 것이라 생각된다. 이 해 김은호는 창덕궁 대조전에 화려한 진채 <백학도>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