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한국사여행 (2024~) [해설서]/5.한국현대사 (1945.8.15~)

[웹북] 광복절 (8.15해방) 조국 해방의 날

동방박사님 2024. 9. 1.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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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1945 년  8 월  16 일 마포형무소 앞

광복절

조국해방의 날 / 광복절 조국해방의 날

장소 한반도 / 형태 공휴일(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중요도 일제강점기 종료 / 시작 1945년 / 날짜 815일 / 빈도 매년 / 축제 경축 행사 / 행사 일본 제국으로부터의 해방 / 관련 대일 전승 기념일, 3·1,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

광복절(光復節) 또는 조국해방의 날(祖國解放의 날)은 한반도가 일본 제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이를 국경일 및 공휴일로 법제화함으로써 매년 양력 815일에 기념하고 있다. 해방년도인 1945년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1949101국경일에 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 및 공휴일로 지정되어 대한민국에서는 전국적으로 각종 경축 행사가 거행되며, 공공기관,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달아 기념하기도 한다.

1949524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3·1(31), 헌법공포기념일(717), 독립기념일(815), 개천절(103)4대 국경일로 하는 안건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였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제정 과정을 거치면서 헌법공포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수정하였다. 같은 해 921, 해당 수정안이 제5회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으며, 1949101일에 국경일에 관한 법률이 제정 및 공포되어 광복절이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Sources Wikipedia]

책소개

‘해방’이나 ‘독립’ 기념일을 국경일로 자축하는 나라-민족의 역사에는 식민지배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린다. 대한민국이 그중 하나다. 세계사의 20세기 전반부 스토리보드에 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이웃 국가의 여러 식민지 중 하나로 스치듯 언급되던 이 나라는, 그 무명 혹은 도명(盜名)의 세월을 끝낸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명명해 기려오고 있다. ‘영예롭게[光] 되찾은[復] 날’이라는 뜻의 광복은 ‘해방’의 기쁨에 ‘독립’국가의 염원을 포갠 명칭이다. 요컨대 8.15는 엄혹했던 식민 역사의 종지부인 동시에 명실상부한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셈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1945년 8월 15일의 24시간과 그 직후 3주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해방된 조선인들이 이 땅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시작한 ‘건국 프로젝트’의 흥망이 다큐의 골자다. 연출자는 조선인 가미카제 문제에서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숨겨진 가족사에 이르기까지, 친일과 혐일을 가로지르며 사태의 핵심을 움켜쥐는 글쓰기에 매진해온 ‘한일 관계의 사관(史官)’ 길윤형이다. 그는 강박에 가까운 자신의 취재벽에 힘입어 흩어진 사료와 증언을 차곡차곡 채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 통계나 자료사진만으로 구현하기 힘든 1945년 8-9월의 시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진 건국 프로젝트의 여정을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75년 전 광복 그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밝은 날인 동시에 가장 어두운 날이었다. 이후 26일간은 어둠이 빛을 삼켜 가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한반도라는 공동체가 쟁취할 수 있었지만 끝끝내 좌초하고 만 어떤 정치적 상상,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가슴 아픈 회고다. 그 실패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광복 이전에 있다. 오늘날에도 ‘26일 동안의 광복’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목차

· 머리말
· 프롤로그 8·15는 시린 상처였다

1부 24시간의 삼파전
#01 한밤의 전화 ― 여운형의 8?15
#02 소련군이 내려온다 ― 총독부의 8?15
-틈새읽기 일본의 항복은 10일일까, 15일일까?
#03 경거망동을 삼가라 ― 송진우의 8?15
-틈새읽기 단파방송 사건
#04 항복방송
#05 건국준비위원회
#06 갈등의 시작
-틈새읽기 카이로 선언

2부 민족의 구심력 vs 좌우의 원심력
#07 8월 16일
-틈새읽기 ‘소련군 입성’ 공작은 누가 했을까?
#08 일본의 반격
#09 다시 한번, 합작으로
#10 한반도 분단이 알려지다
-틈새읽기 38선의 획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11 좌우합작, 파국에 이르다
#12 통한의 한미연합작전
#13 일본의 기만
-틈새읽기 여운홍의 마중
#14 인민공화국의 탄생
#15 성조기가 올라가다
-틈새읽기 일본인들은 어디로?

· 에필로그 대한민국 갈등의 기원을 생각한다
· 감사의 말
· 미주
·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길윤형

1977년 서울 출생. 대일외고를 거쳐 서강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다. 2001년 11월 [한겨레]에 입사해 경제부, 사회부 등을 거쳤고, 2013년 9월부터 2017년 4월까지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이어 [한겨레21] 편집장을 거쳐 현재 [한겨레] 국제부에서 일하고 있다. 아베 정권 이후 본격화된 반동의 흐름 속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미일동맹 강화를 비롯한 일본의 안보정책 변화 등과 관련한 여러 ...

책 속으로

75년 전 8월 15일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날이면서 가장 어두운 날이었다. 그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냉전을 눈앞에 둔 미소라는 ‘외세에 의해 주어진 해방’에 있었다. 이 모순을 딛고 독립국가를 세우려면 전 민족이 하나로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었다. 조선 내 모든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좌우합작’은, 그래서 반드시 성사시켜야 했던 건국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 pp.4-5

해방된 조선에는 크게 세 부류의 플레이어가 있었다. 첫째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좌익 인사들이었다. (…) 둘째, 이들과 맞선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제 말기 전향해 낮 뜨거운 친일활동을 벌인 부끄러운 과거를 숨기고 있었다. 일본의 패망은 이들에게도 기쁜 일이었지만, 정통성에 큰 흠결이 있었던 탓에 좌익에 비해 수세적인 자세로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 세 번째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의 지배자로 군림했던 조선총독부였다. (…)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지은 세력은 첫 1막에는 등장하지 않는 미국과 소련이란 두 강대국이었다.
--- pp.15-16

“아, 틀림없어. 내일 일본이 항복해. 나가서 결사대를 조직하라!” -여운형
--- p.47

“대승이라고 하여 민간에 술·설탕까지 특배했지만, 그것은 전혀 거짓말입니다. 우리 쪽 해군이 거꾸로 전멸당했습니다.” -이하라 준지로, 일본군 참모장
--- p.52

“낭산, 대책은 무책이요.” -송진우
--- p.86

“전국의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는 기립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다 노부카타, 일본방송협회 아나운서
--- p.115

“국내에서 여운형씨와 송진우씨가 악수를 하면 그에 대항할 세력이 없을 것이다.” -정백
--- p.134

“여 선생, 조심해야죠. 헌병이 길거리에 득시글거리잖우. 왜 이렇게 좌익만 만나는 기요? 주의자 서클은 안 됩니다.”-이임수
--- p.145

“민족적 성업을 하는 데 단 몇 사람이 사랑방 문을 잠그고 수근대는 수가 어디 있소!” -이인
--- p.165

“대권은 아직도 천황에 엄존한다. 누구라도 달려드는 자는 가차 없이 단칼에 베겠다.” -간자키 히사시, 일본군 대좌
--- p.216

“고하의 민족주의와 몽양의 사이비 공산주의가 서로 타협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은연중 주도권을 서로 장악하려는 배짱으로 맞지 않을 것이었다.” -이인
--- p.225

“조선에 관하여서는 자유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는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하에 두고 각각 군정이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 p.258

“의미 없는 노력이었다. 민공 쌍방 너무 국제정세에 우원--- p.愚遠)한 편이었고, 또 사대주의적이었다.” -안재홍
--- p.286

“이제 본인은 본인 및 동료들이 어떠한 공적 위치로서가 아닌 완전히 개인의 자격으로서 귀국을 허락받은 것임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귀하에게 확신시키고자 합니다.” -김구
--- p.312

“조선은 미국의 적” -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
--- p.329

“이것은 순전히 소아병적인 극렬 공산당원들이 꾸며낸 하나의 연극이었다.” -여운홍
--- p.339

“미국·영국 등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내일 점심시간을 지나 조선호텔로 오라.” -미군사령부
--- p.366

“우리는 피를 흘려야 합니다.” -김일성
--- p.402
 

출판사 리뷰

우리는 아직 광복 이전에 있다
-한국 현대사의 첫날에서 분단까지, 3주간의 역사 다큐멘터리

광복 그날과
26일간의 건국 프로젝트


오늘날 세계 각국은 하나의 달력(태양력)을 사용하지만 거기에 담긴 국경일의 면면은 저마다 다르다. 그래서 달력을 넘기다 보면 그 나라의 정체성이 슬며시 엿보이곤 한다. 가령 영국과 일본의 달력에 등재된 여왕·천황 탄신일은 이 두 나라가 입헌군주국임을 가리킨다. 중국과 프랑스는 제각기 민중 봉기일을 기림으로써, 자신들의 국체가 민중혁명에서 비롯되었음을 넌지시 뽐낸다.

‘해방’이나 ‘독립’ 기념일을 국경일로 자축하는 나라도 있다. 이런 나라-민족의 역사에는 식민지배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린다. 대한민국이 그중 하나다. 세계사의 20세기 전반부 스토리보드에 제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이웃 국가의 여러 식민지 중 하나로 스치듯 언급되던 이 나라는, 그 무명 혹은 도명(盜名)의 세월을 끝낸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명명해 기려오고 있다. ‘영예롭게[光] 되찾은[復] 날’이라는 뜻의 광복은 ‘해방’의 기쁨에 ‘독립(국가)’의 염원을 포갠 명칭이다. 요컨대 8.15는 엄혹했던 식민 역사의 종지부인 동시에 명실상부한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셈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한국 현대사의 첫날인 1945년 8월 15일의 24시간과 그 직후 3주간-정확히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성조기가 게양되는 9월 9일까지 26일간-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역사 다큐멘터리다. 해방된 조선인들이 이 땅에 통일된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시작한 ‘건국 프로젝트’의 흥망이 다큐의 골자다. 연출자는 조선인 가미카제 문제에서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숨겨진 가족사에 이르기까지, 친일과 혐일을 가로지르며 사태의 핵심을 움켜쥐는 글쓰기에 매진해온 ‘한일 관계의 사관(史官)’ 길윤형이다. 그는 강박에 가까운 자신의 취재벽에 힘입어 흩어진 사료와 증언을 차곡차곡 채집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 통계나 자료사진만으로 구현이 힘든 1945년 8-9월의 시공간과 그 속에서 벌어진 건국 프로젝트의 여정을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24시간+25일에 숨은
한국 현대사의 기원


1부에서는 일본 패망과 조선 해방을 직감한 여운형의 전화로 시작되는 해방 전야, 히로히토의 항복방송 막전막후, 감격에 젖은 조선인들과 하루아침에 뒤집힌 세상에 당황하는 재조일본인들,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대표되는 건국 프로젝트의 시작, 여운형-송진우의 좌우합작 시도를 재구성함으로써 광복이라는 거대한 명칭에 가려졌던 8.15 당일의 24시간을 생생하게 복원한다. 2부에서는 해방 이튿날부터 9월 9일까지, 한국 현대사의 거푸집을 ‘분단’이라는 모양으로 굳힌 결정적 순간들-좌우합작 결렬, 한미연합 한반도 침투계획인 독수리작전의 실패, 조선총독부의 반격과 건준의 몰락, 미소 점령군의 남북 진주 등-을 복기한다.

8.15 이후 26일간은 우리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까? 시인 김수영은 해방 직후의 경성 풍경을 “글 쓰는 사람과 그 밖의 예술하는 사람과 저널리스트들과 그 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마리서사〉, 1966)로 뭉클하게 회고한 바 있다. 반면 반세기 뒤를 사는 저자의 복기는 한층 건조하면서도 절박하다. 그의 눈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는 해방 당일부터 미군이 경성에 진주하는 9월 9일까지가 외세의 ‘직접 개입’ 없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광복의 날들”이었지만, 그 26일 동안 건국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던 좌우합작은 철저하게 구겨지고 뒤틀렸다. 3년간의 동족상잔과 75년간의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서 발발했다는 것이다. 해방정국에서 민족의 구심력이 외세와 이념의 원심력을 감당하지 못한 대가로, 한반도는 지금껏 지구상 유일한 냉전지대로 남아 있다.

학습된 과거는 실제보다 냉정한 평가를 받기 쉽다. 그렇더라도 과거의 공적 사태의 재구성은 그 자체로 역사학이다. 그리고 역사라는 이름의 이야기에는 현재를 사는 공동체의 열망이 투영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75년 전 광복 그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밝은 날인 동시에 가장 어두운 날이었다. 이후 26일간은 어둠이 빛을 삼켜 가는 시간이었다. 이 책은 한반도라는 공동체가 쟁취할 수 있었지만 끝끝내 좌초하고 만 어떤 정치적 상상,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가슴 아픈 회고다. 그 실패로 인해, 우리는 여전히 광복 이전에 있다. 오늘날에도 ‘26일 동안의 광복’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1540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대한민국의 정확한 ‘건국일’이 언제이며, ‘광복절’은 정확히 무엇을 경축하기 위한 국경일인지를 이론적으로 정리한 책. 대한민국의 건국일,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관계, 1945년 8월 15일의 성격, 광복절 등을 둘러싼 논쟁을 해소하기 위해 쓰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일’과 ‘광복절’에 대한 국민과 정부, 학계의 인식 혼란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목차

머리말 004

대한민국 건국일 고찰 009
1919년 대한민국 건국설 비판 033
대한민국과 임시정부의 관계 063
대한민국 건국과 김구 091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나, 광복되었나? 111
광복절을 정상화하자 129

저자 소개 

저 : 양동안 (梁東安)
 
1945년 전남 순천시(구 승주군)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언론계에 투신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시수, 1975년 정치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언론계와 학게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는 중앙대 강사로 활동했고, 조선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의 교수로 일하면서는 경향신문...
 
저자 : 양동안
양동안(梁東安)은 1945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했다. 196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1975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정외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1990년까지 언론계와 학계 두 영역에서 활동했다. 합동통신기자, 경향신문과 세계일보의 비상임 논설위원, 중앙대 강사, 조선대 전임강사, 경기대 조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후신) 교수 등으로 일했다. 1990년 이...

책 속으로

대한민국이 처음부터 건국일이 없는 ‘생일 없는 국가’였던 것은 아니다. 1949년 8월 15일 정부는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으며, 모든 정당과 신문 들은 독립 1주년 기념 성명을 발표하고 기념 기사를 보도했다. 국가의 독립과 건국은 실천적 내용이 동일하기 때문에 1949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독립 1주년이 되었다 함은 곧 그 1년 전엔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이 독립?건국되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1949년 독립 1주년 기념 기사를 보도하는 데 일부 신문은 ‘건국 1주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정당들의 성명에서 대한민국 건립(설) 1주년이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pp.13~14

건국 60주년이 되던 해인 2008년에는 광복회와 한국사학회 및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합세하여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된 것이 아니라 1919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이명박 정부에 대해 ‘건국 60주년’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겁쟁이 이명박 정부는 이에 굴복했고, 이후 행정부 관리들은 ‘건국’이란 용어의 사용을 회피했으며, 언론매체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건국일을 잃어버렸고, 오늘날 ‘생일 없는 인간’과 같은 초라한 국가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실종됨으로 해서, 각급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민족의 과거 국가들의 건국일은 다 기록되어 있으면서 우리 민족의 현재 국가인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기록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모르게 된 것이다. --- pp.14~15

건국일이란 국가 구성의 4가지 필수 요소들이 완전히 갖추어진 날을 뜻한다. 건물의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의 건축공사가 완결된 날이 건물의 건립일인 것처럼, 국가 구성의 4가지 필수 요소들이 완비되는 날이 건국일이다. 인간의 출생에 비유하면 아기의 전신이 노출된 날이 아기의 생일이듯이, 국가 구성의 필수 요소들을 완비한 정치결사가 출현하는 날이 건국일이다. --- p.20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미군정과의 사전 합의에 따라 이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 곧 주권을 인수했다. 이로써 국가 구성의 4개 필수요소인 영토·국민·정부·주권을 완비한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가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생일, 곧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인 것이다. --- p.28

대한민국이 건국된 날에 건국을 기념·선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논거로 삼아, 객관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구성 필수요소들이 완비된 것이 확실한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공지되지 않은 이유로 실제로 일어났던 객관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건국이 기념되고 선포되지 않았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건립에 필요한 조치들이 다 취해졌으면 그것이 대한민국의 건국이고, 그것이 행해진 날이 대한민국의 건국일인 것이다. --- p.31

1950년 이후로도 언론기관들은 광복절에 관한 보도에서는 혼선을 빚으면서도,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데는 혼선을 빚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부터 10년, 20년, 30년 등 매 10년 단위로 건국 10주년, 건국 20주년, 건국 30주년 등의 특집보도를 했다. 1998년 건국 50주년까지는 그런 관행을 유지해왔다. 또한 정부와 국민들도 대한민국이 1948년에 독립=건국되었다는 점을 논란의 여지없는 사실로 수용해왔다.
이처럼 조야와 모든 국민이 인지했던 대한민국 독립=건국일(1948년 8월 15일)이 일차적으로는 좌익혁명세력의 반 대한민국적 선전투쟁 대문에, 이차적으로는 광복회와 그 주변에 기생하는 한ㄲ사 연구자들의 왜곡된 민족주의 감정에서 비롯된 궤변 때문에 압도적 다수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통탄할 일이다. --- p.35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1945년 9월 3일에 발표한 「국내외 동포에 고함」이란 제목의 성명문에서 1945년 9월 현재의 민족운동 단계를 명료하게 규정했다. 성명은 “우리가 처한 현 단계는 건국강령에서 명시한 바와 같이 건국의 시기로 들어가려는 과도적 단계다. 다시 말하면 복국임무를 아직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건국의 초기가 개시되려는 계단이다”라고 말했다.
건국에 관한 임정의 입장과 임정의 성격이 이러했기 때문에 임정 지도자들도 귀국 후 전재한 자신들의 활동을 ‘건국’활동을 표현했다. 예를 들면, 임정 부주석이었던 김규식 박사는 1946년 12월 자신이 의장으로 있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창설기념식 참석 초청장을 보내면서 당시 정치활동가들을 ‘건국도상에 다망하신’ 분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표현은 김규식 부주석이 당시의 정치활동을 건국활동으로 보고 있음(즉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이 건국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해준다. --- pp.59~60

광복과 독립은 동의어이지만, 전자는 주권의 ‘회복’에 방점을 두고, 후자는 주권의 ‘확립’에 방점을 둔다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주권의 회복이나 주권의 확립은 ‘주권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같은 것이지만, 주권보유를 과거의 회복으로 보느냐, 새로이 획득한 것으로 보느냐에 관한 의식의 차이가 있다. 우리 민족이 반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독립은 잠시 빼앗긴 국권(국가의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인사들은 ‘광복’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반면에 국가가 이미 소멸되었으므로 주권은 새로 획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국제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인사들은 ‘독립’이란 용어를 선호했다.
--- p.130

출판사 리뷰

사회갈등과 논쟁의 대상이 된 대한민국의 ‘건국일’

우리 사회에서는 대한민국의 ‘건국일’이 언제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은 어떤 관계인지, 1945년 8월 15일에 우리 민족은 해방된 것인지 광복된 것인지, ‘광복절’은 무엇을 경축하는 국경일인지 등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오고 있다. 대한민국이 건립된 지 68년이 되었는데도 이러한 쟁점들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한심스러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1919년 4월 11일(또는 13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 건국일이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한 개천절이 건국일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1948년 8월 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느 날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건국일인가?
대한민국의 건국은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졌으나 그날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아는 사람은 국민 전체의 2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pp.10~11, 2006년 8월 14일자 「조선일보」 참조).
원래 건국일이란 국가 구성의 4가지 필수 요소-영토?국민?정부?주권-들이 완전히 갖추어진 날을 뜻한다. 건물의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의 건축공사가 완결된 날이 건물의 건립일인 것이다. 따라서 국가 구성의 4가지 필수 요소들이 완비되는 날이 건국일인 것이다. 인간의 출생에 비유하면 아기의 전신이 노출된 날이 아기의 생일이듯이, 국가 구성의 필수 요소들을 완비한 정치결사가 출현하는 날이 건국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을 거행했다. 이날 오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고, 이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청이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권, 곧 주권을 이양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건국·독립되었다. 이로써 국가 구성의 4개 필수요소인 영토?국민?정부?주권을 완비한 대한민국이란 독립국가가 탄생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생일, 곧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인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날 대한민국 정부수립만 선포되었지,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지 않았으므로 이날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한 나라의 건국일은 ‘국가의 생일’에 해당되는 것이다. 인간이 해마다 생일 축하잔치를 벌이듯이 대부분의 국가는 건국일을 최고의 국경일로 정하여 해마다 성대한 건국 축하잔치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의 다수가 건국일을 모르고 행정부도 건국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탓에 건국 축하잔치를 열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한민국은 ‘생일 없는 인간’과 같은 초라한 신세의 국가가 되고 말았다.

‘광복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국경일인가?

‘광복절’은 원래 1948년 8월 15일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과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해방’이란 말은 ‘민족해방’이란 용어와 함께 공산주의자들이 도입한 용어로서, 1948년 8·15 전에는 항일독립운동세력 중 좌익들이 주로 선호하던 용어였다. 반면 우익은 ‘독립’과 ‘광복’을 선호했다. 그런 반공의식이 작용하여 ‘광복’이 ‘해방’과 같은 의미로 왜곡된 후 반공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1945년 8·15를 ‘광복’이라 말하기를 좋아했고, 좌익 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해방’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5공정권 시기인 1982년에 교과서에서 1945년 8·15를 기술할 때 ‘광복’으로 기술하도록 지시되었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것을 ‘해방’이 아닌 ‘광복’으로 착각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원래 독립·건국과 동의어였던 ‘광복’이 ‘해방’과 동의어로 왜곡되고, ‘광복’에서 독립·건국의 의미가 삭탈된 오늘의 상황은 항일독립운동 과정에서 정립된 광복과 해방의 정확한 의미와는 부합하지 않는 억지요 변괴다. 역사인식을 바로 하려면, 사리에 어긋나는 이런 억지와 변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착각의 보편화라는 이 나라 국민의 집단 정신질환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억지와 변괴는 조속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18491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

책소개

1948년생 대한민국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건국일이다. 대한민국이 그냥 아무 나라가 아닌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오천 년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자유민주혁명이었다. 공산 전체주의 야욕을 가진 세력과 치열하게 싸워 아주 간절하게 이루어낸 건국이었다. 이날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한국인은 백성이나 신민이 아닌, 비로소 ‘자유가 보장되는 개인이자 국민’으로 거듭났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배우지 못한 학생·청소년 세대를 위해,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연구와 역사 연구에 저명한 네 명의 저자들이 핵심만 짚어 읽기 쉽게 썼다. 기존 교과서나 언론보도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사진 자료들을 각 꼭지마다 곁들여 5쪽 안팎으로 간결하게 서술했다. 좌편향 역사교과서에 노출된 자녀들에게 읽히면 좋을 올바른 역사책이다. 물론 어른 세대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자녀들과 함께 읽으며 공감대를 형성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01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갈망했던 진정한 ‘건국’ (강규형)
02 추악한 일·소중립조약과 딱 엿새 싸우고 승전국 된 소련 (강규형)
03 일본 대표가 지팡이를 짚은 까닭은? (정경희)
04 김일성이 소련군 훈장을 가슴에 단 까닭은? (김용삼)
05 해방정국을 주도한 것은 우익이 아니라 좌익이었다 (김용삼)
06 찬탁이냐 반탁이냐? (김용삼)
07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한 것은 북한인가 남한인가? (강규형)
08 정읍연설의 목적이 단정수립? (정경희)
09 좌우합작을 추진한 미 군정 對 반공주의자 이승만 (남정욱)
10 극한으로 치달은 좌익의 투쟁 (남정욱)
11 이승만이 미국으로 간 까닭은? (김용삼)
12 유엔한국위원단이 북한에 들어가지 못한 까닭은? (김용삼)
13 김구가 변심한 까닭은? (김용삼)
14 좌익의 5·10 총선거 방해공작 (김용삼)
15 5·10 총선거와 제주 4·3사건의 관계는? (남정욱)
16 5·10 총선거에서는 친일파가 배제되었다 (김용삼)
17 5·10 총선거는 작대기 선거였다? (정경희)
18 초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정경희)
19 앞장서 친일파를 등용한 김일성 (남정욱)
20 대한민국 초대 내각은 친일 내각? (남정욱)
21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대한민국을 세우다! (정경희)
22 건국을 기념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정경희)
23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제1호는? (김용삼)
24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 그 의미와 논란 (강규형)
25 사라진 북한 땅 (강규형)
저자소개

저자 소개

저 : 강규형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역사학 석사를, 오하이오대학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명지대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연세대 통일연구원 연구교수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 을 역임했다. 국사학계가 가진 치명적인 결점인 우물 안 개구리 식의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이 아닌 세계사적 조망으로 본 한국현대사, 또는 종족주의적 역사관을 탈피하는 국제관계사로서의...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출판사 리뷰

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처럼 대한민국이 죽어야 하나?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열심히 달리고 성장했다. “공산 괴뢰국이 된 북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 정통성을 좌익이 부정하고 나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과 대결하는 구도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자 대한민국은 나라가 아니며 ‘북쪽에 세워진 것만이 나라’라고 우기기 시작한 것이다.” (9쪽 |책머리에| 中)

좌익 세력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철두철미하게 진행한 것은 ‘건국일 지우기’였다. 좌익들이 신봉하는 체제로 통일·건국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을 마치 『나비효과』 영화의 또 다른 결말처럼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할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도 삭제하기 시작했다.

이제 나라의 근간이 될 인재 교육에 대한민국의 위대한 건국사는 사라졌으며 한국인은 생일 없는 나라를 살게 되었다. 아니 대한민국이 ‘나라’임을 부정하니 한국인은 국적 없는 난민이나 공산 치하의 인민 신세로 전락하게 될 위기다.

이것이 이 책을 쓴 이유다.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한 채로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이미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 실험을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되풀이하려는 저들의 무모한 시도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며 바로 알리는 건국사를 책자에 담아 펴냈다. (11쪽 |책머리에| 中)

1919년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정부

대한민국 1948년 건국을 부정하기 위해 좌경 세력들이 가장 크게 주장하는 이른바 ‘건국설’은 1919년 임시정부이다. 그러나 만약 1919년이 건국이라면 이후 우리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임시정부 수립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은 아니며 건국은 앞으로 쟁취해야 할 목표임을 가장 잘 인식한 사람들은 바로 임정 요인 자신들이었다. 1919년 이후 펼쳐진 독립운동(혹은 광복운동, 민족해방운동 등)은 바로 진정한 대한민국 수립을 위한 노력이었다. 더욱이 임시정부가 1941년 11월 28일 새 민주국가의 건설, 즉 진정한 독립과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한 것은 온전한 국가를 세우기 위한 몸부림의 결정체였다. (16쪽)


독립과 광복이 1945년이 아닌 1948년 8월 15일이었다고?

많은 사람들이 광복절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15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광복절은 원래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유엔의 결의를 따른 것이었다. 그 과정은 자유총선거, 국회 구성, 헌법 제정, 그리고 정부 수립의 4단계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1948년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는 것은 4단계의 건국 과정 가운데 마지막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건국이 완료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정부 수립’은 곧 ‘건국’이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 ‘정부 수립’은 ‘독립’, ‘건국’과 동일한 뜻이었다. (159-160쪽) ··· 1950년 8월 15일에는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고, 1951년 8월 15일에는 제3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됐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 또는 광복으로 본 것이다. (181쪽)

그런데 어떤 경위로 사람들은 8월 15일 광복절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로만 인식하게 된 것일까? 어째서 건국일을 기념하지 않게 된 것일까? 책에 그 답이 명쾌하게 나와있다.


이래도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

2014년 1월 30일 밤 NASA에서 촬영한 한반도 위성 사진 한 장이 몇 년이 흐른 지금도 화제다. 불빛이 환한 남쪽과 만주 사이의 북한 지역은 검게 나타나 있었고 이 때문에 남한은 마치 섬처럼 보였다. 1948년에 어느 선택이 옳았는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날 건국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위성에서 바라본 한반도의 이 사진이 백 마디 웅변보다 더 명확히 결론을 얘기해 준다. 빛의 번영을 누리는 한국. 이래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부끄러운 나라인가?

대한민국이 어떻게 1948년 8월 15일 자유민주주의체제로 건국될 수 있었는지 이제는 문명사적 의의를 되새기며 제대로 알아야 할 때이다.

조금 더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싶다면 이 책의 시리즈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 『나라 잃은 소년 나라를 세우다 이승만 이야기』 일독을 권한다.

출처: https://japan114.tistory.com/21137 [동방박사의 여행견문록 since 2010:티스토리]