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전태일기념관 상설 전시실 이음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970년 스물세 살 전태일이 우리 곁으로 왔습니다. 거부당하고 외면당한 50여년의 시간을 지나 새로운 한 발자국을 내 딛습니다. 청년 전태일의 아픔은 우리나라 노동환경에 대한 아픔이고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노동자의 고통이었습니다.
전태일을 다시 불러 봅니다.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토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도 않은 삶의 태도를 함께 경험하고자 합니다. 자기자신보다 힘든 동료와 이웃을 향해 배풀었던 끊임없는 온정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부당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전태일의 실천과 연대 그리고 대안을 제시햇던 그의 아름다운 꿈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청년 전태일의 따뜻한 마음과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그리고 함께하는 행동을 전시하고자 합니다. 시대를 뛰어넘어 전태일과 어깨걸고 현재의 우리 삶을 이야기하며 함께 걷기를 희망합니다. 관거의 전태일 에게서 오늘의 전태일인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는 진정한 노동자의 삶을 느끼며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이 전시를 위해 애써주신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장 이수호
지독한 가난
1948년 8월26일,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였던 전상수와 독립운동가의 딸 이소선사이에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태일의 어린시절은 가난과 고독의 연속이었다. 1964년 식모살이를 떠난 어머니를 찿아 막내 동생과 함께 서울로 올라올 때까지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며 노상에서 천막집 까지 떠돌이 생활을 했다.
살아가기 위하여
전태일은 1959년 12살 되던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돈 버는 일을 시작했다. 사기를 당해 가족들은 거리로 내몰렸고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모내고 어머니 이소선은 충격에 몸져누엇다. 아직 어린 세동생 등 가족의 생게를 태일이 홀로 책임져야 했다.
행복했던 청옥시절
1963년 전태일은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서 입학하게 된다. 배움에 간절했고, 우정에 목말랐던 전태일은 수기에서 이시기를 가장 행복한 때로 꼽았다. 청옥고등공밈학교는 주간에 일을 해야만 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야간 학교였다. 비록 다른 친구들보다 두달 늦게 학기를 시작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겼었지만 50분의 수업시간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전태일은 행복했다.
공부, 방황 그리고 노동
1964년 17살 전태일은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 공부하기 위해 가출하여 돈 되는 일이면 뭐든지 하는 생활을 1년 동안이나 이어간다. 잘 곳이 없어 덕수궁수의실, 서울역, 중앙시장, 야채가게 주변 등에서 새우잠을 자는 밑바닥 생활을 했다. 전태일은 수기에 어린 시절 서울, 부산, 대구를 옮겨 다니며 생존하기 위해 해야만 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적었다. 신문팔이, 우산장사부터 삼발이 같은 지금은 생소한 물건들을 팔거나 리어카 뒤밀이 등의 몸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짧은 학창시절에도 아버지를 도와 아침저녁으로 봉제일을 쉬지 않았다.
전태일의 눈
1965뇬 17세의 전태일, 평화시장 봉제노동자로 첫 삶을 시작한다.
평생의 첫직장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비참학고 끔찍한 노동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평화시장 다락방 공장
단추달이
원잔이나 소품에 단추를 다는 데 사용하는 재봉틀이다.
바느질감을 눌러주는 노ㅗ루발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단추를 다는 것이 특징이다.
다락방 속 하루
공장은 대부분 소규모로 노동자들은 1.5m도 되지 않는 천장 때문에 허리를 펴고 일어설 수도 없었다.
재봉틀 (미싱)
재봉틀은 천, 가죽, 종이, 비닐 등을 실로 엮는데 사용되는 기계이다. 1829년 처음 등장하여 두 가닥의 실로 바느질하는 형태는 1846년 하우에 의해 발명되었다. 우리나라는 처음 도입 된 것은 1877년이며, 1960년대 중반부터 대중화되었다.
전태일의 실천
봉제공장에서 목격한 부당함
1996년 전태일이 통일사에서 미싱사로 취직할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는 하루 기본 15시간의 장시간 노동은 몰론, 밤샘 야간작업으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임금 역시 업주의 재량으로 정하는 것이 관레였다. 노동자들은 하루 15시간 이상을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햇볕도 들지 않는 작업장에서 먼지를 마셔가며 노동했다.
불안정한 고용환경ㅇ으로 비수기에는 실업자가 되었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영양실조, 만성소화불량, 신경계통 및 호흡기 질환, 인질 등 대부분의 노동자가 질병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럽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에게는 건강검진이나 휴가 등 복지는 커년 병세가 악화되면 해고조치 되는 일도 잦았다.
이러한 노동 착취 현장에서 전태일은 정직한 재단사가 되어 연약한 직공들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같은 해 한미사에 재단 보조로 취직 하였고 곧 재단사가 되었다.
봉제 공장의 노동 참상
이상혁에게 보내는 편지
1970년 6월30일
평화시장에서 해고되어 임마뉴엘 수도원 공사장에서 일할 당시 이상혁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내용에는 바보회 구성과 목적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평화시장 노동실태 조사용 설문지
1970
삼동회 회원들과 함께 평화시장 노동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제작 배포한 설문지이다. 시다 권영희가 작성한 설문지로 당시 노동실태를 알 수 있다.
전태일의 바보호 회장 명함
1969
1969년 전태일이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처음으로 재단사들의 모임을 조직한 후 회장을 맡아 제작한 명함이다.
노동운동의 시작
1968년12월 전태일은 재단사 10명을 모아 " 바보회 (1969.6)를 결성했다. 바보회의 첫 사업은 노동실태 조사를 통해 시청과 노동청ㅇ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 이었다.
전태일은 이 일을 게기로 해고당했고, 바보회 활동은 중단 됐다. 1970년 9월 기존 바보회 회원을 비롯한 12명의 재단사와 함께 '삼동회 (三棟會)' 를 결성해 다시 노동환경 실태 조사에 들어 갔다.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노동청에 제출한 <평화시장 피복제조업 종업원 근로조건 개선진정서> 는 다음날인 1970년 10월7일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 이라는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보도 했다.
심태식,< 근로 기준법 해설> 1963년
전태일의 저항
태일의 흔적
전태일의 결단
전태일의 저항
전태일은 11월 13일 오후1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기 위해 책을 휘발유에 끼얹고 점화하기 직적에 연설대에 올라 외칠 구호와 선언을 다음과 같이 준비했다.
전태일의 시위계획서 초안
<1차, 구호제창>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근로감독관 임병주를 고발한다. 108조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2차, 대통령 각하에 대한 메시지 낭독>
대통령 각하(메세지) 우리도 인간임을 인정하여 주십시오.
<3차, 구호제창>
일주일에 1번만이라도 햇빛을
1일 16시간의 작업에 임금 100원
1개월 작업시간 440시간, 법정 작업시간 200시간
여자와 소년은 단체규약이 있는 경우라도 1주 6시간을 초과하지 못하며
휴일근무를 원칙적으로 금지 하였다.
기준법 55조, 56조, 57조.
전태일의 꿈
노동자 어머니 이소선 (李小仙 1929~2011)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도아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는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되어서 천대받고, 멸시 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뤄주세요 - 이소선 어머니 연설에서-
이소선 어머님 유품
200년대
이소선 어머니가 직접 착용한 신발, 안경, 지팡이, 그리고 전화번호 수첩이다. 전화번호 수첩에는 노조위원장에서 가족번호까지 빼곡히 적혀있다.
청계피복노조의 투쟁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부의 노조탄압이 거세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노동교실운영 등 모조가 성과를 내자 정부당국은 물리적 해산을 시도했다. 노조를 지원해오던 활동가를 긴급조치위반 협의로 재판에 넘기고, 이에 항의한 이소선 어머니를 법정모독죄로 구속했다.
1977년 청계피복노조은 이소선 어머니 석방 이후, 노동3권 보장 등을 요구하며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다.이소선 어머니는 다시 1년을 복역했고, 1978년 석방 직후 동일방직 노동자 시위에 참가했다가 심하게 구타당해 영구 장애후유증을 안게 됐다. 1981년 초 전두환 신군부의 강제해산 명령으로 청계피복노조는 위기에 봉착했다. 청계피복노동자와 어머니는 노조합법성 쟁취를 위해모학연대 투쟁을 격렬히 전개했다.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노동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던 1988년, 드디어 노조합법화를 이루어 냈다.
"전태일 평전"과 조영래 (趙英來1947~1990)
대구 출생으로 서울대 법과대학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6.7 부정선거 규탄, 유신헌법, 3선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중 전태일의 분신항거를 접하고 그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과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복역과 수배생활을 했으며, 이 기간동안 "전태일 평전"을 집필했다. 복권된 이후 인권변호사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1974년~1979년 6년간 도피 생활을 하며 전태일의 수기를 바탕으로 이소선 어머니와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한 전태일 평전은 1978년 (불꽃이되다:한국청년노동장의 삷과 죽음)이란 이름으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됐다. 이후 1983년 우리나라에서도 익명으로 출판되어 민주화과정에서 많은 독자들이 읽었다. 저자가 조영래로 밝혀진 것은 조영래 사망 1년 후 1991년 개정판이었다. 그 후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여러나라 노동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 1983년
우리나라에서 첫 출간된 첫번째 전태일 평전으로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 엮음, 돌베개)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군사독재의 탄압으로 저자이름을 제대로 밝힐수 없었고 원고의 내용도 상당히 수정되었다.
전태일 평전 / 1991년
군사독재가 끝난 1991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가 조영래임을 밝힘과 동시에 책의 내용도 원고대로 출판하였다.
전태일의 분신항거, 그리고
전태일의 분신항거는 노동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각성을 급속도로 확산시켰고, 지식인 및 노동자 스스로가 과감히 연대투쟁에 뛰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노조의 형성
노동운동은 전태일 분신항거 이후 조직과 투쟁이 늘어나면서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청계피복, 반도상사,YH무역,콘트롤테이타,동일방직, 한국모방(이후 원풍모방) 서통의 노조들이 대표적인 조직이었고 그외 수많은 노조가 서로 지원하고 연대하면서 민주노조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의 전개
전태일의 분신항거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오히려 노동3권을 봉쇄했다. 하지만 한국모방 노조원은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과감한 현장투쟁을 통해 최고의 임금. 노동조건을 쟁취했다. 콘트롤테이타노조는 외국자본의 횡포에 맞서 인권과 노동조건을 대폭 향상시켰다. 동일방직노조는 자본가와 어용노조가 국가기관과 짜고 민주노조를 깨기 위해 여성노동자에게 똥물을 퍼붓고, 블랙리스트로 취업길을 막았지만 알몸시위 등 격렬한 투쟁으로 민주노조를 사수했다. 마침내 1979년 8월 회사의 폐업을 막기 위해 신민당 당사 농성에 나선 YH 무역노조의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농성에 나선 YH무역노조의 죽음을 무릅쓴 투쟁은 유신독제정권을 무너트린 기폭제가 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과 그후
1987년 전두환정권의 6.29 항복선언 이후 노동자의 거대한 투쟁이 폭팔했다. 임금인상, 노동3권의 보장, 어용노조퇴진, 노동인권보장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의 성남 외침은 같은해 울산 현대엔진에서의 노조결성과 파업투쟁이 발화점이 되었다. 마침내 그 해 여름 전지역, 전 산업에서 대대적인 파업투쟁이 터져 나왔다.
87년 이후노동운동은 급격한 지형변화를 가져왔다. 노동운동의 주체가 모든 임금노동자로 확장됐으며,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축으로 전노협(1990년)과 민주노총 (1995년)이 건설되어 한국노총의 개혁을 촉진했다.
1996년 민주노총이 선봉이 되어 신한국당의 " 날치기 노동법 안기부법 개악"을 철회시키기 위해 한국노총과 함께 총파업을 벌였다. 이 정치 총파업은 연인원 540여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정부 수립후 최대규모의 투쟁이었으며 김영삼정권에서 개악된 노동법을 철회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태일피복
전태일은 노동환경 개선 노력이 번번이 좌절되자 업체를 직접 운영할 목적으로 '태일피복' 이라는 <모범업체 설립계획서>를 작성했다. 25매의 이 사업게획서는 시장조사에서부터 광고, 생산제품, 임금, 복지시설 등 오늘날에도 합리적이고 현실 가능한 게획안으로 평가 받고 있다.
중앙일보사 주사위 담당게에 보낸 편지
1970년 2월 24일
전태일은 모범업체 '태일피복'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일보 사회면 ' 주사위'란에 게재된 맹인 음대생의 사연을 보고 자신의 안구를 기중하겠다고 쓴 편지이다.
모범업체 설립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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