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폭력연구 (책소개)/1.국가폭력

국민보도연맹 (부산 경남지역) : 끝나지 않은전쟁

동방박사님 2022. 9. 25.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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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국민보도연맹 학살에 관한 자료집. 학살현장을 돌며 유족이나 목격자들로부터 들은 증언, 1960년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남긴 '증언청취 속기록', 5 · 16 군사쿠데타세력이 유족회를 탄압한 뒤 그 성과물로 제작한『혁명재판사』, 1949~1950년 보도연맹 결성 및 1960년 4 · 19 직후 유족회 활동에 관한 신문보도 등을 지역별로 구분하여 정리하였다.

목차

제1장 국민보도연맹 결성과 조직
1. 개념
2. 중앙본부 및 전국의 조직
3. 경남도 본부 결성
4. 경남도연맹의 하부조직

제2장 조직확대
1. 포섭공작
2. 자수, 전향자 속출
3. 가입강제 등 변칙가입과 부작용
4. 검거
5. 연맹 탈퇴

제3장 학살
1. 개요
2. 6.25 발발 직후 보도연맹원들의 대응
3. 예비검속
4. 지역별 주요 학살사계
5. 보복학살

제4장 국회의 조사활동
1. 국회조사단 구성과 활동
2. 언론보도에 나타난 국회조사 활동
3. 증언청취 속기록에 나타난 국회조사 활동
4. 국회 진상조사의 한계성

제5장 유족회의 결성과 탄압
1. 개요
2. 혁명재판사에 나타난 우족회 결성과 활동
3. 언론보도에 나타난 지역별 유족회 활동
4. 군, 경과 유족의 마찰
5. 유족회에 대한 탄압

제6장 학살 책임자
1. 학살은 왜 저질렀나
2. 각종 기록에서 드러나는 학살 책임자
3. 지역별 학살자 책임자
4. 우익단체
5. 미국의 책임

제7장 진상규명 노력
1. 6.25 피학살양민 부산, 경남 유족회
2.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3. 통합볍률(안)
4. 전국합동위령제 및 전국유족회의 재결성
 

저자 소개

저자 : 김기진
1963년 부산 출생. 1990년 부산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현재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
 
 

책 속으로

(가) 개요

양산지역에서는 대략 35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유족들은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 4 · 19 직후 유족들이 사배골짜기 등에 대한 유골발굴을 했을 때 모두 712구나 되는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2배 이상 많은 유골이 나온 것은 부산, 김해 등 인근 지역에서 끌려온 매우언들이 이곳에서 학살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합동장례를 준비하고 사회를 보았던 고 유혁(2001년 작고) 씨 등은 유골을 화장하여 담은 관이 여섯 개나 되었다고 증언 한 바 있다.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호출을 받고 나섰다가 목화창고에 구금된 뒤 사배골짜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1960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학살은 2주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하나 정확히 확인되는 날짜는 7월 7일이다.

(나) 증언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이 학살로 가족 잃어"

양산 석산리 월리, 곡리, 지당 등 3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7월 초만 되면 일제히 제사가 치러진다. 부산과 양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6 · 25 이전까지만 해도 150여 가구가 평화롭게 살아가던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보련 학살로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에 가까운 46가구가 한꺼번에 가족을 잃었다. 모든 서른 살 안팎의 남자들로 가정이 파괴되었음은 물론 마을 전체에 심각한 일손부족 현상까지 초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처럼 큰 피해가 발생한 데는 1949년 중순 보련 조직 당시 면서기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입을 종용했고, 마침 서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 젊은이가 연맹에 가입하자 모두들 별탈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따라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 p.130
(가) 개요

양산지역에서는 대략 35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유족들은 추산하고 있다. 그러나 1960년 4 · 19 직후 유족들이 사배골짜기 등에 대한 유골발굴을 했을 때 모두 712구나 되는 유골이 쏟아져 나왔다. 이처럼 2배 이상 많은 유골이 나온 것은 부산, 김해 등 인근 지역에서 끌려온 매우언들이 이곳에서 학살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합동장례를 준비하고 사회를 보았던 고 유혁(2001년 작고) 씨 등은 유골을 화장하여 담은 관이 여섯 개나 되었다고 증언 한 바 있다.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의 호출을 받고 나섰다가 목화창고에 구금된 뒤 사배골짜기 등지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1960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학살은 2주일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하나 정확히 확인되는 날짜는 7월 7일이다.

(나) 증언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이 학살로 가족 잃어"

양산 석산리 월리, 곡리, 지당 등 3개 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7월 초만 되면 일제히 제사가 치러진다. 부산과 양산의 경계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6 · 25 이전까지만 해도 150여 가구가 평화롭게 살아가던 농촌마을이었다. 그런데 보련 학살로 전체 가구수의 3분의 1에 가까운 46가구가 한꺼번에 가족을 잃었다. 모든 서른 살 안팎의 남자들로 가정이 파괴되었음은 물론 마을 전체에 심각한 일손부족 현상까지 초래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처럼 큰 피해가 발생한 데는 1949년 중순 보련 조직 당시 면서기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가입을 종용했고, 마침 서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한 젊은이가 연맹에 가입하자 모두들 별탈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뒤따라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주민들은 증언한다.
--- p.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