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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지평 의병기념관 (기념비.전시관)

동방박사님 2023. 6. 1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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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의병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반기를 든 유생들이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 축출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일으킨 최초의 항일 의병이다.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본에 대항하여 싸운 임진왜란 이후의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이라는데 의의가 크다

양평 출신 의병장

이춘영 (李春永)

지평출신이며 안승우의 부친 안종응과 거의 계책을 논의하고 김백선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지평의병을 창의하였다.

안종응(安種㣹). 안승우(安承禹) 父子

뛰어난 학자였던 안종응은 아들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의병거사를 권고하고, 이춘영이 포군장 김백선을 찾아가 함께 창의한 계책을 일러주었다. 아들 안승우는 군무도유사로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국 역당의 맢잡이 무리와 혈전을 겨루었다.

김백선 (金伯善)

이춘영과 합세하여 지평의병을 창의하였다. 지평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단양장화협전투와 충주성 점령 등 의병전투력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승룡 (李承龍)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양근에서 의병을 모아 전술훈련을 시키고 양근의병장이 되어 남한산성에서 주력부대로 활동하였다.

손덕화 (孫德化). 손용문(孫龍文) 父子

손덕화는 류인석 의진에 참여하여 충주성 전투에서 적과 싸웠고, 그 후  제천에서 다른 의병들과 집결하여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佳興)을 공격하는 가운데 전사하였다. 그는 어린 아들 손영문 또한 초산(楚山)전투 때 2백여 리 밖에서 달려와 적군의 공격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어 류인석의진에게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김성화(金性化), 김재관(金在觀), 임을선(林乙善) 등이 있다.

을미의병 기념비

을미의병 기념비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양평문화원이 주축되어 건립한 비이다.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의 강제 시행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한말 최초의 항일의병전쟁이다. 1895년 11월(음) 이춘영 (李春永)과 김백선(金伯先)이 지평에서 포군 4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안승우(安承禹)가 원주 안창에서 합류하여 창의를 선포하였다. 지평의병은 원중, 단양, 충주 등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인근 강원, 충북 지역 의병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지평의병의 구국정신은 이후 1907년 정미의병 및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희망의 횃불  : 지평의병 - 구국의 투혼이 서린 땅 

위정척사사상으로 외세에 맞선 이항로

양평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이항로에 의해 정립된 위정척화사상를 통해 양평인들의 머릿속에 국방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지평에서 의병을 창의한 것도 화서학파의 유림들이었다. 화서학파는 일제와 비타협적으로 맞서며 일제강점기에는 만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상해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끌었다. 화서학파에서 독립유공 서훈을 받은 사람이 233명이고 103명이 순국했다.

의병봉기의 거점이 된 교통의 요지, 양평

양평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지리적 여건으로 뱃길과 육로가 맞나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중앙의 소식을 가장 빨리 접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의병 봉기는 양평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갔다. 또한 용문산이 있어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하기에 알맞은 지형과 지세를 갖췄다. 후기의병인 정미의병전쟁때 권득수, 조인환 의병대장 등은 용문사을 근거지 삼아 게릴라전을 펼쳐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지형,자세와 지리적 조건은 의병을 소모하고 주둔시키기에도 적합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82~1868)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82~1868)

화서 이항로 선생은 1792년(정조16)에 양근근(현 양평군) 벽계리에서 태어났다. 서른에 이미 명성이 경향 각지로 퍼져 그 문하에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면암 최익현과 13도 의병대장 유인석 등이 문하생으로 이항로의 강학실은 우국충절의 교육장이었다

지평현 여지도 (서울대 규장각소장)

지평여지도 (서울대 규장각소장)

1882년에 제작된 옛 지평현 지도의 몽미산 아래에 관아건물들이 보인다. 관아중심에 내아, 동헌, 객사, 향교, 동고, 서고, 향청, 사창, 화약고, 장청, 작청, 군기고, 연무정 등은 지평의병이 창의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고장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지평면 지평리가 조선시대에도 지평의 중심부였다.

이근원(李根元, 184~1918)
금계집(錦溪集)

금계집(錦溪集)

금계집은 조선말기 학자  이근원(李根元, 184~1918)의 시문집으로 원(元) 형(亨) 이(李) 정(9貞) 4책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스승 중암 김평묵과 성재 유중교에게 올린 서신, 사우 및 제자들과 시사(時事)에 관한 것이 많다. 이를 통해 20세기 초의 국제정세와 국내정치 및 사회적 문제를 이해하고 역사적 변천 과정에서 유학자들의 활약상을 살필 수 있다.

이근원은 지평출신으로 자는 문중(文仲) 호는 금계(錦溪) 본관은 전주이다. 1866년 (고종3)에 이항로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스승이 서거한 후 김평묵, 유중교를 사사하여 화석학파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저항의 역사

19세기 말 서구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동아시아삼국(한.중.일)은 문호를 개방한다. 조선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이들이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반영되기도 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본격화되자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운동 등 국권 수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1882 임오군란

1884 갑신정변

1895 을미의병

1895년 10월 명성왕후시해사건과 11월 단발령 공포에 대한 반발로 양평지역의 화서학파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 1895년 말 이춘영이 안종응과 계책을 논의 한 뒤 포장군 김백선을 찾아가 거병을 결의,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砥平義陳)을 창의하였다. 

1905 을사의병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이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하자, 이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 평민의병장이 출현하는 등 평민들도 의병단체를 만들어 항일의병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07 정미의병

고종의 강제 퇴위로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에 참여해 의병은 더욱 조직적인 작전전개가 가능해졌다.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양평을 거점으로 서울진공 작전의  실행을 준비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1905년 5월21일 프랑스 일간지 '라 크로와 일뤼스트레'에 게재된 의병학살 장면

'철도파괴 혐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3명의 한국인이 산채로 십자가에 달린 뒤 총격을 받는다. 처형이 끝나면 일본장교가 다가와 총알의 성능을 확인한다."

1907년 8월4일 프랑스 일간지' 르 프티 주루날'에 게재된 남대문전투  

"일제의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분노한 병력이 봉기하여 서소문에서 일본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다. 한국군 뿐 만아니라 시민들도 적지 않게 참살되었다."

명성왕후 반차도

명성왕후반차도

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이 일어난지 2년2개월 후인 1897년 11월22일의 명성왕후 장례식 장면

맥켄지

맥켄지 (Mackenzie1869~1931)

영국 런던 데일리메일의 종군기자로 1904년과 1906년 두차례 한국을 방문,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독립운동을 후원한다. 2014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 본 지평의병

 1906년부터 1907년까지 2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의병전쟁 지역을 답사한 멕켄지는 1907년 11월 7일과 8일, 삼산리전투가 벌어진 직후 양평지역을 방문해 그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그간 만난 의병에는 군인과 유생, 농민, 어린 소녀병사도 있었다. 그는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고 기록하고 한국인들의 애국심이 무었인지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맥켄지 (Mckenzie F.A)가 마주한 비극

영국의 신문기자였던 맥켄지는 1904년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내한 후 겪은 구한말의 폭압적인 현실과 일본의 만행, 그리고 탄압을 적나라하게 작성하여 조선의 비극 (THE TRAGEDY OF KOREA) 이라는 책과 1919년 3.1운동사를 중심으로 한 한국독립운동 (KOREA'S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을 발표한다. 

의병장과의 만남

11월 7일 맘 멕켄지는 어느 의병부대 의병장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멕켄지 : "야간 습격에 대비해 초병을 세우는 것이 어떻습니까?"

의병장: " 초병을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주민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요."

맥켄지 :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잇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

의병 사진으로 유일한 이 사진들은 현재의 양평군 오빈리로 추정되는 남한강에서 맥켄지에 의해서 촬영되었다.

일본군의 잔혹상

멕켄지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다시 의병을 만났는데 패배한 의병들을 부상병이나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조직적으로 몰살하는 일본군의 잔혹상을 듣고 기록했다. 또 의병뿐만 아니라 도처의 민가를 방화하고 주민을 학살 했으며, 살해하는 잔인한 장면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일본군은 도처에 불을 지르고 다님과 동시에, 반란군을 도왔다는 혐의가 있는 자를 다수 사살했다. 한국인들이 나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 줄때 그들이 마지막에 꼭 하는 말은, 일제 사격을 가한 후 총살대를 지휘하는 일본장교는 시체에 다가가 칼로 찌르거나 베거나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빙성을 확실히 보증할 수 있는 어는 영국인에게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김백선 金百先  (1849~ 1896)
구한말의 의병장

경기도양평군청운면갈운리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주 김씨이며 원래 이름은 도제(道濟), 백선(伯善)은 자()이다. 1896년 을미의병의 선봉장이 되어 싸웠고, 같은 해 327일 생을 마쳤다. 당시 47세였다. 1968년 대통령 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있으며 1894년 지평면에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였던 전적이 있으며 1895년을미사변때 국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먹고 양평 지역에서 400명의 포수를 이끌고 의병 궐기에 앞장서며 양평 지역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가흥에서 일본군 토벌 부대와 싸웠을 때 지원군의 부재로 패망하면서 제천에 있던 유인석과 안승우에게 항의를 하였다가 항명죄 때문에 1896년 총살형에 처해졌다.

항일의병의 효시, 지평의병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11월 단발령의 공포 후 지평출신 이춘영과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400여 명이 국가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 안창에서 지평의진을 창의하여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원주 관아와 제천 관아를 잇달아 점령하고 단양의 장회협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의병봉기의 도화선이 된 최초의 척사의병이다.

벽문수록

벽문수록 

벽문의 글을 모아 편찬한 책이다. 

3편의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말기의 유학자였던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가 지은 글이다. 유중교의 저작이 아닌 3편 중 2편은 여교남소청과 별지인데, 이 두 글의 저자는 유중교의 동문이자 스승인 중암 김평묵 (重庵 金平默)이다 나머지 1편은 담김조저어로서 유중교의 스승인 화서 이항로의  저작이다.

국맥지평의병 (國脈 砥平 義兵)

 

국맥 지평의병 (國脈砥平義兵)

지평의 의병사를 연구한 책. 경기도 양평을 왜 의향이라고 하는지 밝히고, 한말의병의 발원지란 사실과 우리독립운동사 양평군 지평면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양평 의병을 둘러싼 여러 오류와 논란을 가다듬을 수 있는 다양한 기록들이 담겨있다.

 

육의사열전 (六義士列傳)

육의사열전 (六義士列傳)

의암 유인석 선생 휘하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던 이춘영, 안승우, 서상렬, 주용규, 이범직 등 5인의 의병장과 병신년 (1896) 4월13일 제천 싸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친 홍사구의 항쟁기록

종의록 (從義錄)

종의록 (從義錄)

의병항쟁의 최고지도자였던 의암 유인석 선생과 함께 했던 지평출신 이춘영, 안승우 의병장 등의 피묻은 전투기록

꺼지지 않은 희망, 양평 의병전쟁

일제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일제의 반식민지화되자 의병활동은 다시금 봉기하게 되었다. 을미의병이 화서학파에 의한 거의 였다면 정미의병은 평민층과 해산된 군인들이 주도했다. 1907년 11월 초, 각지의 5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부대가 서울 진공 작전을 목표로 지평 삼산리(三山里)에 집결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삼산리 전투를 치루게 되었고, 의병의 근거지라고 하여 양평지역의 유서 깊은 사찰인 용문사. 상원사 등이 불태워지는 피해를 보는 등 강력한 탄압이 혹독했다.  그러나 의병의 항일의지는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양평 출신 후기 의병장

권득수 (權得洙)

용문산을 근거지로 하여 양평, 양주, 이천, 지평 일대에서 2백여 명이 넘는 의병진을 편성하고 용문사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활동했다. 서울로 진격하는 도중 일본기병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격전을 치렀으며 다른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인제군 일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춘수(金春洙)

홍천에서 칭의하여 2백여 명을 인솔하고 양평, 여주, 광주 일대에서 활동했다.

이연년(李延秊)

전기의병장 이승룡의 장자로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하자 의병장으로 추대받아 활동을 개시하였으며, 지평의 김춘수 의진에 합류하였다.

조인환(曺仁煥)

군대해산 직후 국권을 희복하고자 용문산으로 들어가 용문사와 상원사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박광천(朴光天) 안기영(安基永, 안승우 子) 윤태운(尹泰勳), 이성서(李聖瑞).이재복(李再福). 정영운(鄭永雲) 등이 있다.

양평 의병전쟁의 전개

후기의병이라고 말하는 양평의 의병전쟁은 1905년 5-6월경 구만서가 이끄는 의병부대 50여 명이 지평군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양평 의병전쟁은 1907년 7월 고종퇴위와 8월 군대해산을 계기로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면서, 한말 정미의병의 중심지가 되었고, 13도연합의병진이 결성될 당시에는 원주-제천-양근-지평-양주를 잇는 의병부대 이동축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용문산전투와 삼산리전투를 한말 의병전쟁사에 남겼다. 

용문사전투(龍門寺戰鬪)

1907년 8월24일 용문사에 근거를 두었던 조인환부대는 토벌에 나선 일본보병 제52년대, 제9중대와 격전했다. 아카시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토벌대는 용문사에 쌓아 둔 의병 군량과 군수물자를 찾아내어 불태웠다. 이때 천년고찰 용문사도 소실되었다.

삼산리 전투 (三山里 戰鬪)

의병전쟁 중 매우 규모가 큰 전투로 각 지에서 집결한 의병부대 5천 명은 1907년 11월7일부터 2일간 삼산리에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 양평 의병전쟁의 태동기

후기 의병전쟁의 깃발을 들다.

- 1905년 6월7일 새벽 구만서가 이끄는 50여명의 의병부대가 지평군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

- 양평출신 이문호가 지평에서 봉기하고 13도에 통문을 보내 의병거의를 촉구

- 이범수가 5월 말과 7월 초에 양근과 지평부대를 결성

- 심상희 의병부대가 여주에서 창의하여 양평에서 활동 시작

2. 양평 의병전쟁의 절정기

전국 의병 지평으로 향하다.

- 1907년 7월 한갑복을 중심으로 지평에서 의거한 의병 부대는 홍천과 원주중심으로 활동

- 의병장 권득수는 200여 명을 모집, 용문산에 주둔하며 인근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 의병장 조인환 부대는 지평관아를 습격하여 군수 김태식 처단

- 양평에서 의병활동이 거세지자 일제는 의병진압을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

- 이인영을 중심으로 연합의병 모색, 각 지방의 의병장 들에게 통합사령부 창설 및 서울 진군 호소

- 각지에서 약 5천명의 의병 부대가 지평(양동)에 집결

- 의병 창의대장 이인영은 일제 통감에게 '성토격서'(선전포고문)을 보내고 '삼산리전투' 수행  

3. 지구전에 들어간 양평의병

끈질긴  저항이 이어지다.

- 의병장 김춘수와 김홍렬이 일본군에 체포

- 양평지역 의병활동 소규모 집단의 유격전으로 변화

- 1908년 7월4일, 의병 18명이 양근 서북 50리 지점에서 광주수비대와 교전한 것을 시작으로 한일합방이 이루어지는 1910년 6월까지 약40여회의 전투 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