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폭력연구 (책소개)/1.국가폭력

국민은 적이 아니다 - 한국전쟁과 민간인학살, 그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서

동방박사님 2022. 10. 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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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민은 적이 아니다』는 두 방향에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하나는 그동안 절대적 권위를 누려오던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와 이른바 ‘전쟁영웅’들의 기록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그 속에 내재된 오류를 자체 논리로 하나하나 비판해 나간다. 그러면서 그는 민간인집단학살에 이르게 되는 배경으로 당시 국가권력의 무능과 이기심을 폭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기밀로 관리되어오던 국가기록을 조사하면서 확인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있다. 전쟁에 패해 후퇴를 하면서도 치밀하게 자기 국민을 집단 학살한 사실을 사단별 후퇴경로를 추적하며 밝혀내고 있다.

목차

추천사 진실과 인권을 찾아서

머리말 한국전쟁사를 되돌아보다

1장 피난민 제1호가 대통령?
이승만의 일주일과 전쟁 시나리오
정상성 | 이승만의 일주일 | 이승만에게 전쟁 시나리오가 있었을까? | 이승만의 부산행은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

2장 한강철교는 파괴되지 않았다?
한강철교 폭파, 그 수수께끼를 묻다
한강다리 폭파의 재구성 | 그러나 한강철교는 끊어지지 않았다 | 폭파가 일렀던 걸까 | 아군의 보호인가 공격의 저지인가 | 희생된 사람들이 민간 피난민이 아니라고? | 한강다리 폭파는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 폭파 책임도, 폭파 실패의 책임도 규명되지 않았다

3장 적을 앞두고 사라진 김포지구전투사령관
전쟁 확대를 야기한 어이없는 김포 방어선 포기
6월 25일 김포 | 김포지구사령부의 급편과 인민군의 진입 | 27일 김포에 인민군 진입하다 | 사령관의 실종 | 계인주 대령은 누구인가? | 계인주와 민간인집단학살사건

4장 스미스 부대를 기억하다
이미 사라진 ‘특수임무’와 그들만의 패배
미군의 참전 결정과 스미스 부대의 파병 | 스미스 부대 착륙지 변경 의혹 | 스미스 부대와 국군 17연대의 전선 배치 | 교전 | 스미스 부대는 맥아더의 실험용 소모품이었을까?

5장 후퇴 국군은 왜 국민을 공격했나?
경기 강원 충북 경북 지역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 | 후퇴하는 국군과 민간인 학살 | 미군 작전 지역에서의 민간인 학살 | 자기 국민을 죽여야 승리하는 이런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6장 전선이 없었던 호남도 피해가지 못했다
충남 호남 지역의 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 직후의 호남 지역 상황 | 호남 지역을 일부러 내준 것이라고? | 전선의 호남 진입 전 서해안 지역 피해 현황 | 호남 지역의 전투와 민간인 학살 | 학살이 임무였던 나주경찰부대의 활동 | 민중을 적으로 여긴 전쟁
7장 국방부에 간첩이 있다?
음모설을 부르는 한국전쟁의 수수께끼들
전쟁유도설 | 음모설의 등장 | 3월 차량과 전투 장비의 대규모 정비 | 4월 22일과 6월 10일의 사단장급 인사이동 | 6월 13~15일 전방부대의 후방 이동 | 운명의 6월 24일 | 6월 28일 국군의 중무장을 해제한 한강 철교 폭파 사건 | 6월 30일 미 정찰기의 인민군 수원 공격 보고 | 7월 3일 평택역 폭격 | 국군 8사단에 내려진 유령 명령 ‘대구로 이동하라’ | 미군 관련성 | 음모설이 가지는 의의

8장 국군 17연대는 과연 어디에 있었나?
인천상륙작전 참전의 허구
인천상륙작전 | 국군 17연대 | 작전명령서 | 살아남은 자의 역사 왜곡인가

9장 정말 인민군이었나?
‘적대세력사건’의 모순 고찰
사건의 비극적 성격 | 전개 과정 | 미군과 경찰의 조사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의문점 | 억울한 죽음의 진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10장 피난민은 적이었나?
국민은 없고 국군만 남은 국가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공격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다 | 영동 노근리 사건, 피난민 통제회의 후 최초 사건 | 이어지는 소개작전과 미 전투기의 피난민 공격 | 해군 공군이 총동원되어 포항의 피난민을 공격하다 | 1951년 1월 다시 피난민 공격이 시작되다 | 단양 미군 폭격 사건과 임실 군경 토벌 사건의 비교 | 국군과 경찰의 피난민 공격이 시작되다 | 토벌작전이 빨치산을 만들어 내다 | 토벌작전 희생자들에 대한 토벌 군경의 증언 | 민간인 학살이 전투성과로 보고되다 | 피난민 공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장 살아있는 것이 죄?
부역 처리의 불법성과 위헌성
’빨갱이죄‘에 ‘부역죄’가 더해지다 | 전쟁 발발과 학살의 제도적 준비 | 수복하던 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 합법을 가장한 처형, 지역별 현황 | 14후퇴 시기의 피해

12장 대한민국이 법치국가라고?
「비상조치령」은 위헌이었다
국방경비법, 비상조치령은 위헌이었다 | 「비상조치령」의 공포 | 죄인은 죄인이 아니었고 재판은 재판이 아니었다 | 피해의 규모 | 이제라도 구제해야 한다 | 희생자와 가해자 | 부역혐의학살사건의 역사적, 사회적 성격
 

저자 소개

저자 : 신기철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도 고양시에서 자랐으며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다녔다. 인천과 구로, 영등포 지역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종사하면서 금정굴 사건 등 과거사 진상규명 활동에 가담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했다. 현재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부설 인권평화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제노사이...
 

책 속으로

1장 6월 27일
26일부터 서울사수와 철수문제를 의제로 시작된 국회 토론이 밤을 세며 새벽까지 이어졌다. 결국 찬반투표에 이르러 서울사수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을 알리려고 국회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을 때 대통령은 이미 피신한 뒤였다. 대한민국 제1호 피난민이 대통령이었음이 공식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36p)

5장 자기 국민을 죽여야 승리하는 이런 전쟁은 전쟁이 아니다
영토 점령을 목적으로 한 침략전쟁에서 점령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집단 학살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방어를 위한 전쟁이라면 공동체의 영토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 그 목적이므로 집단 학살이 발생할 수 없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의 한국전쟁은 방어 전쟁이라고 하면서 점령군이나 저질렀을 법한 집단 학살을 일으켰다. 그것도 후퇴하는 과정에서 그 직전에 일으켰다. 아주 사악한 점령군이나 저지를 수 있는 만행이었다. (135p)

6장 민중을 적으로 여긴 전쟁
미군의 후퇴 정책으로 보아 국군과 미군의 호남 포기 전략은 선택이 아니라 불가피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허술한 틈을 보여 유인했다기보다 실제 병력과 무기가 없어 허술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낙동강 전선 형성이 목적이었으므로 호남 지역에 대한 방어 계획이나 방어 의지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승만의 초기 부산 도주, 한강다리 폭파와 같은 맥락이다. 강문봉이 회고하는 유인 작전은 낙동강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 벌기였던 것으로 보아 이 역시 전쟁 시나리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 중 하나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자기 국민에 대한 학살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호남 지역에서의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전투의 관계는 다른 지역의 경우와 달리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먼저, 호남 지역은 다른 지역과 달리 전투의 주도권이 국군과 경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침략 의도를 가진 공격자가 아니라 후퇴 계획을 하고 있는 방어자가 주도권을 쥔 기이한 전투였던 것이다. 둘째는 전투가 없었으므로 후퇴 일정에 맞춰 체계적, 계획적으로 학살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대부분 지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체계적으로 학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드러나며, 희생 일정 역시 대체로 비슷했다. 이는 미군 작전 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유사하다.
국민보도연맹사건에 가담한 가해 측 군인이나 경찰관들은 인민군이 점령할 경우 희생자들이 여기에 협력할 것이므로 미리 살해했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전쟁 상황에 놓인 국민 대부분이 점령군을 지지할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들 적으로부터 지키지 못하는 지역의 주민들에 대해 피난 계획은 세우지 못할망정 학살 계획을 세우는 것은 범죄의 수준을 넘어서는 짓이다. 그리고 이는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하는 권력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152p)
9장 억울한 죽음의 진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그동안 의문을 제기하지 못했던 인민군 측 학살명령 근거, 사건 발생일의 불일치, 발생 정황의 모순, 조사 근거의 오류 등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희생자와 가해자를 흑백 논리로 단순하게 구분하고 있는 오류를 검토했으며 이를 통해 반공이라는 정치적 요구에 의해 역사적 사실 자체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후 이제 남한 지역에서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사건과 국군, 경찰에 의한 학살사건을 비교하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해 보인다. 여기에 북한 지역에서 벌어진 또 다른 두 종류의 사건을 정리할 수 있다면 서로 얽히고설킨 진실을 찾아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지역에까지 사건들이 연속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다면, 남한 지역의 우익인사를 학살한 인민군은 북한 지역에서도 이승만 정부의 ‘국민보도연맹사건’ 같은 것을 저질렀을 것이고, 국군의 1·4 후퇴로 다시 북한지역을 수복한 인민군은 북한 지역의 부역자를 학살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비록 지나치게 주관적, 감정적인 서술이지만『 한국전쟁사 3』에서 일부나마 확인된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저자 신기철의 입장은 분명하다. 그는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악랄하기까지 한 국가권력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전쟁이라는 국난을 틈타 아무 죄도 없는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밀었으며, 이유조차 알지 못한 그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국민을 적으로 아는’ 국가권력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여러 연구 자료와 도서 또는 전쟁기록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충분히 거론되어 왔다. 북에 대한 남한의 방어 전쟁이자 미국과 중국, 소련의 동북아 패권을 둘러싼 국제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으로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자료를 접한 독자나, 미디어를 통해 한국전쟁의 이모저모를 만난 사람들은 본인이 한국전쟁을 잘 알고 있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전쟁사(戰爭史)’로서의 한국전쟁일 것이다. 신기철은 이와 다른 각도에서 한국전쟁을 조명하고 있다. 바로 민중이 겪은 비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전쟁, 한국전쟁으로서 말이다.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생각하던 국군이 어느 날 당신 안방에 들이닥쳐 총부리를 들이댄다. 왜 그러냐고 해도 알 수 없는 죄목을 말한다. “당신은 인민군에 협력할 위험이 있다, 그러니 지금 체포하겠다.” 그리고 아무도 알 수 없는 곳에서, 최소한의 재판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총탄 세례를 받고 구덩이에 떨어진다.

신기철은 2006~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조사팀장으로 활동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국가 폭력의 진실을 마주했다. 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체계적이었으며, 치밀한 국가범죄였다. 진실에 다가갈수록 그는 철저히 객관적인 관찰을 통한 기록조사자의 시선으로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궁금해졌다. 국군은 왜 전쟁 초기에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졌을까? 그러면서 왜 자기 국민을 그토록 많이 죽였을까?
그는 한국전쟁을 이승만의 친위 쿠데타로까지 규정한다. 전쟁을 통해 정권 연장을 위한 묘수를 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이 결코 우발적인, 또는 전쟁에서의 부수적인 피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계획적으로 자기 국민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이승만과 이승만 정부가 바로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잃어버린 고리였다.
그리고 그가 만난 한국전쟁과 민간인 학살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유족들을 통해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그리고 유골과 유품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동안 억압당해온 유족들의 현실에서 여전히 뼈저린 고통의 흔적을 현재형으로 만나게 되었다. 또 당시 참혹한 결과를 낳았던 냉전의 갈등 구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6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은 물론 이에 대한 진실 규명조차 여의치 않은 게 현실이었다. 신기철은 두 방향에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하나는 그동안 절대적 권위를 누려오던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사]와 이른바 ‘전쟁영웅’들의 기록들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그 속에 내재된 오류를 자체 논리로 하나하나 비판해 나간다. 그러면서 그는 민간인집단학살에 이르게 되는 배경으로 당시 국가권력의 무능과 이기심을 폭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기밀로 관리되어오던 국가기록을 조사하면서 확인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의 전모를 밝히고 있다. 전쟁초기 국군은 제대로 인민군을 저지하지 못했지만 민간인을 학살하는 데는 너무 치밀하고 계획적이었다. 전쟁에 패해 후퇴를 하면서도 치밀하게 자기 국민을 집단 학살한 사실을 사단별 후퇴경로를 추적하며 밝혀내고 있다.저자는 그러면서 새로운 사실 하나를 밝혀낸다. 바로 전쟁 전후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감옥에 가두었던 [비상조치령]이 1952년 헌법위원회(헌법재판소의 전신)의 위헌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상조치령]을 근거로 한 모든 법적 행위는 모두 원상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상조치령」은 「국방경비법」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을 재판이라는 형식으로 학살한 사이비 법률이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지만 1999년까지 무려 40여 년간 감옥에 있었던 장기수 상당수가 한국전쟁 당시 바로 이 「국방경비법」을 위반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이 이미 1952년 위헌으로 판단되었다는 것이다. 당시가 아직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으므로 대통령 이승만의 긴급명령을 위헌이라고 판단했다는 것도 놀랄 일이었다. 그렇지만 더욱 놀랄 일은 그 후 60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법살 당한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후속 조치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272p)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국민은 소외되고 있다. 참혹한 국가범죄임에도 국가는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명예회복과 진실규명, 피해에 대한 보상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은데도 정부는 꿈적하지 않는다. 과거 일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국가는 자신의 절대적인 힘을 이용해 국민의 손발을 묶고, 입을 막고, 목을 조르고 있다. 지금도 “국민은 적이 아니다”라는 말이 과거형이 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요약-

제1장은 이승만의 행적을 중심으로 전쟁 초기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기까지를 규정하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살펴보았다. 이승만 또는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이해 불가능한 재앙이 아니라 충분히 예측 가능한 상황에서 택한 합리적 전략이라는 측면이 있었다. 이는 이승만의 초기 행적을 비롯해 미군의 전략과 국군의 전술에서 나타난다. 순진한 국민들만 이를 모르고 있다가 패전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제2장은 한강인도교 폭파와 한강철교 폭파 실패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군의 전략과 민간 피난민 정책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그동안 알려졌었던 폭파 사실, 조기 폭파와 폭파 책임, 폭파 희생자가 사실과 다름을 확인했으며, 한강인도교 폭파 시도를 통해 군 병력 보존이 우선이었는지 아니면 인민군 진군 저지가 우선이었는지를 냉정하게 판단하고자 했다.

제3장은 김포지구전투사령관의 탈영 사건을 계기로 7월 3일 한강 방어선의 붕괴를 초래한 전쟁 초기 김포 지역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전쟁 발발 초기 작전계획에 없는 국군 1사단 12연대의 후퇴로 인해 김포 지역이 점령당했으며 이 때문에 한강 이북의 국군이 포위당할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김포 방향에서 온 전차에 의해 영등포 방어선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는 한강철교를 건넌 전차에 의해 방어선이 붕괴했다는 기존의 주장이 사실과 다름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국전쟁 확대 또는 민간인 학살 확대의 시공간적 기점이 김포 지역과 관련되었다는 주장을 가능하게 한다.

제4장은 7월 5일 스미스 부대의 오산전투 패배를 중심으로 미 지상군의 한국전쟁 전략을 살펴보았다. 『한국전쟁사』 집필진은 오산전투에 참여한 부대가 400여 명의 스미스 부대 외에도 국군 17연대, 미 34연대가 더 있었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스미스 부대만이 패배의 전투를 치른 것으로 기록했다. 이 전투 후 미군은 경부국도를 중심으로 낙동강 전선 서부 지역까지 차례로 후퇴했으며 국군은 그 동쪽에서 낙동강 전선 북부 지역으로 후퇴했다.

제5장은 소총과 탄약이 없어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는 국군이 자기 국민을 학살할 여력은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전쟁 발발 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전선에 이르는 동안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을 가해조직과 지역에 따라 구분했다. 국군 각 사단은 전투가 없던 시기에 주둔 지역의 민간인들을 학살했음이 드러난다. 미군의 후퇴 경로에서는 주로 이들과 함께 후퇴하던 국군 17연대와 방첩대, 경찰이 사건을 저질렀다. 같은 시기에 발생한 영동 노근리 사건은 미군의 피난민 소개작전에 의한 피해였다.

제6장은 충남 서해안 지역과 호남 지역에서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특징을 통해 한국전쟁의 정치적 본질을 살펴보았다. 인민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해 일부러 호남 지역으로 유인했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밝혀낸 것을 비롯해 각 지역별 사건 발생 현황을 정리했다. 같은 시기에 발생한 ‘나주경찰부대사건’은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분노한 주민들의 감정을 역이용해 다시 기만적으로 학살한 만행이었다.
제7장은 최근 각종 회고록에서 소개되고 있는 국방부 장관 음모설이 얼마 전까지 주장되던 전쟁유도설과 같은 근거를 하고 있음을 검토했다. 이를 통해 미군 또는 국군의 방어실패가 군 스스로 갖고 있었던 전략의 실패와 무능의 결과일 뿐, 국민의 잘못이 아님을 확인했다.

제8장은 마치 국군 17연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것처럼 주장하는 한국전쟁사의 서술 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한국전쟁사는 국군 17연대가 9월 24일 인천에 상륙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도 마치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던 것처럼 주장하는 거짓 증언을 그대로 소개하는 잘못을 범했다.

제9장은 인민군 후퇴 시기이자 국군 수복 직전에 벌어졌던 ‘적대세력사건’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이 사건의 많은 경우에 의문이 있다. 학살명령에 대한 일부 주장은 그 근거가 확인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한국전쟁사』의 주장은 정황은 물론 근거의 객관성에도 의문이 있다. 실제 사실과도 일치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자료마다 사건 발생일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국군 수복 후에 발생한 사건이 있기도 하다. 이는 학살 사건이 그 비극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반공이라는 정치적 목적에 이용당한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을 여지가 있다.

제10장은 폭격 미군과 토벌 국군이 갖고 있던 피난민 정책을 살펴보았다. 피난민에 대한 미군의 공격은 전쟁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소개작전 과정이나 근접지원작전 과정에서도 공격이 있었다. 이는 피난민을 적으로 보았거나 최소한 작전에 방해되는 존재로 보았음을 알려준다. 토벌 군경 역시 같은 관점이었다. 작전의 전개 과정 자체가 주민들을 적으로 내몰았으며 이렇게 희생된 주민들은 군경의 전투성과로 보고되었음을 확인했다.

제11장은 1950년 10월 국군의 수복과 동시에 발생한 ‘부역혐의학살사건’과 재판에 의한 부역자 처리 과정을 검토했다. 부역자 처벌의 근거는 전쟁 발발과 동시에 마련되었고, 수복하는 국군에 의해 즉결처형이 시작되었다. 수복 후 복귀한 경찰에 의해서도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이 발생했으며 1?4후퇴 시기와 재수복 후에도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제12장은 헌법위원회가 대법원의 판단 없이 1심만으로 심판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선언한 사실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이승만 정부는 ‘비상조치령’이 공포된 1950년 6월 25일 이후 희생된 민간인들에 대해 원상회복시킬 의무가 있었다고 할 것인데,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추천사-
이이화_역사학자,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이사장

『국민은 적이 아니다』를 읽어가면서 가슴이 아프고 심장이 떨렸다. 인간을 마구 짓밟은 광기의 역사가 눈앞에서 선연히 펼쳐졌다. 저자 신기철은 한국전쟁은 광기에 어려 민중을 적으로 여긴 전쟁이었다고 주장하며, 여전히 그 의미를 되새겨야만 하는 ‘국민은 적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당시 벌어졌던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의 과정과 의미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민중의 안위는 간과하고 자신의 입지만 지키려 했던 당시 정부의 비열함과 패전의 책임을 모면하려 했던 그들의 비겁함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이들이 저질렀던 민간인 학살이라는 만행과 닿아있다.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해야 했던 원혼들에게 그 이유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믿었던
국가의 손에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야 했던
수많은 영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