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미러링
강영민作
캔퍼스에 스프레이페인트, 2016. 겨울
아들 전태일 장레식장에서 영정을 들고 오열하는 이소선
전태일 영정자리에 거울을 달았다.
이소선 어머니
하성흡 作
한지에 수묵채색 1990/ 전태일재단
1990년 11월 전국노동자 대회에 참석한 어머니의 모습을 한지에 먹과 채색물감을 사용하여 그렸다.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엑게 보낸 진정서
여러분 오늘날 여러분께 안정된 기반 위에서 경제번영을 이룬 것은
과연 어떤 층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하십니까?
볼론 여러분이 애써 이루신 상업 기술의 결과라고 생각하시겟습니다만은
여기에는 숨은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명심 하셔야 합니다.
즉 여러분들의 자녀들의 힘이 큰 것입니다.
성장해가는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은 하루 15시간의 고된작업으로
경제 발전을 위한 생산계통에서 믿거름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의류게통에서 종사하는 어린 여공들은 평균연령이 18세입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여러분들의 전체의 일부입니까?
가장 장 가꾸어야 할 가장 잘 보살펴야할 시기입니다.
정신적을 육체적으로 어느 면에서나 성장기의 제일 어려운 고비인 것입니다.
이런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동심들을 사회생활이라는 웅장한 무대는
가장 매마른 면과 가장 비참한 곳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마른 인정을 합리화시키는 기업주와 모든 생활형식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말살당하고
오직 고삐에 매인 금수처럼 주린 창자를 채우기위하여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곧 그렇게 하는 것이 현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다고 가르칩니다.
기업주들은 어떠합니까?
아무리 많은 폭립을 취하고도 조그마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합벅적이 아닌 생산공들의 피와 땀을 갈취합니다.
그런데 왜 현사회는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지 저의 좁은 소견은 알지 못합니다.
내심 존경하시는 근로감독관님
이 모든 문제를 한시바삐 선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1969년 12월19일 전태일
*전태일 기념관 외벽글씨는
전태일 진정서를 미술가 임옥상이 재해석하여 건축사 윤정원과 하우건축사무소에서 설계.시공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약속
1970년 11월13일 전태일 분신항거 직후,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루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근로조건개선과 노조결성 등 8개항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정부는 온갖 협박과 천문학적인 보상금을 제시하며 의지를 껏으려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어머니는 결국 항거 2주만인 11월 27일 " 청계피복노동조합"을 결성하는데 성공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은 이 땅의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운동의 산실로 제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그 이후 '내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억울하고 사람의 편에 서겠다는 어머님의 다짐은 41년 동안 지속되었다. 무었이 그것을 가능케 했을까?
청계피목노조가 결성되었지만 사업주와 정부당국의 방해로 조합원 가입조차 어렵게 됐다. 청계노조 간부와 이소선 어머니는 노조 활동 정상화를 요구하며 강력히 투쟁했다. 이소선 어머니는 노동조합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점심을 굶는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후생식당'에서 일하면서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었다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되면 삽니다.하나가 되면 이깁니다.
9월 3일이면 이소선 어머니 8주기다. 어머니가 오래토록 바라던 " 노동자의 집"이 청게천 한 곳에 생겼다. 이곳에서 어머니 생전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 뜨겁고 절박한 외침을 떠올려 본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이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되어서 천대받고 멸시 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나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할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 꼭 이루어 주세요"
2019년 현재, 우리 사회에서 '하나가 되세요"는 어떤 의미일까?
이소선 어머니가 말한 " 하나가 되세요"는 연대의 가치를 일깨우는 외침이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하나되세요'의 의미가 아닐까.
소장품 기획전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18년 전태일 기념관 개관준비 과정에서 수집한 이소선어머니의 사진과 사료50여점 및 영상기록을 중심으로 구성 했다. 어머니의 활동을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어머니를 주제로 다룬 현대미술 5점과 함께 전시한다. 특히 1970년 12월 청계피복노조 설립직후 전태일에게 발급한 1호 조합원증 및 1970년대 어머니가쓴 일기가 일반에 최초로 공개된다.
올해를 시작으로 어머니의 뜻 하나가 되라는 그 바람을 잇는 일응 전태일 기념관에서 시작한다. 전시보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되는 보람을 함께 고민하길 어머님 말씀을 빌려 감히 청한다. "하나가 되세요"
어머니를 석방하라
어머니는 언제나 어렵고 힘든 사람 편에 서서 조건없는 강력한 연대와 지지를 보냈다. 군사정권 시절, 약자의 편에서 연대하고 싸우다 네번이나 구속되어 형을 받거나 수배생활을 했다. 구류당한 횟수만도 200여 회 가까이 된다. 재판정에서 의견을 큰소리로 말했다는 이유로 실형을 살기도 했고, 누군가의 장례위원장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배선상에 오르기도 하였다.어처구니 없는 사유들에 대해 어머니는 의연하게 대처했다.
노동자의 어머니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했다. 1981년 조조탈환을 위한 투쟁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을때, 어머니는 재소자 신분카드 별명란에 직접 '노동자의 어머니'라고 적기도 했다. 자신을 높이 세우기보다는 '어머니"라는 호칭 아래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묵묵히 수행 했다.
유가협과 함께
이소선 어머니의 하나됨은 특히 전태일의 길을 따라 행동하거나, 억울한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 향해 있었다.
1971년 영등포 한영섬유 노동자 김진수 씨가 회사에 사주를 받은 어용노조에 의해 머리에 드라이버가 찔려 숨진 사건으로 시작,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85년 택시기사 박종만 열사사건, 86년 신흥정밀 바경진 열사사건, 87년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죽음에 앞장서 사웠다. 1986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기업)의 창립과 더불어 초대회장에 선임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유가족을 위로하고 제대로 된 명예회복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유가협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1970년대 인혁당사건 등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들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유가협은 1988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투쟁, 1988년~1999년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희복 특별법제정 촉구 천막농성 등을 통해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및 명예희복에 관한법"과 의문사진 규명법"을 국회에서 제정하는 특별법을 국회에서 제정하는 성과를 얻었다.
동백꽃 이소선
전태일 40주기에서 백기완 선생과 이소선 어머니
곽노충 作 / 통일문제연구소
2010년 전태일 40주기 행사장에서 만난 백기완 선생과 이소선 어머니를 담은 사진이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신영복 작
화선지에 먹 / 전태일재단
2011년 9월3일 이소선 어머니 소천후 묘비에 새긴 묘비문의 원본이다.
이소선 어머니의 영정 / 2011 전태일재단
이소선 어머니 소천당시 영정으로 사용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