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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일문제의 기원 (2014) - 한일회담과 ‘전후 한일관계

동방박사님 2024. 5. 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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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나라 대법원의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배상판결을 빌미로 2019년 7월 일본이 반도체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전격적으로 발표하면서 시작된 갈등으로 현재 한일관계는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다. 어쩌다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이 책의 저자 니가타국제정보대학 국제학부 요시자와 후미토시 교수는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여러 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이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는 1945년 8월 일본 패전 후의 한일관계를 ‘전후戰後 한일관계’로 부른다. 저자는 현재도 ‘전후 한일관계’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청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 없이 ‘전후’의 종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인식 아래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분석하고 1945년부터 1965년까지의 ‘전후 한일관계’의 실상을 고찰한다.

목차

시작하면서
초판 서문
한국어판 서문

서론
1. 재고되어야 할 ‘전후 한일관계’: 과제의 설정
2. 선행 연구의 정리와 과제의 접근 방법

제1장 초기 한일회담의 전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Ⅰ. 한일회담 이전의 한일관계
1. 해방 직후의 한반도
2. 대일배상을 둘러싼 동향
3. 한국의 대일강화회담 참가 문제와 대일강화조약
Ⅱ. 초기 한일회담의 전개
1. 개황
2.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 국적 문제를 중심으로
3. 제1차 회담에서의 한국과 일본의 대립
(1) 기본관계 / (2) 청구권 / (3) 어업 / (4) 미 국무성의 ‘청구권 문제에 대한 견해’의 의미
4. ‘구보타 발언’을 둘러싼 한일 간 대립
(1) 한국과 일본의 주장 / (2) 미국의 조정과 실패
소결

제2장 중단기의 한일관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Ⅰ. ‘억류자’ 상호 석방 교섭과 한일예비회담
1. ‘억류자’ 문제
(1) 한국정부에 의한 일본 어선 나포 / (2) 강제 퇴거 대상 조선인 수용자 수의 증가 / (3) 독도 문제
2. 하토야마 정권의 한일교섭
(1) 한일예비회담 / (2) ‘억류자’ 상호 석방 교섭 / (3) 한일예비회담과 ‘억류자’ 상호 석방 교섭의 연관성
3. 기시 정권에 의한 한일교섭
(1) 사무 수준 교섭의 진행 / (2) ‘친한파’의 움직임 / (3) 한일 합의문서의 조인, 한일 공동성명의 발표 / (4) 미국정부 「구상서」의 비밀문서화
Ⅱ. 제4차 한일회담과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1. 제4차 한일회담의 개시
2. 일본정부에 의한 한국 문화재 ‘인도’
3. 재일조선인 귀국사업
(1) 경과 / (2) 한국정부의 대응 / (3) 일본의 관심
소결

제3장 한일회담에서 대일청구권의 구체적 토의 제5차 회담 및 제6차 회담을 중심으로

Ⅰ. 4월혁명 이후의 한일관계
1. 한일회담 추진세력의 대두
(1) 4월 혁명과 한·미·일 관계 / (2) 제5차 한일회담의 개시 / (3) 민주당 정권의 위기와 일본 의원단의 방한
2. 제5차 회담에서의 토의: 대일청구권의 전체적 성격
Ⅱ. 한국 군사 쿠데타 이후의 한일회담
1. 한국 군사 쿠데타 이후의 한일관계
(1) 한국 군사 쿠데타와 미국과 일본의 대응 / (2) 제6차 한일회담의 개시 / (3) 한일 수뇌회담의 합의 내용
2. 제6차 회담에서의 토의: 대일청구권의 항목별 내용
(1) 개인청구권을 둘러싼 토의: 은급, 기탁금,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금을 중심으로 / (2) 개인청구권 이외의 항목
소결

제4장 한일회담에서 청구권 문제의 정치적 타결 1962년 3월부터 12월까지

Ⅰ.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과 청구권 문제: 한국, 미국, 일본의 입장
1.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 구상의 부상
2. 한·미·일 각국에서 청구권과 경제협력의 관련
(1) 일본 / (2) 한국 / (3) 미국
Ⅱ. 최덕신·고사카 외상회담: ‘관료적 공세’와 ‘정치적 수세’의 구도
Ⅲ. ‘공백 기간’ 동안 한·미·일의 움직임
Ⅳ. 예비절충에서의 논의: ‘실무적 노선’에 의한 조정
Ⅴ. 김종필·오히라 회담: 정치적 노선에 의한 타결
소결

제5장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의 차관교섭 1963~1964년 한·미·일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Ⅰ. ‘김종필·오히라 합의’ 이후의 한일회담
Ⅱ. 1963년의 차관교섭
1. 국교정상화 이전의 민간 차관에 대한 기본 정책
2. 차관교섭의 구체적 사례
Ⅲ. 1964년의 차관교섭
1. 오정근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의 교섭
2. 한국에 대한 일본정부의 2천만 달러 긴급 원조
3. PVC공장 및 제5시멘트공장 건설과 일본으로부터의 자본재 도입
4. 한국 여론에 대한 대응: 차관교섭의 또 하나의 목적
소결

제6장 한일 국교정상화의 성립 제7차 회담에 대한 고찰

Ⅰ. ‘6·3사태’ 이후의 정치 상황: 제7차 회담의 정치적 배경
Ⅱ. ‘다카스기 발언’의 무마
Ⅲ.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의 방한과 한일기본조약 가조인
1.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를 둘러싸고
2. 한일기본조약을 둘러싼 교섭
Ⅳ. 세 가지 현안에 대한 합의사항 가조인
1. 한일 농업장관 회담
2. 한일 외상회담에서 합의 내용 가조인까지
(1)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 / (2) 청구권 및 경제협력 문제: 문화재 문제를 중심으로 / (3) 어업 문제
Ⅴ. 한일기본조약 및 여러 협정의 조인
1. 박정희의 미국 방문
2. 합의 내용의 조문화 과정과 조인
소결

제7장 한국에서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1964~1965년을 중심으로

Ⅰ. 시각과 시기 구분
Ⅱ. 반대운동의 전개
1. 1964년 반대운동의 전개
(1)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초기 단계 / (2) 한일회담 비판에서 반정부운동으로의 이행 단계 / (3) 반정부운동의 고양과 계엄령의 시행
2. 1965년 반대운동의 전개
(1) 조인까지의 반대운동 / (2) 조인 후의 조약비준 반대운동
Ⅲ. 운동의 주체와 주장
1. 조직
2. 주장
(1) 『한일회담백서』와 「현 한일회담 저지투쟁의 정당성」 / (2) ‘비준 국회’에서의 논전
소결

제8장 일본에서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1960년대를 중심으로

Ⅰ. 시각과 시기 구분
Ⅱ. 반대운동의 전개
1. 제1 고양기: 1962년 후반부터 1963년 초까지
2. 제2 고양기: 1965년 후반
Ⅲ. 주요 단체와 주장
1. 혁신 정치세력 단체: 일본사회당·총평, 일본공산당
(1) 총론적 주장: 세 개의 핵심논리 / (2) 각론적 주장: ‘일한국회’에서의 한일조약 논의
2. 재일조선인 단체: 조선총련을 중심으로
3. 일조 우호단체: 일조협회, 일본조선연구소 등
4. 학생과 지식인의 동향
소결

결론

1. ‘전후 한일관계’의 시기 구분
2. 재산청구권 문제의 전개
3. 반대운동

후기

옮긴이 후기
역자 주
참고문헌
참고자료: 한일회담 경위 일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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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요시자와 후미토시 (YOSHIZAWA Fumitoshi,吉澤文壽)
 
1969년생. 히토쓰바시대학(一橋大?) 사회학연구과 박사 과정 졸업(사회학 박사). 현재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국제학부 교수. 한국현대사, 한일관계사 전공. 주요 저작으로 『日韓?談1965 ?後日韓?係の原点を??する』(高文硏, 2015年), 『[新裝新版] ?後日韓?係―?交正常化交?をめぐって』(クレイン, 2015年, 한국어판: 이현주 옮김, 『현대 한일문제의 기원·한일회담과 ‘전후 한일관계’』일조각, 2019년), ...

역 : 이현주

인하대학교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빙연구원을 거쳐 현재 국가보훈처 학예연구관으로 재직 중이며,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문위원, 한국근현대사학회 편집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로 본 한국현대사」 편찬위원 등을 지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사회주의세력의 형성 1919∼1923』(일조각, 2003), 『해방전후 통일운동의 전...

책 속으로

청구권 교섭에서 한일 간 대립은 단순히 ‘청구권’에 대한 법 이론상의 대립이 아니라 양측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인식의 충돌이었다. 즉 한국은 식민지 지배가 불법이며 부당했다고 인식하여 일본의 청구권을 부정하면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는 청구권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일본의 조선 지배가 당시 국제법상 합법이고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한국의 주장을 반박하고 재조일본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일본의 청구권은 한국의 청구권을 감쇄 또는 상쇄하기 위한 ‘교섭 기술’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 p.81

한일회담이 중단되었던 시기의 한일관계는 한국에 억류된 일본인 어부와 오무라 수용소의 강제 퇴거 대상 조선인의 석방이라는 ‘인도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병행하여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예비회담이 열려 1957년 12월 한일 합의문서의 조인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1958년부터 또 하나의 ‘인도적 문제’로 재일조선인 귀국 문제가 부상하면서 한일회담은 중단을 반복했다. 이렇게 한일관계는 다시 교착상태에 빠졌다.
--- p.136


1960년에 성립한 한국과 일본의 새 정권은 미국을 끌어들이면서 한일관계의 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 같은 해 10월부터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이 시기 한·미·일 간의 한일회담 추진 세력은 반공 및 민생 안정의 관점에서 한국의 경제개발을 중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가와 관료뿐만 아니라 재계가 한일관계의 개선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은 중요하다.
--- p.187

대일청구권에 대한 구체적 토의는 1961년 11월 한일 수뇌회담에서 합의한, 정치적 절충을 하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요컨대 이 토의는 다가올 정치적 절충에서 양국이 취할 수 있는 한 유리한 금액을 제시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정치적 절충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지불할 ‘금액’과 그 ‘명목’이 초점이 되었는데, 그와 같은 타결 방법 자체가 일본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실현하는 적절한 방법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토의에서 어느 정도 의의가 있는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논의가 정치적 절충의 장에 반영될 가능성은 없었다.
--- p.19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60년대의 한일회담은 1950년대의 원칙적 대립 및 ‘인도외교’의 단계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시기는 한국의 경제개발에 초점을 맞춰 한·미·일 3국의 교섭 당사자가 한일회담을 추진한 단계이다. 그것은 ‘경제 기조’에 따라 한일회담 타결을 향한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경제 기조’에 의한 한일회담 타결이란, 말하자면 한일 간에 놓여 있는 중요한 문제를 경제적 수단으로 얼버무리게 된 것을 의미한다. 청구권 문제는 그 전형적인 사례였다.
--- p.191~192

1960년경부터 미국의 대한 원조 삭감을 계기로 한국에서 ‘자립 경제’의 확립 및 한국정부의 일본 자본 도입의 움직임, 거기에 일본정부의 대미 협조 외교와 일본 재계의 한국 재평가 같은 요소에 의해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 문제가 부상했다. 그래서 한·미·일 3국은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을 통해 한국 경제를 원조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한일 국교정상화의 조기 실시를 도모하려 했다. 여기에 1960년대 한일회담이 ‘경제 기조’로 전개된 이유가 있는 것이다.
--- p.234

청구권 문제가 본래 가지고 있던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라는 과제와 관련하여 청구권 교섭의 정치적 타결 과정을 평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경제 부흥 및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 문제가 현실의 과제로 부상하면서 청구권 교섭의 중점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평가에서 청구권과 경제협력의 연결 방식으로 이행했다. 이것은 ‘경제 기조’에 의해 “일본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라는 한일 간의 과제가 흐지부지하게 된 과정이었다. 한국정부는 국민적 비판을 피하기 위해 ‘청구권’이라는 명목을 주장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청구권 교섭이라는 본래적 성격의 흔적을 남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기 교섭에서 일본이 한국에 공여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 것은 명목이야 어떻든 경제협력 자금이었다. 그리고 그 규모는 일본 ‘식민지 지배 책임’의 무게나 한국인에 대한 보상의 필요성이 아니라, 오로지 한국의 경제개발 계획이나 일본의 자금 공여 능력이라고 일컬어진 경제적 요소만 고려된 것이다.
--- p.240~241

차관교섭에서 한·미·일의 교섭 담당자들은 의견 교환을 통해 한일 양측의 의지를 확인했다. 그에 따라 한일 국교정상화를 기다리지 않고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협력 실시가 가능해졌다. 즉 차관교섭은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의한 청구권 및 경제협력 문제의 원칙적 합의 내용을 더욱 진전시킨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6·3사태’에 의해 한일회담이 중단된 상황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이전의 차관교섭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관계를 깊고 단단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 차관교섭이 정식으로 타결된 1964년 12월부터 제7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다. 이때 수석대표에는 재계 관계자가 발탁되었고, 불과 6개월 후에 14년간이나 끌어온 한일회담이 정식으로 타결된 것이다. 이와 같이 차관교섭과 그에 이은 한일회담은 ‘경제 기조’의 외교로 매듭지어졌다. 따라서 1963년부터 1965년까지의 한일관계는 국교정상화를 향해 양국의 경제관계가 긴밀해진다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280

합의 내용에 대해 일본은 어느 정도 한국에 양보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주장을 반영시켰다. 한편 한국은 결정적인 국면에서 곤혹스러운 결단을 해야 했다. 한일기본조약을 둘러싼 초점, 즉 구 조약 무효 확인 조항 및 한국정부의 유일 합법성 확인 조항에 대해 그 내용은 일본의 제안을 성문화한 것이었다. 한편 한국정부는 이들 조문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 합치하는 ‘해석’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한 어업협정에서는 이승만라인이 철폐되는 대신 그 해역에 공동자원조사수역이 설정되었다.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에서는 한국정부가 실질적으로 외교보호권으로서의 대일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정부가 보상의 의미를 전혀 포함하지 않는 경제협력을 실시하는 것으로 되었다. ~ 이것들은 어쨌든 일본의 입장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이러한 실질적인 양보를 통해 선박 협력, 문화 협력, 어업 협력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의 차관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김종필·오히라 합의」에 의한 청구권 문제 타결의 기본 전제였다. 즉 한일 간의 여러 문제를 어쨌든 경제적 수단에 의해 흘려보낸다는 ‘경제 기조’의 정치적 타결이었다.
--- p.332

한일회담의 타결에서 또 하나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한일회담의 타결이 결코 한일 문제의 해결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이나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은 한일의 주장이 타협되지 않은 채 조문화되어 조인되었다. 또한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협정에서도 협정 영주권자 자손의 법적 지위는 미확정이며, ‘조선적朝鮮籍’의 재일조선인은 대상 밖이었다. 더욱이 한국정부는 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한국인 개인의 보상 청구에 대한 외교보호권을 포기해 버림으로써 한국인 개인의 민사상 청구권은 ‘구제 없는 권리’가 되고 말았다. 재일한국인의 개인청구권은 청구권 및 경제협력 협정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한일회담의 타결은 교섭 과정에서 전혀 논의되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전쟁 및 식민지 지배에 의한 피해나 그 역사적 책임에 관한 문제를 포함한 여러 문제를 내버려 둔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새로운 한일 문제의 ‘계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 p.333~334

제3공화국 성립 직후인 1964년 3월부터 학생 및 야당이 주체가 되어 대규모로 본격적인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 5월 중순부터 다시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운동이 급진화해 고양되었고 6월이 되자 학생 중심의 시위에 많은 일반 시민이 참가함으로써 반대운동은 본격적인 반정부운동으로 변화했다. 이 변화는 박정희 정권 발족 이래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단숨에 분출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는 계엄령을 발포하여 군대에 의한 진압을 꾀했다. 이른바 ‘6·3사태’에 의해 한일회담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와 같이 1964년 반대운동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한국 국민의 불만을 배경으로 한일회담 반대에서 박정희 정권 타도로 그 목적을 단계적으로 확대시킨 것이다. 1965년이 되자 한국정부는 한일기본조약, 청구권 및 경제협력, 어업, 법적 지위 협정의 가조인을 차례로 실현시켰다. 반대운동은 이것들의 무효를 주장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야당 및 학생의 시위는 4월 절정을 이루었고, 5월부터는 야당 통합에 의해 결성된 민중당이 많은 시민을 유세에 동원하여 한일회담 반대 여론을 고조시켰다. 또한 조인 후의 비준반대 투쟁은 야당, 학생뿐만 아니라 각계 인사가 한일조약에 대한 찬부를 표명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 p.375

반대운동 세력의 주장을 검토하면, 그들은 기본관계, 어업, 청구권, 독도 문제를 중심으로 한일기본조약 및 여러 협정을 비판했다. 특히 야당은 일본과 한국의 해석이 다른 문제를 중심으로 국회에서 질문 공세를 폈다. 한국정부의 설명에 대해 반대운동 세력은 한일조약에 의해 한국의 ‘민족적 이익’이 손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한일조약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한 점은 충분히 평가해야 한다. 한편 한국에서 한일조약을 둘러싼 논쟁은 오로지 한국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한일조약 찬성파도 반대파도 ‘국시國是’로 반공이라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청구권과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와 깊이 관계된 인권 문제를 상대적으로 경시했던 것이다.
--- p.376~377

일본과 미국이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무력과 경찰력으로 진압하는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다시 지적하고자 한다. 미국은 1964년 6월 3일 계엄령 선포 및 계엄군 동원을 허락했다. 일본은 대한 경제 원조를 통해 한국인의 대일 감정을 호전시키는 것으로 반대운동을 누르려고 했다. 그리고 한·미·일 3국은 외교 채널을 통해 계속해서 한국의 반대운동에 대한 대응을 협의했다. 한국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매국외교’, ’굴욕외교‘를 전개한 박정희 정권뿐만 아니라 일본과 미국이라는 국제 세력과도 대결한 것이다.
--- p.377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1960년 안보투쟁까지를 전사前史로 하여 1962년 후반부터 1963년 초기까지 제1 고양기, 1965년 후반을 제2 고양기라고 할 수 있다. 안보투쟁 이후 반대운동 세력은 미일 신안보조약의 구체화로서 한일회담의 군사적 성격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일본공산당, 일본사회당, 총평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 정치세력은 일한대련부터는 안보반대국민회의로 운동조직을 바꾸어 공동투쟁 체제를 취했다. 1962년 10월 김종필의 방일에 즈음하여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제1 고양기가 도래한다. 일본의 반대운동 세력은 같은 해 12월 13일 발표된 한일회담에 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성명을 지지하고 1963년 3월까지 수만 명 규모의 시위를 전개했다. 1963년부터 일본 사회에서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재일조선인의 조국 자유왕래 요구 운동이 시작되었다. 1964년 한국에서 반대운동이 활발해지자 일본에서도 한국의 운동을 지지하고 이와 연대하려는 시위가 이어졌다. 그리고 1965년 6월 한일조약 조인 이후 일본의 반대운동은 한일조약 비준 저지 투쟁으로 제2의 고양기를 맞았다. 안보투쟁 이후 혁신 정치세력은 강령적 차원이나 평화운동 현장에서 대립과 분열이 심화되었지만, 6월 9일 지식인들의 호소에 응하는 형태로 ‘일일공투’가 실현되자 일한국회에서도 이 방식으로 공동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하여 안보투쟁 이래 최대 규모로 ‘일한투쟁’이 전개되었다.
--- p.432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1960년 이후 혁신 정치세력이 분열하고 대립한 상황에서 두 번에 걸친 ‘공투’ 체제를 실현시켰다. 그 요인은 1964년 말 대두한 일본사회당 좌파와 일본공산당의 연계, 조선총련과 일조협회, 문화인 그룹으로 일컬어졌던 ‘결절점’의 존재, 나아가 안보투쟁 이후 학습회, 연구 활동을 통한 조선 문제에 대한 일본 사회의 관심 고조와 “소수지만 날카로운 실천”을 하는 활동가의 성장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에는 간단하게 ‘실패’로만 단정할 수 없는, 긍정적인 평가를 부여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p.435

다만 “시작하면서”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종결되고 5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 책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점에서 일본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한계성을 엄격하게 지적할 수밖에 없다. 한일조약 체결 이후 남겨진 일본과 조선 반도의 ‘전후戰後’적 과제에 대해 일본인은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또는 왜 마주할 수 없었는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계기로 이 문제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일본과 이웃 나라의 평화적인 관계를 전망하고 싶다.
--- p.436

출판사 리뷰

여전히 진행 중인 ‘전후 한일관계’

이 책의 저자 요시자와 후미토시 교수는 한국현대사, 한일관계사 분야 연구자로 일본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자로, 1990년대 후반부터 한일회담을 중심 주제로 하여 한일관계 관련 논문을 꾸준히 내왔다.

이 책은 일본현대사의 입장에서 쓴 것으로, 일본 패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향한 도정에서 식민지 지배의 청산이라는 과제에 중점을 두고 그 전개 과정을 고찰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4월 일본이 ‘독립’을 회복하고 국제 사회에 복귀하여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된 냉전의 전장에 자본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선전 포고도 없이 ‘참전’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전후 일본의 재건에 한국의 고통이 놓여 있음을 인정한다.

이 책은 ‘전후 한일관계’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과제인 청구권 문제의 전개 과정을 명확히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연구가 많이 진행되지 않은 다른 여러 현안, 예컨대 기본관계와 어업,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화재 문제 등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고찰한다. 이에 더해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전개된 한일회담 반대운동까지 살피고 있다. 이 ‘반대자’들이야말로 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한 양국의 ‘대중’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서술은 관료와 정치가 중심으로 논의되어 온 한일관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확장하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식민 지배의 청산은 당연히 1945년 8월 이후 일본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관계, 즉 ‘전후 일조관계’와도 관련되는데, 이 책은 이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한일 간 청구권 교섭 과정을 고찰하면서 일본이 한국에 대해 국가적 보상을 통해 ‘식민지 지배 책임’을 수행하고 과거를 청산할 결정적인 기회를 잃었다고 평가한다. ‘전후 한일관계’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은 이승만라인(평화선) 문제의 해결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해소’를 우선했을 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한편 한국은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에서 경제개발에 의한 국가 건설을 우선하여 ‘청구권’ 명목으로 일본 자금의 도입을 도모했고, 일본은 이를 기회로 경제협력에 의한 청구권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경제 기조’로 인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과 관련된 여러 과제는 해결되지 못했고, 한일 국교정상화와 동시에 한국인 개인의 청구권은 민사상 청구권을 포함하여 ‘구제되지 않은 권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잃어버린 한국인의 권리가 구제될 기회가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이라는 과제는 묻어 둔 채 진행된 청구권 교섭이 보여 준 정치적 타결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과정의 시기 구분

※ 제1기: ‘원칙적 대립’의 시기(1945~1953년)
1945년 일본 패전 후 한국, 일본, 미국은 각자 대일 배상 방침을 검토했다. 미국은 일본의 전후 부흥을 우선시하여 대일 배상을 가능한 한 줄인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의 대일 무배상 원칙은 미국과 영국이 주도한 대일강화조약 작성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한국은 독자적으로 대일 배상 조사를 진행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을 내용으로 하는 구상권을 행사하려고 했다. 일본은 이 대일강화조약에 대한 준비 작업을 통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 및 재산 형성의 정당성을 주장하려고 했다. 그리고 한일 양국은 미국의 중개 아래 1951년 10월부터 한일회담을 열어 기본관계, 청구권,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어업 등의 의제를 토의했다. 그러나 한일은 각각의 원칙적 입장을 주장했을 뿐 타결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러한 한일 대립의 구도는 1953년 구보타 발언으로 인해 한일회담이 결렬된 이후 한동안 유지되었다.

※ 제2기: ‘인도 외교’의 시기(1954~1960년)
한일회담이 중단된 시기에 한일관계는 한국에 억류된 일본인 어부와 오무라 수용소의 강제 퇴거 대상 조선인의 석방이라는 ‘인도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예비회담이 이루어져 이들 문제는 1957년 12월 한일 합의문서 조인이라는 형태로 진전되었다. 그러나 1958년부터 또 하나의 ‘인도 문제’로 재일조선인 귀국 문제가 부상하면서 한일회담은 중단과 재개가 반복되고 한일관계는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본정부는 억류 일본인 어부의 귀환과 재일조선인 문제의 ‘해결’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을 가능한 한 국외로 보내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은 ‘인도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한국정부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처우에 불만을 갖고 다양한 수단으로 ‘북송’ 저지에 노력했다. 한국정부의 관심은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에 있었다.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가 귀국 사업을 통해 한일회담을 견제하려 했다는 추측도 충분히 성립한다. 1950년대 후반은 재일조선인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이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와 같이 1950년대에 전개된 한국, 일본, 조선 사이의 ‘인도 외교’는 정치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 제3기: ‘경제 기조’의 시기(1960~1965년)
1960년 4월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한·미·일 3국 정·관·재계는 한일회담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 한국과 일본의 여당 정치 세력은 한일관계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한일의 관료들은 한일관계의 개선을 중시하면서도 자국 정부의 입장을 내세워 교섭은 용이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한일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노선’과 ‘실무적 노선’이 형성되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재계는 한일관계 개선을 열망하여 경제시찰단 파견 등을 통해 한일 교류를 추진했다. 1960년경부터 미국의 대한 원조 삭감을 계기로 한국의 ‘자립경제’ 확립 및 한국정부의 일본 자본 도입 움직임, 그리고 일본정부의 대미 협조 외교와 일본 재계의 한국 재평가라는 요소에 의해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 문제가 부상했다. 이에 한·미·일 3국은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에 의해 한국의 경제개발을 지원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최대한 빨리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에 1960년대 한일회담이 ‘경제 기조’로 전개된 배경이 있다. 1962년에 청구권 교섭은 ‘실무적 노선’에 의한 절충 후 ‘정치적 노선’인 김종필·오히라 회담에 의해 일본의 대한 경제협력 공여라는 형태로 정치적으로 타결되었다. 1964년 12월 시작된 제7차 회담에서는 한일의 교섭 담당자가 현안에 대해 대단히 ‘협력’적으로 대처했다. 그리고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 및 여러 협정이 조인되었다. 한일합의의 내용으로 기본관계, 어업, 선박, 문화재 등 여러 문제에서 일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들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장에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청산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들은 모두 빠져 버렸다. 한국은 식민지 지배 청산과 관련한 사항을 실질적으로 양보하는 대신 선박 협력, 문화 협력, 어업 협력의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을 받아들였다. 이와 같이 청구권 문제를 비롯한 한일 사이의 여러 현안을 전부 경제적 수단에 의해 흘려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