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한국사여행 (2024~) [해설서]/6.문화유산 (문화재 궁궐 성곽 능)

[웹북] 환구단

동방박사님 2024. 9. 1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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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구단(圜丘壇)

황궁우 , 1925 년 버튼 홈스 촬영

환구단

종목 사적 제157호 / (1967715일 지정) / 면적 3필지/4,278m2 / 보호구역 : 1필지 764.7m2 / 시대 대한제국(1897) / 소유 한국관광공사 / 관리 서울특별시 중구

위치

서울 소공동(대한민국) / 주소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번지

*정보: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환구단(圜丘壇)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단()이다.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157호로 지정된 환구단은 고종 대에 있던 환구단 본단 터로, 일제가 헐어버리고 건축한 조선호텔 자리이다.

유교권 황제국의 제단

유교의 천자가 하늘인 상제(上帝)와 오방제(五方帝)에게 바치는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다. 환구는 예기에 기록된 천자가 행해야 할 천제(天祭)이다. 이 제사의 본단을 환구단(圜丘壇)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황제가 유교의 예법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장소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자국 이외의 국가들은 모두 오랑캐로 보며 오직 자국 군주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나라같이 유교를 수용하고 외왕내제의 성격을 가진 나라들은 모두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일반적인 동양 전통건축물과 달리 원구단은 둥글거나 혹은 원에 가까운 팔각정 같은 형태를 한 경우가 많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고 해서, 동양에서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일반적인 기와집 건물들은 사각형이 대부분이지만 이것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므로 둥글게 지은 것이다.

이름

천원지방의 사상에 기초하여 지은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구단이라 불렸는데 오늘날 환구단으로도 불린다. '둥글 원', '돌 환' 두 가지 훈음으로 읽으면서 생긴 혼란이다. 본래 의 이체자로 구별 없이 쓰여서 이 건물이 세워질 때는 원구단이 맞다. 은 구한말 화폐 단위의 이름으로 쓰였는데, 1910년 발행된 구한국은행권을 보면, 한자로 이라 하고 한글로는 ""이 아니라 ""이라 표기하고 있다. , 애초에 은 원으로 읽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3년 화폐개혁시 화폐단위를 에서 으로 바꾸고 음독을 ''으로 변경한 이래 사람들이 원구단을 환구단으로 바꾸어 읽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241124, 1925625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분명히 한글로는 원구단으로 표기되어 있다.

원래는 거대한 규모를 가진 대한제국의 성역(聖域)으로 지정되었던 곳이었으나 일제가 1913년에 호텔 신축을 이유로 철거하여 원구단 본단(本壇)은 없어지고, 대신 원구단의 상징물 격인 '황궁우(皇穹宇)'만 남았다. 현재 원구단 본단 자리에는 웨스틴 조선호텔이 세워져 있다.

지정 사유

환구단(圜丘壇)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제천행사는 농경문화의 형성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삼국시대부터는 국가적인 제천의례로 시행된 것으로 믿어진다.

고려 성종 2(983) 정월에 처음 시행되어 설치와 폐지를 계속 되풀이하다가 조선초에 제천의례가 억제되자 폐지되었다. 세조 2(1456)에는 일시적으로 제도화하여 1457년에 환구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세조 10(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환구단에서의 제사는 중단되었다. 환구단이 다시 설치된 것은 고종 34(1897) 조선이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현재 환구단의 터에는 황궁우와 석고 3개가 남아있다. 황궁우는 1899년에 만들어진 3층의 8각 건물이며, 석고는 악기를 상징하는 듯한 모습으로 화려한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913년 일제에 의해 환구단은 헐리고 그 터에는 지금의 조선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개요

한국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 고구려 태조대왕때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환구제(圜丘祭)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성종(재위 981997) 때부터라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에 제천의례는 큰 중요성을 갖지 못하다가, 조선 세조(재위 14551468) 때 왕권강화를 위해 환구제를 다시 부활시켰으나, 세조 10년에 폐지하고 종묘로 대체하였다. 조선왕조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천자가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다시 설치되었다.

역사

1906 년의 모습 .  좌측에 황궁우가 ,  우측에 환구단이 보인다 .

 

본단에서 바라본 황궁우

1897(광무 원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환구단에 나아가 천지에 고하는 제사를 드린 후 황제에 즉위했다. 당시 환구단이 마련된 곳은 중국 사신들을 접대하던 남별궁(南別宮)이 있던 자리로,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에는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신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12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정자로,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광무 4)에 환구의 북쪽에 건립하여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 앞에는 1902(광무 7)에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돌로 만든 북[石鼓]을 세웠는데, 이 북은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 무늬가 있다.

환구단과 황궁우는 당시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다.

한편, 1960년대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이 2007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되어 복원 공사가 진행되어 2009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기년

환구단에는 없고 중국 천단에만 있는 기년전(祈年殿)은 중직경 32m높이 38m25개의 중심에 유지된 건축물로서, 중국 군주들이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에 오곡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던 전각이다.

원구

천지제는 원래 천제(天祭)와 지제로서 원구·방택(方澤)이라 하여 원형단(圓形壇)과 방형단(方形壇)의 형태로 각각 수도의 남쪽 교외와 북쪽 교외에 나누어 세우는 것이 원칙이나, 후일 합제(合祭)하는 것을 통례로 하였다. 그 배향(配享)은 원구의 맨 위층에 천황 상제위(上帝位)를 두고, 지황 지위(祗位대명위(大明位야명위(夜明位) 북두칠성 528수의 성신위(星辰位)와 운사·우사·풍백·뇌사(雷師)·55(五岳五鎭)·44(四海四瀆명산대천·성황사토위(城隍司土位) 등을 둔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음력 917일에 제사할 때 친히 제주(祭主)가 되는 것은 하늘의 아들인 천자이기 때문이며, 국가의 안녕을 축원한다.

환구단 · 황궁우 · 석고전의 건축

환구단은 고종이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중국 사신이 머물던 남별궁터에 3층의 원형 제단 형태로 조성했다. 당시 최고 도편수였던 심의석이 설계, 1000여 명의 인력이 동원돼 10일 만에 완공했다.

사진

환구단 황궁우

 

황궁우 난간
석조 대문
석조 대문 계단
환구단 석고단
환구단 정문

원구단 정문 -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53

대한제국 / 대한제국 고종 / 사직단

[Sources Wikipedia]

환구단

환구단 정문

  대한제국(1897~1910)초기 원구단 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원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시설로,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당시 황궁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맞은편 남별궁터에 세웠다. 원구단의 전체 시설은 제를 올리는 원구단과 천신의 위패를 모시는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 시설로 어재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황궁우 그리고 그 주변시설로 엊실, 향대청, 석고각 등을 갖추었으나 현재 황궁우와 석고각 안에 돌복만 남아있다.

  정문은 원래 황궁우 남족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국가 있는 소공로변에 있었는데, 1960년대 말 철거된 뒤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했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정문으로 사용하던 문이 원래 원구단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복원을 논의했다. 여러 후보지 가운데 좀 더 많은 시민이 원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하도록 서울광장, 덕수궁과 마주보는원구단 시민광장으로 자리를 정했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측 칸을 좁게 조정했다. 기둥위에는 출목을 갖춘 이익공식 공포를 사용하고, 대한제국황실문장인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활용한 점도 특별하다.

환구단

사적 제 157호 / 1897년 광무원년 /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87-1 번지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 또는 원구단, 원단 이라고도 한다.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1852~1919)이 1897년 황제에 즉위하면서 제국의 예법에 맞추어환구단을 건설하였다. 1897년(광무 원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당시 왕실 최고의 도편수였던 심의석(1854~1924)이 설계하였다. 환구단은 제사를 지내는 3층의 원형제단과 하늘신의 위패를 모시는 3층 팔각 건물 황궁우, 돌로 만든 북, 삼문, 협문 등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환구간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로서 당시 고종황제가 머물던 황궁(현재 덕수궁)과 마주보는자리에 지어졌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209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