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폭력연구 (책소개)/1.국가폭력

한과 슬픔은 세월의 두께 만큼 (2007) - 강화 민간인학살의 진실과 과거사법 투쟁사

동방박사님 2022. 10. 30. 18:22
728x90

책소개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던 강화도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홀홀단신 가해자를 찾아나서는 활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온 서영선 회장. 그가 어렵게 기록한 책 『한과 눈물은 세월의 두께만큼』은 부제 "강화 민간인학살의 진실과 과거사법 투쟁사"가 말해주듯이 강화 민간인학살에 대한 체험적 경험과 그 반인륜적인 참상을 고발하고, 아울러 이로부터 실체적 진실규명을 통해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해 줄 것을 전편의 글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 촉구하고 있다.

목차

<여는 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서영선
<추천사>
진솔하고 감동어린 현대사 증언 - 이이화(역사학자)
현대사 바로잡기의 지침서 - 이기형(시인)

제1장 행복했던 유년과 쓰라린 기억
1. 사모의 정
2. 그리운 아버지와 행복했던 유년시절
3. 쓰라린 기억
4. 두 번째 상처와 고난

제2장 길고긴 투쟁의 세월과 슬픔
1. 가해자를 찾아서
2. 가해자와의 직접 만남
3. 임시술 할머니의 증언
4. "강화사"의 오류
5. 민간인학살 범국민위원회가 창립되다
6. 유족을 찾는데 심혈을 기울이다
7. 방송에서 증언한 가해자
8. 눈물 젖은 어머니 詩碑를 세우다
9. 연세대 학생들이 탐방 오다
10. 촛불집회와 천막농성
11. 일념의 법 투쟁
12. 가해자와의 대담 - 한 특공대원의 고백

제3장 영혼의 외상, 전쟁 중 아동의 트라우마 - 서영선의 경우

제4장 강화도 민간인학살의 전모

1. 강화 민간인학살의 특성
2. 해방기 강화군 민간인학살
3. 한국전쟁 초기 반공 무장단체의 활동
4. 강화 1차 부역자(가족) 학살
5. 학살의 주체, 특공대와 유격대
6. 1·4 후퇴 전후 도서지역의 민간인학살
8. 1·4 후퇴 전후 강화 본도의 민간인학살
9. 전쟁 후 부역자의 재산 강탈

제5장 유족들의 상처와 고난
1. 한현우 2. 안장섭 3. 고문자 4. 윤석만 5. 조광호 6. 유희종
7. 이진항 8. 황남순 9. 안학섭 10. 황인선 11. 이상국 12. 황재환
13. 전윤자 14. 나영희 15. 황성용 16. 방성일 17. 박화순 18. 김의용

제6장 강화 민간인학살 관련 자료
1. 강화 지역 피학살자 명단
2. 강화유족회 활동일지
3. 강화위령제 소사
4. 신문·잡지 보도자료
5. 관련 문서

제7장 맺는 말

*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자 : 서영선
강화 양민학살 희생자 유족회 회장. 1938년 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칠순에 접어든 서영선 회장은, 1951년 1월 6일 13세의 나이로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 어머니가 학살되는 과정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후 언젠가는 반드시 가해자들을 찾아서 어머니의 무고한 죽음을 따져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품고, 강화를 떠나 부역자의 가족으로 연좌제의 고통 속에서 어려움 삶을 살아왔다. 1990년...
 

책 속으로

1950년 6·25의 발발 직후 강화에는 인민군이 6월 27일에 들어왔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너희들 난리 났으니 빨리 집으로 가라하셨다. 막 뛰어 들어오니 어머니는 피난보따리를 싸고 계셨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들어왔지만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러구러 인공시절 3개월을 보내고 나서 아버지는 어디론가 가셨다. 마당에서 아버지가 어머니와 헤어지는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점이 우리 모든 식구들과 영영 이별일 줄이야 그 누군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우리 단란했던 가족에게 비극의 씨앗이 될 줄이야!

9·28 수복이 되었다. 어머니와 우리 6남매는 우선 친척집에 피신을 하였지만 그 많은 식구들이 언제까지 신세를 질 수 없기에 집으로 돌아왔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시면서 어머니는 우리들은 데리고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돌아오자마자 엄마와 나, 언니 세 사람이 치안대에 불려갔다. 엄마와 언니는 건물로 데리고 들어가서 손을 피라고 하며 회초리로 때리고 나는 마당에 있는 큰 우물에 거꾸로 들고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우리 가족은 먹을 양식도 없어 쌀 한 줌에 멀건 물로 겨우 연명하면서 매일매일 공포에 떨면서 지내야 했다.

한 동네 사는 인간들이 더 나쁜 인간들이다. 건달이던 정평심은 정보원이라고 어머니에게 하면서 협박을 하며 우리 물건을 빼앗아갔고 전에도 친절하게 지낸 남윤조는 치안대에 가서 우리를 불리하게 하였다. 오히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더 원수가 된 것이다. 어떤 놈은 창을 들고 와 엄마 배에 대고 협박을 하고 끌고 가려 하였다.

이렇게 공포에 질려 사는 시간도 무심하여 어느새 3개월이 되어 1·4 후퇴가 돌아왔다. 그전에도 엄마는 치안대에 두어 번 끌려갔다 오시면 4살짜리 여동생이 마당에서 놀고 있으면 끌어않으시며 "어런 것들이 불쌍하지. 너희들은 어디 가서 심부름이라도 해주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잖니?" 하시면서 우셨다. 그 비참한 심정은 어떠하였으리. 2살, 4살, 6살, 9살, 12살, 14살. 이 철부지들을 데리고 날보고 어찌 살라고 하시면서 우셨다.

그때의 내 심정 지금의 내 심정 어찌 나는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1950년 12월 결성한 향토방위특공대는 강령에 부역을 하고 달아난 가족들의 동태를 살핀다고 해놓고 아무 짓도 안 하고 공포에 떨고 있는 가족들을 연행하기 시작한다. 12월 말경에 우리 집에 복면을 한 기동대 세 놈이 와서 어머니를 끌고 갔다. 내가 저만치 따라 나가니 들어가라고 소리친다. 나는 그만 무서워서 들어올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우리 5남매와 마지막이 되었다.
--- 제1장 3절 "쓰라린 기억" 중에서
강화 민간인학살의 특성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톱질(빈번한 교전) 중 발생한 민간인학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강화군의 집단학살은 군경에 의해 이뤄진 것이 아니고 유격대의 교전 중 발생했다. 유격대의 향토방위 중, 또는 북·중공군 점령으로 인한 주둔지 철수와 적진 침투시 발생했다. 유격대는 전투를 한 것인데 다수의 민간인들은 피살되어 있었다. 바로 '교전'과 '학살'이 구분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학살자의 정체도 불분명하다. '자생적유격대'와 '유엔군(미군)소속유격대'의 중간단계에 있던 유격대, 즉 '강화향토방위특공대'와 '교동해군(병)특공대'를 비롯한 교동도, 서도, 석모도 등에 주둔한 유격대가 민간인학살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강화군 민간인 학살을 이해하려면 "빈번한 교전지역에서 유격대에 의해 발생한 민간인학살"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해군 첩보대, 및 미극동군 방첩대와 유격대와의 관계다. 이렇게 해서 강화군에서 피살된 사람들이 약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52년 11월 11일에 작성된 「강화도 급 교동도에 국군파견 건의에 대한 처리전말에 관한 건」에서 윤재근 의원은 "'유엔군 직속유격대'와 '첩보기관 소속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약탈, 강금, 살인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1사단 정보처요원인 안일채가 1951년 2월 28일 강화의 5816부대장으로 부임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강화도에는 좌익분자들을 소탕할 목적으로 이북 각 지역에서 온 피난 치안대들이 운집하였는데, 이들은 양민들의 재산탈취, 살해 등을 일삼으며... ― (재)북한연구소, 『북한민주통일운동사-평안북도 편』, 대진문화사, 1990, 667쪽

안일채는 살인자가 이북에서 내려온 치안대라고 했다. 이북에서 내려온 '치안대' 또는 '유엔군소속유격대(동키, 울팩, 8240, KLO)'가 교동과 강화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주장이다.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최중석은 자신의 입으로 "(1951년) 1월 7일에는 인천형무소에서 석방돼 철곶(鐵串)으로 건너오는 지방 공산당원 105명을 생포해 악질 공산당원 60여 명은 식량 문제도 있고 해 처치해 버렸습니다."(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4, 을유문화사, 1972, 388쪽)라고 말했다. 이른바 '특사령'을 받고 풀려났기 때문에 안심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악질 공산당'이라는 누명을 씌워 학살한 것이다.

따라서 '이북에서 내려온 치안대들'과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강화 민간인학살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부문건과 스스로의 시인 그리고 해당 부대의 직속상관의 주장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강화 본도는 '강화향토방위특공대'에 의해서 그리고 교동도, 석모도, 서도는 '이북에서 내려온 치안대' ― 홍현치안대, 연백치안대, 벽성치안대, 교동해병(군)특공대 등 이른바 '유엔군소속 유격대' ― 에 의해서 학살이 자행됐다.

강화도와 인근섬(교동도, 석모도, 서도)의 민간인학살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모호성'이다. 강화 본도에서는 '학살'과 '교전'의 모호성이 존재하고 교동 등의 인근 섬에서는 학살자들이 '자생적 유격대'인가 아니면 '유엔군(미군)소속 유격대'인가에 대한 모호성이 존재한다. 바로 이 '모호성'이 민간인 학살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벽이 되고 있다.
--- 제4장 "강화도 민간인학살의 전모" 중에서
 

출판사 리뷰

제1장과 제2장은 서영선 회장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기록한 수기이다. 1951년 1·4 후퇴를 전후로 하여 강화도의 유일한 공권력으로 등장한 '강화향토방위특공대'의 무자비한 부역자학살이 단란했던 한 가정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 학살의 무자비함으로 인하여 유족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살아왔는지를 서영선 회장의 시와 분노에 찬 목소리를 통해 토로하고 있다. 아울러 서영선 회장이 개인사의 고통을 넘어서 한국전쟁 전후 이 땅에서 일어난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을 규명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저간의 사정과 그 간난의 투쟁과정이 꾸밈 없이 기록되고 있다.

제3장 "영혼의 외상, 전쟁 중 아동의 트라우마"에서는 끔찍한 전쟁과 학살이 어린 서영선의 내면에 어떤 상처를 드리웠고 그것이 그의 일생에 어떤 내면적 상처와 동시에 힘으로 되살아났는지를 심리학자와의 대담을 통해 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제4장 "강화 민간인학살의 전모"에서는 서영선 회장의 어머니가 1·4 후퇴 직후 부역자학살 과정에서 옥계나루에서 학살된 사건을 포함하여 강화 전역에서 일어난 민간인학살의 전모를 치밀하게 추적한 보고서이다. 강화 민간인학살 연구모임에서 그간 이루어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작성한 제4장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광기가 강화라는 작은 섬을 어떤 과정을 거쳐 끔찍한 살육의 동토로 만들었는지를 서늘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제5장은 강화 본도를 비롯 교동, 석모, 서도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간인학살 사건의 유족들이 겪은 학살의 체험과 그 후의 고통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제6장에서는 강화 민간인학살의 의해 현재까지 극히 일부나마 신원이 밝혀진 피학살자들의 명단을 위시하여 강화유족회의 그간의 활동일지와 강화 위령제의 소사,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기사내용, 관련 문서자료를 모아 향후 본격적인 진실규명을 위한 자료로 제시한 것이다.

<여는 글>과 <맺는 말>에서 서영선 회장이 거듭 주장하고 있듯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비록 1951년, 56년 전에 일어난 강화에서의 민간인학살이지만 아직도 그 진실은 왜곡된 채 학살에 의해 희생된 원혼들은 구천을 떠돌고 있고, 그 유가족들은 반세기가 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강화 옥계나루에서 서영선 회장의 어머니가 우익 특공대가 등 뒤에서 쏜 총에 맞아서 바닷물에 수장당한 지 56년째 기일이 지났다. 이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난 2000년부터 시작된 강화 위령제 제8회 행사가 학살현장인 강화 구대교 앞에서 4월 14일 11시 개최된다. 그러나 경찰도, 법무부도, 국민고충처리위원회도, 그리고 인천시와 강화도에서마저 이들의 고통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가운데, 서영선 회장의 사비를 털어 위령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부디 이 책의 발간으로 강화 민간인학살의 진실이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고, 그리하여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의 명예회복과 유가족들의 고통이 치유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서영선 회장은 간절히 소망하면서, "이 책을 강화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원혼들에게 바친다"고 책을 끝맺고 있다.
 

추천평

서영선 선생은 1993년부터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의 실상을 알리는 증언자로도 활동하였고 현지답사를 통해 진실규명의 작업에 적극 나섰다. 또 강화도 학살 현장에서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기도 하고 신문, 잡지, 텔레비전 등 많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 시기 강화도 민간인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렸다. 어찌 보면 이 땅의 역사적 정의와 인권을 위해 온 정열을 바쳤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 여인을 얕보는 사회풍조에서 용맹스런 전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의 인생 역정을 진솔하게 담았다. 앞부분에서는 자신의 개인사를 쓰면서 시를 곁들여 감동을 주고 있다. 읽어가다 보면 찡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뒷부분에서는 강화도와 교동도 등지의 민간인학살의 실상 그리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싸워온 이야기들을 담았다. 이를 방해하는 자들의 행동거지도 부각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유별나게 겪은 개인사와 "진실·화해를 위한 특별법" 통과의 과정을 솔직한 표현과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 번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읽어보기로 하자. 격려의 박수와 함께 추천의 글을 띄운다.
이이화 (역사학자)
어느 날 저녁 서영선 시인이 시집과 원고 뭉치를 들고 저의 집을 찾아왔다. 내가 더듬더듬 읽는 것보다 직접 빨리 읽는 게 나을 것 같아 읽으라 했다. 1951년 1월 5일경 어머니와 한 살짜리 동생의 학살을 중심으로 엮어나간 글들을 나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의 학살 기록문과 시는 잉크로 쓰지 않았다. 눈물과 피로 썼다. 그는 엄마가 마지막 끌려가는 순간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고 되풀이 울먹였다. 그때 서영선의 나이는 고작 열두 살이었다. 그 열두 살 때의 기억을 더듬어 그녀는 거대한 현대사의 비극을 연출해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이기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