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천 한복판’이던 ‘중구’ 차이나타운
― 차이나타운, 인천 청관
인천 중구는 행정구역으로 ‘중구’인데, 길그림으로 살펴보면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는 안 보입니다. 인천이 걸어온 길은 인천이라는 고장으로서 곧게 걸은 길이 아닌 탓입니다. 인천은 바다를 끼고 항구가 선 곳이면서 바닷길로 서울하고 이어지는 징검돌입니다. 오늘날에는 직할시를 거쳐서 광역시가 되었기에 땅으로 치자면 넓습니다만, 지난날에는 그저 자그마한 고을이었어요. 일제강점기에도 인천은 그리 크지 않은 고을이었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에서 ‘중구’나 ‘동구’ 같은 이름은 오늘날에는 걸맞지 않은 이름이지만, 이 이름에는 인천이라는 곳이 걸어온 자취가 고스란히 남습니다. 길그림을 보면 ‘중구’가 맨 왼쪽, 이른바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동구’는 중구 위쪽에 있어요. 인천 ‘남구’는 중구하고 동구 오른쪽인 동쪽에 있습니다. 인천 ‘서구’는 동구 위쪽인 북쪽에 있어요. 이제는 계양구나 부평구라는 이름을 쓰지만 예전에는 ‘북구’라는 이름을 썼고, 이 북구는 인천에서 동쪽 끝에 있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얼거리이다 보니 인천 길그림을 살피면 ‘동서남북’이 모두 뒤죽박죽인 셈이라고 여길 만해요.
오늘날에는 뒤죽박죽이지만, 인천이라는 작은 고을이 도시로 커진 일제강점기를 살피면, 그무렵에는 ‘인천 = 중구 + 동구’였다고 여길 만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랬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인천 중구는 일본사람이 살던 곳이면서, 중국사람도 건너와서 살고 서양사람도 나란히 살던 곳이었어요. 그무렵에도 중구 쪽에 한국사람이 살았지만, 일본은 ‘조계지’라는 울타리를 내세워서 한국사람이 섣불리 넘보지 못하게 했어요. 이러면서 한국사람은 ‘동구’라는 곳에 몰려서 살았지요. 잠은 동구에서 자고, 일은 중구에 가서 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요즈음 인천에서 잠은 ‘인천에서’ 자고 일은 ‘서울에서’ 하는 틀하고 비슷한 모습이에요.
어느 모로 본다면 ‘일제강점기 중구’ 자리는 일본사람이 ‘한복판에 선’ 곳이요, 여기에 중국사람도 한복판에 선 곳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전철역 이름에도 아직 이런 자국이 남았어요. ‘인천역’은 경인선 맨 왼쪽(서쪽)에 있는 끝 역이고, ‘동인천역’은 인천역 옆에 있는 곳인데, ‘동인천역’은 ‘이제 동쪽 인천이 아닌, 맨 서쪽에 있는 인천’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인천역’이라는 이름이 인천 중구에 있던 까닭은 그곳이 옛날에는 인천 한복판이었다는 뜻이고, ‘동인천역’은 인천 동쪽 끝자락을 가리켰다는 뜻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동인천역에서 오른쪽으로 더 가면 ‘거기는 인천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됩니다. 옛날에는 그랬겠지요.
나의 기록은 1980∼2000년까지의 인천 화교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많은 중국집들로 화려하지만 그 당시 인천 차이나타운은 여러 가지 이유로 쇠락해 있었다. 나는 사라져 가는 역사의 자취를, 화교 1세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했다. (사진가 노트)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면서 인천이라는 고을이 차츰 커집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들어선 수많은 공장은 더욱 많이 늘어났습니다. 서울 옆에서 서울에 자원과 물건과 사람(인력)을 대는 고을로 커집니다. 이러면서 ‘인천 한복판’은 중구 쪽에서 차츰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서울하고 가까운 쪽으로 움직입니다. 인천역이나 동인천역이 ‘인천 중구’에 있다고 하더라도, 중구도 ‘인천역·동인천역’도 ‘옛날 한복판(구도심)’일 뿐입니다.
김보섭 님이 1980∼2000년 사이에 찍은 ‘인천 차이나타운’ 모습을 담은 사진책 《차이나타운, 인천 청관》(눈빛,2015)을 읽으면서 인천 발자취와 ‘중구’라는 이름과 ‘한복판(도심, 구도심, 신도심)’이라는 자리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나는 인천 ‘남구(도화동)’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동구(송월동)’이고, 어린 날이나 국민학교는 ‘중구(신흥동)’에서 보냈습니다. 집과 학교와 이웃집 사이는 언제나 두 다리로 걸어다녔고, 공항이 들어서기 앞서 배로 오가던 영종섬을 꽤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사진책 《차이나타운》은 인천 중구에서도 ‘북성동·선린동’ 두 마을을 찬찬히 살핍니다. 이 사진책에 붙은 이름은 ‘차이나타운’인데, 이곳을 가리키는 이름을 생각하니, 영어로 차이나타운뿐 아니라, ‘청관’이란 한자말도 썼고, ‘중국인거리’나 ‘중국인마을’이란 이름도 썼어요. 그냥 ‘북성동’이나 ‘선린동’이라고만 하기도 했어요.
일제강점기에는 눈부시도록 북새통을 이루던 북성동이요 선린동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계획 때문에 인천이라는 곳이 ‘서울 언저리 공업 위성도시’ 구실을 하는 동안에는 행정이나 경제 모두 ‘오른쪽으로(서울과 가까이)’ 갈밖에 없었으니, 그 눈부신 북새통을 이루던 북성동이나 선린동은 차츰 저물밖에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고속도로가 나고, 중구에 있던 온갖 시설이 다른 구로 옮기면서 ‘중구’는 ‘한복판’이라는 이름이 바래도록 더 크게 저물었을 테고요.
나는 어릴 적에 ‘중구에 있던’ 여러 학교들하고 인천시청에다가 인천시외버스역이 모두 ‘다른 구’로 옮기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학교와 행정기관과 여러 시설이 중구에서 다른 구로 옮기면서, 그야말로 인천 중구하고 동구는 나란히 비면서 엄청나게 조용해졌어요.
요즈음은 ‘차이나타운 관광지’로 다시 북새통을 이루는 마을로 바뀌는 중구이지 싶습니다. 다른 도시에 있는 ‘중국인마을’도 관광바람이 불며 다시 북새통을 이루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북성동이든 선린동이든 청관이든 차이나타운이든 중국인마을이든, 예나 이제나 똑같은 대목이 하나 있어요. 북새통을 이루었든, 눈부심이 저물었든, 새 관광바람이 불든, 작고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사람들은 늘 그대로입니다.
관광지 걸개천이나 붉은 등불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에서 몇 미터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용하고 한갓진 골목이 나옵니다. 이곳에서는 얌전하면서 수수한 골목집이 어깨를 맞댑니다. 사진책 《차이나타운》에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이 조용하고 한갓진 골목집에서 얌전하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여느 얼굴입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북성동이나 선린동에 살던 내 어릴 적 동무들은 ‘그냥 동무’였습니다. 화교도 뭐도 따로 아닌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바다 너머에 있는 어떤 나라를 그리는 마음을 때때로 느끼더라도, 바로 이곳에서 오늘 함께 웃고 떠들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예요. 내 어릴 적 동무들하고, 내 어릴 적 동무들하고 놀던 골목하고, 내 어릴 적 동무들을 낳고 돌본 어버이(이웃 아저씨 아주머니) 모습을 작은 사진책 한 권에서 새삼스레 되돌아봅니다. 2016.4.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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