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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올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거장 알렉산더 라비노비치의 1976년 작 The Bolsheviks Come to Power: The Revolution of 1917 in Petrograd가 개정돼 미국?한국 등지에서 재출간됐다. 본디 러시아 혁명을 소수의 쿠데타로 보는 보수적 견해의 소유자였던 라비노비치는 엄정한 학술 연구를 통해 볼셰비키가 당시 대중의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10월혁명도 진정한 대중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삼은 이 책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는 주로 1917년 7월 봉기부터 10월혁명까지를 상세히 다룬다. 또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혁명가들의 논쟁과 실천, 평범한 노동자와 병사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이야기 등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걸작이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삼은 이 책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는 주로 1917년 7월 봉기부터 10월혁명까지를 상세히 다룬다. 또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혁명가들의 논쟁과 실천, 평범한 노동자와 병사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이야기 등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걸작이다.
목차
러시아 혁명 100주년판 머리말
한국어판 머리말
프롤로그: 2월부터 7월까지
1장 | 7월봉기
2장 | 공격당하는 볼셰비키
3장 | 반동기의 페트로그라드
4장 | 효과 없는 탄압
5장 | 다시 일어서는 볼셰비키
6장 | 코르닐로프의 대두
7장 | 코르닐로프 대 케렌스키
8장 | 코르닐로프의 패배와 볼셰비키
9장 | 신정부 문제
10장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1장 | 봉기를 위한 레닌의 투쟁
12장 | 봉기의 장애물
13장 | 수비대 위기와 혁명군사위원회
14장 | 전야
15장 | 볼셰비키가 권력에 이르다
에필로그: 왜 볼셰비키가 승리했는가
후주
옮긴이의 말
용어 찾아보기
인명 찾아보기
한국어판 머리말
프롤로그: 2월부터 7월까지
1장 | 7월봉기
2장 | 공격당하는 볼셰비키
3장 | 반동기의 페트로그라드
4장 | 효과 없는 탄압
5장 | 다시 일어서는 볼셰비키
6장 | 코르닐로프의 대두
7장 | 코르닐로프 대 케렌스키
8장 | 코르닐로프의 패배와 볼셰비키
9장 | 신정부 문제
10장 |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1장 | 봉기를 위한 레닌의 투쟁
12장 | 봉기의 장애물
13장 | 수비대 위기와 혁명군사위원회
14장 | 전야
15장 | 볼셰비키가 권력에 이르다
에필로그: 왜 볼셰비키가 승리했는가
후주
옮긴이의 말
용어 찾아보기
인명 찾아보기
책 속으로
7월봉기 때 볼셰비키 ‘군사조직’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조급함에 반대한 레닌
당은 이미 싸움에 휘말려 들어갔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선동 작업은 명백히 거리의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위자들이 든 깃발에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이 씌어 있었다. 조직에 새로 가입한 수비대 병사들의 압력을 받아 볼셰비키 ‘군사조직’은 당중앙위원회의 허가 없이 처음부터 운동의 조직화를 도왔다. 물론 7월 3일 오후에 당중앙위원회는 운동을 억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겨우 몇 시간 뒤, 시위가 이미 진행되자 ‘군사조직’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지도부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뒤늦게 당중앙위원회가 당의 종전 입장을 철회하고 시위를 공개 승인했다. 이어서 ‘군사조직’이 운동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강력하고 폭넓은 무력지원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
레닌은 수병들에게 연설하려고 2층 발코니로 나서면서, ‘군사조직’ 간부 몇 사람에게 “당신들 모두 얻어맞아야 하는데!”라고 투덜댔다. 이때 레닌이 한 이중적 발언은 그의 딜레마를 반영했다. 레닌은 인사말을 몇 마디 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고는 수병들에게 자제, 결단, 경계를 호소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때 레닌의 연설을 들은 한 사람은 몇 해 뒤에 당시 레닌이 평화적 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많은 수병들에게는 뜻밖이었다고 회고했다. 수병들 사이에 있는 아나키스트와, 아울러 일부 볼셰비키도 싸우기를 열망하는 무장한 군중이 어떻게 무장시위를 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 …
7월 말 볼셰비키 제6차 당대회, 그 논쟁의 현장
러시아 각지에서 온 볼셰비키 지도자 150여 명이 오랫동안 기다린 제6차 당대회 개회식을 위해 7월 26일 밤에 비보르그 구 한복판에 있는 한 민간 협회의 널찍한 회의장에 모였다. 이 전국 볼셰비키 간부회의는 레닌, 트로츠키, 카메네프, 콜론타이, 루나차르스키를 대회 명예 공동의장직에 선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열다섯 차례의 회기를 거쳐 여드레 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끝을 맺었다. …
혁명의 발전과 연관된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는 당대회에서 “현 정치 상황”에 관해 논쟁할 때 주로 논의되었다. 이 논쟁이 벌어진 7월 30~31일의 실무 회기가 의심의 여지 없이 당대회 전체에서 가장 중요했다. 레닌이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트로츠키가 기조 연설을 하고 “현 정치 상황”에 관한 결의문 초안을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대회 개막 이틀 전에 트로츠키가 체포되자, 이 일을 할 사람으로 스탈린이 급하게 선정되었다.
이때 레닌이 주창한 전술 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할 만하다. … 그리고 “레닌파”가 로비를 벌인 노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스탈린이 제6차 당대회에서 현 상황과 앞으로의 진로에 관해 한 발언은 그가 제2차 시협의회에서 했던 연설보다 레닌의 견해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제 모든 면에서 스탈린과 레닌의 입장이 일치했음을 시사해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스탈린은 당대회 초기에 벌어졌던 한 토론에서 “권력이 지금 누구 손에 있는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했다. …
코르닐로프 쿠데타와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선 볼셰비키
1917년의 권력 경합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 사건의 승자였다는 점은 명백했다. 코르닐로프의 패배는 좌익의 거대한 잠재력을 입증해 주었으며 볼셰비키 강령이 지닌 엄청난 매력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그러나 혹자가 그러듯이 코르닐로프의 패배로 레닌의 승리가 불가피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많아 보인다. 대중의 분위기는 볼셰비키 정부를 바라는 정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딱 집어서 볼셰비키적이지는 않았다. 코르닐로프 사태 이후에 쏟아져 나온 정치결의문이 드러내 주듯이, 페트로그라드의 병사, 수병, 노동자 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사회주의 인자를 결합하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이라는 목표에 더 이끌렸다. 그들이 보기에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권력, 즉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어쨌든 7월봉기와 이후의 반동은 대중의 분위기에 의존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었다. …
무장봉기를 결정한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회합
10월 10일 저녁, 늦가을의 한기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막으려고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스몰니에서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을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네바 강 건너 멀리 페테르부르크 방면구에 있는 비밀 회합장소에서 열리는 전략회의에 참석하려는 것이었다. …
레닌이 즉시 행동하자는 열렬한 탄원으로 토론을 시작했는데, 이 탄원은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레닌은 동료들이 “문제의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레닌은 당이 오래전에 이 문제의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시간이 극히 중요하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정부가 혁명의 숨통을 조이는 수단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독일군에 넘겨줄 참이라는 확신을 다시 표명했다. …
끝으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지닌 힘과 정부의 고립과 취약성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역사적인 10월 10일 회의에는 노긴과 리코프 같은 잠재적 동조자가 없었고, 그 밖에 다른 모든 이는 레닌의 편이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빼놓으면, 이때 당중앙위원회 위원들 사이의 견해차는 근본적인 이론상의 쟁점, 또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해야 하느냐는 문제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정부 타도와 권력 이전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빨리 실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봉기를 소비에트 대회와 꼭 연계해야 하는지에 집중되었다. …
10월 25일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계급
소련에서 씌어진 대다수 설명과는 달리, 겨울궁전은 돌격으로 점령되지 않았다. 훗날 안토노프-옵세옌코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늦저녁까지 “겨울궁전 공격 전체는 대체로 극히 무질서한 성격을 띠었다. … 마침내 남아 있는 사관생도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자 나와 추도놉스키는 공격 대원들을 이끌고 겨울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 사관생도들은 이미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임시정부 각료들을 찾아서 궁전 깊숙이 마음대로 침입해 들어갔다. …
루나차르스키가 일어나서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즉각적 인준을 받고자 [노동자, 병사, 농민에게]라는 레닌의 선언문을 제출했다. 이 선언문은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승인하고 최고 정치 권한이 소비에트 대회와 러시아 전역의 지역 소비에트로 넘어왔다고 선포하고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당면 계획의 개요를 가장 포괄적인 용어로 제시했다. 궁극적으로 소비에트의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되는 이 역사적 선언서는 다음과 같다. …
드디어 10월 26일 오전 5시에 혁명 정부 창출을 합법화하는 선언문이 표결에 부쳐져 압도적 차이로 통과되었다. 단 두 명의 대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지고 12명이 기권했다.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들이 스몰니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때, 늦가을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안개 낀 잿빛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위층에서는 녹초가 된 혁명군사위원회 지도자들이 혼잡한 지휘 본부의 바닥에 드러누워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다. …
당은 이미 싸움에 휘말려 들어갔다. 볼셰비키의 강령과 선동 작업은 명백히 거리의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위자들이 든 깃발에는 볼셰비키의 슬로건이 씌어 있었다. 조직에 새로 가입한 수비대 병사들의 압력을 받아 볼셰비키 ‘군사조직’은 당중앙위원회의 허가 없이 처음부터 운동의 조직화를 도왔다. 물론 7월 3일 오후에 당중앙위원회는 운동을 억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겨우 몇 시간 뒤, 시위가 이미 진행되자 ‘군사조직’과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지도부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뒤늦게 당중앙위원회가 당의 종전 입장을 철회하고 시위를 공개 승인했다. 이어서 ‘군사조직’이 운동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강력하고 폭넓은 무력지원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
레닌은 수병들에게 연설하려고 2층 발코니로 나서면서, ‘군사조직’ 간부 몇 사람에게 “당신들 모두 얻어맞아야 하는데!”라고 투덜댔다. 이때 레닌이 한 이중적 발언은 그의 딜레마를 반영했다. 레닌은 인사말을 몇 마디 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이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표명하고는 수병들에게 자제, 결단, 경계를 호소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때 레닌의 연설을 들은 한 사람은 몇 해 뒤에 당시 레닌이 평화적 시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많은 수병들에게는 뜻밖이었다고 회고했다. 수병들 사이에 있는 아나키스트와, 아울러 일부 볼셰비키도 싸우기를 열망하는 무장한 군중이 어떻게 무장시위를 하는 선에서 그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었다. …
7월 말 볼셰비키 제6차 당대회, 그 논쟁의 현장
러시아 각지에서 온 볼셰비키 지도자 150여 명이 오랫동안 기다린 제6차 당대회 개회식을 위해 7월 26일 밤에 비보르그 구 한복판에 있는 한 민간 협회의 널찍한 회의장에 모였다. 이 전국 볼셰비키 간부회의는 레닌, 트로츠키, 카메네프, 콜론타이, 루나차르스키를 대회 명예 공동의장직에 선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열다섯 차례의 회기를 거쳐 여드레 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끝을 맺었다. …
혁명의 발전과 연관된 근본적인 이론적 문제는 당대회에서 “현 정치 상황”에 관해 논쟁할 때 주로 논의되었다. 이 논쟁이 벌어진 7월 30~31일의 실무 회기가 의심의 여지 없이 당대회 전체에서 가장 중요했다. 레닌이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트로츠키가 기조 연설을 하고 “현 정치 상황”에 관한 결의문 초안을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당대회 개막 이틀 전에 트로츠키가 체포되자, 이 일을 할 사람으로 스탈린이 급하게 선정되었다.
이때 레닌이 주창한 전술 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는 데 주목할 만하다. … 그리고 “레닌파”가 로비를 벌인 노력의 결과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스탈린이 제6차 당대회에서 현 상황과 앞으로의 진로에 관해 한 발언은 그가 제2차 시협의회에서 했던 연설보다 레닌의 견해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이제 모든 면에서 스탈린과 레닌의 입장이 일치했음을 시사해주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스탈린은 당대회 초기에 벌어졌던 한 토론에서 “권력이 지금 누구 손에 있는지 아직도 분명하지 않습니다”라고 단언했다. …
코르닐로프 쿠데타와 이를 저지하는 데 앞장선 볼셰비키
1917년의 권력 경합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가 코르닐로프 사건의 승자였다는 점은 명백했다. 코르닐로프의 패배는 좌익의 거대한 잠재력을 입증해 주었으며 볼셰비키 강령이 지닌 엄청난 매력을 다시 한 번 보여 주었다. 그러나 혹자가 그러듯이 코르닐로프의 패배로 레닌의 승리가 불가피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많아 보인다. 대중의 분위기는 볼셰비키 정부를 바라는 정서를 반영한다는 의미에서 딱 집어서 볼셰비키적이지는 않았다. 코르닐로프 사태 이후에 쏟아져 나온 정치결의문이 드러내 주듯이, 페트로그라드의 병사, 수병, 노동자 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사회주의 인자를 결합하는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이라는 목표에 더 이끌렸다. 그들이 보기에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권력, 즉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어쨌든 7월봉기와 이후의 반동은 대중의 분위기에 의존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 주었다. …
무장봉기를 결정한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회합
10월 10일 저녁, 늦가을의 한기와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막으려고 두터운 외투로 몸을 감싼 볼셰비키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이 스몰니에서 한 사람씩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것을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네바 강 건너 멀리 페테르부르크 방면구에 있는 비밀 회합장소에서 열리는 전략회의에 참석하려는 것이었다. …
레닌이 즉시 행동하자는 열렬한 탄원으로 토론을 시작했는데, 이 탄원은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처음부터 레닌은 동료들이 “문제의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레닌은 당이 오래전에 이 문제의 기술적 측면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시간이 극히 중요하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정부가 혁명의 숨통을 조이는 수단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독일군에 넘겨줄 참이라는 확신을 다시 표명했다. …
끝으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지닌 힘과 정부의 고립과 취약성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평가했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역사적인 10월 10일 회의에는 노긴과 리코프 같은 잠재적 동조자가 없었고, 그 밖에 다른 모든 이는 레닌의 편이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빼놓으면, 이때 당중앙위원회 위원들 사이의 견해차는 근본적인 이론상의 쟁점, 또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해야 하느냐는 문제 주위를 맴도는 것이 아니라 정부 타도와 권력 이전을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빨리 실행할 수 있는지, 그리고 봉기를 소비에트 대회와 꼭 연계해야 하는지에 집중되었다. …
10월 25일 혁명에 성공한 볼셰비키와 러시아 노동계급
소련에서 씌어진 대다수 설명과는 달리, 겨울궁전은 돌격으로 점령되지 않았다. 훗날 안토노프-옵세옌코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늦저녁까지 “겨울궁전 공격 전체는 대체로 극히 무질서한 성격을 띠었다. … 마침내 남아 있는 사관생도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지자 나와 추도놉스키는 공격 대원들을 이끌고 겨울궁전 안으로 들어갔다. … 사관생도들은 이미 저항을 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임시정부 각료들을 찾아서 궁전 깊숙이 마음대로 침입해 들어갔다. …
루나차르스키가 일어나서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즉각적 인준을 받고자 [노동자, 병사, 농민에게]라는 레닌의 선언문을 제출했다. 이 선언문은 페트로그라드의 봉기를 승인하고 최고 정치 권한이 소비에트 대회와 러시아 전역의 지역 소비에트로 넘어왔다고 선포하고 신생 소비에트 정권의 당면 계획의 개요를 가장 포괄적인 용어로 제시했다. 궁극적으로 소비에트의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되는 이 역사적 선언서는 다음과 같다. …
드디어 10월 26일 오전 5시에 혁명 정부 창출을 합법화하는 선언문이 표결에 부쳐져 압도적 차이로 통과되었다. 단 두 명의 대의원만이 반대표를 던지고 12명이 기권했다.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들이 스몰니에서 서서히 빠져나올 때, 늦가을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안개 낀 잿빛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위층에서는 녹초가 된 혁명군사위원회 지도자들이 혼잡한 지휘 본부의 바닥에 드러누워 잠깐이라도 눈을 붙였다. …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올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 혁명사 연구의 거장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미국 인디애나대학 명예교수)의 1976년 작 The Bolsheviks Come to Power: The Revolution of 1917 in Petrograd가 개정돼 미국?한국 등지에서 재출간됐다. 영미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대가인 라비노비치가 패기만만한 소장 역사가일 때 내놓은 이 저서는 저자의 1917년 7월 사태 연구(Prelude to Revolution: The Petrograd Bolsheviks and the July Uprising)의 속편 격이며, 볼셰비키의 10월 무장봉기를 다룬 러시아 안팎의 최고 연구서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듣는다. 라비노비치의 이 책은 소련에서 최초로 번역·출간된 서방 학자의 10월혁명 역사서였다.
본디 러시아 혁명을 소수의 쿠데타로 보는 보수적 견해의 소유자였던 라비노비치는 엄정한 학술 연구를 통해 볼셰비키가 당시 대중의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10월혁명도 진정한 대중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삼은 이 책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는 주로 1917년 7월 봉기부터 10월혁명까지를 상세히 다룬다. 또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혁명가들의 논쟁과 실천, 평범한 노동자와 병사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걸작이다.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혁명은 소수 음모 집단의 쿠데타였는가?
치열하고 엄격한 학술적 연구 성과를 실감 나는 르포 형식에 담은 것도 이 책의 강점이다. 예컨대, 라비노비치는 볼셰비키의 1917년 10월 무장봉기를 비민주적 쿠데타로 보는 기존 통설을 뒤집어 버리는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데도 무척 설득력이 있다. 라비노비치가 갖가지 1차 사료를 능숙하게 활용해 독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러시아 혁명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1917년 가을의 페트로그라드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생생한 혁명의 현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될 이 책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 나는 …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고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이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요컨대, 1917년 혁명기의 볼셰비키는 민주적 대중정당이어서, 다른 경쟁 상대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아 노동자 정부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세계 최초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볼셰비키의 힘을 음모적 성격과 철저한 상명하복식 위계제에서 찾던 서방의 보수적 10월 혁명사는 물론이고, 강철 같은 규율과 레닌의 탁월한 영도력을 강조하던 옛 소련의 10월혁명 공식 해석을 일거에 뒤집는 대담한 시도의 귀결이다.
본디 러시아 혁명을 소수의 쿠데타로 보는 보수적 견해의 소유자였던 라비노비치는 엄정한 학술 연구를 통해 볼셰비키가 당시 대중의 커다란 지지를 받았고, 따라서 10월혁명도 진정한 대중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1차 사료를 바탕으로 삼은 이 책 《1917년 러시아 혁명: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다》는 주로 1917년 7월 봉기부터 10월혁명까지를 상세히 다룬다. 또 러시아의 정치적 상황, 혁명가들의 논쟁과 실천, 평범한 노동자와 병사의 목소리, 숨겨져 있던 이야기를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걸작이다.
볼셰비키가 주도한 10월혁명은 소수 음모 집단의 쿠데타였는가?
치열하고 엄격한 학술적 연구 성과를 실감 나는 르포 형식에 담은 것도 이 책의 강점이다. 예컨대, 라비노비치는 볼셰비키의 1917년 10월 무장봉기를 비민주적 쿠데타로 보는 기존 통설을 뒤집어 버리는데,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데도 무척 설득력이 있다. 라비노비치가 갖가지 1차 사료를 능숙하게 활용해 독자의 손목을 잡아 이끌고 러시아 혁명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1917년 가을의 페트로그라드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생생한 혁명의 현장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본문을 차근차근 읽다 보면 어쩔 도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될 이 책의 주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볼셰비키의 경이로운 성공은 적잖이 1917년에 당이 띤 성격 덕택으로 돌릴 수 있다. … 나는 … 비교적 민주적이고 관용적이고 분권화한 당의 구조와 작동 방식, 이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개방적이고 대중적인 당의 성격을 강조하고자 한다.”
요컨대, 1917년 혁명기의 볼셰비키는 민주적 대중정당이어서, 다른 경쟁 상대를 물리치고 권력을 잡아 노동자 정부를 표방하는 사회주의 정권을 세계 최초로 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볼셰비키의 힘을 음모적 성격과 철저한 상명하복식 위계제에서 찾던 서방의 보수적 10월 혁명사는 물론이고, 강철 같은 규율과 레닌의 탁월한 영도력을 강조하던 옛 소련의 10월혁명 공식 해석을 일거에 뒤집는 대담한 시도의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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