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정치의 이해 (독서)/4.민중투쟁사

고대 노예제사회 - 로마 사회경제사

동방박사님 2022. 10. 2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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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자유와 문명의 이면에는 노예제사회가 있었다
‘노예제사회’라는 주제로 그려낸 고대 로마의 참모습


고대 노예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보통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노예제사회로 규정한다. 기원전 2세기는 제2차 포에니전쟁(한니발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에 시작되었고, 기원후 2세기는 오현제 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즉, 이탈리아와 시칠리아가 노예제사회였던 시기는 고대 로마의 전성기와 거의 일치한다.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것이 로마 군단과 장군들이라면, 하드리아누스 방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도록 로마 세계의 중심인 이탈리아와 곡창인 시칠리아를 떠받친 것은 노예들이었다.

기독교의 확산은 노예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로마인들이 노예를 해방한 이유는 무엇인가? 왜 노예제사회가 쇠퇴하고 농노가 등장했는가? 저자는 사회경제사라는 틀을 통해 고대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노예제사회의 실상과 한계를 되짚어봄으로써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이 어떻게 융성하고 어떻게 몰락해갔는지를 새롭게 보여준다.

목차

제1장 고대 노예제 연구의 쟁점
제2장 노예제사회와 지식인들의 노예관
제3장 노예제 농장 경영
제4장 노예제 이목
제5장 노예제의 쇠퇴와 소작제의 발달
제6장 노예제사회의 성립과 쇠퇴: 핀리의 이론
제7장 고대 경제의 근대성과 원시성
제8장 노예 가족
제9장 노예해방과 노예해방 제한법
제10장 비공식 노예해방과 비공식 피해방인
제11장 노예 검투사와 빵과 서커스의 정치
제12장 제1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제13장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

 

저자 소개 

저 : 차전환
 
1959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역사교육과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로마 제국과 크리스트교』(2006), 『(인물로 보는) 서양고대사: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 제정 시대까지』(공저, 2006), 『서양고대사강의(개정판)』(공저, 2011)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로마제국의 노예와 주인: 사회...
 

책 속으로

그리스·로마의 고전 문명을 흠모하는 인문주의 전통 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 고대 노예제는 한동안 옥에 티처럼 애써 외면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도덕적·종교적 입장에서 노예제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제 고대 노예제는 관점을 달리하는 역사가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1848년의 공산당선언 이후, 고대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와 서구 부르주아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은 전장으로 표현될 정도였다. 고대 노예제는 역사적 현상이라기보다 정치적 쟁점이 되었던 것이다. --- pp.18-19

매해 동지 무렵에 벌어진 사투르날리아 축제 동안 로마인들은 고정된 사회적 경계를 완화해서 노예들에게 평소 허용되지 않던 형태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1년에 수 일 동안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던 아득한 신화적인 시대를 상기했다. 그렇지만 축제의 휴일이 끝나면 노예와 자유의 ‘정상적’ 구분이 신속히 복구되었다. 사회적 지위를 고도로 의식하는 로마 세계에서는 아무도 비자유인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으며, 사투르날리아는 결코 사회적 변화나 개선의 비전을 고취하지 못한 일시적 파격에 지나지 않았다. --- p.49

기원전 130년대 시칠리아에서는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발생해 노예 소유주들을 놀라게 했다. 노예 반란을 경험한 노예 소유주들은 농장 노예들을 통제하는 데 처벌의 공포를 이용할 뿐 아니라 노예들의 지위에 따라 페쿨리움이나 보상, 회유책 등도 활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 농장 노예들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처우는 노예 공급의 감소나 인도주의를 반영했다기보다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노동을 좀 더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 p.95

제국 주민은 켄수스(인구조사) 때 자신의 원적지로 돌아가야 했는데, 소작인의 원적지는 지주의 소작지였다. 소작인들에게 지주는 주인이자 지방 당국의 대표자가 되었다. 소작인들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한 원적의 원리가 소작인들을 토지에 결박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예속 소작인들의 새로운 계급이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옛 구분을 종결지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지방적 권위로부터도 독립적이면서 황제에게만 고분고분한 새로운 지주계급이 형성됨으로써 제국 말기에는 이미 봉건사회의 징후들이 나타났다. --- p.149

한 사회가 충분한 노예 공급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정복이 아니라, 사회 외부에 체계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잠재적인 노예노동의 ‘저수지’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이나 포르투갈과 영국의 노예 상인들은 노예노동의 저수지에 접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의 주요 원천인 동부와 북동부의 ‘야만인들’을 놓고 체계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예제사회가 출현한 것은 정복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며,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 pp.167-168

가족생활이 허용된 노예들은 그렇지 못한 노예들보다 더 나은 지위에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도시 노예들이 농촌 노예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예 가족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주인이 매각하고, 가족이 분리되어 유증되는 등 노예 가족의 전망이 노예들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에 달렸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예 소유주에게는 노예 가족이라는 수단을 통해 노예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 p.224

로마인들이 유언장으로 대규모의 노예를 무차별적으로 해방하는 실례가 빈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언장을 통한 노예해방의 모든 손실은 유언자의 상속인들에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속인들은 노예들을 상실할 뿐 아니라 노예해방세를 납부해야 했다. 죽은 후 관대하다는 명성과 일시적인 화려한 장례식을 위해 자신의 상속자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대규모 노예해방을 명령하는 유언자는 현실적으로 드물었을 것이다. --- p.240

노예해방은 로마 노예제의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로마 세계의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를 해방하는 데 그리스인들보다 더욱 관대했으며, 일부 노예에게 노예 상태는 항구적이 아닌,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해방된 피해방인은 법적으로 자유인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로마 시민권을 얻어 시민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로마인들의 노예해방은 피해방인을 시민이 아닌, 거류 외인의 범주에 포함한 아테네인들의 그것과 대조된다. 피해방인에게는 자유를 준 전 주인을 보호자로 삼아 일정 기간 전 주인에게 복종하고 다양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조건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해방을 통해 노예의 운명은 극적으로 변했다. --- p.255

제정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줄어듦에 따라 각종 경기장과 극장은 황제와 시민들이 극적으로 대치할 수 있는 빈번한 기회를 제공했다. 역사상의 대제국 가운데 로마제국은 황제와 수도의 대중이 빈번하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허용한 유일한 제국이었다. 때때로 관중은 곡물 가격이 비싸다고 소리 높여 항의했고, 인기 없는 정무관을 처형하라고 외쳤다. 한 번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공중목욕탕에 있는 조각상을 황실로 가져간 것을 경기장의 관중이 반환하도록 요구했고, 황제는 그 요구를 수용했다. 극장의 대담한 배우는 정치적 비난의 대사나 몸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 p.279

노예 반란의 산물로서 새로운 국가가 출현한 것은 역사상 지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유일한 실례는 생도맹그에서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노예 혁명에 뒤이어 1803년에 아이티에서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생도맹그 혁명의 기원과 전개는 프랑스혁명의 넓은 맥락과 관련되어 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노예들이 살던 시대와 달리, 생도맹그 노예들이 반란하던 시대에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공식화되어 있었다. 반면에 시칠리아에 노예 국가를 수립하는 것은 그 섬의 유산자들(로마인들과 지역 엘리트들)과 로마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을 것인데, 로마가 그러한 특권의 강탈을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 pp.304-305
 

출판사 리뷰

윌리엄 포드가 솔로몬 노섭을 풀어주지 않은 이유

『노예 12년』은 한 흑인 남자가 12년 동안 노예로 살면서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41년의 뉴욕에서 시작한 영화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솔로몬 노섭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가면서 무대를 루이지애나 주로 옮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노섭의 주인이 된 농장주 윌리엄 포드는 인정이 많은 인물이다. 경매장에서 자식들과 떨어지게 된 노예를 보다 못해 노예 가족 모두를 사려 하기도 하고, 노예들에게 성서를 읽어주기도 하며, 노섭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익을 보자 보답으로 바이올린을 선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관대한 포드도 결국에는 노섭을 다른 농장주에게 팔아넘긴다. 노섭이 자신은 본래 자유인이라며 항변했는데도 포드는 왜 노섭을 풀어주지 않았을까? 포드 자신의 말대로 빚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이면에는 포드라는 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이 있다. 포드는 노예 소유주로서 지닌 한계, 나아가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미국 남부라는 노예제사회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즉, 풀어주지 않은 것이 아니라 풀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노예제사회란 무엇인가?

인류가 문명 단계에 들어선 이래, 노예는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단순히 노예와 노예제가 있다고 해서 그 사회를 노예제사회로 부르지는 않는다. 다양한 정의가 있지만, 노예가 전체 주민 가운데 일정한 비율 이상이어야 하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만 노예제사회로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진정한 노예제사회는 손에 꼽을 정도인데, 19세기 미국 남부는 그중 하나에 해당한다. 면화를 재배하는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 농업은 노예노동에 크게 의존했다. 무엇보다 남부 백인 사회에서 노예를 부린다는 것은 부와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의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또한 노예제사회였다. 공화정 말기에서 제정 초기에 이르는 고대 로마의 전성기에 이탈리아는 로마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시칠리아는 로마의 곡창지대였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신장한 고대 로마에서 노예제가 가장 발달했다고 하면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노예제는 도덕적으로 볼 때 악이 아니었다. 사회를 이루는 정상적 요소이자 근본적 요소였다. 시칠리아의 밀밭에서 노예를 이용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번성하는 동안 로마의 엘리트들은 노예라는 인간 재산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위신을 과시했다.

왜 고대에는 노예제 폐지론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로마의 한 전설에 따르면 유피테르(제우스)가 사투르누스(크로노스)를 타도하고 강자들이 부를 통제하고서 불행한 사람들과 공유하기를 거부했을 때, 노예제가 세상에 출현했다. 이 전설을 통해 로마인들이 노예제를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노예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은 아득한 신화시대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사회적 지위를 고도로 의식하는 로마 세계에서는 아무도 비자유인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의 지식인 중에서 이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노예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토아철학자들은 노예를 부드럽게 대하라고 주문했지만, 노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예 소유주의 도덕적 건강을 위해서였다.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지성인들의 사색 속에 노예제 폐지는 없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노예제를 부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예 12년』에서 노섭의 두 번째 주인이 된 농장주 에드윈 엡스가 성서 구절을 근거로 노예들을 학대한 것처럼, 고대 로마의 노예들은 성서에 있는 여러 은유적 표현을 통해 현세의 질서를 긍정하고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누가 노예가 되는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는 약속을 어기고 로마군을 공격한 갈리아 부족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노예로 팔아넘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노예로 팔린 사람은 5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시오노 나나미는 카이사르의 생각을 빌려 약속을 중요시하는 로마인들에게 약속을 어기는 행위는 명백한 죄이며,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에게 어울리는 운명은 노예라고 독자에게 설명한다. 그러나 굳이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식으로 말하면서까지 정당화할 필요는 없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한 자가 노예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세기의 로마법이 노예를 ‘목숨이 살려진 자’로 규정한 것은 포로를 노예로 삼던 관행을 보여준다. 게다가 로마에는 노예가 필요했다. 로마는 무력으로 지중해 세계를 지배했으며 로마 엘리트들은 방대한 제국 건설을 자신들의 운명으로 여겼다. 급속히 팽창하는 제국을 지탱하려면 많은 노예가 있어야 했고, 전쟁은 노예를 얻는 가장 쉬운 수단이었다.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이 왜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면서 흥미로운 언급을 한다. 로마 사절이 흑해 연안의 동맹국 비티니아를 방문해 군사원조를 요청하자 비티니아의 왕은 많은 비티니아인이 빚 때문에 로마인 푸블리카니(조세 징수 청부업자)들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전락했다고 이야기하며 난색을 보인다. 그러자 로마 원로원은 로마 속주에서 노예로 있는 동맹국 시민들에게 자유를 주라는 칙령을 내린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이 반발해 노예해방이 철회되고, 희망이 꺾인 노예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보면 로마에는 동맹국 출신의 노예도 많았던 듯하다.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노예 반란을 보면 30년이 넘는 시차에도 공통점이 보인다. 반란 노예들은 두 차례 모두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우려 했다. 명확한 목적이 없이 움직였던 스파르타쿠스와는 다른 점이다. 제1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지도자 에우누스는 자신을 안티오코스로 칭했고,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반란의 지도자 살비우스는 트리폰이라는 칭호를 선택했다. 안티오코스와 트리폰은 둘 다 시리아에서 유래한 왕명이다. 게다가 에우누스는 자신이 이끄는 반란 노예 집단을 ‘시리아인’으로 불렀다. 당시 시칠리아에서 일하던 노예의 상당수가 시리아와 같은 문명화된 동방 지역 출신임을 짐작하게 한다.

로마인들은 왜 노예를 해방했는가?

영화 『벤허』에서 주인공 벤허는 갤리선의 노잡이 노예로 전락했다가 로마 함대사령관의 목숨을 구하면서 운명이 바뀌어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고 나중에는 로마 귀족의 양자까지 된다. 영화만큼 극적이지는 않았겠지만, 실제로 고대 로마는 다른 노예제사회와 달리 노예를 빈번하게 해방했다. 로마인들이 노예를 해방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인도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사후의 명성을 의식한 경우도 있었고, 원로원 의원이 자신을 대신해 사업을 관리할 대리인으로 삼고자 노예를 해방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방된 노예들은 로마 시민단에 수혈되는 신선한 피의 공급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외국인 노예가 해방되어 자신과 동등한 시민이 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따라서 무분별한 노예해방을 막으려는 법들이 시대별로 여러 차례 제정되면서,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해방을 미끼로 노예들을 통제하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기도 했다. 한편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들이 가족을 이루도록 허용해 충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 가족은 가족 중 한 명이 다른 곳으로 팔릴 수도 있었고, 노예 소유주가 사망할 경우 여러 명에게 분리되어 상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항상 흩어질 위험을 감내해야만 했다.

노예제는 왜 몰락했는가?

기원전 2세기에 그라쿠스 형제가 목도한 현실처럼, 전성기에 들어선 고대 로마에서는 부유한 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되었고, 자영농은 몰락해갔다. 지주들은 노예노동을 이용해 라티푼디움으로 불리는 대토지를 경작했다. 대 카토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카르타고를 맹렬하게 몰아붙이던 것만큼이나 자신이 소유한 농장 노예들에게도 무자비했다. 카토와 바로, 콜루멜라가 쓴 농업서에는 어떻게 하면 노예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해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지 골몰하는 로마 지주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후 시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사라지자 지주들은 노예를 충원하는 대신 점차 독립성을 상실한 하류층의 노동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제정 후기의 황제들은 조세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소작인들이 소작지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자유를 잃고 토지에 결박된 소작인들은 중세 농노의 특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대 말기에도 제국 전역에는 여전히 많은 노예가 있었지만, 더는 노예제사회가 아니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한 문명은 노예제사회와 함께 저물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