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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한
‘피해의식’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농밀한 해설서
피해의식은 현대 사회의 금기어이다. 피해의식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단어다. ‘나’의 피해의식이건 ‘너’의 피해의식이건, 그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대화 분위기는 얼어붙고 모두가 황급히 주제를 돌리려고 한다. 사회적 피해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피해의식 역시 그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모두가 쉬쉬하는 사이, 피해의식은 개인들의 삶을 불행에 몰아넣고 들불처럼 퍼져나가 각종 사회적 갈등과 마찰, 혐오의 불씨가 된다.
이 책은 과감하게 현대 사회의 금기어인 피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그저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며,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반응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저자는 ‘기억’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또한 저자는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 사람에 대한 단편영화 같은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나’와 ‘너’의 상처는 무엇이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상처에 대한 이해와 ‘나와 다른 상처를 지닌 이’들에 대한 감수성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의 발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권력과 일부 언론이 자신의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사회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개인들을 양산하고 그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며, 피해의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 ‘너’의 피해의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피해의식을 극복할 현실적 방안 역시 제시한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한 번 읽는 데 오래 걸리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한 독자의 댓글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피해의식, 또 가족·연인·친구 등 소중한 이들의 피해의식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의 상처든 ‘너’의 상처든 ‘우리’의 상처든, ‘상처받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말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우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못한 상처는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나’, ‘너’, ‘우리’ 모두가 불행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그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대해본다.
누구에게나 있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못한
‘피해의식’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농밀한 해설서
피해의식은 현대 사회의 금기어이다. 피해의식은 누구나 알고 있는 단어이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단어다. ‘나’의 피해의식이건 ‘너’의 피해의식이건, 그것에 대해 말하는 순간 대화 분위기는 얼어붙고 모두가 황급히 주제를 돌리려고 한다. 사회적 피해의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피해의식 역시 그 누구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역으로 인식된다. 그렇게 모두가 쉬쉬하는 사이, 피해의식은 개인들의 삶을 불행에 몰아넣고 들불처럼 퍼져나가 각종 사회적 갈등과 마찰, 혐오의 불씨가 된다.
이 책은 과감하게 현대 사회의 금기어인 피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그저 불쾌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적하며, 피해의식은 상처받은 마음의 자연스러운 자기방어 반응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재해석을 바탕으로 철학적 사유와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심도 있게 파헤친다. 저자는 ‘기억’과 ‘무의식’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명료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또한 저자는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일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한 사람에 대한 단편영화 같은 그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그 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나’와 ‘너’의 상처는 무엇이었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나’의 상처에 대한 이해와 ‘나와 다른 상처를 지닌 이’들에 대한 감수성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의 발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나아가 권력과 일부 언론이 자신의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사회가 피해의식에 휩싸인 개인들을 양산하고 그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시대의 많은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피해의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말하며, 피해의식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나’와 ‘너’의 피해의식 뿐만 아니라, ‘우리’의 피해의식을 극복할 현실적 방안 역시 제시한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한 번 읽는 데 오래 걸리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한 독자의 댓글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피해의식, 또 가족·연인·친구 등 소중한 이들의 피해의식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나’의 상처든 ‘너’의 상처든 ‘우리’의 상처든, ‘상처받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라고 말하며,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우회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못한 상처는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여 ‘나’, ‘너’, ‘우리’ 모두가 불행해지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그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대해본다.
목차
머리말
프롤로그
1부.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피해의식
1. 사회적 금기어, 피해의식
2.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
3.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
4.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
5. 자기방어의 도구 :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6. 자기방어의 결과 : 억울함, 우울함
7. 피해의식이라는 주사위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스피노자
2부. 피해의식, 사실과 상상의 소용돌이
1.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2. 피해의식은 ‘기억’이고 피해자 의식은 ‘사실’이다
3. 피해의식의 과잉해석과 과소해석
4.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
5. 피해의식에 대한 그릇된 진단
6.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화
7. 세 가지 기억, 세 가지 피해의식
8. 나의 피해의식은 어느 정도일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베르그손
3부. 무의식이란 어둠,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2. 피해의식은 왜 강렬한가?
3.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
4. 피해‘의식’, 피해‘무의식’, 피해‘전의식’
5. 피해‘전의식’을 확장하라
6. 강박증적 피해의식, 히스테리적 피해의식
7.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라캉
4부. 권력과 금기의 지옥도,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다
2. 피해의식과 자존감
3.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
4. ‘권력-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
5. 피해의식의 촉매제, 자의식 과잉
6. 부채감이라는 폭력
7. 피해의식,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에피쿠로스
5부. 피해의식은 어떻게 우리를 파괴하는가?
1.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이유
2.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3.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
4. 자기연민은 어디서 오는가?
5. 소망의 부정, 부정의 소망
6. 대화의 단절, 관계의 단절
7. 피해의식의 전이
8. 피해의식은 냉소주의를 낳는다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비트겐슈타인
6부. 피해의식이라는 거대한 감옥
1. 언제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가 되는가?
2.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3. 피해의식은 바이러스다
4. ‘갑질’은 왜 발생하는가?
5.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
6. 절대적 가해자도, 절대적 피해자도 없다
7. 피해의식과 언론
8. 피해의식과 파시즘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악셀 호네트
7부.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1.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2. 주인공의 시선, 비평가의 시선
3. 평균의 힘
4.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
5. 기억 너머 새로운 기억으로
6. 욕망의 해소, 금기의 직면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질 들뢰즈
8부. ‘우리’의 피해의식 너머
1.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제멋대로 살아야 한다
2.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
3. 예민함 너머 섬세함으로
4.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5. 한계 너머 문턱으로
6.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
7.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
에필로그
프롤로그
1부. ‘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피해의식
1. 사회적 금기어, 피해의식
2.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
3. 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
4. 피해의식의 여섯 가지 얼굴
5. 자기방어의 도구 :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
6. 자기방어의 결과 : 억울함, 우울함
7. 피해의식이라는 주사위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스피노자
2부. 피해의식, 사실과 상상의 소용돌이
1.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
2. 피해의식은 ‘기억’이고 피해자 의식은 ‘사실’이다
3. 피해의식의 과잉해석과 과소해석
4.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
5. 피해의식에 대한 그릇된 진단
6. 피해의식, 상상의 기억화
7. 세 가지 기억, 세 가지 피해의식
8. 나의 피해의식은 어느 정도일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베르그손
3부. 무의식이란 어둠,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무의식적이다
2. 피해의식은 왜 강렬한가?
3.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
4. 피해‘의식’, 피해‘무의식’, 피해‘전의식’
5. 피해‘전의식’을 확장하라
6. 강박증적 피해의식, 히스테리적 피해의식
7.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라캉
4부. 권력과 금기의 지옥도, 피해의식
1. 피해의식은 사랑받지 못한 상처다
2. 피해의식과 자존감
3.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
4. ‘권력-욕망-금지-의무’의 사면체
5. 피해의식의 촉매제, 자의식 과잉
6. 부채감이라는 폭력
7. 피해의식, 못나서 못되지는 마음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에피쿠로스
5부. 피해의식은 어떻게 우리를 파괴하는가?
1. 당위와 현실을 혼동하는 이유
2.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
3.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
4. 자기연민은 어디서 오는가?
5. 소망의 부정, 부정의 소망
6. 대화의 단절, 관계의 단절
7. 피해의식의 전이
8. 피해의식은 냉소주의를 낳는다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비트겐슈타인
6부. 피해의식이라는 거대한 감옥
1. 언제 피해의식은 사회적 문제가 되는가?
2. ‘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
3. 피해의식은 바이러스다
4. ‘갑질’은 왜 발생하는가?
5. 절대적 피해자와 절대적 가해자
6. 절대적 가해자도, 절대적 피해자도 없다
7. 피해의식과 언론
8. 피해의식과 파시즘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악셀 호네트
7부.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1. 약함을 긍정하지 말라
2. 주인공의 시선, 비평가의 시선
3. 평균의 힘
4.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
5. 기억 너머 새로운 기억으로
6. 욕망의 해소, 금기의 직면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 질 들뢰즈
8부. ‘우리’의 피해의식 너머
1. 혼자 사는 것이 아니기에 제멋대로 살아야 한다
2.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
3. 예민함 너머 섬세함으로
4. 사랑하거나 싸우거나
5. 한계 너머 문턱으로
6.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
7.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
에필로그
책 속으로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깊은·상처가 반복되어서·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상흔을 흉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깊은 상처로 인해 피부를 꿰맨 상흔을 보며 흉하다고 인상만 찌푸리는 것은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가? 피해의식을 흉한 흉터로만 치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피해의식을 비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한지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일이다.·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중에서
피해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순간에나 찾아올 수 있다. 피해의식을 다룰 때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에 잠식되는 일은 자신에게는 결코 피해의식이 있을 리 없다는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피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이 생긴다.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상처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마치 그것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성급하게 은폐하고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네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렇게 은폐된 상처는 짓무르고 곪아서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성급하게 덮어 두느라 상처에 눌러 붙은 천 조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고통을 감당하며 상처 부위를 벌려 곪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약을 발라주고 햇볕에 쬐어주고 바람도 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상처를 가장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이다.
(...)신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같다. 신체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고통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신 옆에 있었던 아름다운 경치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상처 역시 그렇다. 정서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그 슬픔을 견뎌야 한다. 그 슬픔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그 슬픔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렇게 자신 옆에 늘 주어져 있었던 기쁨의 순간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불운했던 피해자가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억울한 비난이나 오해(상처)를 받아도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오해하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혹은 조건부 사랑만 받았던 이들은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쉽게 견뎌내기 어렵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피해의식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중에서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 결핍된 것(돈·학벌·명예·외모…)을 과도하게 욕망하게 되고, 바로 그 욕망이 피해의식을 발생시킨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 피해의식은 욕망으로부터 온다. 결핍된 것(돈·명예·외모…)을 채우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비대하면 비대할수록 그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강하다.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중에서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운 이가 기쁨(인정·칭찬·관심)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일종의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기쁨의 독점’이 일어나고, 그 반작용으로 인해 받은 상처(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된다. 예쁜 아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온갖 인정·칭찬·관심을 독점할 때, 못생긴 아이는 폄하·비난·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없다. 그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가 어떻게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학벌·명성·젠더 등등 모든 피해의식은 그렇게 발생한다. 돈·학벌·명성·남성(혹은 여성)은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돈이 많은, 학벌이 좋은, 유명한, 남성(혹은 여성)인 누군가가 기쁨을 독점할 때, 그 반작용으로 인한 상처(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즉, 마음이 뒤틀어져서 피해의식이 생긴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한 결과로 발생한) 피해의식 때문에 마음이 뒤틀어지는 것이다. 기쁨의 독점! 이것이 피해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중에서
행복과 불행은 상처받은 기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중에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가장 상처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대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장된 자기연민에 휩싸인 이가 어떻게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중에서
피해의식은 대화를 단절시킨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까? 그들과의 대화는 맥락 없는 분노나 적개심, 인신공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끝내 홀로 남겨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와 결국 그들은 세상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이 홀로 고립되는 것은 대화의 단절이 낳은 필연적 결과다. 대화의 단절, 이는 피해의식의 치명적 유해함 중 하나다.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비트겐슈타인」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가 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어서, 또 어떤 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또 어떤 이는 가난해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될 때, 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절대적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처럼 만연한 피해의식은 만연한 절대적 피해자를 양산한다.
모두가 절대적 피해자가 된 세상을 상상해보라. 모두가 자기 상처와 고통에 매몰되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쓰러운 존재라고 믿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자신보다 더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냉소적이거나·폭력적인·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삶만 불행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피해의식이 만연해질수록 공동체적 불행 역시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중에서
피해의식은 언제 옅어지는가?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할 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쉽게 말한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라!” 이보다 무지하고 순진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주관성, 너를 향한 객관성’이라는 보편적 조건 안에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을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이 보편적 조건을 무시하려 했다면 순진한 것이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의 피해의식은 이미 모두 사라졌을 테다.
우리는 언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가? 사랑할 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뒤집을 수 있다. ‘나를 향한 객관성, 너를 향한 주관성’. 바로 이 뒤집힌 조건 속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피해의식을 무력화시키는 작동 원리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라. 그때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 너머 자기 객관화에 이르고, 비로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중에서
‘나’는 이제 돈에 매여 살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적게 쓰고, 더 없으면 번다.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거의 없다. 돈에 쪼들렸던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다 기억난다. 대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억을 쌓았다. 신체가 변화될 정도의 기억들. 돈이 없지만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돈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 그들을 보며 다시 심장이 콩닥거렸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신체가 변용되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났고, 동시에 피해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그’ 역시 그렇게 나쁜 기억과 결별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어린 시절 왜 그렇게 심하게 자신을 때렸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답장을 했다.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못나서 그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편지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지금 그는 “아직 결혼할 자신은 없지만 결혼이 꼭 아이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을 함께 떠나보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오래된 나쁜 기억과 결별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스런 연인의 입맞춤과 손길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떨림을 경험했다. 그 신체적 떨림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설렘의 떨림이었다. 연인과 첫 잠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지금 그녀는 “여전히 남자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모든 남자가 짐승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을 함께 떠나보냈다.
---「기억 너머 새로운 기억으로」중에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피해의식을 부정하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을 볼 수 있으면 된다. 이를 통해 이질의 피해의식을 대해서 이해하고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피해의식이라는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노동조합원들이 여성 운동을 함께하는 사회, 페미니스트들이 성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 성소수자들이 장애인 인권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다.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수자들과 장애인들이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사회다. 이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마저 껴안아 연대하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모든 피해의식이 함께 연대해서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중에서
불편한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 피해의식은 광기 어린 폭력성을 띤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은 언제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유대인들(시오니스트)은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유는 하나다. 바로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해는 자신이 엄청난 피해자이니, 자신이 행하는 어떤 폭력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정당화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상처는 나치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사고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시오니스트들은 이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거나 싸우거나」중에서
아비투스도, 피해의식도 우리에게 영원히 들러붙은 저주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습관(아비투스)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강고한 습관이지만,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습관은 아니다. 어떤 습관도 ‘구조화된 구조’인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시간 우리를 지배해온 ‘습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답할 수 있다. 매혹적인 마주침과 고통을 견디는 실천을 통해서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가장 먼저, 매혹적인 마주침을 찾아 떠나야 한다. 매혹적인 마주침을 만났다면, 고통을 견디며 새로운 습관을 위한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의 오래 습관인 피해의식과 결별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중에서
길원옥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이다. 그녀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에 의해 참혹한 일들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자신의 고통은 잠시 잊고 일본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일본을 돕고 싶다고 전했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 너머의 삶이다. 이는 얼마나 귀하며 드문 삶인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귀하며 드문 법이다. 내게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떻게 피해의식을 벗어났을까? 길원옥 할머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 크고 깊은 상처가 그리 쉬이 아물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의식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혜롭기 때문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나’의 상처를 돌보며, ‘너’의 상처마저 돌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는 일이다. 그것이 지혜다. 만약 길원옥 할머니가 지혜롭지 않았다면, ‘나’의 상처에만 매여 일본의 참사에 은근히 통쾌해하거나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흔한 이들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혜롭다. 이것이 그녀가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대로 치유해가고, ‘너’의 고통에 대해서는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한다. 이는 ‘나’의 고통은 그것대로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너’를 배려한다. 심지어 그 ‘너’가 ‘나’의 고통에 깊게 관계된 ‘너(일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모두 고통을 치유해주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을 부정적으로 보고 비난하는가? 피해의식을 흉한 흉터로만 치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한 사람의 피해의식을 비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그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그건 네 피해의식이지.” 이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한지를 보여주는 절망적인 일이다.·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중에서
피해의식은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 상태다. 피해의식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느 순간에나 찾아올 수 있다. 피해의식을 다룰 때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에 잠식되는 일은 자신에게는 결코 피해의식이 있을 리 없다는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피해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자신의 피해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틈이 생긴다.
---「피해의식이 없는 이는 없다」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상처와 고통이 크면 클수록 마치 그것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성급하게 은폐하고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그네들의 바람과는 달리 그렇게 은폐된 상처는 짓무르고 곪아서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는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상처를 직시해야 한다. 성급하게 덮어 두느라 상처에 눌러 붙은 천 조각을 걷어내야 한다. 그렇게 고통을 감당하며 상처 부위를 벌려 곪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 약을 발라주고 햇볕에 쬐어주고 바람도 쐬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상처를 가장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이다.
(...)신체의 상처와 마음의 상처는 같다. 신체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고통을 견뎌야 한다. 그 고통이 필요하다.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고통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때 비로소 자신 옆에 있었던 아름다운 경치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의 상처 역시 그렇다. 정서적 상처가 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며 그 슬픔을 견뎌야 한다. 그 슬픔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견디는 시간 속에서 그 슬픔은 조금씩 잦아들게 된다. 그렇게 자신 옆에 늘 주어져 있었던 기쁨의 순간들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불운했던 피해자가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피해의식은 ‘기쁜 슬픔’, 피해자 의식은 ‘슬픈 기쁨이다」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에게 깊은 사랑을 받은 이들은 억울한 비난이나 오해(상처)를 받아도 비교적 쉽게 넘길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오해하더라도, 부모만은 자신을 온전히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상대적으로 피해의식이 옅을 수밖에 없다. 반면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거나 혹은 조건부 사랑만 받았던 이들은 억울한 비난과 오해를 쉽게 견뎌내기 어렵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부모마저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는 아이는 더 이상 기댈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의 피해의식은 더 짙어질 수밖에 없다.
---「근본적 피해의식, ‘부모’와 ‘성’」중에서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자신에게 무언가 결핍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은 그 결핍된 것(돈·학벌·명예·외모…)을 과도하게 욕망하게 되고, 바로 그 욕망이 피해의식을 발생시킨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그 피해의식은 욕망으로부터 온다. 결핍된 것(돈·명예·외모…)을 채우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이 비대하면 비대할수록 그에 대한 피해의식 역시 강하다.
---「신경증적 피해의식 너머」중에서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은 왜 발생했을까? 외모가 아름다운 이가 기쁨(인정·칭찬·관심)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외모는 일종의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기쁨의 독점’이 일어나고, 그 반작용으로 인해 받은 상처(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외모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된다. 예쁜 아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온갖 인정·칭찬·관심을 독점할 때, 못생긴 아이는 폄하·비난·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없다. 그런 상처를 받고 자란 아이가 어떻게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학벌·명성·젠더 등등 모든 피해의식은 그렇게 발생한다. 돈·학벌·명성·남성(혹은 여성)은 권력이다. 그 권력으로 돈이 많은, 학벌이 좋은, 유명한, 남성(혹은 여성)인 누군가가 기쁨을 독점할 때, 그 반작용으로 인한 상처(폄하·비난·무관심) 때문에 저마다의 피해의식이 발생하게 된다. 즉, 마음이 뒤틀어져서 피해의식이 생긴 게 아니라, (일부 계층이 기쁨을 독점한 결과로 발생한) 피해의식 때문에 마음이 뒤틀어지는 것이다. 기쁨의 독점! 이것이 피해의식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피해의식의 근본 원인, 기쁨의 독점」중에서
행복과 불행은 상처받은 기억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상처받은 기억을 잘 치유하는 것이 행복이고, 그렇지 못하는 것이 불행이다.
---「고통을 과장하고 싶은 욕망」중에서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이 받은 고통을 과장하고 확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이라고 여긴다. 자신이 가장 상처받았다고 믿는 이들은 언제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가장 소중히 대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과장된 자기연민에 휩싸인 이가 어떻게 자신 곁에 있는 소중한 것들의 소중함을 제대로 볼 수 있겠는가?
---「소중한 것을 소중히 대하지 못하는 이유」중에서
피해의식은 대화를 단절시킨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을까? 그들과의 대화는 맥락 없는 분노나 적개심, 인신공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이 끝내 홀로 남겨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와 결국 그들은 세상에 혼자 남겨지게 된다. 피해의식에 빠진 이들이 홀로 고립되는 것은 대화의 단절이 낳은 필연적 결과다. 대화의 단절, 이는 피해의식의 치명적 유해함 중 하나다.
---「철학자가 본 피해의식: 비트겐슈타인」중에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저마다의 상처가 있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어서, 또 어떤 이는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서, 또 어떤 이는 가난해서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가 피해의식이 될 때, 그들은 너무 쉽게 자신을 절대적 피해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이처럼 만연한 피해의식은 만연한 절대적 피해자를 양산한다.
모두가 절대적 피해자가 된 세상을 상상해보라. 모두가 자기 상처와 고통에 매몰되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안쓰러운 존재라고 믿는 세상을 상상해보라. 그 세상은 어떤 세상이겠는가? 자신보다 더 상처받고 고통받은 이들에게 무관심하거나·냉소적이거나·폭력적인·세상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모두들 자신의 이기적인 삶을 정당화하는 세상일 수밖에 없다. 피해의식은 개인적인 삶만 불행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피해의식이 만연해질수록 공동체적 불행 역시 만연해질 수밖에 없다.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중에서
피해의식은 언제 옅어지는가?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할 때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이들에게 쉽게 말한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라!” 이보다 무지하고 순진한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나를 향한 주관성, 너를 향한 객관성’이라는 보편적 조건 안에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인간 내면의 보편적 조건을 몰랐다면 무지한 것이고, 이 보편적 조건을 무시하려 했다면 순진한 것이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었다면, 세상의 피해의식은 이미 모두 사라졌을 테다.
우리는 언제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되는가? 사랑할 때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만 인간의 보편적 조건을 뒤집을 수 있다. ‘나를 향한 객관성, 너를 향한 주관성’. 바로 이 뒤집힌 조건 속에서만 우리는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사랑이 피해의식을 무력화시키는 작동 원리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말라. 그저 한 사람을 사랑하라. 그때 우리는 인간의 보편적 조건 너머 자기 객관화에 이르고, 비로소 피해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랑, 자기 객관화에 이르는 길」중에서
‘나’는 이제 돈에 매여 살지 않는다. 있으면 있는 대로 쓰고, 없으면 적게 쓰고, 더 없으면 번다. 돈에 관한 피해의식이 거의 없다. 돈에 쪼들렸던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건 다 기억난다. 대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새로운 기억을 쌓았다. 신체가 변화될 정도의 기억들. 돈이 없지만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 돈보다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기쁘게 살아가는 이들. 그들을 보며 다시 심장이 콩닥거렸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신체가 변용되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부터 벗어났고, 동시에 피해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다.
‘그’ 역시 그렇게 나쁜 기억과 결별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어린 시절 왜 그렇게 심하게 자신을 때렸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답장을 했다. “정말 미안하다. 아버지가 못나서 그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짧은 편지를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지금 그는 “아직 결혼할 자신은 없지만 결혼이 꼭 아이 인생을 망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을 함께 떠나보냈다.
‘그녀’ 역시 그렇게 오래된 나쁜 기억과 결별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시작했다. 사랑스런 연인의 입맞춤과 손길에서 이전과 전혀 다른 떨림을 경험했다. 그 신체적 떨림은 두려움의 떨림이 아니라 설렘의 떨림이었다. 연인과 첫 잠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지금 그녀는 “여전히 남자들을 믿을 수는 없지만, 모든 남자가 짐승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는 새로운 기억으로 과거의 나쁜 기억과 피해의식을 함께 떠나보냈다.
---「기억 너머 새로운 기억으로」중에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저주처럼 들러붙은 피해의식을 부정하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긍정해야 한다. 그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을 볼 수 있으면 된다. 이를 통해 이질의 피해의식을 대해서 이해하고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피해의식이라는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난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노동조합원들이 여성 운동을 함께하는 사회, 페미니스트들이 성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 성소수자들이 장애인 인권을 위해 함께 싸워주는 사회다. 더 나아가 페미니스트들과 성소수자들과 장애인들이 노동조합원들과 함께 자본주의에 맞설 수 있는 사회다. 이렇게 ‘나’의 피해의식 너머 ‘너’의 피해의식마저 껴안아 연대하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모든 피해의식이 함께 연대해서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사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인가?
---「피해의식으로 연대하기」중에서
불편한 삶의 진실이 있다.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피해의식을 갖게 된 피해자는 선하지 않다. 피해의식은 광기 어린 폭력성을 띤다. 왜 그런가? 피해의식은 언제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유대인들(시오니스트)은 ‘피해자’라는 이름의 ‘가해자’가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을까? 이유는 하나다. 바로 자신이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해는 자신이 엄청난 피해자이니, 자신이 행하는 어떤 폭력도 괜찮다는 무의식적 정당화의 결과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의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대인들의 상처는 나치들에 의한 것이다. 이것이 합리적 사고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휩싸인 시오니스트들은 이런 합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을 상대로 비합리적 보상 심리를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하거나 싸우거나」중에서
아비투스도, 피해의식도 우리에게 영원히 들러붙은 저주가 아니다. 피해의식은 습관(아비투스)일 뿐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강고한 습관이지만,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습관은 아니다. 어떤 습관도 ‘구조화된 구조’인 동시에 ‘구조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오랜 시간 우리를 지배해온 ‘습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답할 수 있다. 매혹적인 마주침과 고통을 견디는 실천을 통해서다.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가장 먼저, 매혹적인 마주침을 찾아 떠나야 한다. 매혹적인 마주침을 만났다면, 고통을 견디며 새로운 습관을 위한 실천을 해나가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 우리의 오래 습관인 피해의식과 결별할 수 있다.
---「피해의식은 아비투스다」중에서
길원옥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이다. 그녀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이 또 있을까? 그녀는 군국주의 망령에 사로잡힌 일본에 의해 참혹한 일들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하지만 그녀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인들이 고통받고 있을 때, 자신의 고통은 잠시 잊고 일본인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걱정해주었다. 심지어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일본을 돕고 싶다고 전했다. 이것이 바로 피해의식 너머의 삶이다. 이는 얼마나 귀하며 드문 삶인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귀하며 드문 법이다. 내게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다.
길원옥 할머니는 어떻게 피해의식을 벗어났을까? 길원옥 할머니의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그 크고 깊은 상처가 그리 쉬이 아물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피해의식에 잠식당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혜롭기 때문이다. 지혜는 무엇인가? ‘나’의 상처를 돌보며, ‘너’의 상처마저 돌보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의 상처를 모두 치유하는 일이다. 그것이 지혜다. 만약 길원옥 할머니가 지혜롭지 않았다면, ‘나’의 상처에만 매여 일본의 참사에 은근히 통쾌해하거나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를 일이다. 피해의식에 휩싸인 흔한 이들처럼 말이다.
그녀는 지혜롭다. 이것이 그녀가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대로 치유해가고, ‘너’의 고통에 대해서는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일본 정부에 진심 어린 사죄를 요구한다. 이는 ‘나’의 고통은 그것대로 치유해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너’를 배려한다. 심지어 그 ‘너’가 ‘나’의 고통에 깊게 관계된 ‘너(일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우리’ 모두 고통을 치유해주고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이가 또 있을까?
---「내겐 너무 아름다운 그녀」중에서
출판사 리뷰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한 사람의 피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철학과 정신분석학을 통해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파헤치다
‘피해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누구나 ‘피해의식’이란 단어를 쓰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모호하고 뒤엉킨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마음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을 서서히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의식처럼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며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안경’을 통해 ‘피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준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피해의식이 자리 잡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라고 정의한다. 오랜 시간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누가 손을 올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감싸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가난·외모·학벌·성차별 등으로 상처받은 아이는 누가 가난·외모·학벌·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화들짝 놀라며 화를 내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처럼 반복되었던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바로 피해의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피해의식을 ‘그저 나쁜 것’으로 여긴다. 이는 피해의식이 삶에서 주로 느닷없는 감정 폭발이나 이해할 수 없는 고집, 자기연민 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피해의식은 멀리하려 하고, 자신의 피해의식은 숨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으면 누구나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피해의식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피해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을 ‘비이성적 감정’이 아닌 ‘자기보호 장치’로 볼 수 있을 때, 피해의식 너머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볼 수 있는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깊은 상처가 반복되어서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흔(피해의식)을 흉터(부정적)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깊은 상처로 인해 피부를 꿰맨 상흔을 보며 흉하다고 인상만 찌푸리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날카로운 말로 다그치기 전에,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한다. ‘나’의 피해의식이건 ‘너’의 피해의식이건, 그것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__「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에서
저자는 피해의식 그 자체가 아닌,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즉, ‘상처받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이 과도해지면 우리 삶을 심각한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느라 삶이 불행해지고 있다면, 그 과도한 부분은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교통사고(상처)의 경험이 있는 ‘수철’과 ‘선빈’의 이야기를 통해 ‘피해의식에 휩싸인 슬픈 삶’과 ‘피해의식을 넘어선 기쁜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철’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이해 못할 바 없다. ‘수철’은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다시 교통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수철’ 역시 자기 나름대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철’의 자기방어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이 과도한 자기방어는 건강하지 않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수철’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과도하게 자신을 지키려 한 대가로 바다의 시원함도, 꽃의 향기도, 산 정상의 풍광도 만끽할 수 없을 테다. 그뿐인가?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소중한 친구도 만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 오히려 그 상처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서글픈 일이다. 집 밖에 나오지 않으면 결국은 영원히 집 안에서 지난 상처만 되새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는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선빈’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선빈’ 역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두려웠다. 횡단보도 앞에 서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주변을 살펴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됐다. 그런 ‘선빈’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선빈’은 횡단보도를 지나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선빈’은 그녀와 함께 산과 바다, 영화와 음악을 여행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 매혹적인 순간들 덕분에 ‘선빈’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종종 잊게 됐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자신의 상처마저 치유되는 삶. 이는 얼마나 유쾌하고 기쁜 삶인가? __「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피해의식 너머 기쁜 삶!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을 상처받은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을 그저 위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상처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이론적 토대와 실천 방안들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세상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씩씩한 삶’을 설파해온 저자의 철학을 잘 반영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수철’의 삶보다 ‘선빈’의 삶에 마음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는 진짜 이야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피해의식을 이해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피해의식을 소개한다. 보통 피해의식을 떠올리면, 가난이나 외모에 대한 상처 혹은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모습 등을 연상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피해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은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사람마다 상처받은 기억은 다 다르고,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양상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이라는 여섯 가지 감정을 통해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승주’는 사랑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어린 시절 늘 바빴던 부모님은 ‘승주’를 집에 혼자 남겨두었다. 빈집에 남겨진 ‘승주’는 늘 혼자 베란다에 서서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법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미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 ‘승주’는 종종 피해의식에 휩싸이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을 보면 정체 모를 분노가 일었다.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승주’는 누군가를 만날 삶의 의욕을 놓아버렸다. 시간이 지나 ‘승주’는 모든 것이 억울해졌다. __「자기방어의 결과: 억울함, 우울함」에서
‘재길’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재길’은 가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나간 건지 빚쟁이들을 피한 건지 늘 곁에 없었고, 남겨진 ‘재길’과 엄마는 모텔은 전전해야 했다. 옆방 연인의 신음 소리가 여덟 살 아이의 귀에 들릴까 봐 엄마는 흐느끼며 ‘재길’의 귀를 막아주었다. ‘재길’은 돈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길’은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재길’은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늘 심장이 두근거렸다.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다시 음습한 모텔에서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던 아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__「자기방어의 도구: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에서
저자가 피해의식을 그려내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저자는 그 피해의식을 갖게 된 사람의 서사와 감정선을 따라 그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가 환자나 내담자의 증상을 해석하는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영화감독이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마치 그 사람에 대한 단편 영화를 보듯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이는 저자가 오랜 시간 인문 공동체를 이끌며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리얼리티다.
저자는 가난·외모·학벌·성차별·권력 등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의식뿐만 아니라, 직장에 대한 피해의식(“나는 힘들게 일하는데 너는 왜 편하게 일해?”), 우유부단 피해의식(“나는 할 말 못하고 사는데 왜 넌 하고 싶은 말 다 해?”), 오해에 대한 피해의식(“사람들은 항상 날 오해하고 있어!”), 강박증적 피해의식(“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히스테리적 피해의식(“나만 항상 눈치보고 살고 있어!”) 등 보다 은밀하고 기묘하기에 일상에서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피해의식들도 소개한다. 그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을 마주하다 보면, ‘이거 내 이야기인가?’ ‘이거 내 남편(아내·친구·연인·부모·가족·직장 동료) 같은데?’ 하며 머릿속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나아가 그 사람에게도 이런 단편 영화 같은 안쓰러운 서사가 있지는 않을지 고민해보길 권장한다. “최대한 많은 피해의식을 소개하려고 했어요. 나와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저자의 전언이다.
“피해의식은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는 거대한 감옥이다.”
개인적 피해의식 너머 사회적 피해의식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마찰, 분열의 근원인 ‘피해의식’에 비상경보기를 울리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우리’의 피해의식으로 논의를 넓혀나간다. 우선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 외모·가난·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외모지상주의·황금만능주의·학벌지상주의라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피해의식이 권력자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해의식은 권력자의 체제 강화·유지 수단으로 기능한다. 달리 말해, 권력자들은 의도적 상처를 통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한다. 이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었다.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심지어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했다.
나의 마음은 왜 그리 뒤틀어졌던 것일까?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저 가난했기 때문에 돈벌레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자(정부·자본가)의 의도적 상처가 이미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곧바로 돈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려면, 권력자의 의도적 상처(매개체)가 개입되어야 한다.
나는 왜 돈벌레가 되었을까? 특정 정부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복지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하고(정규직 축소·비정규직 확대 정책), 집값(부동산)을 폭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도적 상처(무한경쟁·각자도생) 때문에 나는 돈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가난해서 상처받았던 기억에, 이런 의도적 상처까지 더해질 때 어찌 돈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 앞에서 돈벌레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__「‘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에서
저자는 권력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부 언론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폭로한다. 일부 언론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수시로 자극하여 편 가르기를 조장한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이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지, 그 원리를 파헤친다.
언론은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곧바로 피해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가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나’의 상처가 유독 큰 상처라고 믿을 때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증폭된다. 일부 언론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파고들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은 대단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우리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반복해서 말한다. “너도 돈 없잖아. 너도 힘들게 살고 있잖아. 너 돈 없었을 때 누가 도와줬어?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까먹은 거야?”
과도하게 반복되는 친구의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비범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그래, 나도 지금 힘들잖아.’). 심지어 추위에 떨고 있는 이에게 기묘한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나는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데, 너는 뻔뻔하게 구걸해서 돈을 번다고?’). 이것이 일부 언론사가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__「피해의식과 언론」에서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우리의 피해의식은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증폭된다. 그렇게 짙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나’와 ‘너’는 오직 자신의 상처와 고통만을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는 둔감하고 무례하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개인이 된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사회에 드러나 있는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모두 피해의식 도사라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피해의식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하며, 우리 사회에 비상경보기를 울린다. 그리고 개인적 피해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피해의식을 극복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 역시 마련해준다.
“글을 읽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네요.”
읽으면 읽을수록 속 시끄러워지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을 넘어선 아름다운 삶과 사회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떠오르는 기억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오래 걸렸습니다.” “온통 제 이야기인 것 같아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독자들의 댓글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나 역시 원고를 읽는 것이 힘들었다. 나 역시 원고를 읽을 때마다 나의 피해의식과 상처받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너머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정직하게 말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가슴이 답답했다. 저자의 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피해의식이 어떻게 우리 삶과 사회를 파괴하는지 생생하게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나의 상처에서 너의 상처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다 어려워보였다. 아마도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낸 독자라면 나와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대한 이 밀도 높은 이야기와 몇 달을 씨름하고 나니 그 답답한 마음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대신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 내 피해의식을 잘 돌보아줄 수 있겠다는 자신감. 상처받은 마음을 다 치유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앞으로도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내 피해의식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내 피해의식 때문에 나만 과도하게 방어하느라 혹여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여유.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가 만났던 상처받은 ‘너’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책으로 엮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상처받는 순간마다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원한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 이성복”
엮은이 김혜원 씀
한 사람의 피해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철학과 정신분석학을 통해 피해의식의 발생 원리를 파헤치다
‘피해의식’은 이해하기 어려운 마음이다. 누구나 ‘피해의식’이란 단어를 쓰지만, 정작 그 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모호하고 뒤엉킨 우리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마음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삶을 서서히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피해의식처럼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며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자는 철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안경’을 통해 ‘피해의식’이라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준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마음에 어떻게 피해의식이 자리 잡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선 저자는 피해의식을 ‘상처받은 기억으로 인한 과도한 자기방어’라고 정의한다. 오랜 시간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는 누가 손을 올리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감싸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오랜 시간 가난·외모·학벌·성차별 등으로 상처받은 아이는 누가 가난·외모·학벌·성차별에 대한 이야기만 꺼내도 화들짝 놀라며 화를 내는 등의 방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처럼 반복되었던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바로 피해의식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는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저자의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흔히 피해의식을 ‘그저 나쁜 것’으로 여긴다. 이는 피해의식이 삶에서 주로 느닷없는 감정 폭발이나 이해할 수 없는 고집, 자기연민 등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피해의식은 멀리하려 하고, 자신의 피해의식은 숨기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저자는 “상처받으면 누구나 자신을 보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피해의식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피해의식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의식을 ‘비이성적 감정’이 아닌 ‘자기보호 장치’로 볼 수 있을 때, 피해의식 너머 한 사람의 ‘상처받은 마음’을 볼 수 있는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은 한 사람의 마음에 남은 상흔일 뿐이다. 깊은 상처가 반복되어서 오래도록 아물지 못한 피딱지 같은 상흔. 한 사람의 상흔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상흔(피해의식)을 흉터(부정적)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깊은 상처로 인해 피부를 꿰맨 상흔을 보며 흉하다고 인상만 찌푸리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일인가?
‘나’의 상흔이건 ‘너’의 상흔이건, 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상흔(피해의식)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상처(고통)를 먼저 보아주어야 한다. 겁이 많은 아이는 다그치지 말고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피해의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피해의식에 대해 날카로운 말로 다그치기 전에, 먼저 따뜻하게 안아주어야 한다. ‘나’의 피해의식이건 ‘너’의 피해의식이건, 그것에 대해 차갑게 가치 평가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마음을 살펴주어야 한다. “너는 이런 상처로 인해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구나.” 이것이 피해의식을 다루는 첫 번째 작업이다.” __「피해의식은 나쁜 것일까?」에서
저자는 피해의식 그 자체가 아닌,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 끼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즉, ‘상처받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이 과도해지면 우리 삶을 심각한 불행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과도하게 자신을 보호하느라 삶이 불행해지고 있다면, 그 과도한 부분은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교통사고(상처)의 경험이 있는 ‘수철’과 ‘선빈’의 이야기를 통해 ‘피해의식에 휩싸인 슬픈 삶’과 ‘피해의식을 넘어선 기쁜 삶’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수철’은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이해 못할 바 없다. ‘수철’은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면 다시 교통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수철’ 역시 자기 나름대로 자기방어를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수철’의 자기방어에는 ‘과도한’ 측면이 있다. 이 과도한 자기방어는 건강하지 않다. 과도한 자기방어는 우리네 삶에 크고 작은 불행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수철’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과도하게 자신을 지키려 한 대가로 바다의 시원함도, 꽃의 향기도, 산 정상의 풍광도 만끽할 수 없을 테다. 그뿐인가?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낼 소중한 친구도 만날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다 오히려 그 상처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서글픈 일이다. 집 밖에 나오지 않으면 결국은 영원히 집 안에서 지난 상처만 되새기며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이는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선빈’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선빈’ 역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두려웠다. 횡단보도 앞에 서면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몇 번이고 주변을 살펴야 했다. 그렇게 겨우겨우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게 됐다. 그런 ‘선빈’에게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선빈’은 횡단보도를 지나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렇게 ‘선빈’은 그녀와 함께 산과 바다, 영화와 음악을 여행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 매혹적인 순간들 덕분에 ‘선빈’은 자신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종종 잊게 됐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자신의 상처마저 치유되는 삶. 이는 얼마나 유쾌하고 기쁜 삶인가? __「피해의식은 과도한 자기방어다」에서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피해의식 너머 기쁜 삶! 저자는 상처받은 이들을 상처받은 채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들을 그저 위로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이 상처에서 한 걸음 걸어 나와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다양한 이론적 토대와 실천 방안들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관점은 철학자이자 인문주의자로서 오랜 시간 세상 사람들에게 ‘유쾌하고 씩씩한 삶’을 설파해온 저자의 철학을 잘 반영한다.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수철’의 삶보다 ‘선빈’의 삶에 마음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피해의식은 사람마다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리네 삶과 맞닿아 있는 진짜 이야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나’와 ‘너’의 피해의식을 이해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매우 다양한 종류의 피해의식을 소개한다. 보통 피해의식을 떠올리면, 가난이나 외모에 대한 상처 혹은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모습 등을 연상하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피해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은 그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는 당연한 결과다. 사람마다 상처받은 기억은 다 다르고, 그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양상 또한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두려움·분노·열등감·무기력·억울함·우울함이라는 여섯 가지 감정을 통해 피해의식이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승주’는 사랑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어린 시절 늘 바빴던 부모님은 ‘승주’를 집에 혼자 남겨두었다. 빈집에 남겨진 ‘승주’는 늘 혼자 베란다에 서서 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그저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것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법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도 미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받지 못한 ‘승주’는 종종 피해의식에 휩싸이곤 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다. 누군가에게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을 보면 정체 모를 분노가 일었다. 누군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을 보면 열등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승주’는 누군가를 만날 삶의 의욕을 놓아버렸다. 시간이 지나 ‘승주’는 모든 것이 억울해졌다. __「자기방어의 결과: 억울함, 우울함」에서
‘재길’은 돈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 ‘재길’은 가난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유년 시절을 피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돈을 벌러 나간 건지 빚쟁이들을 피한 건지 늘 곁에 없었고, 남겨진 ‘재길’과 엄마는 모텔은 전전해야 했다. 옆방 연인의 신음 소리가 여덟 살 아이의 귀에 들릴까 봐 엄마는 흐느끼며 ‘재길’의 귀를 막아주었다. ‘재길’은 돈 때문에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았고, 그로 인해 과도한 자기방어의 마음이 생겼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길’은 대기업에 취직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룬 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하지만 ‘재길’은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늘 심장이 두근거렸다. 통장에서 크고 작은 돈이 빠져나갈 때마다 다시 음습한 모텔에서 엄마와 부둥켜안고 울던 아이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__「자기방어의 도구: 두려움, 분노, 열등감, 무기력」에서
저자가 피해의식을 그려내는 방식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어떤 종류의 피해의식이든, 저자는 그 피해의식을 갖게 된 사람의 서사와 감정선을 따라 그 모습을 그려낸다. 이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사가 환자나 내담자의 증상을 해석하는 방식과는 결이 다르다. 오히려 영화감독이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에 가깝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한 사람의 상처받은 기억이 어떻게 피해의식이 되고, 그 피해의식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마치 그 사람에 대한 단편 영화를 보듯 생생히 체험하게 된다. 이는 저자가 오랜 시간 인문 공동체를 이끌며 상처받은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왔기에 가능한 리얼리티다.
저자는 가난·외모·학벌·성차별·권력 등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피해의식뿐만 아니라, 직장에 대한 피해의식(“나는 힘들게 일하는데 너는 왜 편하게 일해?”), 우유부단 피해의식(“나는 할 말 못하고 사는데 왜 넌 하고 싶은 말 다 해?”), 오해에 대한 피해의식(“사람들은 항상 날 오해하고 있어!”), 강박증적 피해의식(“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히스테리적 피해의식(“나만 항상 눈치보고 살고 있어!”) 등 보다 은밀하고 기묘하기에 일상에서 쉽게 알아채기 어려운 피해의식들도 소개한다. 그 다종다양한 피해의식을 마주하다 보면, ‘이거 내 이야기인가?’ ‘이거 내 남편(아내·친구·연인·부모·가족·직장 동료) 같은데?’ 하며 머릿속에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그 사람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이 혹시 피해의식 때문은 아니었을지, 나아가 그 사람에게도 이런 단편 영화 같은 안쓰러운 서사가 있지는 않을지 고민해보길 권장한다. “최대한 많은 피해의식을 소개하려고 했어요. 나와 다른 상처를 가진 이들에 대한 감수성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저자의 전언이다.
“피해의식은 서로가 서로를 옭아매는 거대한 감옥이다.”
개인적 피해의식 너머 사회적 피해의식까지
우리 사회의 갈등과 마찰, 분열의 근원인 ‘피해의식’에 비상경보기를 울리다
저자의 논의는 개인적 차원에서 멈추지 않는다. 저자는 ‘나’와 ‘너’의 피해의식 너머 ‘우리’의 피해의식으로 논의를 넓혀나간다. 우선 저자는 한 개인의 피해의식에 사회적 문제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한 사람에게 외모·가난·학벌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외모지상주의·황금만능주의·학벌지상주의라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형성된 마음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피해의식이 권력자의 체제 유지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피해의식은 권력자의 체제 강화·유지 수단으로 기능한다. 달리 말해, 권력자들은 의도적 상처를 통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방치하고 조장한다. 이를 통해 기존의 체제를 강화하고 유지한다. 이는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가난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다. 악착같이 돈을 벌고 싶었다.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면서까지, 심지어 타인에게 크고 작은 상처를 주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했다.
나의 마음은 왜 그리 뒤틀어졌던 것일까? 가난했기 때문일까? 그저 가난했기 때문에 돈벌레가 되었던 것일까? 아니다. 거기에는 권력자(정부·자본가)의 의도적 상처가 이미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가난하다고 곧바로 돈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나’와 ‘돈벌레 나’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하려면, 권력자의 의도적 상처(매개체)가 개입되어야 한다.
나는 왜 돈벌레가 되었을까? 특정 정부가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하는 복지 정책을 무력화시키고, 고용을 불안정하게 하고(정규직 축소·비정규직 확대 정책), 집값(부동산)을 폭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도적 상처(무한경쟁·각자도생) 때문에 나는 돈벌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가난해서 상처받았던 기억에, 이런 의도적 상처까지 더해질 때 어찌 돈벌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이 없으면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혹은 생존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 앞에서 돈벌레가 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__「‘슬픔의 공동체’의 원인, 피해의식」에서
저자는 권력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 일부 언론이 공모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폭로한다. 일부 언론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수시로 자극하여 편 가르기를 조장한다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부 언론이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지, 그 원리를 파헤친다.
언론은 어떻게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가? 누구에게나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곧바로 피해의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상처가 ‘나’에게만 일어났다고 여기거나 혹은 ‘나’의 상처가 유독 큰 상처라고 믿을 때 피해의식은 촉발되고 증폭된다. 일부 언론사들은 바로 이 지점을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파고들어 대중들의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한다.
언론이 피해의식을 촉발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은 대단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에게 우리가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주려고 한다. 이때 옆에 있던 친구가 반복해서 말한다. “너도 돈 없잖아. 너도 힘들게 살고 있잖아. 너 돈 없었을 때 누가 도와줬어? 그때 얼마나 비참했는지 까먹은 거야?”
과도하게 반복되는 친구의 말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비범한 이들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그래, 나도 지금 힘들잖아.’). 심지어 추위에 떨고 있는 이에게 기묘한 반감이 생길 수도 있다(‘나는 힘들게 일해서 돈 버는데, 너는 뻔뻔하게 구걸해서 돈을 번다고?’). 이것이 일부 언론사가 피해의식을 촉발·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__「피해의식과 언론」에서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방치하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우리의 피해의식은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증폭된다. 그렇게 짙은 피해의식에 휩싸인 ‘나’와 ‘너’는 오직 자신의 상처와 고통만을 크게 생각하고,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는 둔감하고 무례하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개인이 된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다시 집단을 이룰 때, 우리 사회에는 아귀다툼 같은 갈등과 마찰, 분열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빈부 갈등,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등 우리 사회에 드러나 있는 사회적 갈등의 근본에는 모두 피해의식 도사라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피해의식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될 잠재적 요소라고 하며, 우리 사회에 비상경보기를 울린다. 그리고 개인적 피해의식과 더불어 사회적 피해의식을 극복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 역시 마련해준다.
“글을 읽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네요.”
읽으면 읽을수록 속 시끄러워지는 책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을 넘어선 아름다운 삶과 사회에 대한 희망이 생긴다
이 책은 결코 단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떠오르는 기억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하루에 몇 장 읽기 어려운 책이다. “글을 읽는 데 멈춰지게 되는 순간이 많아서 오래 걸렸습니다.” “온통 제 이야기인 것 같아 여간 힘든 게 아니네요.” 이 책의 전신인 브런치스토리 연재에 달렸던 독자들의 댓글이다. 이 책의 편집자인 나 역시 원고를 읽는 것이 힘들었다. 나 역시 원고를 읽을 때마다 나의 피해의식과 상처받은 기억들을 끊임없이 떠올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 너머에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정직하게 말한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가슴이 답답했다. 저자의 긴 이야기를 따라가며, 피해의식이 어떻게 우리 삶과 사회를 파괴하는지 생생하게 알게 되었지만, 동시에 그 피해의식을 넘어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나의 상처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치유하는 것도, 나의 상처에서 너의 상처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다 어려워보였다. 아마도 이 책을 진지하게 읽어낸 독자라면 나와 같은 기분이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의식에 대한 이 밀도 높은 이야기와 몇 달을 씨름하고 나니 그 답답한 마음이 신기하게 사라졌다. 대신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앞으로 내 피해의식을 잘 돌보아줄 수 있겠다는 자신감. 상처받은 마음을 다 치유해서가 아니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도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앞으로도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 잠시 멈추어 서서 내 피해의식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내 피해의식 때문에 나만 과도하게 방어하느라 혹여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여유. 피해의식이라는 모호하고 뒤엉킨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도록 이 책이 길잡이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가 만났던 상처받은 ‘너’들을 위해 이 이야기를 썼다.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내가 상처받을 때마다 꺼내볼 수 있는 책으로 엮고 싶었다. 나는 앞으로 상처받는 순간마다 이 책을 꺼내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상처받지 않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들 때문에 피해의식에 휩싸이는 순간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그때 이 책이 상처받은 마음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바이블.’ 언젠가 이 책이 그렇게 불릴 수 있길 기원한다.
“한 사람의 상처는 모든 사람의 상처다. - 이성복”
엮은이 김혜원 씀
'32.심리학 연구 (독서>책소개) > 5.상담심리치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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