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3.삼일운동기억

왕이 없는나라 (황제의 나라에서 국민의 나라로)

동방박사님 2019. 4. 26. 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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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1886~1947 건국준비위원회 연설문에서  (1945.8.16)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첫발을 내 딛게 됐다.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리 이땅을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해야한다,

독립운동가들이 꿈꾼나라

사상의 귀추와 운동의 방향. 나경석 (1890~1959) <개벽 제5호> 1924년3월. 국립중앙도서관제공

공화제, 정치체제의 이상이되다

나경석은 20세기 초 사회의 상황에 따라 사상의 변화를 소개하며 3.1운동이 민중 사상 전환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독립주의를 추구하던 우리나라의 사상을 1905년 이후 입헌군주제론이 대세를 이루었지만, 대한제국이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1910년대 이후에는 공화제가 강력히 대두하여 3.1운동 당시에는 공화제로 귀결되었다. 공화제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가르친 사상이 아니라 조선에서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자연히 나타난 사상이라 말하였다.*공화제: 주권이 인민에게 있고 인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인민의 인권과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하는 체재
조선의 사상계는 3.1운동을 기회삼아 일대 전환했다. 그전의 조선 사상의 주류는 정치적 자유주의, 즉 독립주의였다. 또 조선의 전제정치가 멸망을 가져왔다고 하여 군주입헌정체를 목표삼은 근왕 애국주의를 고조했음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나 그 당시에는 지지받던 정치 사상이었다.그 후 정치가 또 변화하여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다고 발표하니, ... 말살되려던 조선 역사를 연구하여 민족적 자부심을 키우도 또 근대정치의 최고 이상을 공화 대의제로 생각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국내외에서 분주할 때지방열병에 전신이 마비되면서도 장래 조선의 정치체제의 이상에 관해서는 거의 다른 의견 없이 공화제에 귀일 했다.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한용운 (1879-1944) <독립신문> 1919.11.7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다.

한용운이 3.1운동  이후 감옥에서 검사의 심문에 답하기 위하여 작성한 글이다. 조리있고 해박한 이론, 시대와 민족을 초월한 탁월한 사상을 담고 있으며, 당시 세계정세를 궤뚤어 보는 글이다. 이글은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하던 김상호가 비밀리에 빼내어 1919년 11월4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간되던 <독립신문> 제25호의 부록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대요] 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글은 <3.1독립선언서>에 버금가는 독립선언서로, 민족 독립의 대의와  세계평화에의 근본을 밝히는 뛰어난 논설문이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입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압박을 당하는 사람의 주위는 무덤으로 바뀌는 것이며, 쟁탈을 일삼는 자의 주위는 지옥이 되는 것이니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달게 받는 것니다. 이것은 인생의 권리인 동시에 또한 의무이기도 하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으로서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트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각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의 본능이요, 세계의 대세이며, 하늘이찬동하는 바로서 전인류의 앞날에 올 행복의 근원이다. 누가 이를 억제하고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삼일운동 참가자 신문조서 1921

전 국민이 함께한 3.1독립운동

일본은 3.1운동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사건으로 규정 하였다. 3.1운동에 참가하여 심문을 받은 인원은 총362명 이었다. 관련문서의 마지막에는 1919년 3월1일부터 4월30일까지 사건 경과표가 있는데,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 국민이 함께 한 독립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3월1일

(경기 경성부) 4,000명     (평북 의주군)1,200명     (평남 평양부) 1,800명      (평북 선천군)다수

(평북 안주군) 300명        9함남 원산부) 2,500명     (평남 진남포부 ) 130명 


소요사건 도별 일람표(3월1일~4월30일)경기도 129,528명         황해도 38,073명충청남도 40,000명       평안남도 29,267명충청북도 23,730명       평안북도 59,650명전라남도 2,868명         강원도 16,712명전라북도 3,710명         함경남도 12,570명경상남도 70,370명        함경북도 12,570명경상북도 20,526명----------------------------------------                                  합계 463,086명

민족대표 공식재판 기사 <동아일보> 1920.7.22

민족대표의 공식재판에 모든사람의 시선이 모이다.

3.1운동 직후에 체포된 소요사태의 주범, 즉 민족대표 48인의 첫 공판은 1920년 7월 12일에 열렸다.

민족대표 48인은 1919년 3.1운동때 독립선언서의 기초와 서명 인쇄및 배포, 파고다공원 만세 시위등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 참가한 핵심인사가 48명이다. 당시<동아일보>는 관련기사를 잇달아 내 놓았다.

금일이 대공판

만인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당국의 처치는 어떠할지 작년 3월에 탑골공원에서 만세소리가 일어나며 명월관

지점 제1호 실에서는 조선민족대표 33인이 모여 조선독립만세! 를 부르고 독립 선언한 후로 손병희 외 48인은 서대문 감옥 돌벽늘구들에서 답답한 더뉘와 아픈 추위를 겪은지 열여섯달과 열이틀만인 오늘 오전 8시에 이감옥에 매인 사람들의 운명을 결단하는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1920.7.13 동아일보)

3.1운동 민주공화국의씨앗

대한독립선언 1919 독립기념관 제공 

육탄혈전 (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이다

199년 3월 김교현 (金敎㧋 1868~1923)등 39인의 명의로 중국지린 (吉林)에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조소앙(趙素昻 1887~1958)이 기초한 이 선언서는 대한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고 민주의 자립국이라고 선포하면서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할 것과 유탄혈전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3.1독립 선언이나 2.8독립선언에 비해 훨씬 신랄하게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고 더 선명하게 독립의지를 표출했으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안으로 무장투쟁 노선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청산리전쟁 (1920.10,21-26)

이나 봉오동전투 (1930.6.4-6.7)등 중국 무장독립투쟁의 성과로 이어지는 그 출발점 이 바로 이 선언서이다. 

우리대한의 동족 남매와 세계의 우방 동포들이여,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 독립과  신성한 평등 복리로 우리 자손들에게 세대를 거듭하여 전하기 위하여 이에 이 민족전체의 학대와 억압을 벗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아, 우리 마음이 갈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의 본령(本領)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하고,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하며, 하늘(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모든 삿 된것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 (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 지어다.

2.8.독립선언 1919.2.8

 민주주의 위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청년단"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된 국가가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면서 한일 합병조약 (1910.8) 폐지와 조선독립선언, 민족대회 소집 요구, 만국평화회의 (1919,4)에 민족대표 파견등과 함께 영우너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였다. 2.8독립운동은 3.1독립운동을 촉발시킨 선구적운동이다.

모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43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겨례는 실로 세계 최고의 문명 민족 중 하나다......

우리 겨례는  아득히 뛰어난 문화를 가졌고 반만년 간 국가생활의 경험을 가진 자라. 비록 많은 세월 전제 정치의 해독과 경우의 불행이 우리겨레의 오늘로 이르게 하였다 하더라도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위에 선진국의 본보기를 따라 새로운 국가를 건설 한 뒤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겨례는 반드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할지라. 이에 우리겨례는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겨례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겨례는 생존을 위하여 자유 행동을 취하여서 우리겨례의 독립을 이루기를 선언하노라.

대동단결 선언. 1917년

2.8독립선언  1919.2.8

대동단결 선언 1917

황제권 소멸의 때가 민권 발생의 때이다.

1917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신규식(1879-1922)등이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민족대회 소집을 제의한 선언이다. 이 선언문은 주권이 민족의 고유한 것이므로 융희(수농) 황제 (재위1907-1910)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국민에게 양보한 것으로 보아야하며, 국내 동포가 일본의 속박을 받고 있으니 그 주권 행사의 권리와 의무를 해외 동지가 감당해야 한다는 취지였다.이 선언문은 독립운동의 논리를 확립하고 정부적 통합 체계를 계획 함으로서 그동안 전개되어 온 여러갈래의 독립운동 노선들을 하나로 결집하였다. 

융희(순종)황제가 삼보(三寶: 토지.백성.정치)를 포기한 8월29일은 즉 우리동지가 삼보를 게승한 8월29일이니 그 사이 순간도 멈춤이 없다. 우리 동지는 완전한 상속자이고 저 황제권 소멸의 때가 즉 민권발생의 때이다.구한국 최종의 날은 즉 신한국최초의 날이니 무었 때문인가. 우리한국은 태초부터 한인韓人 의 한韓 이고 비한인(非韓人)은 한인(韓人)이 아니다. 한국인의 주권수수는 역사불문법 국가 헌법이고, 비한인에게 주권 양여는 근본적 무효로 한국민성(韓國民性)의 절대 허락하지 않는바이다. 때문에 경술년 융휘황제의 주권포기는 즉 우리 국민동지에 대한 묵시적 선위이니 우리 동지는 당연히 삼보를 계승하여 통치할 특권이 있고 또한 대통을 상속할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2천만 국민과 삼천리 영토(領土)와 사천의 주권을 우리 동지가 상속하였고 상속하는 중이며 상속할 에정이니 우리동지는 이에 대하여 무한 책임이 중대하다.  

민중, 국권 희복에 앞장서다

독립신문 대한제국.1987.3.9

백성의 권리

한국 매체들은 외국 정치 제도. 사상 소개에 그치지 않고, 사회 변혁을 위한 주장을 펴 나갔다. 독립신문은 백성들의 자유와 평등, 권리에 대한 주장을 백성이 곧 나라의 주인이라는 논리로 확장시켰다.1897년 3월9일자 논설에서 "인민이 나라의 근본이며, 나라의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국민주권론을 주장했다.

나라가 진보되어 가는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것은 그나라 사람들이 자기들의 백성된 권리를 찿으려 하는지 여부이다. 우리가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벼슬을 아니 하는 사람만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에 사는 사람은 모두 그 나라 백성이다. 백성마다 얼마큼 하나님이 주신권리는 누구도 빼앗지 못하는 권리요, 그 권리를 가지고 백성노릇을  잘 하여야 그 나라 임금의 권리가 높아지고 나라의 지체가 높아지는 법이다. 조선 백성들은 몇백 년을 자기 나라사람에게 압제를 받아 백성의 권리라는 것은 당초에 다 잊어버렸고 또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한성순보 1884.2.7

민주주의에 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인[한성순보] (1883년창간)는 서양정치제도를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한성순보]의 이글은 [중국공보 中國公報]에 실린 글을 옮긴 것으로, 한국의 신문 가운데 처음으로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언급한 글이다. 또한 미국의 정치 체제에 관한 기사에서 프레지던트를 대통령이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한국에서 '대통령'이라는 말을 쓴 첫 기사였다.

서양각국에서 행한 여러 제도의 가장 중요한 요점은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이 국민에게 있으며, 국민으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본 원인은 모든 사람이 행도하기 때문이다.... 임금과 신하라고 해서 손발과 귀와 눈이 더 길거나 많지않고, 서민이라고 해서 귀와 눈과 손발이 적거나 짧지 않다. 이로 보아 나라를 다스리는 법 역시 국민에게서 나와야지 한 사람이 마음대로 주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민중의 권한을 모아서 한사람에게 모아 통치자가 되도록하니, 이것이 바로 국왕을 선거하게 된 기원이며, 그를 보좌하는관원을 역시 그렇게한다. 이렇듯 민중의 권한을 한 사람에게 위임하여 민중에게 유익하게 하고 반역이나 가혹한 정치가 없도록 하니 이것을 만드는 이유다

지구전요 최한기 조선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통령제도

한국 지식인들은 19세기 중반 중국과 일본 책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입헌군주제, 프랑스와 미국의 공화제 같은 서구의 정치체제를 이해하며, '민주공화국'의 뜻을 알게되었다. [지구전요]는 최한기가 서양을 바르게 이해하기위해서 중국인의 저서 [영환지략] [해국도지] 등을 정리한 책이다. 최한기는 미국의  대통령제도, 대통령과 의회의 관계등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조지워싱턴 (1732~1799)이 국가를 세워 선거의 법을 처음 만들었으며 여론에 다라 정치를 하는데, 비록 국왕은 세우지 않았으나 정치는 신속하고 법령이 잘 시행된다고 평가 했다. 최한기는 단순히 미국과 영국의 제도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고 긍정적인 평가를 덧 붙이고 있다.

비록 국왕을 세우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일이 간단하고, 정사가 신속하고, 명령이 행해지고, 법이 지켜지니 어진 국왕이 다스리는 바와 다름이 없다. 이것은 정치를 변화시켜서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이룬 것이다... 건륭 54년(1789)에 논의하여 미국을 세워서 콜롬비아의 워싱턴을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그길로 국왕을 세우지 않고 마침네 프리지던트 한사람을 두어서 전국의 군사, 형벌, 부세, 관리의 출척을 총체적으로 관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군국의 중요한 사안과 외국과의 조약 밎 전쟁과 관계되는 일과 같은 것은 반드시 의회와 모여 함께 의논한 후에 행하였다.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 전시회 / 국립 중앙 박물관 전시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