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4.동양역사문화

중국과 아시아

동방박사님 2022. 3. 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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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근현대 중국인들이 제기했던 다양한 아시아주의를 검토함으로써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중국 중심의 새로운 아시아 국제질서의 향방을 가늠해본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중국의 개혁 개방은, 급속한 경제 성장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그 결과 중국의 국제적 지위 또한 급속하게 상승하게 만들었다. 특히 2008년 베이징(北京) 올림픽으로 고무된 중국인들의 자심감과 2009년 세계 경제위기를 통해 확고해진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급기야 중국으로 하여금 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G2로서의 지위를 갖게 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이러한 초강대국화와 그에 따른 국제적 영향력의 확대가, 19세기 중엽 이래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아래 억눌려 왔던 아시아에서의 중국의 주도권을 회복시키는 계기가 될 것은 분명하다. 이 점은 중국이 강대해지면 주변 지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중국의 헤게모니(주도권)가 강력하게 행사되었던 동아시아 역사상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초강대국화는, 향후 어떠한 형태의 아시아 내지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가져올 것인가? 새롭게 대두하게 될 중국 중심의 아시아 국제질서는, 비록 중국 중심의 전통적 아시아 국제질서인 중화제국질서(中華帝國秩序)와는 그 내용과 형태를 달리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 또 역사상 중국의 영향력을 가장 민감하게 받아온 한반도의 경우 중국 중심의 이러한 새로운 아시아 국제질서 가운데서 어떠한 지위에 처하게 될 것인가?

현실적으로 매우 긴박한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근현대사의 범위 안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출발점이다. 이 책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 1940년대까지의 시기에 중국인들에 의해 제기되었던 아시아주의(亞洲主義) 혹은 대아시아주의에 대한 실증적 검토를 통해 근현대 시기 중국인들의 아시아 인식과 아시아연대에 대한 주장이 어떤 내용과 특색을 가지고 있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목차

제1부 19세기 말 개혁파와 아시아주의
제1장 황쭌셴의『조선책략』과 아시아주의
제2장 량치차오와 아시아주의:『대동합방신의』의 출판과 중화주의의 변용

제2부 1910~1920년대 공화혁명과 아시아주의
제1장 신해혁명 시기 쑨원의 아시아 인식
제2장 1920년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제3부 1930~1940년대 중일전쟁 시기의 한국·아시아 인식
제1장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국민정부의 한국 인식과 대한정책(對韓政策)
제2장 카이로회담에서의 한국문제와 중국의 전후 아시아 구상
제3장 친일을 위한 아시아연대론: 왕징웨이의 아시아주의

저자 소개

저자 : 배경한
신라대학교 사학과 교수. 중국현대사 전공. 주요 저서 『장개석 연구』』(1995), 『從韓國看的中華民國史』(2004), 『쑨원과 한국』(2007), 『왕징웨이 연구』(2012)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조선책략』은 기본적으로 청국에게 최대의 적으로 간주되고 있던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을 이용하려는 목적 아래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 미국과 연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아시아 지역 연대의 모양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청국과 일본의 연대라고 하는 것도 러시아의 남침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완전한 동상이몽이었고 더구나 미국이라는 서양 열강을 연대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는 서구 열강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공동 대응이라는 흥아회류(類)의 아시아주의와도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오히려 러시아와 일본의 침략 아래 중국의 종주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조선에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청국의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유지 내지 강화해가려는 것을 기본 의도로 한다는 점에서 “이이제이”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 화이관(華夷觀), 즉 중화질서의 국제관이 더 크게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p.49

신해혁명 전후 시기 쑨원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비록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공존하는 복잡한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면모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문제인 한국문제에 대한 쑨원의 소극적 내지 자기 규제적 태도를 고려할 경우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쑨원의 인식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또 마찬가지 입장에서 쑨원이 강조하고 있던 중일연대나 중일공동영도를 전제로 하는 아시아주의 주장도 한국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고 있던 제국주의 열강 일본에 대한 쑨원의 인식이 얼마나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p.89-90

아편전쟁 이후 점증하는 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은 제국에서 약소국으로 몰락하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했다. 이에 따라 주변 지역이나 국가들을 조공국(朝貢國)이라는 명목 아래 일종의 완충지대로 확보하는 전통적 국제체제, 즉 중화제국질서도 와해되어버렸다. 이를테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아시아 국제질서 또한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국민혁명(國民革命)의 성공으로 난징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라는 중앙집권적 통일정부를 만들게 된 것은 중국이 국민국가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강대국 중국’의 회복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기(轉機)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 이후 본격화된 제국주의 일본의 중국 침략과 1937년 칠칠사변(七七事變) 이후 전면전으로 확대된 8년간의 중일전쟁은 ‘강대국 중국’의 회복 시도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으니, … 이러한 상황 아래 1941년 12월에 발발한 태평양전쟁과 그에 이은 미국의 참전은, 오랜 항전으로 거의 고사 직전에 놓여 있던 중국과 중국인들에게 승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 1940년대 종전(終戰)을 전후한 시기 장제스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정부의 새로운 아시아 질서 구상을 살펴보는 것은 전후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중국의 의도와 함께 이러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중국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된다. --- p.127-129

한국광복군 창설을 둘러싼 한국임시정부와 국민정부 사이에 벌어진 논의는 1940년 한국임시정부의 충칭 정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는데, 그것은 임시정부의 독자적 운영권 확보 노력과 이에 대한 중국의 견제 및 통제 정책을 잘 보여준다. 중국은「한국광복군행동구개준승」을 제정해 광복군을 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실제적인 군 운영도 군사위원회에서 파견한 중국 장교들이 장악하도록 했다. 중국의 이러한 정책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외국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일면 타당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러한 조치는 항일을 위한 연대라는 중한호조(中韓互助) 측면이나 한국망명정부에 대한 인도적 지원 측면보다는 주변 약소민족에 대한 통제와 예속 측면을 더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p.146

동아시아의 발칸이라고 불리던 한반도의 경우 일본 패망으로 해방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미국과 소련이라는 새로운 열강들의 분할 점령에 놓이게 되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 시도는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으로 말미암아 중국이 사대강국(四大强國)에 포함되기는 했으나, 장제스의 걱정대로 ‘강대국 중국’은 아직 그 명실이 상부하지 못했던 것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국민정부가 도모하고 있던 한국정책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 이전 상태의 아시아 국제절서의 회복과 그것을 통한 중국의 주도권 회복을 잘 보여주고 있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전후 아시아 구상은 전통적 중화제국체제의 회복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 p.148
 

출판사 리뷰

동아시아연대와 중국 중심의 아시아 국제질서는 공존할 수 있는가

1990년대 이래로 한국,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각국에서 동아시아공동체 내지 동아시아연대론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동아시아담론이 연대론만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또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 아시아연대론 자체도 그 내용이나 방향에서 일정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다만 이들 다양한 동아시아공동체 내지 동아시아연대론의 배경에는, 개별 국민국가의 배타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이념적 지향과 유럽연합(EU)의 성립으로 고무된 지역 통합의 필요성 대두, 세계화와 함께 나타나고 있는 초국가적 내지 탈경계적 공동체에 대한 모색 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론과 전술한 중국 중심의 아시아 질서의 대두라고 하는 현상은 일견 상반되는 것으로 비쳐진다. 호혜와 협력, 평화적 공존을 전제로 하는 동아시아공동체 내지 동아시아연대는 중심과 주변의 관계나 상하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초강대국 중국 중심의 아시아 국제질서와는 출발에서부터 공존하기 어려운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근현대 중국의 아시아주의의 다양한 모습과 그 맥락에 주목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을 제외하고서 아시아의 온전한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에 동의한다고 하면, 중국인들의 아시아 인식과 아시아연대에 대한 논의들을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야 연대론을 중요한 이념적 목표로 삼는 동아시아담론이나 이를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민운동으로서의 아시아연대운동의 가능성 문제를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 연구는 동아시아담론의 현실적 기반과 그 실현 가능성을 검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중국 사상계에서의 아시아연대

중국의 경우 과연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에 대한 인식이나 탐구, 또 그를 기반으로 하는 아시아연대의 모색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만큼 중국 안에서 아시아에 대한 논의 자체가 드문 것이 사실이다. 중국에서 아시아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이러한 현상은 물론 중국이 세계 인식의 중심이라고 하는, 따라서 중국과 그 주변으로서 아시아를 상정하는 중화주의적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중국 중심적 아시아 인식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사고 속에서 대등한 존재로서의 주변국 내지 아시아라는 관념이 자리 잡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이래로 중국의 사상계에서는 아시아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주의 주장이 꾸준하게 제기되어왔다. 중국에서 본격적으로 아시아주의가 등장한 것은, 일본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받은, 캉유웨이(康有爲)와 량치차오(梁啓超)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개혁파 사상가들 및 이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황쭌셴(黃遵憲)의 아시아연대 주장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대표되는 황쭌셴의 아시아연대론과 거기에 나타나는 일본 아시아주의의 영향 및 그것이 가지는 성격을 다루는 한편, 일본인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의『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 개혁파 인물들에 의해『대동합방신의(大東合邦新義)』로 번안(飜案) 출판되는 과정과 두 책 사이의 내용상 차이점에서 드러나는 개혁파 인사들의 아시아에 대한 이해와 아시아연대 구상을 살펴보고 있다.

쑨원, 장제스, 왕징웨이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혁명파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쑨원(孫文)이다. 쑨원은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1905년 중국혁명동맹회 창립 과정에서도 이들의 지지를 적지 않게 받았다. 이런 까닭에 쑨원은 동맹회 시기부터 일본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특히 말년인 1924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고베(神戶)에서 행한 ‘대아시아주의[大亞洲主義] 강연’은 이러한 그의 아시아주의 주장을 총괄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으로 크게 주목받아왔다. 다만 그의 아시아주의는 일본과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라고 하는 불평등한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 열강 일본에 대한 의존과 함께 여전히 전통적 중화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쑨원은 특히 자신의 이 강연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의 독립을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아시아인들 사이의 평등한 연대를 보여주기는 처음부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 중일전쟁의 후반에 해당하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 발발 이후 시기에 장제스(蔣介石)와 국민정부(國民政府)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이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전후(戰後) 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구상에 접근한다. 또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새로운 축을 만드는 데 출발점이 된 1943년 11월 말의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장제스와 국민정부의 카이로회의 준비 과정에서부터 카이로회의에서의 실제 논의 과정을 중심으로 구체적으로 다룸으로써 중국의 전후 새로운 아시아 구상에 접근한다. 물론 장제스는 아시아주의를 언급한 적이 거의 없고 그런 까닭에 아시아주의자라고 말하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앞에서 논의해온 근현대 중국의 아시아주의 주장이 가지는 현실적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장제스와 같은 실제 정책 결정자의 아시아 인식이나 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1937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중일전쟁 시기 아시아주의의 등장과 특징을 살피기 위해 1938년 말 충칭(重慶) 탈출 이후 만들어지는 왕징웨이(汪精衛) 친일정권에서의 아시아주의의 왜곡 내지 굴절 문제이다. 쑨원의 아시아주의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왕징웨이 친일정권의 아시아주의는 한마디로 친일 논리로서 이용된 아시아연대 주장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이 또한 당시 일본에서 침략 이념으로 이용되고 있던 아시아연대 주장, 곧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주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 아시아주의와 중국 아시아주의의 관계,
근현대 중국의 아시아주의와 중화주의


이상의 19세기 말 개혁파 인사들에서부터 1940년대 친일연대론과 장제스의 전후 아시아 구상에 이르는 근현대 중국의 아시아주의에 접근하는 기본적인 연구 시각으로는 두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한 가지는 동시대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어떠한 영향 관계에 있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사실 중국의 아시아주의가 그 출발에서부터 일본이 아시아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면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영향을 밝혀내면서 그 유사성과 상이점을 밝히는 작업이야말로 중국 아시아주의의 성격을 파악하고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대목이 될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시각은, 근현대 중국의 다양한 아시아주의의 내면에 들어 있는 전통적 중화주의의 존재 혹은 잔재를 밝혀내는 작업으로서 이 또한 중국 아시아주의의 내면적 성격이나 한계성을 보여주는 데 유효한 시각이 될 것이다. 근현대 중국의 아시아주의와 중화주의의 관련성을 생각할 때 변법파와 같이 비교적 전통의 영향이 크게 남아 있었다고 짐작되는 인물들의 아시아주의가 전통적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일이지만, 1919년 오사운동(五四運動) 이후 단계에 가서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보편화되고 그 결과로 반제(反帝)민족주의 사조 및 반제민족주의 운동이 본격화한 이후 단계에 가서도 아시아의 연대를 주장하는 대목 속에 이러한 중국 중심주의가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중국 아시아주의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전통적 중화주의의 잔재를 밝혀내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