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9.한국문화.한국사

응답하라 우리 술 (2022) - 전통과 애환이 빚은 한국술 이야기

동방박사님 2022. 11. 2.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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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 술(막걸리, 소주)의 전통 제조과정과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술에 얽힌 흥미로운 애주사(愛酒史)를 민속·풍속적이며 미생물과학으로까지 전개한 술 인문역사교양서 『응답하라 우리 술』이 도서출판 깊은샘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김승호는 ’90년대 문화답사 베스트셀러 저서에서 한국인들에게 회자됐던 ‘아는 만큼 보이는’문화답사 정신을 본 도서에 포커스를 맞춰 우리 술을 알고 마시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관점으로 다채로운 우리 술의 맛과 멋, 인문적 향취를 책 안에 올올이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우리 전통술의 아름다운 고갱이의 전통은 바로 오랜 시간 정성들여 지역의 좋은 부재료-소나무 재료, 지초, 진달래, 국화 등-를 누룩으로 디뎌 오래도록 변치 않는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오래전에 발휘된 왕가와 사대부가의 로컬푸드 전통에서 찾고 있다.

목차

제1편 술이란 무엇인가?

01 술이 만들어지기까지
02 곡물발효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제2편 응답하라 우리 술, 막걸리

03 막걸리, 나는 누구인가? / 04 전통주란 무엇인가?
05 우리 술의 출발점, 누룩 / 06 술맛의 근원은?
07 청·약주 논쟁 - 우리 술의 정체성 혼란
08 우리나라의 대표 막걸리 / 09 조선의 18세기 - 금주령과 술의 전성시대
10 사라진 세시주 ‘도소주’와 술 예절 ‘향음주례’
11 술잔에 깃든 이야기 / 12 주세법과 주세령 시대
13 밀막걸리와 양조장 전성시대 / 14 쌀막걸리의 부활과 막걸리 전성시대의 종언
15 막걸리 순수령과 아스파탐 / 16 100달러 시절의 막걸리와 3만 달러 시절의 막걸리
17 르상티망 - 욕망의 막걸리 ‘해창 18도’

제3편 응답하라 우리 술, 소주

18 권력의 상징물, 소주 / 19 소주(燒酒)인가, 소주(燒酎)인가
20 향으로 즐기는 술 소주 / 21 조선의 대표 소주
22 빼앗긴 들에 봄은 오지 않고, 우리 소주도 사라졌다
23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그리고 소주
24 총동원령 시대와 영화 ‘말모이’ / 25 1950년 전쟁과 막소주
26 성북동 술이야기 / 27 《서울, 1964년 겨울》과 《서울은 만원이다》
28 8.3조치와 함평고구마 / 29 1980년 ‘노동의 새벽’과 25도 소주
30 벚꽃처럼 떨어지는 소주의 알코올 도수
 

저자 소개

저 : 김승호
 
쓸데없이 석사과정까지 경제학을 전공하고 금융사와 IT분야를 취재하는 기자생활을 15년 정도 하다가 어느 날 신문사에 사표를 내고 험하디 험한 정치권에 뛰어들어 국무총리실과 국회 등에서 ‘어공’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에 답답함을 느끼고 결국 10여 년 만에 자연인으로 돌아와 술문화에 천착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많이 마시지는 못하지만 즐겨 마시며 우리 술에 담긴 역사와 문학에 빠져 지난 7년 전부...
 

책 속으로

술의 시작은 인간의 발명이 아니라 자연에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한 데서 비롯된다. 발효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수만 년 전 혹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을 것이다. 자연이 스스로 빚어낸 알코올─포도 등의 과일, 그리고 꿀 등에 공기 중의 효모가 들어가 만들어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원숭이를 보면서 신석기시대의 인류는 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술이 만들어지기까지’」중에서

곡아 발효와 타액 발효로 시작된 쌀 문화권의 술 빚기는 결국 누룩으로 연결되어 당화와 발효를 동시에 진행하는 병행복발효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누룩도 습기에 찬 곡물이 방치되어 생긴 곰팡이가 출발점이다. 물기를 머금은 보리나 밀 등에 공기 중의 누룩곰팡이가 앉아 덩어리진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재활용하면서 사람들은 곰팡이가 슨 곡물이 특별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곡아 발효와 타액 발효로 시작된 쌀 문화권의 술 빚기는 결국 누룩으로 연결되어 당화와 발효를 동시에 진행하는 병행복발효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 것이다.
---「‘곡물발효주가 만들어지기까지’」중에서

나를 부르는 이름은 너무도 많았고 낯설 만큼 서로 달랐다. 흰색을 띠고 있어 백주(白酒), 지게미가 있어 재주(滓酒), 묽게 희석되어 박주(薄酒), 농사일하면서 마신다고 하여 농주(農酒), 곡물로 빚었다 하여 곡주(穀酒). 탁한 빛깔이어서 탁주(濁酒) 등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다채롭기 그지없다. 나만큼 개방적이며 유연한 술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다 익지 않아도 마실 수 있고, 숙성시키지 않고 바로 걸러서 마셔도 맛이 있고, 심지어 물을 타서도 마실 수 있는 술은 아마 지구상에 나 말고는 없을 듯하다.《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내 이름은 ‘탁주’ 혹은 ‘탁료(濁?)’였다. 그리고 지게미가 없도록 맑게 거른 ‘청주(淸酒)’와 약용성을 강조하기 위해 쓴 ‘약주(藥酒)’라는 명칭도 자주 등장한다.
---「‘막걸리, 나는 누구인가?’」중에서

최근 1~2년 사이에 젊은 MZ세대가 한국 술에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맛의 막걸리를 찾거나 증류소주를 찾아 직접 양조장이나 우리 술 전문 판매점을 찾는 사람도 부쩍 늘었다. 시장에서의 트랜드 변화를 읽어낸 다수의 양조장이 기존의 탁주 제조면허 대신 지역특산주면허로 전환하고 있다. 지역특산주는 여타 주류면허와 달리 인터넷 등의 통신판매가 가능해진다. 그만큼 소비자 접근성이 좋아지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신규 면허를 내는 양조장들도 지역특산주 면허를 선호하고 있다. 주류 면허 측면에서 우리 술 시장을 보면 가장 활발한 분야가 지역특산주 양조장들이다.
---「‘전통주란 무엇인가?’」중에서

조선에 와서는 술의 종류만큼 다양한 누룩이 만들어졌다. 누룩 제조법이 따로 고조리서에 정리될 만큼 누룩을 중요시했다. 누룩은 누룩을 만드는 곡물에 따라 이름과 그 특징이 달라진다. 흔히 사용한 밀누룩(조곡)은 밀을 통째로 파쇄하여 만든다. 그리고 보다 좋은 주질의 술을 만들 때는 밀 껍질을 제거하고 가루로 만들어 빚은 백곡을 사용하거나 녹두가 들어간 누룩을 만들어 사용했다. 조선시대 누룩인 향온곡이나 내부비전곡, 백수환동곡등은 모두 다른 곡물에 녹두를 추가로 넣어 만든 누룩들이다.
---「‘우리 술의 출발점, 누룩’」중에서

2000년대 들어 직접 자신들이 사용할 누룩을 빚는 경우도 같이 증가하고 있다. 청주의 ‘풍정사계’(화양양조장), 포천의 ‘술빚는 전가네’, 전남 장성의 ‘청산녹수’와 ‘해월도가’, 평택의 ‘호랑이배꼽막걸리’, 강원도 홍천의 ‘예술’과 ‘마마스팜’, 경북 울주의 ‘복순도가’, 김천의 ‘배금도가’ 등이 자신의 술맛을 특화하기 위해 고유한 누룩 제조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지역특산주 면허를 내는 양조장이 늘어나면서, 자신들만의 주질을 유지하고 개선하는 방법에 관한 고민도 같이 늘고 있어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해질 전망이다.
---「‘우리 술의 출발점, 누룩’」중에서

우리 술 이름 하나가 갑자기 일본 술의 이름으로 둔갑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조선의 통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일제는 주세법을 반포(1909년)한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잘 쓰고 있던 술 이름 ‘청주’가 일본 술이 된 것이다. 일제는 우리 술을 조선주라는 이름으로 묶고 그 아래 탁주와 약주 등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우리 술 이름 청주를 일본주인 사케에 붙였다. 물론 일본에서도 맑은 술을 청주라고 했으니 일방적으로 빼앗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술 청주가 약주라는 이름으로 제한된 것은 총독부의 술 분류체계가 그 원인이다.
---「‘청·약주 논쟁 - 우리 술의 정체성 혼란’」중에서

삼해주를 마신 조선의 선비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시문에 ‘삼해주’에 대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조선 초기성종 대의 문신 서거정(1420~1488)은 자신이 엮은 책 《태평한화골계전》에서 “극락과도 바꿀 수 없다”는 극찬을 내놓고 있고 선물 받은 삼해주를 마신 고려 말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는 ‘시 한 수를 지어 삼해주를 가져다준 데 대해 사례한다’는 시를 통해 삼해주의 뛰어난 맛을 전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기대승(1527~1572)도 광주 무등산을 돌아보고 식영정에 이르렀을 때 삼해주의 맛에 빠져 ‘식영정의 시에 차운하다’라는 시로 삼해주 사랑을 노래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 막걸리’」중에서

백곡 김득신이 술맛에 집중하기 위해 잔을 소중하게 다뤘다면 손순효(1427~1497)와 송강 정철(1536~1593)은 철저하게 양을 중심으로 술잔을 이해한 경우다. 손순효는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조선 3대 주호로 불리는 사람이다. 송강 정철도 술 때문에 구설이 잦은 사람이었다. 결국 반대 세력에게 탄핵당하게 되자 선조는 그에게 은 술잔을 내린다. 그리고 그에게 허용된 술은 하루 석 잔.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주호(酒豪) 정철이 어찌 석 잔에 만족하겠는가. 그도 방짜로 늘린 술잔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절’이라는 글에서 애주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한다. 여기서 그는 술을 마시고 주사를 하면 선비일 수 없다고 경고한다. 그런 그가 이백의 시 ‘양양가’를 응용해서 ‘백년, 삼만 육천 일, 반드시, 매일 3백 잔을 기울이다’라는 제목의 시를 남긴다.
---「술잔에 깃든 이야기‘ 중에서

주세령이 시행되면서 30만 명이 넘던 자가용 주조 면허는 급격히 줄어 1931년이 되면 1명이 된다. 그리고 결국 1934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자가용주 면허는 완전히 폐지된다. 특히 주세법과 달리 주세령 개정에서는 그동안 특별히 규제하지 않았던 누룩과 국(입국)에도 면허제도를 도입하였다. 1919년 주세령 개정을 통해 판매용 국과 누룩을 만드는 작업장도 면허를 받도록 하였고, 1934년에는 자가 소비용 누룩의 제조에 대해서도 면허제도를 신설하였다. 이유는 밀조주 자체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주세법과 주세령 시대’」중에서

시장에는 대형양조장 이외에 소규모 생산시설을 갖춘 양조장들이 제법 늘었다. 특히 최근 2~3년 사이에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트랜드가 되고 있다. 이들 양조장에서 만드는 막걸리들은 합성감미료를 넣지 않는다. 술맛도 단맛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단맛과 신맛, 그리고 알코올 감까지 자신들이 원하는 균형감 있는 맛의 술을 만들면서 자신들의 시장을 형성해가고 있다. 여기에 부응하듯 20~30대 젊은 소비자층들도 전통주 혹은 가양주스타일의 우리 술을 찾아 나서고 있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사람들은 천연의 입맛을 갈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DNA 안에 기억된 천연의 단맛을 찾아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막걸리 순수령과 아스파탐’」중에서

조선은 향온곡으로 빚는 술을 어용주, 즉 임금이 마시고 쓰는 술로 삼았다. 각종 제사는 물론 외빈(중국 사행단) 맞이 및 왕족과 공신들에대한 선물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온서와 내의원에서 소주를 내렸다. 당연히 일반에서 소주를 구경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정치적 안정기인 세종대에 접어들어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서울의 양반들도 소주를 빚기 시작한다. 이렇게 소주는 권력자를 중심으로 유통되던 술이다.
---「‘권력의 상징물, 소주’

불을 이용해 증류하는 술을 우리는 소주(燒酒)라고 부른다. 증류 과정에서 보이는 대표적인 이미지를 가져와 불태울 소(燒) 자에 술 주(酒) 자를 사용한 것이다. 소주의 또 다른 이름은 땀이 나듯 송골송골 맺힌다고 해서 ‘한주(汗酒)’라고도 한다. 또한 소줏고리에서 내려오는 모양이 이슬 같다고 하여 ‘이슬 로(露)’ 자를 술이름으로 사용하여 ‘로주(露酒)’ 혹은 술 이름의 끝에 ‘로’ 자를 붙이기도 한다. 조선의 세 가지 유명한 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전라도의 죽력고(竹瀝膏)와 이강고(梨薑膏)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소주(燒酒)인가, 소주(燒酎)인가’」중에서

2~3년 이상을 항아리에서 숙성시킨 고급 증류주들도 여럿 등장했다. 홍천에서 자체적으로 누룩을 빚어 막걸리와 전통 청주를 만들고 있는 ‘전통주조 예술’이 ‘무작 53’이라는 이름의 고급 증류주를 냈으며, 국내 처음으로 오미자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오미나라’에서도 항아리와 오크통 숙성, 두 가지 버전으로 ‘고운달’이라는 증류주를 발표했다. 법주 스타일로 빚어 소주를 증류하는 풍정사계, 그리고 생쌀 발효로 막걸리를 빚어 증류주를 생산하고 있는 배혜정도가, 율무로 만든 막걸리를 증류한 연천양조, 5양주를 만들어 증류하고 있는 평택 좋은술의 ‘화주’, 안동에서 밀로 소주를 내려 만든 ‘진맥소주’ 등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우리 증류 소주들이 시장에 얼굴을 비치고 있다. 있다.
---「‘향으로 즐기는 술 소주’」중에서

조선시대 사대부라면 누구나 제사를 모시고 손님을 맞이하는 예법(봉제사접빈객, 奉祭祀接賓客)을 지키기 위해 술을 빚었다. 궁에선 특히 더 많은 제사를 지내야 했고, 손님을 맞이해야 했다. 그래서 솜씨 좋은 장인의 손길에서 청주와 소주가 빚어졌으리라. 그 중 대표적인 소주는 향온주와 홍소주, 그리고 서울 술이라고 알려진 삼해소주 등이다. 그렇게 궁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소주도 결국 사가로 제조법이 넘어가게 된다 사가로 제조법이 넘어가면서 더욱 유명해진 소주가 삼해주와 향온주, 홍소주다. 향온곡으로 빚는 향온주는 고려때부터 만들어 왔던 오랜 역사를 지닌 술이며, 조선 500년 왕조의 궁궐 술로 자존감을 유지해온 최고의 술이었다. 지금은 서울시의 무형문화재(제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술이기도 하다. 현재 이 술은 2대째 무형문화재를 이어 오고 있는 박현숙 장인의 손에서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의 대표 소주’」중에서

절간고구마(썰어 말린 고구마)와 대만산 당밀 등을 이용해서 저렴하게 생산하는 신식 소주와 비교할 때 우리 쌀로 빚는 누룩 소주는 가격경쟁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누룩 소주를 빚는 양조장들에 한 줄기 희망이 비친다. 흑국 소주였다. 대자본을 들여서 다단식연속 증류기를 갖추지 않고도 발효제 하나만으로 생산비를 낮출 수 있었던 것이다. 1931년 유통되던 소주는 신식 소주, 흑국 소주, 누룩(맥국) 소주 등 3종류였으며, 이중 신식 소주가 약 20%를 차지하고,흑국 소주가 50%, 누룩 소주가 나머지 30%였다.
---「‘빼앗긴 들에 봄은 오지 않고, 우리 소주도 사라졌다. 중에서’

막소주는 두 부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주류면허를 내고 정식으로 판매하던 술이었고, 또 하나는 어둠의 경로에서 유통되던 밀조주 소주였다. 알코올 도수 30% 정도의 소주를 1.8리터들이 됫병에 담아 유통했던 술은 특히 막노동판에서 인기를 끌었다. 거친 노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럿이 모여 됫병 소주를 맥주잔이나 양재기에 나누어 담아 마시기도 하고, 혼자 남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잔술로 덜어 마시는 장면은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소설의 단골 메뉴였다.
---「‘1950년 전쟁과 막소주’」중에서

최근 1~2년 사이에 서울에 막걸리 양조장이 여럿 등장했다. 여전히 장수막걸리가 대세인 세상이지만, 그래도 젊은 층이 자주 모이는 홍대 입구와 강남 등의 주점에서 서울의 다른 막걸리를 만나는 일은그리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성수동에만 두어 개의 양조장이 들어섰고 연희동과 문래동에도 양조장이 만들어졌다. ‘한강주조’ ‘188도깨비’ ‘날씨양조장’ ‘같이 양조장’ ‘한아주조’ ‘서울 효모방’ ‘온지도가’ 등이 그 주인공들이다. 크래프트 문화가 계속되는 한 서울의 양조장들도 더 늘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서울, 1964년 겨울》과 《서울은 만원이다》’」중에서
 

출판사 리뷰

인문적이고 풍속적이며 음식문화적이고 미생물·과학적이기까지 한
달큰쌉싸름한 우리 술문화의 다채로운 향미(香味)과 양조 명인을 찾아서!!


“전통은 박물관의 진열장에 갇혀 문화유산으로 있을 때보다 거리로 나와 문화로 소비될 때 더 의미 있게 가치를 드러낸다. 고답적인 태도로 ‘전통’이라는 이름에 머물러 있는 순간 새로움은 사라지고 낡은 이미지만 남은 ‘전통’은 그때부터 박물관의 시계에 지배당한다. 그래서 더 생기있게 문화 속에 살아남기 위해서 ‘전통’은 ‘팔다리’를 걷어붙이고 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조선의 대표소주’중에서

우리 술(막걸리, 소주)의 전통 제조과정과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술에 얽힌 흥미로운 애주사(愛酒史)를 민속·풍속적이며 미생물과학으로까지 전개한 술 인문역사교양서 《응답하라 우리 술》이 도서출판 깊은샘에서 출간되었다. 저자 김승호는 ’90년대 문화답사 베스트셀러 저서에서 한국인들에게 회자됐던 ‘아는 만큼 보이는’문화답사 정신을 본 도서에 포커스를 맞춰 우리 술을 알고 마시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관점으로 다채로운 우리 술의 맛과 멋, 인문적 향취를 책 안에 올올이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우리 전통술의 아름다운 고갱이의 전통은 바로 오랜 시간 정성들여 지역의 좋은 부재료-소나무 재료, 지초, 진달래, 국화 등-를 누룩으로 디뎌 오래도록 변치 않는 맛과 향을 음미할 수 있는 오래전에 발휘된 왕가와 사대부가의 로컬푸드 전통에서 찾고 있다. “하등 멥쌀 1말을 절구에 찧어 굵은 체에 쳐 낸다. 쌀가루를 시루에 쪄떡을 만든 다음, 차게 식기를 기다려 물 1~2말과 누룩 4장(여름은 4장 반)을 가루 내어 넣고, 고루 버무려 술밑을 빚는다. 술밑을 술독에 담아 안치고, 이불로 덮어 겨울 10일, 여름 7일간 발효시킨다.”

저자는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나오는 막걸리의 제조 방법을 소개하며 이처럼 전통술 하나를 만드는 데는 쌀과 누룩, 그리고 물로 빚으며, 간혹 쌀이 아닌 지역의 재료가 등장할 때도 있다고 말한다. 가령 제주도의 오메기(차좁쌀의 사투리)와 남도의 보리, 그리고 밀과 메밀, 감자 정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곡물과 누룩, 그리고 물이 만난 뒤 1주일 또는 열흘이 지나면 막걸리가 만들어지며, 막걸리를 좀 더 고급스럽게 만들기 위해 덧술을 해 한 번을 더하면 이양주, 두 번을 더하면 삼양주, 이런 식으로 술밥을 더 주는 식으로 고급주를 만든다고 한다. 덧술을 한 술은 단양주와 비교해 더 풍부한 맛을 가지고, 알코올 도수도 높다는 것이 전국의 명인명주를 직접 취재해 얻은 저자의 명주 비결이다.

저자는 이토록 정성과 시간으로 우려낸 아름답고 건강한 주류문화가 불과 100년도 안 돼 국가와 자본에 의해 ‘박제화 된 전통’으로 전락한 오늘의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지금 젊은 양조인들과 전통명주 장인들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각종 크래프트 주류의 개성과 고집이 빚어내는 독특하고 창조적인 주류 양조 과정에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소비하는 전통’의 모범답안을 찾는다. 그는 이 모범답안을 손수 쓰기 위해 팔도의 양조명인들과 국세청 주류면허 담당관, 대학의 미생물학과 교수에 이르기까지 책에 필요한 양질의 술문화 현장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저자는 이토록 다채롭고 흥미로우며 과학적인 전통 제조방법을 집필하기 위해 막걸리와 수제맥주, 그리고 증류소주 등을 배우면서 알게 된 다양한 인연과 한발 더 나아가 왜 그들이 그토록 전통방식의 양조 재현에 헌신적으로 임하는지를 탐구한다. 저자의 발로 뛴 역작의 흔적은 안동소주(조옥화 명인)와 한산소곡주(우희열 명인), 문배주(이기춘 명인), 부산금정산성막걸리(유길청 명인), 삼해약주(권희자 명인), 이성자 송절주장, 두술도가의 김두수 대표, 해창주조장의 오병인 대표, 삼해소주(김택상 명인), 진도 홍주(허화자 무형문화재), 감홍로(이기숙 명인), 향온주(이성자 향온주장) 등 다채로운 술 빛깔만큼이나 다양하고 영롱한 명인들의 정성으로 빚은 술로 다가온다. 저자는 매주 전국에 있는 양조장을 찾아 나선 이야기를 금융신문에 연재하였다. 술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내용과 양조장과 명인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리 술이 지닌 다채로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봉제사 접빈객’ 즉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는 유교 질서 속에서의 술은 조선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중심축이었었고, 20세기 초중반 겪어야 했던 슬픈 역사는 우리 술의 왜곡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알게 했다. 저자는 책 행간에 기회 있을 때마다 우리네 아름답고 건강했던 전통술을 오늘에 되살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전통을 제대로 재현해낸 최근의 크래프트 주류들을 대중들이 쉽고 익숙하게 소비하는 이른바 ‘소비하는 전통’에 답이 있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는 곧 서민의 애환이 깃든 전통의 우리 술 막걸리와 소주가 제대로 대접받아 ‘아는 만큼 더 잘 즐기며 마실 수 있는’ 건강하고 풍성한 술 문화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살아나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처럼 절실하게 이 책이 읽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응답하라 우리 술》의 구성
프랑스 와인, 독일 맥주가 지역의 포도와 보리로 세계명주로 재탄생하듯
우리 지역의 곡물과 물, 장인의 솜씨로 빚어낸 크래프트 로컬푸드, 우리 술 이야기!


“전통주가 서서히 박제화의 길을 걷는 가운데 한국 술의 새로운 모색은 지역특산주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역특산주와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를 취득한 양조인들이 ‘전통’에 새로운 상상력을 보태면서 한국 술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소규모 주류 제조면허로 시장에 출사표를 던지는 젊은 양조인들도 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집단의 기억이 되어 새로운 우리의 전통이 되어갈 것이다.”
- ‘전통주란 무엇인가? 중에서

《응답하라 우리 술》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술의 탄생과 역사, 우리 술의 제조과정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다루고 잇다. 서론에 해당하는 제1편 술이란 무엇인가?에선 술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인류문명사와 곡물발효주가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중심 글은 주로 인류가 술을 어떻게 구했고, 만들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다.

인류가 역사시대는 물론 신화시대부터 술은 인류의 동반자였다. 인류의 발이 닿는 곳에는 항시 술이 있었고, 사회적 관계든 정치적 관계든 술은 빠지지 않고 개입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그런데 발효라는 개념을 몰랐던 당시의 인류가 어떻게 술을 손에 넣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양조의 비밀까지 풀어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것이 필자가 술에 천착한 또 하나의 이유다.술을 즐겼던 것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의 상고사가 기록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을 살펴보자. 부여의 ‘영고’를 설명하면서 ‘음식가무(飮食歌舞)’를 즐겼다는 표현이 나온다. 먹는 행위보다 마시는 행위가 먼저 나온다. 그리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렇게 우리는 술을 중시했다. 술은 이처럼 문명의 세계에서만 즐길 수 있는 향정신성물질이었다. 글의 서두는인류가 어떻게 문명을 일구며 향정신성물질인 술을 경계 안에 포함시켰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었다.

글의 두 번째는 우리 술 막걸리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선 ‘우리 술의 출발점, 누룩’에서부터 ‘청·약주 논쟁 - 우리 술의 정체성 혼란’, ‘우리나라의 대표 막걸리’, ‘조선의 18세기 - 금주령과 술의 전성시대’, ‘사라진 세시주 ‘도소주’와 술 예절 ‘향음주례’, ‘주세법과 주세령 시대’, ‘밀막걸리와 양조장 전성시대’, ‘쌀막걸리의 부활과 막걸리 전성시대의 종언’, ‘100달러 시절의 막걸리와 3만 달러 시절의 막걸리’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막걸리 스토리가 전개된다.

주식으로 먹는 곡물을 술로 만드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유럽도 포도나 사과 등의 과일로 발효주를 만든다. 포도 농사가 힘든 곳에선 보리로 술을 빚고는 있다. 하지만 주식으로 이용하는 밀은 되도록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일본도 마찬가지다)는 쌀을 대체할 술의 재료가 없었다. 충분한 알코올 도수를 낼 수 있는 당도 높은 과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만든 술들은 당시 주식으로 이용하던 곡물로 빚었다. 누룩과 물과곡물이 만나 수천 년을 이어와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술이 오늘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조선시대까지는 손님을 맞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꼭 필요했던 술이어서 집안마다소중하게 관리해왔던 존재였지만, 20세기 들어 우리 술은 타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정체성을 잃게 된다. 심지어 식민지가 되어서 통치자금의 수익원이 되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집집이 담아 먹었던 김치와 장류의 숫자만큼 많았던 술을 잃게 된다. 특히 해방 이후 주식으로서의 쌀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부가 선택한 양곡 정책으로 문화로서의 우리 술은 더 많은 생채기를 입게 된다. 이렇게 제 모습을 잃었던 우리 술이 지난 세기말부터 활기를 띠고 있다. 가양주를 인정해주고 누룩도 디딜 수 있도록 법의 제한을 풀어준 것이다. 이렇게 복원되고 재현된 우리 술 ‘막걸리’를 추적하는 과정이 15편의 글에 실려 있다.

세 번째 주제는 소주다. 소주는 발효주를 증류해서 만드는 술이다 .가스를 모으듯 술의 정수를 모은다는 측면에서 소주는 우리 술의 꽃에 해당한다. 이 술이 우리 땅에서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리고 주로 빚었던 소주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막걸리처럼 곤경에 처하기도 했던 우리 소주의 역사를 백석과 이상화의 시와 연결시켜 살피기도 했고, 영화 ‘말모이’와도 연결시켜 우리 술을 추적하기도 했다.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우리 소주, 그리고 자본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선택했던 새로운 증류법은 신식소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희석식 소주에게 어떻게 무너졌는지도 담고자 했다. 또한 희석식 소주가 대세를 이루는 과정과 소주 재료의 변화, 추락하듯 떨어지는 소주의 알코올 도수도 살펴보았다.

저자 인터뷰

1. 선생님께서는 지금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막걸리, 소주의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우리의 전통술이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소비되고 유통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우리의 술은 주식으로 먹는 쌀로 빚은 막걸리와 약주가 중심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양곡관리법 등으로 우리 술은 왜곡되기 시작했는데, 이름이 바뀐 경우(청주-〉약주)도 있고 식량이 부족해서 쌀로 술을 빚지 못한 때도 있었습니다. 주곡을 이용하여 술을 빚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우리 술을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술은 그 어떤 음식보다 로컬푸드여야 합니다. 그 지역의 쌀과 물과 누룩(발효제)로 빚어 그 지역에서 소비될 때 가장 맛있습니다. 독일에 ‘양조장 굴뚝이 보이는 곳에서 맥주를 마셔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최근 국내산 쌀로 빚은 전통방식의 술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시면 취하는 알코올이 아니라 우리 문화로 빚은 술이라는 관점에서 즐기듯 이 술들을 찾았으면 합니다. 술을 만드는 과정은 공학이지만, 술을 마시는 과정은 인문학이기 때문이죠. 술은 곧 문화입니다.

2. 특별히 이 책을 집필하시면서 애주가들이나 소비자들이 우리 술을 어떻게 알고 즐기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강조해 말씀하시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었다면 어떤 것들이십니까?

전통은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 나와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할 때 가장 빛을 발합니다. 전통주와 관련한 아카데미나 강습이 전국적으로 개최됩니다. 가양주를 직접 빚으면, 우리 술에 대한 이해의 폭도 늘게 되어 있습니다. 박제 같은 문화가 아니라 거리에서 소비되는 문화로서 우리 술이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서 말했듯 술을 만드는 과정은 공학이지만, 술을 마시는 과정은 인문학입니다. 이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과 식물로 빚은 술이 가장 우리 문화를 잘 표현하는 술일 것입니다.

3. 책에는 술의 탄생기원에서부터 곡물발효주가 만들어지기까지 정말 다양한 분야-미생물 발효과학, 곡물 정제과정, 술의 본질 등-를 망라해 다양한 이야기 꺼리를 제시하시는데요. 책을 집필하시면서 이런 전문정보들을 얻기까지 도움을 받으신 분들과 그분들로부터 받은 정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술을 공부하면서 신화학과 고고학에 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포도주와 제의 등은 실제했던 사건들이 서사시로 옮겨진 것입니다. 술과 관련한 기록은 다양한 경전 등에도 실려 있습니다. 전설이나 신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했던 사건들이 스토리로 엮어져 해당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소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보는 아직 국내에 전문가가 많지 않습니다. 와인과 관련해선 그리스 신화 전공자들이 많지만, 우리 술에 관해선 이제 연구가 시작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화학과 고고학에 대한 정보는 주로 책에서 얻었습니다. 물론 발효과학에 대해선 전남대의 김진만 교수, 농진청의 강희윤 박사, 경기도농업기술원의 이대형 박사 등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발효와 관련한 이화학에 대한 정보를 주로 자문받았습니다.

4. 선생님께서는 우리 전통의 좋은 막걸리와 소주가 국가로부터 ‘박제화 된 전통’에 머물러 있는데, 그보다는 ‘소비하는 전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술을 소비해야 하고, 양조업자나 술 만드는 사람은 어떤 점들을 더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술에 계급은 없습니다. 또 좋은 술과 나쁜 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은 ‘좋은 술과 더 좋은 술이 있다’입니다. 모든 술은 각각의 스토리텔링을 갖고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 술 ‘막걸리와 소주’는 근대화 과정에서 억압을 받다가 상황이 바뀌어 급조되듯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이니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우리 술에 관한 관심이 늘게 되면 자연스럽게 거리에서 ‘소비되는 전통’이 되어 갈 것입니다. 술을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자신이 만들고 싶은 술보다는 소비자가 원하는 술을 만들어야겠죠. 다만 천편일률적으로 단맛 중심의 술을 만든다면 차별화가 되지 않고, 또 소비자들도 금방 싫증을 낼 것입니다. 이와 함께 좋은 술은 안전하게 관리된 술입니다. 주류는 안전문제를 꼭 생각해야 합니다. 생산은 물론 유통과정에서의 안전도 꼭 고려해야 합니다.

5. 우리 술 막걸리는 전통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된 술이었는지요? 좋은 막걸리가 최근 크래프트 막걸리 붐을 타고 다양하게 전승, 소비되고 있는 현장을 다녀오신 분으로서 중요한 막걸리는 어떤 것들이고, 요즘 애주가들이 어떤 점 때문에 이런 막걸리에도 관심을 보이신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우리 술은 김치와 집된장처럼 각각의 집에서 만들어졌고, 소비되었습니다. 이런 술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주세법과 주세령 발효 이후입니다. 그리고 양곡관리법에 의해 쌀로 술을 빚지 못하다가 1995년 가양주와 누룩의 사적 제조가 가능해졌습니다. 즉 고작 27년 정도의 역사 속에서 예전 가양주 전통의 술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1~2년 사이 젊은 MZ세대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좋은 우리 술이 늘고 있는 것이구요. 중요한 막걸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우리 술을 고르면 된다고 봅니다. 요즘은 전통주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판매점이 늘고 있으니 예전보다 쉽게 자신에게 맞는 술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관심의 증가에는 소득증가에 따른 소비 여력의 증가와 자신에 대한 보상심리 등이 같이 작용한 듯합니다. 고된 사회생활을 버텨내 준 자신에 대해 좋은 술을 선물해준다는 식의 보상심리인 거죠.

6. 예로부터 소주는 왕가와 일부 특권층 사대부들 등 소수만이 즐기던 권력의 상징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소주의 어떤 점이 특별히 왕가나 사대부 권력층에서 향용하게 된 요인이었는지요? 이러한 왕가의 술이 일반인들에게도 전수되게 된 과연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겁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경제력입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내린 소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막걸리 3병에 좋은 청주 한병, 그리고 청주 3병에 좋은 소주 한병 정도가 나옵니다. 따라서 가난한 농부가 소주를 즐길 수 없는 것이죠.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밥으로 지을 쌀이 없는데 소주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왕가와 귀족들의 술이 일반에게 소개된 시장은 숙종과 영정조 시대 이후입니다. 상업의 발전이 한몫하게 되었는데, 당시 해외에서의 은의 유입이 급증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상민 중에서도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왕가의 술이 일반에 전파되는 경우는 상궁으로 있다 궁을 벗어난 경우, 공주나 옹주처럼 왕가의 사람이 반가의 사람과 결혼한 경우, 그리고 왕가의 사람이 먼 지방으로 유배를 떠난 경우입니다. 자연스럽게 평소 먹고 마시던, 아니면 만들던 술을 반가의 사람 혹은 지역의 유지들과 나누게 되었을 것입니다.

7. 막걸리와 소주는 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좋은 전통과 맛, 호칭 등에서 심한 왜곡과정을 거치게 되는데요?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의 주류정책 때문에 우리의 전통술이 왜곡되는 사례는 대표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일제가 우리 술과 일본주를 구분하면서 우리 술에는 입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 술에 누룩만 사용하게 했다는 왜 문제였느냐. 이것은 일제가 우리를 바라본 시각에 있습니다. 일본주는 입국을 사용할 수 있게 해서 더 좋은 술을 만들게 하고, 심지어 안정적으로 양조를 할 수 있으니 경제성까지 갖게 됩니다. 하지만 누룩은 안정적인 발효가 이뤄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전통의 발효제였지만, 입국처럼 해당 곰팡이만 모아둔 발효제와 발효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던 것입니다. 일제가 이런 정책을 편 것은 우리 양조산업을 고사시켜 일본주만 이 땅에 살아남게 하려던 것이었습니다.

8. 해방 이후로도 우리 막걸리와 소주는 시대의 변화와 상황에 따라 꽤 부침이 심한 술들로 변모하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술이 동시대를 호흡했던 서민들에게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시는지요?

憫酒 불과 20~30년 전까지 우리는 경제적으로 풍요롭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의 상당부분은 ‘저곡가 저임금’ 정책이 한축을 담당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제대로 수익을 올리지 못했고, 도시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충분한 소득을 올리지 못했지요. 당연히 수입산 농산물로 값싸게 만든 막걸리와 소주는 농민과 도시 서민들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노동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가장 값싼 친구였던 것이죠. 이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은 술, 비싼 술을 소비할 수 없잖습니까. 이 때 이술 들은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9. 선생님께서 이 책에 담고자 했던 중심 메시지가 있다면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특별히 우리 술을 애용하시고 사랑하시는 애주가분이나 우리 술의 다양한 면모를 알고 싶어 하시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활용해 보시라고 말씀해 주시고 싶으신지요?

이 책은 우리 술에 대한 인문학적 안내서입니다. 불편한 역사라고 해서 부정할 필요가 없듯이 우리 술의 흑역사도 굳이 부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과정을 거쳤으니 더 사랑할 이유가 생기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우리 술의 흔적들은 되도록 문학작품과 연결지으려 했습니다. 술자리에서 우리 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문학을 같이 즐길 수 있다면 더 근사한 술자리가 되지 않을까요. 짧막한 시가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술을 마시면서 그 술과 관련한 스토리를 같이 소비한다면 우리 인문학의 지평도 같이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추천평

김승호 작가는 우리 술의 발효 효소인 쌀과 보리, 각종 곡물의 발효 과정과 누룩을 만들 때 미생물의 화학반응까지 꼼꼼히 기록하며 우리 술의 풍미와 좋은 맛이 어떻게 우러나는지를 미생물과학적으로 밝혀내고 있는 놀라운 저작을 남기고 있다.
- 김진만 교수(전남대 융합생명공학과 교수, 청산녹수 대표)

우리 술은 일제강점기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숱한 주류정책의 변화와 주류 면허 등 행정절차의 변화를 겪게 된다. 저자는 한국 근현대 주류사에서 빠질 수 없는 주류 면허와 행정절차에 대해 귀중한 사료와 발로 뛴 취재로 의미 있는 술인문교양서를 집필했다.
- 조호철 박사(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우리 술의 역사는 곧 우리 근대사라고 할 정도로 역사와 함께해 온 서민들의 애환과 설움이 빚어낸 한 편의 드라마이다. 주류 전문 칼럼니스트로서 저자의 의미 있는 발자취는 한국 술문화사의 한 장을 연 수준 높은 문화사회학 저술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다.
- 이대형 박사(경기도 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